소설리스트

꽃의 짐승-65화 (65/104)

65화. “NESSUN DORMA”(“아무도 잠들지 못하리”, 오페라 ‘투란도트’) (1)

연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갑옷은 왜 입고 있었던 거예요?”

맞은편에 앉은 이반은 ‘음’ 소리를 냈다.

“혼자 돌아다니기엔 위험한 세상이었거든. 뒤에서 갑자기 찌르는 덴 장사가 없지.”

“하지만 불 속에서 뜨겁지 않았어요?”

“안 그래도 괜히 입었다 싶었어.”

뜻밖의 넉살에 연하는 피식 웃었다. 이반은 기본 안주로 나온 강냉이를 집는 그녀의 손을 가리켰다.

“그만 먹는 게 좋지 않아?”

“아, 영화를 보는 기분이어서 저도 모르게 그만…….”

연하는 강냉이를 내려놓고 손을 털었다.

그들이 있는 곳은 청사 근처의 술집이었다. 팀원들과 가끔 오는 곳으로, 청사를 나오는 길에 청사로 돌아오는 그를 마주쳐서 자연스럽게 같이 걸음을 하게 되었다.

저녁은 조금 일렀고, 프랑스처럼 식전에 술 한잔하는 개념으로.

물론 오늘은 둘 다 술은 주문하지 않았다.

구석 자리에 자리를 잡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클리엔테스로 선택하게 된 계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소장님도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연하는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이반은 잠깐 그녀를 지켜보았다. 연하는 왜 그렇게 보는지 이유를 묻듯이 그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반대하지 않는구나, 둘 사이.”

“아…….”

연하는 콜라 잔을 내려놓고 의자 등받이에 등을 묻었다.

“모르겠어요. 규하가 아무 말 하지 않는데, 제가 뭐라고 할 문제가 아닌 것 같아서요. 어쨌든 서로 어린애가 아니니까.”

이런 말을 할 때에는 더없이 어른스러워 보였다. 하긴, 이미 아이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

이반은 아이처럼 의자를 젖혀서 까딱거리는 연하를 웃으며 보았다.

저런 면이 귀여운 거라고 하면, 너무 팔불출일까.

연하는 의자를 제대로 내려놓았다.

“그럼 전 뭐 때문에 선택하신 거였어요?”

그가 파트로네스라고 알게 돼도 변한 건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실은 제로 14팀인 서울 지부 ERU 3팀의 상사였고, 그는 국장이었다.

그녀에게도 파트로네스가 있고, 심지어 그게 이반이라고 생각하면 뭔가 신나서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기분이지만, 여전히 감염되는 순간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 황금색 형체와 이반이 잘 매치가 되진 않았다.

“선택하지 않았어. 돌아오기로 선택한 건 너희들이었지.”

연하는 이해되지 않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감염은…….”

“모든 건 욕망의 문제야. 얼마나 무엇을 욕망하느냐. 난 그렇게 생각해. 살아나기를 간절하게 욕망한 자들이 감염을 이긴다고.”

연하는 자신의 욕망에 대해 생각했다.

‘그건…….’

저도 모르게 앞에 있는 남자를 훑었다. 조금 다른 욕망이긴 하지만…….

‘그런데 뭘 어떡해야 하는 거지.’

며칠 전 뭔가 굉장히 중요했던 것 같은 순간을 놓쳐 버린 이후 두 사람은 제대로 만날 틈도 없었다. 국장직은 원래 워낙 바쁘고, 그녀도 대기 해제 전에는 청사 붙박이나 다름없으니까.

주먹으로 벽을 때려 부수는 건 쉬운데, 남녀 사이의 벽을 허무는 일에는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너희 셋 모두 감염되는 것 자체를 선택한 건 아니지.”

그때 이반이 말했다. 연하는 얼굴이 어두워졌다.

필립 로스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다.

이반은 모든 것을 담담히 이야기해 주었지만, 필립에 대한 그리움은 숨기지 못했다.

그가 필립과 함께 한 시간은 뱀파이어 시간으로 따지면 ‘고작’이라 할 만한 십여 년 정도였으나, 제 클리엔테스 형제는 꽤 다정다감한 성격으로 이반에게 정말 아들 같았던 모양이다.

이반이 쓴웃음을 지었다.

“셋 다 죽어가고 있어서 물어볼 만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만약 너희들이 대답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글쎄, 모르겠구나.”

연하는 바로 반박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어, 상사님.”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연하는 돌아보았다. 한 중사였다. 그 외에도 도영과 3팀만이 아니라 다른 팀들을 포함해 익숙한 얼굴들이 꽤 보였다.

“누구랑 마시고 계시…….”

그가 다가온 위치에서는 벽 때문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한 중사는 말하다가, 연하 맞은편에 있는 조용한 붉은 눈을 발견하고 움찔했다.

“국장님.”

다들 움찔하며 인사할 기세이기에 이반은 손을 올렸다.

“괜찮습니다.”

분위기가 어색해지려는 순간이어서 연하가 먼저 사람들에게 말했다.

“먼저 마시고 계세요.”

“아, 네.”

그들은 대답하고 바 쪽으로 이동했다. 가면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야, 저건 대체 무슨 조합…….”

“조용히 해. 들리거든.”

이반은 연하를 보았다.

“합류해도 될 것 같구나.”

“일 있으세요?”

이반은 일어나서 의자 등받이에 걸쳐 둔 코트를 입고 웃었다.

“휴식시간이었다는 쪽이 맞겠지.”

“아, 신경 써주실 필요 없었는데……. 아무튼 조심히 들어가세요.”

“나중에 보자.”

이반은 가게를 나섰다. 옅게 비가 오는 모양인지 하늘을 잠깐 올려다본 그가 유리창 너머로 지나가고 나서 연하는 바에 자리한 팀원들과 합류했다.

“상사님, 요즘 저희랑은 전혀 놀아주시질 않네.”

한 중사가 섭섭하단 듯 말했다. 연하는 어깨를 으쓱였다.

“저랑 별로 놀고 싶어 하지도 않으시면서.”

뱀파이어들이 영입되면서 이 바닥 분위기가 좀 변하긴 했으나, 애초에 여성 뱀파이어는 많지 않았다. 그래서 마초적인 느낌 자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팀원들이 이제 와서 그녀를 무시하진 않았지만, 남자 동료들처럼 불알을 치면서 놀 수 없는 건 사실이었다.

“음.”

한 중사는 소리를 내며 제 턱을 짚었다.

“아무래도 우리 상사님을 보면 이 험악한 오빠들이 조심스러워진다고 해야 하나…….”

“욕해 드려요?”

한 중사는 호탕하게 웃었다.

“또 이런 점은 좋아하죠.”

그때 이반이 술집 밖으로 돌아왔다가 멈추었다.

사실 이번 주말에 연하에게 데이트를 신청할 생각이었다. 이렇게 같이 있을 시간도 없어서야, 연하 때문에 시작한 국장일인데 주객전도가 따로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런 풋풋한 연애도 나쁘지 않았지만, 역시 조금은…… 말이다. 그도 남자니까.

물론 순서는 모두 지킬 셈이었다. 연하가 준비되지 않았다면 무엇도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그와 함께라도 그녀가 모든 과정을 겪길 원했다.

설렘, 마주 잡은 손의 떨림, 첫 키스…….

오히려 설레고 있는 건 그 자신인 듯도 싶었지만.

그런데 사람들이 오는 바람에 물어보는 걸 잊어버리고 가서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방해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군.’

다 같이 떠들썩하게 웃고 있는데 그가 들어가는 순간 얼어붙을 분위기를 예상할 수 있었다.

‘나중에 물어봐도 되겠지.’

이반은 창 너머 웃는 연하를 보고 피식 웃고는 돌아섰다.

‘질투가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래도 다행이겠지.’

떠밀리듯이 살게 된 지난 십여 년의 삶이 힘들지만은 않았던 것 같아서.

부슬거리는 빗속으로 이반의 뒷모습이 사라졌다.

한편 술집 안에서는, 도영이 바의 스툴에 앉아 말없이 맥주를 마시면서 사람들 사이에 웃고 있는 연하를 보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만 놀리세요.”

한 중사는 도영을 가리켰다.

“이렇게 지켜주는 기사님도 있고 말이죠.”

“힘은 제가 더 센데요?”

“아, 상사님. 사내 마음에 스크래치. 그렇게 힘으로 남자들 겁주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연하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말하려는데,

“힘은 조금 세졌을지 몰라도 머릿속은 여전히 열아홉 살짜리 계집애죠.”

말소리가 뚝 멈추었다. 다들 잘못 들었나 싶어서 도영을 보았다.

도영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것처럼 기본 안주로 나온 땅콩을 집어먹으면서 말했다.

“남자한테 빠져서 나사 풀린 얼굴이라니. 하여간 이래서 팀에 여자는 들이면 안 된다니까.”

대원들은 시선을 교환했다. ‘이분 갑자기 왜 이러는지 아는 사람?’이라고 묻듯.

“소령님 지금 뭐라고 했어? 다시 한 번 말해봐.”

연하는 제 귀를 의심하는 것 같았다.

“워, 두 분 진정하시고…….”

한 중사가 얼른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하지만 도영은 그만두지 않았다.

“왜?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다음은 뭐야? 남자친구가 몇 시간 넘게 연락 안 된다고 질질 짜는 거냐?”

연하는 갑자기 옆에 놓인 빈 맥주잔을 집어서는 도영에게 다가갔다.

‘설마 저걸로 후려치려는 건가.’

대원들 모두 설마 싶었지만, 일촉즉발의 공기에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도영은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은 반응이었다.

연하는 도영 앞에, 온 힘을 다해 잔을 내려놓았다. 유리잔이 단단한 목재 바에 깊숙이 박히면서 바 전체에 금이 일었다.

콰지직.

벼락에 맞은 나무가 쪼개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나, 다들 흠칫해 분분히 물러났다.

연하는 가까이서 도영을 노려보았다.

“조금 세진 힘은 아닐 텐데.”

도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무식하게 힘자랑은.”

연하는 내치듯이 유리잔에서 손을 떼고 일어났다.

“망가진 건 이쪽이 물어낼 거예요.”

딸랑.

문을 밀치고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났다.

한동안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한 중사가 은근슬쩍 도영 옆으로 다가섰다.

“그래요. 옛날에 괜히 여자를 팀에 들이지 않았던 게 아니죠.”

한 중사는 뒤로 돌아 바에 양팔을 걸친 채 고개를 끄덕였다.

“팀원들이 쓰러져도 업고 뛰어줄 수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남자 대원들 마음이 너─무 싱숭생숭해져서 말이죠. 옆에 막 총알이 날아다니는데 괜히 저 가녀린 친구를 지켜줘야 할 것 같고, 작전이고 뭐고 쟤부터 챙겨야 할 것 같고. 그게 본성인 걸 어쩌겠습니까.”

도영은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었다.

“그래서 이런 일이 있었어요. 소령님이 전출 오시기 전에.”

한 중사는 제로 14팀 결성 초기부터 연하와 함께 있었던, 몇 되지 않은 멤버였다.

“한 부사관이 HVT(고가치 표적. 즉 적군의 중요인물)# 작전 중에 몸을 날려 거의 다 잡은 HVT 대신 위험에 처한 상사님, 그때는 중사였지만, 아무튼 강 상사님을 구한 거죠. 물론 작전은 날아가고, HVT도 날아가고. 저 하늘 멀리.”

그러면서 한 중사는 아련한 눈빛으로 허공에 손가락을 흔들며 손짓했다.

“그 부사관, 아마 겁나게 처맞았겠죠. 반주검이 돼서 침상에 누워 있지만 않았더라면. 상사님, 그날 이후로 배식도 자기한테 먼저 해주지 말라고 하는 분이시잖아요.”

한 중사는 몸을 돌려 바에 양팔을 대었다.

“처음에는 얼떨결에 뱀파이어가 됐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제가 상사님을 존경하는 부분은 그런 거예요. 그래도 자기가 처한 상황에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는 거.”

한 중사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실력이 없었다면 이쪽 바닥에선 아디오스였겠지만,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이 뱀파이어한테도 적용되는 건가 봐요. 그런데 이러시면 소령님 나쁜 사람, 안 나쁜 사람?”

다른 대원이 끼어들었다.

“소령님만큼 강 상사님 일에 핏대 세우던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괜히 질투 나서 저러는 거지.”

“그럼 소령님이 상사님 좋아하는 거야?”

또 다른 대원이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전혀 그런 기색은 느끼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한 중사는 힐끔 도영을 보았다.

“그런 거예요?”

도영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한 중사는 알 만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그거죠? 베스트 프랜드 뺏긴 기분.”

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무슨 여고생 같은 심리인가 싶어서 차마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한동안은 진지하게 혹시 자신이 연하를 좋아하게 된 건가 고민했다. 자꾸만 국장과 연하가 함께 있는 모습에 화 같은 감정이 불끈거렸기 때문이다.

국장 자체는 싫어하지 않았다. 처음엔 거부감이 있었지만, 솔직히 같은 남자가 봐도 인정할 만한 구석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솔직히 말해야겠다. 연하가 변하는 것이 싫었다.

무생물 같은 강연하가 ‘여자’의 눈빛으로 국장을 보는 것도 싫었고, 매일 같이 웃고 떠들던 녀석이 거리감이 느껴질 정도로 저 멀리 성큼 가버린 것도 싫었다.

그들은 항상 함께 있었는데.

도영은 뒷머리를 흐트러뜨렸다.

‘쪽팔리게, 진짜.’

하지만 팀원들끼리 워낙 동고동락하는 바닥이기 때문에 이런 감정싸움이 생각보다 흔하다는 게, 변명이 될 수 있다면 해둬야 할 것 같았다.

한 대원이 손을 들고 말했다.

“난 딸내미 뺏긴 기분.”

“아, 그 기분은 나도 좀 있는데.”

다른 대원이 거들었다.

“오, 너도?”

보아하니, 상대가 국장이어서 그렇지 저 어디 쭉정이 같은 놈이었으면 ERU 3팀과 진솔한 면담을 가졌어야 할 것이다.

팀원들이 웃고 떠드는 사이, 도영이 갑자기 일어나 뛰어나갔다.

“오, 청춘 영화 같아.”

뒤에서 웃음소리와 소란스러운 휘파람 소리가 따라왔다.

문을 나서자, 찬 공기와 부슬거리는 비가 얼굴을 때렸다.

“강연하!”

저 멀리 연하는 돌아보았다. 안개 같은 비 때문에 부옇게 번지는 빛 아래 검은 눈동자가 조용히 이쪽을 응시했다.

흩날리는 빗방울 너머로 불빛이 수런거렸다.

“미안하다. 난…….”

그런데 연하는 가운데 손가락을 세우고 가버렸다. 이번에는 정말 화가 났으니 사과 따위 받아주지 않겠다는 듯.

도영은 피식 웃었다. 저렇게 반응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화가 풀렸다는 의미기 때문에.

‘하여간 속도 없는 자식.’

# High Value Targ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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