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 짐승-64화 (64/104)

64화. 불의 검 (3)

렉스는 숨을 들이켰다. 뒤에서 나타난 병사는 그의 배에 꽂은 검을 빼서 다시 한 번 찔러 넣었다.

“……!”

도끼는 쇳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지고, 렉스는 다리가 꺾여 몸이 무너졌다.

“잘했어!”

기사가 웃으며 외쳤다. 병사는 뿌듯한 표정으로 기사를 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무너지던 렉스는 병사가 입고 있는 갑옷의 목 부분을 잡았다. 그리고 품에서 꺼낸 단도를 병사의 목덜미에 찍어 넣었다.

“컥!”

병사는 그대로 무너져 죽었다.

단도는 앤드라스 형제의 등에 꽂혀 있던 것이었다.

렉스는 천천히 도끼를 주워들고 기사를 돌아보았다. 무언가에 압도된 듯이 지켜보고 있던 기사는 다급하게 검을 벽에서 빼어내었다. 그리고 위협하듯 한 번 회전시켜 잡았다.

하지만 선뜻 덤벼들지 않았다. 그래서 렉스가 먼저 걸음을 디뎠다.

‘배에 불이 붙은 것 같다.’

타오르고 있었다.

기사는 주춤하더니 뒤돌아 달아나기 시작했다. 렉스는 다리를 끌며 따랐다. 장막이 내려오는 무대처럼, 천천히 끝나가고 있었다.

대성당의 문이 눈에 들어왔다. 문틈 사이로 그림자들이 어지럽게 움직였다.

렉스는 피에 젖은 손으로 옻칠이 된 두꺼운 나무문을 짚었다. 그리고 힘을 주어 밀었다.

끼이익.

안에 있는 남자들이 일제히 돌아보았다.

대성당이라고는 해도 보물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전혀 없는 소박한 곳이었다. 그런데 남자들은 조금이라도 빛난다 싶은 것은 모두 뜯어내고 있었다.

이 수도원에서 가장 소중히 다뤄지는 제구들은 이미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시신들과 함께.

베르톨론 수사는 장의자 사이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고, 토마스 수사는 제구들을 지키려고 한 모양 그대로 성합을 끌어안고 죽어 있었다.

‘신이시여.’

렉스는 탄식했다.

‘이들이 정말 당신의 투사입니까?’

한 남자가 장의사 사이로 달려들었다.

분노를 재료로 비정상적인 힘이 타올랐다. 렉스는 도끼로 남자를 내리찍었다. 남자가 검을 들어 막았지만, 힘에 밀려 버티지 못했다. 피가 폭발했다.

하지만 렉스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의 몸에서 넘실대는 검붉은 불꽃을 느낄 수 있는지 다음 남자가 주춤거렸다. 렉스는 도끼를 치켜들었다.

퍽.

화살이 가슴을 때렸다. 반동을 일으키며 멈춘 찰나, 옆에서 달려든 남자가 옆구리를 찔렀다.

그대로 남자가 밀쳐 렉스는 넘어졌다.

우당탕.

장의자에 부딪혀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하지만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건, 너무 사소한 아픔이었다.

억센 손아귀가 머리카락을 휘어 감아쥐고 끌어올렸다. 부들거리며 까라지는 눈꺼풀 사이로 도망쳤던 기사가 보였다.

“예쁜 수사님이 제법이야.”

차가운 칼날이 볼에 닿았다.

“당신 때문에 예루살렘을 해방할 병력이 셋이나 줄었잖아. 알아? 당신, 지옥 갈 거야.”

예리한 통증이 볼을 타고 미끄러졌다. 칼날에 갈라진 상처에서 핏물이 흘렀다.

“수사님만 아니었다면 죽을 때까지 귀여워해 줬겠지만, 우리도 신앙심은 있어서 말이야.”

기사가 렉스의 머리카락을 쥐고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 붉은 길이 물겅물겅 흘러내렸다.

제단 앞 시체 더미 위에 렉스를 던졌다. 그의 아래에 있는 것은 유대인 가족의 늙은 어머니였다.

활짝 벌어진 동공에 그녀가 죽는 순간의 공포가 그대로 아로새겨져 있었다.

“다 챙겼으면 가자고!”

남자들은 구석구석 불을 놓기 시작했다. 기사는 횃불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렉스의 앞에 던졌다.

“수도원에 불을 지르다니, 이 얼마나 지독한 유대인들인가?”

남자들은 왁자지껄 웃음을 터뜨렸다. 제각각인 웃음소리를 따라 무거운 자루를 끌고 밀고 가는 소리가 점차 멀어져 갔다.

텅텅…… 텅……. 텅…….

곧 정적이 눈치를 보는 초식동물처럼 기어들어 왔다. 렉스는 힘겹게 유대인 여인의 눈을 감겼다. 그리고 자신도 눈을 감았다.

그런데 왜인지 모를 이유로 다시 눈이 떠졌다.

장면이 바뀐 것처럼 사방이 격렬한 불길로 타오르고 있었다. 화마가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붉은 말처럼 날뛰었다.

‘벌써 지옥에 도착했는가.’

그런데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넝마 자락…….

렉스는 천천히 눈을 들었다. 흐릿한 시야에 그를 내려다보는, 불보다 더 붉은 눈동자가 있었다.

넝마에 불이 붙었지만 남자는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불타올라 사라지는 넝마 사이로, 갑옷이 나타났다.

불이 너울거리는 손길로 갑옷을 훑었다. 빛나는 갑옷은 은색 같기도 검은색 같기도, 오히려 타오르는 불을 비춰서 불 그 자체 같기도 했다.

불의 갑옷을 입은 위대한 왕의 강림…….

“당신…… 이십니까?”

남자는 아무 말 없이 내려다볼 뿐이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누군가, 숨이…… 붙어 있다면…….”

대답을 들을 수 없으리라고 깨달은 렉스는 말을 멈추었다. 숨을 몰아쉬었다.

그래, 어차피 대답하지 않는 분이시니까.

“저를, 버리십시오.”

렉스는 힘겹게 말했다.

“이토록…… 잔인하신 당신의 섭리가, 다스리는 세계로 가고 싶지 않습니다.”

할 수 있는 한 울부짖었다.

“저를, 기필, 코 버리십시오.”

쿵. 쿠우웅.

불길한 굉음과 함께 제단과 벽, 서까래가 무너져 내렸다. 그것은 그의 세상이 불타 무너져 내리는 것과 같았다.

그의 에덴, 그의 낙원이.

“신을 부르며 죽어가는 이는 많이 봤지만.”

마침내 붉은 눈의 남자는 왕의 목소리로 말했다.

“당당하게 버리라 이야기하는 녀석은 처음이군.”

렉스는 이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무너져 내리는 그의 세상과 함께, 그의 영혼도 타나토스로 향하고 있었다. 눈이 흐려지며 모든 것이 붉게만 보였다.

“돌아오는 것은 네 선택이다.”

붉음이 밀려와 그를 쓸어갔다. 굉음이 울렸다.

* * *

눈이 오고 있었다.

‘아직 동절기 준비를 하지 못했는데…….’

멍하니 생각하는데, 그제야 무거운 잿빛 하늘에서 휘날리는 것이 눈이 아니라 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렉스는 몸을 일으켰다. 온몸을 뒤덮고 있는 재와 함께 낡은 담요가 풀썩이며 떨어져 내렸다.

‘이건……?’

렉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든 것들이 불타 무너진 폐허에 그는 혼자였다. 거의 무너진 벽 위로 솟아오른, 검게 그을린 들보가 잿빛 하늘을 배경으로 늘어져 있었다.

담요 아래 그는 알몸이었다. 담요는 불타지 않고 멀쩡했으므로, 불길이 진화되고 나서 누군가가 덮어준 것 같았다.

렉스는 몸을 일으켰다. 사방에 기척 하나 없었다. 마치 멸망한 세상에 홀로 서 있는 것 같았다.

부스럭.

그런데 소리가 들렸다.

마치 바로 귀 옆에서 들리듯이.

렉스는 소리를 따라 걸었다. 맨발바닥에 온갖 잔해들이 밟혔지만, 이상하게 전혀 아프지 않았다.

몸에도 생채기 하나 없어서, 묘한 느낌이었다. 꼭 불 속에서 구워진 동양의 자기 같았다. 피부에 유난히 윤기가 도는 느낌이었다.

역시 전부 불타 무너진 폐허에 남자가 앉아 있었다. 어떻게 무사한 의자에.

여전히 갑옷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주변에는 말 같은 이동수단도, 몸을 지킬 검이나 봇짐도 없어서 유랑기사라기엔 묘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마치 제 안방에라도 있는 듯이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앉아 무언가를 먹고 있었다.

붉은 눈이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처음이군, 진짜 돌아온 녀석은.”

자세히 보니 남자가 먹고 있는 건 찐 감자였다.

그 발치에, 감자를 보관해 둔 독이 파내져 있었다. 불 때문에 독채로 익혀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이 자리는 창고였다.

“그건 수도원의 재산입니다.”

렉스는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남자는 물끄러미 그를 보며 감자를 한 입 더 먹었다.

“고지식한 녀석이군. 이런 녀석이 첫 번째라니, 난 역시 운이 나빠.”

불 속에서는 뭔가 비인간적인 신비로운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 남자는 뭔가…… 버릇없는 도련님 같았다.

렉스는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졌다. 그런데 다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너무 낯선 감각이어서 애써 무시하고 있었지만, 배가 고팠다.

그냥 고픈 게 아니라, 지금 눈앞에 살아 움직이는 유일한 생물인 남자를 공격하고 싶을 만큼.

갑자기 남자는 그의 앞에 무언가를 던졌다. 풀썩이며 떨어진 것은, 헝겊 주머니였다.

렉스는 떨면서 고개를 들었다. 열린 입구 사이로 꽃잎이 보였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묘한 붉은 꽃이었다.

“꽃…… 입니까?”

‘이런 건 왜…….’

생각하는데, 이상하게 입에 침이 고였다.

“그것만으로는 양이 되지 않겠지만 일단 먹어둬.”

저 멀리서 검은 구름이 몰려오는 하늘이 불길하게 울었다. 곧 폭풍이 오려는 모양이었다.

“어차피 그리 오래 가지 않을 세상이니까.”

지평선까지 펼쳐진 대지에 홀로 우뚝 앉아 있는 남자는 그야말로 폭풍의 왕 같았다.

* * *

이야기를 끝내고, 렉스는 잠깐 틈을 두었다. 규하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 당시 종교는 이데올로기였고, 저 역시 평범한 사람으로서 시대의 이데올로기에 편입되었지만, 늘 미약한 이질감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상황이 그렇게 되어 수사까지 되었을 뿐, 원래대로라면 수사 따위 맞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마 앤드라스 형제님은 자신에게 내린 수난을 감사히 여기며 가셨을 겁니다. 수난이 고통스러울수록 그리스도에게 가까워지는 일이라고 생각하셨겠죠. 그런 분이셨으니까요.”

탁자 위에 가볍게 깍지 껴 맞잡고 있는 그의 손이 왠지 고통을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단지 제가 그런 사람이 아니었을 뿐입니다. 저는 납득을 할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 시대 사람답지 않게 제게 중요한 건 현세의 행복이었습니다.”

“…….”

“그런 면에서 저는 신을 철저하게 제 이득을 위해서만 믿은 얄팍한 인간이었는지도 모르죠.”

아니,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된 건…….”

렉스는 찻물에 비친 자신을 보았다.

“신이 기필코 절 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반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떠났다. 그때는 깨닫지 못했지만, 신을 잃은 그가 본능적으로 이반을 신 대신처럼 대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평생을 누군가에게 헌신하고 순종하고 봉사하고 살아온 버릇을 한순간에 버릴 수 있을 리 없었다.

“난 네 신이 아니야. 사실 뭣도 아니지.”

이반이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한 말이었다.

혼자 남은 렉스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갔다. 인간들 사이를 거닐 때 후각을 자극하는 피의 냄새를, 그걸 달콤하게 느낀다는 사실을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피를 마셔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건, 수년간 숲에 틀어박혀 가끔 동물의 피로 연명하다가 심각한 혈액 부족으로 손상을 입은 장기들이 피를 토해내기 시작했을 때였다.

그는 죽어가고 있었다.

“절 이런 생물로 만든 신의 의도를 수없이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알 수 없었고, 그래서 살기로 했습니다. 무언가를 알 수 있을 때까지.”

“그래서 지금은?”

규하는 어두운 눈으로 물었다.

“지금도 알 수 없습니다. 아마 영원히 알 수 없겠죠.”

대답하지 않는 분이시니까.

사실 언젠가부터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살아도 대답은 얻을 수 없으리라고 납득했다.

“하지만 그보다 제가 무엇을 원하는가, 그게 중요해졌습니다.”

“그게 뭔데?”

“사는 것입니다.”

어쩌면 인간이었을 때부터 렉스가 바란 것은 그 하나였는지도 모른다.

사는 것.

그러기 위해선 이 세상이 온전해야 했고, 그래서 페인 총장이 도움을 요청했을 때도 별로 고민하지 않고 MCTC 창설을 도왔다.

이 세상은 또 하나의 수도원이었다.

그의 낙원, 그의 에덴. 그가 지켜야만 하는 곳.

집은 조용했다. 냉장고가 작동하는 소리, 수도꼭지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올 뿐이었다.

규하가 갑자기 일어났다. 그리고 다가와, 렉스의 얼굴을 감싸 들어 올렸다.

‘무엇을─’

생각하는데, 키스했다. 기쁘긴 했지만 기대하진 않았기에 렉스는 조금 놀랐다.

“무슨 의미입니까?”

“이보다 더 나은 위로는 생각나지 않아서.”

어차피 천 년이나 된 일이어서 새삼 위로받을 건 없지만…….

떠나려는 팔을, 렉스는 잡아당겼다.

“잠깐…….”

규하는 자세를 잡으려고 버둥거렸다. 하지만 역시 힘으로 이길 수는 없어서 결국 그의 무릎 위에 앉게 되었다.

“이거 놔.”

어쩐지 부끄러워져 일어나려는데, 렉스가 허리를 끌어안아서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더 위로해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규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너 정말 기회를 놓치지 않…….”

렉스는 지체하지 않고 규하에게 키스했다. 그녀는 반항하는 소리를 냈으나, 곧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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