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 짐승-63화 (63/104)

63화. 불의 검 (2)

“저희는…….”

유대인 남자가 말하려는 순간, 다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말이 우는 소리, 철이 부딪히는 소리…….

입구에서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들어왔다. 그러자 유대인 가족들은 기겁하며 몸을 움츠렸다.

기사들은 하나 같이 그들을 비웃는 눈으로 보았다. 마치 도망친 노예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가지고 그것을 행사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잔인한 주인처럼 보였다.

“저희는 라이닝겐 백작님의 영도 아래 동방의 동지들을 도와 성스러운 예루살렘을 수복하기 위해 가는 중입니다.”

한 남자가 렉스는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말했다.

나중에 동료 수사가 그건 신성로마제국에서 쓰는 언어였고, 그런 내용이었다고 알려주었다.

하지만 가문의 이름을 댄 사람은 그 한 명뿐이었기 때문에 다른 이들은 그의 사병이거나 도시의 불량배들 같다고 했다.

“‘신께서 그것을 원하셨습니다.’”

Deus lo vult.

공의회에서 사람들이 십자를 질 것을 맹세하며 외쳤다는 말로, 그 말만은 라틴어였기에 렉스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들이 가슴에 부착하고 있는 붉은 십자가 패치가 시선을 끌었다.

“주께서 그대들을 축복하시길.”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원장은 능숙한 제국어로 대답했다.

“십자를 지신 분들께서 어쩐 일로 이런 벽지를 방문해 주셨는지요.”

“예루살렘은 세계의 중앙에도 있지만,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자들은.”

기사는 유대인들을 가리켰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한 유다의 민족입니다. 독사 같은 자들이라 여태까지 그 악한 핏줄을 이어왔으나, 주님께서 성전을 명하셨습니다. 저희는 참으로 높으신 주님의 뜻을 받들고자 할 뿐입니다.”

렉스는 떨고 있는 유대인들을 보았다.

비록 더러워지고 찢겨 있었지만, 차림새가 훌륭했다.

병마와 접촉하는 더러운 의사 일이나 성경이 금지한 고리대금업을 하는 유대인들이 흔히 그렇듯이, 아마 도시에 사는, 제법 재산 있는 자들이 분명했다.

이들이 죽으면 그 재산은…….

‘삿된 생각이구나.’

렉스는 애써 생각을 떨쳐 냈다.

기꺼이 십자를 진 자들에게 그런 불순한 의도가 있으리라 의심하는 것조차 결례일 터였다.

“그리스도를 배반한 죄를 어찌 씻겠습니까마는.”

원장은 말했다.

“그리스도의 보호를 구하는 자들은 보호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또한, 이곳은 수행하는 자들이 기거하는 곳이니, 소요를 원하지 않는 마음을 부디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수도원을 둘러보았다.

거친 옷감으로 수도복을 지어 입은 수사들, 잘 정리되어 있지만 허름한 건물, 텃밭에 푸릇하게 돋아난 채소들…….

문밖에서 말이 푸륵거리며 발을 굴렀다.

“그럼.”

다행히 기사와 그를 따르는 자들은 발걸음을 돌렸다. 긴장이 탁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남자들이 수도원을 나서는 모습을 보고 렉스는 유대인들에게 다가섰다.

“괜찮으십니까?”

공포에 질려 있던 유대인 가족의 딸이 그를 보고 얼굴을 붉혔다.

“원장님.”

한 수사가 원장에게 다가가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부정한 자들입니다.”

“상처 입은 자들이지.”

원장은 단호하게 말하고 명했다.

“상처를 치료해 주어라.”

렉스가 바로 움직이려고 하자 원장이 제지했다.

“자네 말고, 다른 형제들이 하시게.”

원장은 형제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한동안 지켜보고 있다가 걸음을 돌렸다. 렉스는 원장을 따랐다.

“신이 그것을 원하셨다, 라…….”

원장은 회랑을 걷다 말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결국 실행하는 것은 인간이지.”

그때 렉스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만약 이해했더라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 *

“십자군 거병으로 사방이 떠들썩해도 지금에 비하면 소식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느리게 퍼지던 때였습니다.”

렉스는 차를 보며 말했다.

“그래서 저희는 그 지난달에 독일, 아니, 신성로마제국이라고 해야겠군요.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죠.”

차는 이미 식어버렸고, 집은 조용했다.

“라이닝겐 백작 에미코의 부대는 도시 보름스에서 유대인 공동체를 공격해 팔백 명을 학살하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았습니다. 나중에 역사는 그 사건을 ‘보름스 학살’이라고 부르더군요.”#

규하는 물어본 걸 후회하고 있었다. 더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석연치 않아 하는 그가 이야기를 꺼내도록 한 이상 그녀에겐 끝까지 들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라이닝겐 백작의 본대는 이미 지나간 후였습니다. 수도원에 찾아온 남자들은 그 유대인 가족들을 쫓느라 뒤처진 자들이었죠.”

렉스는 잠깐 무슨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라이닝겐 백작 부대에서도 질이 나쁜, 혹은 지도자의 행위를 보고 더 과격한 해석을 하게 된 자들 같았습니다.”

“…….”

“예루살렘 탈환을 위해 십자를 진 자들은 어떤 죄에도 면죄가 있다는 식으로 말이죠.”

렉스는 차분하면서도 우울한 어조로 덧붙였다.

“그야말로 ‘어떤 죄’에도 말입니다.”

* * *

어떤 소린가에 렉스는 잠에서 깨어났다. 몽롱하여 꿈을 꾸나 싶었다.

쨍그랑.

그런데 갑자기 날카로운 파열음이 밤의 정적을 해쳤다.

“……!”

렉스는 흠칫 몸을 일으켰다. 같은 방을 쓰는 동료 수사도 깨어나 얼떨떨한 기색이었다.

렉스는 맨발로 일어나 창문 밖을 보았다. 횃불이 지나갔다. 경장을 한 가벼운 발걸음들이 밭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감이 좋지 않았다.

“원장님께 알려야겠습니다.”

렉스는 동료 수사들에게 말하고 옷을 꿰입고 방을 나갔다.

그 짧은 새에 소란이 커지기 시작했다. 소리를 듣고 깨어난 수도사들이 밖으로 나와 침입자들과 마주친 모양이었다.

침입자들은 딱히 그들의 존재를 감추려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십자를 졌다고 해도 보여준 행실이 무뢰배 같은 자들이라 걱정이었다.

‘큰일이 없어야 할 텐데.’

원장의 방으로 다가갈수록 걸음이 급해졌다.

건너편에서 이는 소란에 정신이 팔려, 방문이 열려 있다는 인식은 하지도 못하고 들어가며 외쳤다.

“원장님. 원장……!”

렉스는 멈추었다. 남자들도 동작을 멈추고 그를 보았다. 원장은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그의 목이.

잠옷을 입은 그의 몸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두 남자가 웃으며 지켜보는 가운데, 한 남자는 유대인 가족의 딸을 제 몸 아래 두고 있었다.

지옥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현세의 풍경이 아니었다. 그럴 수가 없었다.

절규조차 올라오지 않았다.

주춤…….

렉스는 한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남자들이 외쳤다.

“잡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식당이었다. 달려 들어가 문을 닫고 뒷문으로 뛰는데, 아치 아래 어둠 속에서 사람이 쏟아졌다.

그를 끌어안으며 무너졌다. 렉스는 기겁했다. 처음에는 두려움과 공포에서, 다음에는 그것이 앤드라스라는 인식에서.

“형제님!”

앤드라스는 동공이 풀린 눈으로 올려다보고 힘겹게 그를 불렀다. 급히 침대를 벗어났는지 수도복을 대충 걸친 차림이었다.

“무슨 일이십니…….”

렉스는 다급히 묻다가 멈칫했다.

앤드라스의 등이, 칼자국으로 난자당해 있었다.

그리고 등에 똑바로 꽂혀 있는 단검.

소름이 전신을 사로잡았다. 렉스는 주저앉아 버렸다. 앤드라스는 그의 무릎 위에 늘어졌다.

“앤드라스 형제님, 형제님…….”

렉스는 울먹였다.

“저들은 같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까?”

앤드라스는 온 힘을 다해, 하지만 생명의 기운이 빠져나가 걸치는 것에 불과한 힘으로 렉스의 팔을 잡았다.

“주님께선, 알고자, 할 뿐입니다. 욥의 믿음을…….”

앤드라스의 눈에서 빛이 꺼졌다. 렉스는 몸이 제어를 잃고 떨려왔다. 사방이 어두워 악마의 침처럼 검게 보이는 액체가 그의 두 손에 흥건했다.

철컹. 철컹.

어느 쪽이야?

그때 벽 너머에서 먹이를 찾는 포식자의 불규칙한 발걸음소리와 외침이 들려왔다. 발걸음에서조차 피 냄새가 났다.

렉스는 다시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 * *

렉스는 어둠 속에서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몸의 떨림이 멎지 않았다. 지독한 정적 가운데서 어렴풋하게 쇳소리가 들려왔다. 아니면 착각일 수도 있었다. 아무것도 믿어지지 않았다.

자신이 보는 것, 듣는 것, 느끼는 것, 모든 것이.

‘신이시여. 이것은 정말 욥에게 내렸던 것과 같은 시험입니까? 저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함입니까?’

잇새로 새어 나가는 탄식을 막기 위해, 입술을 모질게 깨물었다.

‘그렇다면 어떤 고난 앞에서도 믿음을 지킨 욥에게 잃어버린 자식들을 돌려주셨듯이, 믿음을 증명하면 원장님과 형제님들을 돌려주시는 겁니까?’

하지만 욥의 잃어버린 자식들과 새로 태어난 자식들이 같지 않듯이,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자,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너무도 갑작스러워서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던, 자신이 목도한 지옥의 무게가 심장을 짓눌러 왔다.

‘정말로 가셨다. 평생을 헌신하고 베풀며 사셨는데, 이교도에게도 받지 않을 모욕을 받아…… 그렇게…….’

심장이 산 채로 녹아 흐르는 느낌이 이러할지, 육체를 압도하는 정신의 고통에 그는 옷을 찢으며 울부짖고 싶었다.

‘아니, 아니다.’

렉스는 마음을 다잡았다. 주님의 뜻은 인간의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이 넓고 깊으니까, 이러한 고통을 주시는 데도 모두 의미가 있으리라.

‘최후의 심판 날 천국의 문이 열리면 모두 그곳에 계시겠지. 그리고 영원히 복받은 삶을…… 삶을…….’

하지만 당신이 고통을 아십니까?

마음의 그늘에서, 흉포한 형태를 띤 질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지전능하시어 이 땅의 고통과 슬픔을 직접 겪지 않은 분이니까 이런 고통이 보상받으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잃어버린 자식을 다른 자식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다.’

난폭한 생각의 탕이 끓어 넘쳤다.

이곳은 그의 에덴이었다. 다른 지상낙원은 필요하지 않았다. 이곳을 지키는 불의 검이 되라 한다면, 기꺼이 될 수 있었다.

그때였다. 모퉁이를 돌아, 남자가 나타났다.

“여기 있……!”

‘지켜야 한다.’

렉스는 생각했다.

악마가 되더라도, 그의 낙원을 지켜야만 했다. 그것은 부나 명예를 향하는 것보다도 강렬한 그의 야망이었다.

렉스는 손에 들고 있는 것을 온 힘을 다해 휘둘렀다.

퍽.

도끼날에 찍혀 벽에 폭발한, 피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조각들이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렉스는 도끼를 뽑아 들었다.

자신의 손으로 저지를 거라고 상상조차 해보지 않은 끔찍한, 아주 끔찍한 일이었다.

그런데 몸의 떨림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렉스는 모퉁이를 도는 순간 도끼를 휘둘렀다.

캉.

이번에는 맞부딪치는 금속성이 울렸다. 기사가 검으로 도끼를 막고 있었다. 낮에 말을 했던, 유일한 귀족으로 보였던 기사였다.

“너!”

기사는 적잖이 놀란 기색이었다.

그런데 그의 검에 핏자국이 흥건했다. 그것을 본 렉스는 분노했다. 난생처음 진정으로 분노란 감정을 느낀 순간이었다.

렉스는 무작정 도끼를 휘둘렀다. 하지만 상대는 훈련된 기사였다.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공격에 당할 리 없는지 몸을 피했다.

그리고 렉스가 앞으로 쏠린 사이, 기사가 뒤에서 검을 휘둘렀다.

렉스는 가까스로 몸을 숙여 피했다. 반추해 보면 아드레날린이 솟구쳐 평소에는 불가능한 움직임이 가능한 것 같았다.

캉.

검이 벽을 쳤다.

렉스는 옆으로 굴러서 일어났다. 그리고 벽에 박힌 검을 잡고 있는 기사의 팔을 향해 도끼를 내리찍었다. 기사는 검을 놓고 훌쩍 물러났다.

기사는 렉스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상대라는 걸 깨달았는지 주춤거렸다.

훈련된 기사 정도는 아니지만 이래 봬도 각종 노동으로 단련된 몸이었다. 렉스는 도끼를 꽉 쥐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렉스가 흠칫 돌아보는 찰나였다.

“죽어!”

렉스는 숨을 들이켰다. 뒤에서 나타난 병사는 그의 배에 꽂은 검을 빼서 다시 한 번 꽂아 넣었다.

“……!”

# “Anti-Semitic Massacre Kills 800 jews in Worms”, New Historian, 2018년 8월 13일 접속, https://www.newhistorian.com/anti-semitic-massacre-kills-800-jews-worms/6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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