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불의 검#(1)
규하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이 땀으로 미끈거렸고, 뒤에 맞닿은 남자의 몸도 여전히 뜨거웠다.
그가 허리를 안아 끌어당기며 어깨에 키스했다. 몸이 잔뜩 예민해져 있어, 가벼운 입맞춤이었는데도 전율하고 말았다.
“그냥 때려 죽여. 더는 못해.”
규하는 손을 내저었다.
렉스는 몇 번 더 목덜미에 키스하고는 일어났다. 그리고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에서 물을 꺼냈다. 냉장고의 불빛이 세밀하게 조각된 남체에 음영을 드리웠다.
저 몸을 그냥 말랐다고 생각했다니.
‘대체 그 위장 능력이 엄청난 남방이며 티셔츠들은 어디서 난 거야.’
규하는 그날 저녁, 혼자 온갖 열분을 삭히며 맥주에 오징어를 씹고 있었다.
마치 오징어가 누구 대신인 것처럼 잘근잘근 씹어대며.
그런데 초인종이 울렸고, 인터폰 화면에 렉스의 얼굴이 떴다.
‘분명히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했는데!’
정말 녀석을 오징어처럼 씹어버리려고 잔뜩 독이 올라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너!”
하지만 장전한 욕설이 민망하게도 한 마디라도 제대로 내뱉었나. 렉스가 대뜸 그녀의 얼굴을 붙잡더니만 입술을 부딪쳐 왔다.
‘이게 어디서 못된 짓만 배워서!’
확 얼굴을 긁어줄 셈이었다. 하지만 몸이 눕혀졌다고 깨달았을 때는 이미 바닥이었다.
렉스는 마치 물 만난 물고기 같았다. 이렇게 능수능란할 수가 없었다. 정말 자존심 때문에라도 웬만하면 걷어차 줬을 텐데…….
‘몸에 뭔가 문제가 있나.’
뒤늦게 머리가 지끈거렸다.
당당하게 밀치고 꺼지라고 말은 못 해줄망정, 녀석의 손만 닿으면 아주 나일의 여신이 따로 없었다. 어찌나 풍요롭게 범람하시는지.
그때 물을 다 마신 렉스가 몸을 돌렸다. 규하도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물 마시겠습니까?”
규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달칵.
그가 가져온 잔을 침대 옆 테이블에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비인간적인 무게에 눌린 침대가 깊이 내려앉는 느낌이 났다.
“거의 저한테 화가 나 있군요.”
“몸으로 해결하려 한 녀석에겐 자업자득이지.”
규하는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애초에 해결되지 않은 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는데도 본능에 따랐던 게 문제였는지도 모르겠지만, 다시 그때 응급실로 돌아간다고 해도 멈출 수 있을지 자신은 없었다.
생각하고 있는데, 어깨를 쓰다듬는 손길이 있었다. 규하는 돌아보았다.
“하지만 안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상치 못하게 진지한 얼굴을 마주하고, 규하는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무언가 말하려다가 꾹 입을 다물어 버렸다.
“씻으러 간다.”
* * *
규하는 젖은 머리로 차를 끓이고 있었다. 샤워하고 나온 렉스는 그녀를 지켜보았다.
규하는 그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무심하게 차를 끓여 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고 잔 두 개에 물을 붓고, 물었다.
“너 몇 살이야? 진짜로.”
언젠가는 물어볼 거라고 생각을 하긴 했지만…….
힘이 잔뜩 들어간 눈을 보니, 빠져나가는 방법은 없는 것 같았다.
“1096년에 죽었습니다.”
규하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보았다.
“그럼 거의 천 년은 됐잖아.”
렉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규하는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천 년…… 천 년이라. 혹시 마법 같은 거 쓸 줄 알아?”
렉스는 뜬금없는 질문이 의아했으나 일단 대답했다.
“아뇨.”
규하는 어깨를 으쓱이고 차를 마셨다.
“그럼 천 년씩 산다고 해봤자 별로 재밌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구나.”
“기본적으로 인간이니까요.”
“천 년 넘게 산다는 점에서 이미 인간이 아니거든.”
렉스는 또 대답이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어쩐지…….
‘의기소침한 건가, 이 녀석.’
쓸데없이 귀엽지 말라고.
규하는 표정이 들킬까 봐 차를 한 모금 더 마시고 잔을 내렸다.
“그래서 천 년 묵은 뱀파이어 오빠, 인간일 땐 뭐 하던 사람이에요?”
렉스는 잠깐 그녀를 보았다.
혹시 이거…….
“비꼬는 겁니까?”
“그럼 아닐까 봐? 이제 와서 오빠 행세하려고 해도 무효야.”
렉스는 피식 웃었다.
“수사였습니다.”
천 살이라는 말에도 크게 반응하지 않던 규하가 움찔하며 보았다.
“나 혹시 고해성사할 만한 일을 저지른 거야?”
“천 년 전에 그랬다는 겁니다.”
규하는 렉스를 위아래로 훑었다.
수사였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지만, 납득은 됐다.
차분하고 금욕적인 외형에 비해, 그녀로서는 일종의 재능으로 여기는 신앙심을 가질 만큼 감수성 깊은 내면이 드문드문 비쳤다.
인간의 성격 형성에 유아 시절이 중요한 것처럼 흡혈귀에게 인간 시절이 그렇다면…….
‘오히려 다른 대답이 믿기 힘들었겠지.’
규하는 생각하고 맞은편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렉스는 따랐다. 그에게 찻잔을 밀어주며 물었다.
“수사님이 어쩌다 뱀파이어까지 된 거야?”
렉스는 잠깐 말이 없었다. 그게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고민하는 중이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 후자인 것 같았다.
“제가 신을 버렸고, 그분도 저를 버렸습니다.”
렉스의 붉은 눈이 그녀를 담았다.
* * *
붉은 눈이었다.
남자가 고개를 숙였기 때문에 다시 확인할 길은 없었지만, 렉스는 생각했다.
‘소문으로만 듣던 백색증인가 보군.’
그냥도 살기 힘든데, 눈에 띄는 특징까지 있다면 더욱 살기 힘든 세상이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말했다.
“더 드시겠습니까?”
다른 부랑자들과 함께 수도원 벽 바깥에 앉아 있는 남자는 눈을 들었다.
뒤집어쓰고 있는 넝마 때문에 한쪽 눈이 얼핏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확실히 붉은색이었다.
“다른 이들이 먹을 것이 없어지지 않습니까.”
그는 목소리로 따지자면 넝마보다 왕의 상징인 자색 망토를 두르고 있는 게 더 어울릴 법했다.
“하면 제 것을 드리죠.”
“‘무엇을 먹을까 걱정하지 말라’#……. 과연 그렇군요.”
부랑자가 성경을 인용하여 잠깐 놀랐다.
‘설교를 열심히 들었나 보군.’
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해 주실 것이다.’# 잘 알고 계시는군요.”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남자는 작게 덧붙였다.
“아직은 견딜 만해서 말입니다.”
다른 이들을 생각해 주는 마음이 갸륵했으므로 렉스는 더 권하지 않고 옆 부랑자에게로 옮겨갔다.
묽은 옥수수죽을 떠주자 옆 부랑자는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조용히 한 모금 떠먹는 남자와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어쩐지 묘한 부랑자군.’
게다가 몸집도 다른 이들에 비해 상당히 큰 것 같았다. 넝마를 뒤집어쓰고 구부정하게 있어서 확실히는 알 수 없어도 말이다.
하지만 기다리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렉스는 배식하는 데 집중했다.
수도원 외벽을 따라 반대편에서 배식하면서 다가온 동료 수사 앤드라스를 중간 지점에서 만났을 때에야 허리를 들었다. 렉스는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소란하군요.”
“‘십자가를 진 자’들이 지나가는 중이라더군요.”
렉스는 앤드라스를 보았다.
“십자를 진 자들이라면 이미 지나가지 않았습니까?”
작년에 열린 공의회에서 교황이 이교도에게 빼앗긴 성스러운 도시 예루살렘의 수복을 촉구했다.
운집한 관중들이 그에 호응해 한목소리로 신의 의지를 천명하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고 한다.
‘이런 시골에서는 주님의 대리인인 교황과 성스러운 피를 상징하는 진홍의 수단을 입은 추기경들, 각 문장을 거느린 주교단이 모두 모인 위대한 회의를 상상해 볼 뿐이지만.’
그 소식이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가자 각지에서 군대가 거병해 예루살렘을 해방하기 위해 출발했다. 그리스도인으로서는 고무될 수밖에 없는 소식이었다.
그런데 대체로 프랑스와 독일에서 출발한 ‘십자를 진 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그들의 왕국을 지나가야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마을은 국경의 베오그라드#로 가는 길목에서 비켜나 있었고, 애초에 군대를 먹일 만한 식량도 없는 벽지였다.
‘하지만 길목 위에 있는 도시나 마을들은 식량을 징발당해, 꽤 홍역을 치렀다지.’
“먼저 지나간 자들은 당나귀를 탄 정체 모를 은자를 따르는 어중이떠중이들이었다더군요.”
앤드라스는 같이 수도원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게다가 제문에서 약탈행위를 벌여 국왕 전하의 기병대에 괴멸됐다더군요. 그건 십자를 진 자들이 아니라 도적 떼와 다름없지 않습니까?”
앤드라스는 주변을 둘러보고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벌집을 쑤셔놓은 듯이 사방이 떠들썩한 시기였다. 각종 소문이 횡행했고, 하룻밤만 지나도 온갖 사건이 일어나 있었다.
“아무튼, 이번에는 제후들이 직접 이끈다나 봐요. 정말 예루살렘을 수복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럼 순례길이 훨씬 편해지겠죠?”
“꿈같은 이야기군요.”
“정말, 예루살렘이라뇨. 그래도 형제님께서는 무리가 아닐까 싶지만.”
앤드라스는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얼굴을 하셔서는 말이죠. 부랑자들이 모두 넋 놓고 형제님을 보던 것 보셨습니까?”
의도는 이해하지만, 외모에 대한 언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렉스는 화제를 바꾸었다.
“마무리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예, 물론이죠.”
어쨌든 수도원의 하루는 해야 할 일들로 빠듯했다. 특히 요즘처럼 ‘십자를 진 자’로서 진군했다가 낙오된 부랑자나 부상자들이 곳곳에서 흘러들어오는 때에는.
렉스는 마당을 청소하고 있는 수사들과 인사를 나누고 회랑을 지나 도르미토리움으로 향했다. 그리고 수도원장의 방으로 찾아갔다.
일반 수사의 방과 별다를 것 없는 방에 원장이 막 침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원장님, 일어나시려고요?”
“일이 많은데 마냥 누워 있을 수는 없지 않겠느냐.”
일평생 순종과 헌신으로만 살아온 성자도 세월은 이길 수 없는 것 같았다. 원장의 노구는 각종 병마에 시달렸다.
그제는 눈이 먼 것처럼 침침했고, 어제는 소화가 잘되지 않았고, 오늘은 바싹 마른 다리의 통증이 가시지 않았다.
“도와드리겠습니다.”
렉스는 원장이 옷 입는 걸 도와주었다.
마지막으로 무릎을 꿇고 신발을 신을 수 있도록 돕는데, 갑자기 원장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렉스는 의문이 담긴 눈을 들었다.
원장은 다정한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잘 자라주었구나.”
“새삼스러운 말씀을 하시는군요.”
그가 수도원 앞에 버려진 갓난아기였던 것도 27년이나 된 이야기였다.
“하필 이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곳에 버려져서 말이다.”
렉스는 가분한 웃음을 지었다.
“수도원 앞에 버려지지 않았다면 제 인생이 이보다 잘 풀렸을까요.”
부모가 누군지 모르고 아마 앞으로도 알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렉스는 개의치 않았다. 이곳이 그의 집이었고, 그의 삶이었다.
대체로 젊은 수사들은 수도원 생활에 숨이 막힌다고 했지만, 렉스로서는 충실하게 반복되는 삶의 시계를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깨달음이 어디서부터 왔는지는 몰랐다. 그래서 그는 마치 자신이 수사가 되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원장은 희미하게 웃었다.
“여전히 야망이 없는 젊은이로구나.”
렉스도 따라 웃었다. 원장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나가보자구나.”
막 회랑을 나서는데 입구 쪽이 소란스러웠다.
“무슨 일이냐?”
원장이 묻자, 웅성거리며 모여 있는 수사들이 비켜섰다. 그 가운데, 다급하게 뛰어 들어온 것 같은 사람들이 땅바닥에 엎드리거나 주저앉아 있었다.
열댓 명 정도로, 중년 남자가 둘, 중년 여성이 둘, 아주 늙은 여인이 하나, 다수의 아이들이 있는 구성을 보니 두 가족인 것 같았다.
개중 팔에 부상을 입은 중년 남자가 떨면서 말했다.
“살려, 살려주십시오…….”
그가 손에 쥐고 있는 고깔모자…….
유대인이었다.
수사들은 부정한 자들이 수도원 내에 들어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기겁하여 성호를 그었다.
“어찌 된 일입니까?”
“저희는…….”
그가 막 말하려는 찰나 다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 창세기 3:24, “에덴 동산의 동쪽에 [...] 빙빙 도는 불칼을 두셔서,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
# 마태복음 6:31
# 마태복음 6:33
# 현재 세르비아의 수도. 당시 비잔틴 제국의 국경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