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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짐승-61화 (61/104)

61화. THE KING (4)

“저는, 이반이 좋아요.”

유리벽 너머 겨울 같은 연하가 사라지고, 봄 전부를 가져다 놓은 것처럼 화사한 연하가 말했다.

“물론 아버지로는 아니지만…… 조금은 아버지처럼도 있고, 있잖아요, 존경심 같은 거. 가끔 어른스러운 오빠 같기도 하고, 의지할 수 있는 상사님 같기도 하고…… 어…… 남자…….”

그 부분에서 연하는 못내 부끄러워하는 얼굴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손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꼼지락거렸다.

“……인 것 같아요.”

묘한 일이었다. 그녀에게 어떤 것도 되어줄 수 없기에 떠났는데, 그를 그 모든 것으로 여긴다니.

“제게 중요한 건 그것뿐이에요.”

연하는 똑바로 그를 보고 말했다. 어두운 술집 안인데도, 그는 어쩐지 눈이 시렸다.

“물론 지금 이반이 유부남이거나 그랬으면 좀 문제가 있겠지만…….”

연하는 이어 웅얼거리면서는 탁자를 보고 엄지손가락으로 문질렀다. 그리고 살짝 눈을 들어 눈치를 보았다.

“지금은, 아니잖아요?”

거의 기원하는 것 같은 눈빛, 긴장감에 붉어진 입술이었다.

“그죠?”

연하가 약간 불안해하며 다시 물어, 이반은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응.”

연하는 안도했다. 사실 그가 유부남이었다고 해도…… 알 수 없었다, 그렇다 해도 포기할 수 있었을지.

왠지 그러지 못했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런 상황이 아니어서 진짜 다행이었다. 여자 몇쯤은 물리칠 수 있었을 것 같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취임식에서 봤던 그 여자가 이반을 좋아하는 듯해서 초조해지기도 했다. 빨리 이 남자를 잡아야 할 것 같은 느낌.

그제야 제가 터진 입으로 뭐라고 지껄였는지 인식되어, 연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그럼 마실까요?”

연하는 이반이 말하기 전에 얼른 맥주잔을 들어 마시기 시작했다.

한 입, 두 입…….

속에 붙은 열을 끄려는 듯이 한 잔을 단숨에 꿀떡꿀떡.

“천천히 마셔.”

너무 급하게 마셔대기에 그가 잔을 잡아 내렸지만, 이미 거의 다 비운 후였다. 그리고 연하는 잔을 들어 올리면서 바텐더에게 말했다.

“한 잔 더 주세요.”

바텐더는 바로 맥주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내린 연하는 움찔했다.

그제야 탁자에 놓인 제 손을, 이반이 아까 잔을 잡아 내릴 때 잡은 그대로 놓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도 놓는 걸 잊어버렸다는 듯이.

연하는 자꾸만 얼굴이 붉어져서 점점, 점점점, 시선을 내렸다. 그럼에도 이반은 의뭉스럽게 손을 놓지 않았다.

그런데 꼼지락거리다가 마침내 그의 엄지손가락을 슬며시 잡는 손이, 그 수줍은 끄덕임 같은 동작이 너무 귀여워서 이반은 돌이 된 줄 알았던 심장이 덜컥했다.

뭔가…… 정말 연애를 하는 기분이었다, 그의 생애 처음으로.

* * *

몸이 떠올랐다. 공기에 안긴 것처럼 안락했다. 어렴풋한 시야에 코트를 입은 남자의 어깨와 턱이 보였다.

바로 누구 것인지 알았지만 몽롱하고 기분이 좋아 연하는 오히려 더 몸을 기대었다.

제법 술이 들어가기에 체질인가 싶었는데, 그렇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특별히 술주정을 부리진 않았지만, 어느 순간 잠들어 버렸다.

역시 뱀파이어가 되어도 알코올 분해 능력은 똑같다는 게 아쉬웠다.

반면 지금 와서야 깨달았지만, 그에게 폭음하는 버릇이 있었다는 건 그만큼 주량이 받쳐 준다는 이야기였으리라.

등에 푹신함이 닿았다. 안아 드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려놓는 것이었나 보다.

이불이 서늘하고 부드러웠다. 왠지 그가 가버릴 것 같아 연하는 생각나는 대로 말을 걸었다.

“아이도 있었어요?”

“하나. 진짜 내 아이는 아니었지만.”

연하는 눈을 떴다. 이반은 아까 차림 그대로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왜인지 기록에는 한 명 더 그의 자식이었다고 남은 모양이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어쨌든 그가 말년에는 예언자들의 말에 좌지우지되었다거나 미신을 맹신했다거나 하는 근거 없는 이야기까지도 멋대로 기록되어있으니까 별로 놀랍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는 밖의 것에 더 관심이 많았고, 거의 집에 있지 않았으니까. 이해는 해. 외로웠겠지.”

연하는 인상을 썼다.

“그런 거 이해하지 말아요.”

이반은 웃었다. 그리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며 말했다.

“이제 모두 땅속에 묻힌 이야기야. 나만 남았지.”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연하는 뒷말을 하기에 앞서 주저하듯 입술을 우물거렸다.

“전 좋아요. 덕분에 이반을 만날 수 있었잖아요.”

밤의 그늘에 잠긴 눈이 어두운 빛을 띠고 있었다. 이반은 한동안 그녀를 보다 얼굴을 감싸 안았다. 피부의 솜털 하나하나가 독립된 감각기관처럼 맞닿는 감각이 예민하게 느껴졌다.

이반이 다가왔다. 연하는 눈을 감았다.

처음에는 아이에게 뽀뽀하듯 가볍게 와 닿았다. 그의 입술은 부드러웠다. 남자의 입술이 이런 느낌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뭉클한 혀가 입술을 벌리고 밀려들었다. 예상보다 깊이.

그가 안에서 움직였다. 젖은 것들이 뒤얽히는 소리가 나 연하는 부끄러웠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상관없을 정도로 기분 좋다는 것이, 더 부끄러웠다.

무얼 해야 좋을지 몰라 이반의 등을 끌어안았다. 손바닥 아래 미끄러지는 단단한 근육의 감촉이 그녀를 더욱 흥분시켰다.

처음 만난 날부터 탐만 내보았던 것이 드디어 제 손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연하는 꿈틀거렸다.

이반은 낮은 숨을 내쉬며 입술을 떼었다. 그리고 입술이 스치는 거리에서, 나중에 생각해도 몸이 전율할 정도로 섹시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가서 토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연하는 퉁기듯 일어나 달려갔다.

쾅, 쿠웅, 쿵, 탁.

이리저리 부딪치는 소리가 나더니 격렬하게 쏟아내는 소리가 따라왔다. 이반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너무 잘 마신다 싶을 때 말릴 것을.’

한동안 조용했다.

코트를 벗어두고 화장실로 가보자, 연하는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닫은 것 같은 변기통 뚜껑을 붙잡고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연하야.”

“네에…….”

연하는 꿈틀거리며 대답했다. 아직 의식은 있는 모양이었다.

허리를 안아서 들어 올리자, 무의식중에 세면대 쪽으로 버둥거렸다.

세면대로 데려다주니 연하는 더듬더듬 수도꼭지를 틀고 입과 얼굴을 씻었다. 그동안 이반은 산발이 돼서 흘러내리는 머리를 잡아주었다.

다 씻은 연하가 다리 힘이 풀리는지 다시 주저앉으려고 하기에, 이반은 그녀의 무릎 아래에 팔을 넣어 안아 올려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내려놓자, 연하는 아직 속이 불편한지 침대에 몸을 비비면서 꿈틀거렸다.

“술이 약하구나.”

“별로 마셔본 적이 없어서…….”

흐릿하게 눈을 뜨고 웅얼거리더니 잠들었다. 혹시 의식을 잃은 게 아닌가 싶었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이반은 한숨을 삼키고 손으로 젖어 있는 얼굴을 닦아냈다.

‘오늘 당장 무언가를 하려는 작정으로 호텔로 간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받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케이크를 받았지만, 오늘은 들고 있기만 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것처럼.

아마 딸기 생크림 케이크.

하얀 얼굴에 붉은 입술이 생크림 위에 장식된 과일 같았다. 얼굴을 닦아주다가 어느새 엄지손가락으로 입술을 쓰다듬고 있다는 걸 깨닫는데, 연하가 인상을 썼다.

“응…….”

그리고 잠결에 혼자 있다고 생각하는지, 더듬더듬 청바지 버클을 풀었다. 꽉 끼는 청바지가 갑갑한 것 같았다.

연하는 엉덩이를 구물거려 바지를 허벅지까지 끌어내리더니 힘이 다했는지 더 끌어내리지 못하고 엎드려 누웠다.

바지를 끌어 내리던 손이 아래 깔리면서 엉덩이만 치켜들고 있는 모양새가 된 것도 모르고.

이반은 난감한 웃음을 삼켰다.

‘이 녀석은 정말 날 웃기려고 작정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이반은 연하의 바지를 벗겨주었다. 그러자 이번엔 목에 밀려 올라간 후드가 덥고 불편한지 끌어내리며 뒤척거렸다. 그래서 후드도 잡아 위로 벗겨내 주었다.

그제야 연하는 모든 걸 이룬 듯이 침대에 폭 파묻혀 잠들었다.

얇은 티셔츠 아래 가슴이 천천히 부풀어 올랐다가 내려갔다. 티셔츠 아래쪽에 배가 조금 보였다.

작은 골반을 감싼 검은 팬티는 부대 지급품인 것 같았다.

‘음, 군용속옷 아래가 궁금해지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하는데, 갑자기 연하가 돌아누우면서 한쪽 다리를 그의 허벅지에 척 걸쳐 놓았다.

이반은 눈썹을 추켜들었다. 누가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이반은 피식 웃고는 몸을 내려놓았다. 의식을 아예 내려놓은 것처럼 달게 자는 아이를 보고 있으려니 그도 서서히 졸려지기 시작했다.

어쨌든 사귀는 사이쯤이 된 것 같으니까 이 정도는 괜찮겠지 싶어, 허리를 안아 당겼다. 그러자 연하는 오히려 그에게 팔을 감으며 거의 휘감기듯이 안겨왔다.

아, 이건 좀─

생각하는데, 연하는 무의식중인 듯 웅얼거렸다.

“따듯해…….”

정말로, 따듯했다.

* * *

“강연하!”

연하는 깜짝 놀라 깨어났다.

“누…….”

침대 옆에, 규하가 학교 갈 시간이 되도록 일어나지 않는 사춘기 딸을 깨우는 엄마처럼 엄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연하는 비몽사몽간에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 그럼 어제는 꿈…….’

아니, 주변을 둘러보니 어제 봤던 호텔 방이 맞았다.

아침에 자신이 펜트하우스에 없자 렉스를 통해서 그들이 묵은 호텔로 찾아온 모양이었다. 바깥쪽에서 기척이 느껴지는 걸 보니 두 남자는 부엌에 있는 것 같았다.

상황을 이해하고 안심한 연하는 다시 돌아누웠다.

“너 왜 여기서 자고 있어?”

규하는 말도 없이 외박한 딸을 대하듯이 따져 물었다.

“잘 수가 없었어…….”

연하는 잠결에 웅얼거렸다. 규하는 연하가 파고드는 이불을 홱 젖혔다.

“부사관 관사에 네 방 있다며? 왜 굳이 여기서 잔…….”

연하는 잠에 취해 알지 못했지만, 규하는 티셔츠에 팬티만 입고 있는 연하를 보고 눈이 튀어나오도록 크게 떴다.

“술 한잔하고…….”

웅얼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엉덩이 쪽에서 속옷 속으로 손이 쑥 들어왔다. 단번에 잠이 달아났다. 연하는 기겁하고 일어났다.

“왜, 왜 이래!”

규하는 피부의 모공이 보일 정도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했어?”

“뭘…….”

아무리 꿈에라도 다시 만나길 그린 제 쌍둥이라지만 이 거리는 몹시 부담스러워서, 연하는 고개를 물렸다.

“했냐고.”

“그러니까 뭘…….”

연하는 뒤늦게 깨닫고 멈칫했다. 그리고 어제 일을 기억해 냈다. 악 소리가 절로 나올 뻔했다.

‘왜 거기서 잠들어 버린 거야?’

규하는 그 반응을 다르게 해석한 모양이었다.

“이 자식, 밤중에 애를 꾀어내서……!”

연하는 정말 이반에게 달려가려는 규하의 팔을 얼른 붙잡았다.

“네가 뭘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 일도 없었어. 그리고 나 열아홉 아니야.”

“아니긴. 몰래 빠져나가서 남자를 만나는 게 꼭 열아홉 살짜리가 할 만한…….”

코웃음까지 치면서 어린애 취급하는 데 조금 울컥했다.

“잠도 못 자게 소리친 게 누군데.”

“내가 언제…….”

규하는 멈칫했다.

“뭐?”

연하는 아차 싶었다.

“아무것도 아니…….”

“지 않아. 뭐야, 당장 말해.”

“아니, 그냥, 그게……. 루아스는 청력이 좋다고 해야 하나…….”

연하는 규하의 박력에 압도당해 어물거렸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규하가 열어놓고 들어온 문을 렉스가 두드리고 있었다.

“아침 식사 하세요.”

규하는 창백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들을 수 있다는 거…… 알고 있었어?”

연하는 조마조마해했고, 렉스는 태연했다.

“예.”

규하는 거의 숨을 멈추는 것 같았다.

“근데 왜…….”

그는 역시 태연하게 대답했다.

“알아서 자리를 비켜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 * *

이반은 식탁에 앉아 메일을 확인하고 있었다. 진지한 눈으로 집중하고 있는데, 갑자기 괴성이 집을 뒤흔들었다.

알아듣지도 못할 화려한 욕설로.

중간중간 들린 말을 겨우 조합해 보면,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나면 죽여 버릴 줄 알아.’ 정도인 것 같았다.

이어서 안쪽 방에서 이어지는 복도를 마구 달려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달려 나온 규하는 시뻘건 얼굴로 있는 힘껏 그를 노려보고-그는 왜?- 가버렸다.

“규…….”

뒤이어 나온 렉스가 부르려고 했지만, 규하는 욕설을 한 번 더 날렸을 뿐이다. 이반으로서도 감탄할 수밖에 없는 레퍼토리로.

이반은 렉스를 보고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평소에 널 데리고 다니지 않는 이유를 이야기해 줄 걸 그랬군.”

평소에는 이도 들어가지 않는 원칙주의자 주제에 이상한 부분에서 상식을 벗어날 때가 있었다.

누구나 천 년 정도 살면 머리 어딘가가 이상해질 수밖에 없는 법인지, 이 녀석을 유심히 지켜본 옛 친우의 말에 의하면─

“이 새끼도 은근히 또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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