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THE KING (2)
“당신들을 그저 증오하는 일은 너무 쉽습니다.”
어느 날 청년 라디프는 말했다.
ISLE 장학재단의 전산문제로 장학금 입금이 늦어지고 있어서 런던 지부를 찾아왔다가 다른 일로 그곳을 찾은 이반 그를 만나 한 카페에서 마주보고 앉았을 때였던가.
“가장 어려운 일은, 당신들, 뱀파이어들의 도움이 필요한 제 나약함을 인정하는 일이죠. 그래도 주저하거나 하진 않을 겁니다.”
그를 바라보는 청년의 검은 눈동자가 빛을 뿜는 것 같았다.
“제 일은 제 힘에 대해 절망하거나 당신들을 미워하거나 하는 소모적인 게 아닌, 하늘의 별을 쫓는 일이니까요.”
별을 따라…….
이반은 고개를 돌렸다.
저 지평선 너머 희미한 은빛으로 빛나는 세계의 끝을 보고 싶은 열망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때가 있었다.
하지만 노을빛이 잦아드는 세계의 끝에는 시커먼 나락만이 그를 반겼다. 마치 평평한 지구가 끝나는 낭떠러지처럼.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소리쳐도 뒤이어 오는 자들은 믿지 않았다. 그만큼 가진 못하더라도 가능한 만큼 가겠다고, 오히려 신발 끈을 고쳐 매는 것이다.
하기야, 그가 뭐라고 그들의 안일한 희망을 꺾겠는가.
“알렉스는?”
[나이트 스토커즈#와 이동 중입니다.]
정신을 집중하자, 귓가에 강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육해공으로 대규모 전투라도 치를 수 있는 병력이 이동하고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알렉스가 말하고, 경고음과 함께 수송기의 램프도어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강하하려는 것 같았다.
동행한 예거들 모두.
이반은 전화로 다시 주의를 돌렸다.
“누누이 이야기하지만, 끝엔 아무것도 없을 거야.”
[이바노프 씨도 그곳이 끝이라고 단정 짓지 마십시오.]
페인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있었다.
[별은 아직 빛나고 있으니까요.]
이반은 고개를 내젓고 철컥,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낙천주의도 그 정도면 오글거려.”
* * *
이반은 고개를 내렸다. 발치에 누운 아이는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이미 그가 제대로 보이지 않으리라.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대공이 웃으며 물었다.
“안 그래도 근처에 있다고 해서 일 끝나고 인사나 하러 갈까 했는데…….”
그는 태연한 체했으나 긴장하고 있었다.
“예거.”
그때 흡혈귀들 중 누군가가 신음처럼 내뱉었다.
“예거다.”
주변에 새까맣게 포진한 검은 제복을 입은 자들이 돌아보았다. 하나같이 붉은 눈들이, 아직 어린 것들이 섞여 있어 갖가지 눈동자 색을 가진 테러리스트들을 담았다.
그 가운데, 사나운 사냥개들의 왕이 일어섰다.
눈부신 금발 아래 붉은 눈이 타올랐다.
“쫓아.”
렉스가 나직하게 말한 순간, 모든 것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제 목숨을 다해 달아나는 테러리스트들, 그리고 사냥감을 쫓는 예거, 마지막으로 렉스가 사라졌다.
훤히 비워진 무대 같은 곳에 남은 흡혈귀는 몇 되지 않았는데, 딱 두 부류였다. 지나친 자신감에 넘치거나, 달아날 타이밍을 놓치고 얼떨결에 남았거나.
그리고 대공, 그리고 은발에 가까운 금발을 가진 흡혈귀뿐이었다.
남은 예거들이 테러리스트들을 빙 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예거 몇은 의식을 잃은 니스타르를 둘러싸 보호하고 있었다.
대공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여간 이것들 때문에 우리 애들 씨가 마른다니까.”
그때 주변에 주춤거리던 흡혈귀들이 시선을 교환하고 외쳤다.
“잡아!”
대공은 깜짝 놀랐다.
“잠……!”
말릴 새도 없이 남은 흡혈귀들이 전부 이반을 덮쳐들었다.
이반은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 한 흡혈귀가 거의 닿는 순간─
이반이 휘두르는 모습도 보지 못한 위스키병이 어느새 한 흡혈귀를 후려쳤다.
엄청난 소리가 났다.
흡혈귀는 그대로 바닥에 뒷머리를 박으며 넘어졌다. 동시에 이반이 술병을 허공에서 돌려 잡는 모습이 그 흡혈귀가 마지막으로 본 것이었다.
굉음, 그리고 정적이 찾아왔다.
이반은 술병의 목을 잡은 채로 술병을 들며 자세를 폈다.
바닥은 거대한 낙석이 떨어진 것처럼 파여 있었다. 그 바로 옆에 쓰러져 있는 흡혈귀는 기절한 것 같았다.
만약 제대로 맞았더라면 어지간한 바위도 깨부수는 흡혈귀 머리통이 바닥에 떨어뜨린 젤리 꼴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에 색 좋은 위스키가 찰랑거리는 술병은 멀쩡했다.
대공은 기가 막혀 중얼거렸다.
“뭐로 만든 술병이야.”
물론 술병은 그냥 술병일 뿐이라고 알았지만 말이다. 타격하는 순간에 귀신같이 충격을 분산시킨 것이다.
대공은 여전히 별다른 표정이 없는 이반을 보았다.
“미안하군. 아직 어린 녀석들이 많아서 차라리 예거를 상대하는 편이 나을 거라는 걸 모르는군. 이해해. 흐샤야르샤의 수장님을 알아보지 못해서 그런 거니까.”
듣도 보도 못한 기술을 보고 얼어붙어있던 흡혈귀들은 놀란 듯이 웅성거리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흐샤야르샤.
그것은 ‘방랑하는 유대인.’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를 모독한 죄로 최후의 날까지 죽지 못하리라는 저주를 받았다고 알려진 불신자.
아주 오랜 고대부터 존재하는 흡혈귀 형제단에 그런 이름이 붙은 게 먼저였는지, 13세기경 번성하기 시작한 방랑 유대인의 전설이 먼저였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흐샤야르샤의 구성원들이 진짜 유대인들인지도 정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불리건 그들은 항상 존재했다. 마치 바위처럼.
“아, ‘전’이라고 해야지.”
대공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만두고 떠나셨으니. 그런데 뜻밖이야. 네가 니스타르를 구하러 뛰어오다니.”
이반은 대답하지 않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이가 숨을 몰아쉬며 흐릿한 눈을 뜨고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이는 피에 젖은 입술을 달싹였다.
“구해, 주세요.”
아이는 본능적으로 그가 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았다.
“구, 해주세요……. 규하…….”
미물의 발악에서는 영웅적인 결기마저 느껴졌지만, 한눈에도 아이는 살 가능성이 없었다. 감염은 어차피 죽을 아이의 고통을 더 연장할 뿐이었다.
그가 여타 흡혈귀에 비해 많은 이들을 감염시킨 건 아니지만, 그나마도 감염을 이겨낸 건 렉스와 필립 단둘이었다.
그것도 육체능력이 절정에 이른 건장한 사내들.
“페인이었겠지.”
대공은 한숨을 내쉬었다.
“널 설득하다니. 하여간 매번 날 엿 먹이는 인간이 하나씩 있단 말이야.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려도 유분수지. 이번에야말로 숨바꼭질이 끝날 줄 알았는데…….”
“하긴.”
이반은 갑자기 말했다.
“너 같은 정신병자도 기회를 얻었는데.”
마음이 바뀌었다. 이 아이라고 기회를 얻지 못하란 법은 없다 싶었다.
이것을 기회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역시 결정하는 사람은 그가 아닌 것이다.
이반은 아이를 안아 들며 바닥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아이를 그대로 무릎 위에 올려놓았는데, 한 줌의 무게도 느껴지지 않았다. 거꾸로 쏟아 안을 텅 비워낸 물병처럼.
아이는 백내장 환자처럼 흐린 눈이 계속 까라지려는 듯 파르르 떨렸다.
“구해…….”
아이는 온 힘을 짜내 중얼거리고 눈을 감았다.
이반은 입을 열었다. 송곳니가 자라는 게 느껴졌다.
“너 설마……?”
대공은 눈을 찡그리고 중얼거렸다.
흡혈은 생각보다 내밀한 것이었다.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고 짐승처럼 피를 빠는 모습을 남에게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흡혈귀들은 많지 않았다.
어쨌든 게걸스럽게 식사하는 모습 자체가 남에게 보이기에 유쾌한 모습은 아니니까.
하지만 이반은 개의치 않았다. 제 손에 다 차지도 않는 아이의 얼굴을 모로 돌리며, 고개를 내렸다.
아이의 몸이 반사적으로 퍼뜩 떨렸다.
주변 공기가 숨을 죽였다. 그때만큼은 대공도 입을 놀리지 않았다.
이반은 입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간만에 마신 피로 온몸이 뜨거웠다. 아이가 아니라, 마치 그가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아이는 이제 핏기 한 점 없었다.
그는 제 손목을 물어 피를 빨아내고 아이에게 입을 맞추었다.
힘없이 벌어진 목구멍 깊이 피를 모두 흘려 넣었다.
두 번, 세 번…….
이반은 입을 떼고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유령보다도 하얗게 질린 얼굴에 핏물이 번진 입가는 그로테스크했다.
“어이, 네 피를 그렇게 아무한테나 퍼줘도 되는 거야?”
대공이 기막혀했다.
“천금을 주고라도 사려는 인간들이 있을 텐데.”
“이런다고.”
이반은 아이를 안고 일어나며 말했다.
“가말이 살아 돌아오진 않아.”
처음으로 녀석에게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말하지 마.”
물론 이반은 말했다.
“네 손으로 죽였잖아, 네 쌍둥이는.”
그가 이 말을 할 때마다 녀석은 곧 울 것 같은 아이처럼 입을 다물었다. 붉은 눈에 반짝이는 물기가 도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반은 그게 눈물이라고 믿지 않았다. 살육자의 안광이라면 몰라도.
“아니, 이번엔 화내지 않을 거야.”
그런데 대공은 평소와 달리 빙긋 웃었다.
“알 수 있거든. 가말은 살아 있다고.”
대공은 제 가슴께를 짚었다.
“내가 그렇다고 느끼니까. 무엇보다 뱀파이어잖아. 분명히 어딘가에 살아 있어. 나머지가 모두 죽었는데도 세상이 멸망하지 않으면 알 수밖에 없잖아.”
살육자의 안광이 번뜩였다.
“가말은 니스타르니까.”
“그게 네가 괜한 니스타르들을 죽이고 다니는 이유라는 거지.”
거기에 새로운 인류로서 세상을 다스리겠다거나, 인간들을 공포로 지배하겠다거나, 심지어는 세상을 멸망시키겠다는 제 나름대로의 야망 같은 건 하등 없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이 있을 따름이었다.
테러리스트의 야망보다도 비대하다는 점에서 더 질이 좋지 않았다.
대공은 어깨를 으쓱였다.
“오히려 내 멋대로 하고 다닌 덕분에 따르겠다는 녀석들이 이만큼이나 됐다는 게 또 아이러니하지?”
제 쌍둥이를 찾아 시공을 헤매고 다니던 녀석은 어느 날 나머지 니스타르들이 모두 죽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 같았다. 가말의 생사라도 알려면.
뱀파이어의 정체가 밝혀지든, 전쟁이 일어나든, 지구가 쑥대밭이 되든지 간에.
그런 무자비한 점을 ‘리더의 덕목’으로 여긴 정신 나간 녀석들이 적잖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 아이.”
대공은 이반이 안고 있는 아이를 가리켰다.
“어차피 감염을 이기지 못하겠지만, 혹시라도 살아난다면 자기 쌍둥이를 만나러 가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대공은 빙긋이 웃었다.
“만약 그런다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쌍둥이를 죽이고 말 거니까. 나도 가말을 삼천 년 동안 만나지 못하고 있는데, 그래야 공평하지. 안 그래?”
그때였다.
은발 흡혈귀가 울부짖으며 열차의 잔해를 집어던졌다.
쿠웅.
바람을 일으키며 날아간 잔해가 뒤로 떨어지며 먼지와 파편의 폭풍을 일으켰다.
그 틈을 타 대공은 사라졌다.
예거들은 잔해를 피해 바로 녀석을 쫓아가고, 나머지는 남은 흡혈귀들과 교전하기 시작했다. 특히 은발 흡혈귀는 작정한 것처럼 날뛰었다.
이반의 뒤로 헬기가 내려앉았다. 사방으로 공기가 밀려났다.
이반은 얼핏 뒤를 보았다.
“연하…….”
그런데 목소리를 들었다.
이반은 목소리를 따라 돌아보았다. 폭풍 같은 바람 속에, 예거에게 안긴 니스타르가 얼핏 눈을 뜨고 그를 보고 있었다.
의식이 제대로 돌아왔는지도 알 수 없을 만큼 가물가물해 보였지만, 애써 입술을 달싹였다.
“살려…….”
헬기 승무원이 소리쳤다. 이반은 천천히 돌아섰다.
그 순간 한날한시에 같은 배에서 태어난 쌍둥이는 다시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다.
* * *
연하는 복잡한 얼굴이었다.
“진짜로 부녀 사이가 성립하는 건 아니죠?”
“아니.”
이반은 단호했다.
“그렇다면 좋겠지만.”
연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주 많은 생각들이 왔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머릿속의 소용돌이가 심해질수록 오히려 역류에 휩쓸려 떠오르는 난파선처럼 한 가지 생각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전 싫어요.”
연하는 그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 특수부대 운송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항공부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