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THE KING (1)
아무도 다니지 않는 밤의 도로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위에서 뛰어내리는 인기척을 느낀 듯 올려다보는 시선에 연하는 놀랐다.
“국장님……?”
그 순간 자세가 흐트러지면서 몸이 뒤집혔다.
“앗!”
이대로라면 얼굴로 착지할 판이라, 건물 외벽에 튀어나온 장식을 붙잡아 멈추었다. 그때 손에서 떨어져 나간 운동화가 제각각 도로로 떨어졌다.
이반은 마침 옆에 떨어진 한 짝을 주워들었다.
“신데렐라의 구두가 하늘에서 떨어진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는데.”
“여기서 뭐 하고 계세요?”
연하는 장식을 붙잡고 매달려 있는 채로 얼떨떨해 물었다. 이반은 웃고는 팔을 벌렸다.
“이리 와.”
연하는 잠깐 그를 보다가 장식을 놓았다. 물처럼 그녀를 안아드는 허공의 품을 지나, 그의 품에 안착했다.
연하는 그를, 이반은 그녀를 보았다.
‘당신이었구나.’
내 몸을 지배하는 힘의 근원.
어쩐지 놀랍지 않았다. 본능은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그녀의 허벅지 아래를 받쳐 안더니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널브러져 있는 나머지 운동화 한 짝도 주웠다.
“제가 주워도 되는데…….”
연하는 머쓱해했다.
“맨발이잖아.”
이반은 계단에 연하를 내려주었다. 그리고 몸을 숙이고, 운동화를 명품 구두인 양 정성스럽게 신겨주었다.
관사에 갔다가 다시 나왔는지, 코트 안쪽은 가벼운 니트와 면바지 차림이었다.
연하는 그가 내미는 손을 잡고 계단에서 내려왔다. 에스코트라는 걸 처음 받아봐서 어색하고 쑥스러웠다.
그래서 화제도 돌릴 겸 물었다.
“언제부터 여기 계셨어요?”
“일단 좀 걸을까?”
이반은 위를 눈짓했다.
“어쨌든 저쪽은 바쁜 것 같으니.”
연하는 조금 놀랐다. 아무리 루아스의 청력이 좋다 해도 여기까지는 들리지 않는데, 청력 반경이 얼마나 되기에…….
아무튼 그건 그렇다 치고.
“그…… 둘 다 성인이니까…… 충분히…….”
이반이 그저 지켜보고 있기에 말려드는 혀와 함께 말이 목구멍 뒤로 넘어갔다.
“아닙니다. 갈까요?”
이반이 피식 웃자, 연하는 안심했다.
“그래.”
연하는 먼저 몸을 돌렸다. 따라가면서 이반은 마지막으로 건물을 보았다.
‘천 년 중에 저 녀석이 가장 쓸모 있는 순간이군.’
그렇게 생각하며.
* * *
어쩐지 분위기가 어색했다.
연하는 눈을 굴렸다. 이반이 먼저 말을 꺼내길 기다렸지만, 그는 말없이 보조를 맞춰 걷고 있을 뿐이었다.
돌아볼 수가 없어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저희.”
연하는 용기 내어 돌아보았다.
“술 한잔할래요?”
길가의 술집이 눈에 띈 김에 충동적으로 제안했다. 원래 술은 거의 마시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거친 남자들과 어울리면서 마셔볼 기회가 적진 않았지만, 언제 호출이 울릴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반은 네온사인이 빛나는 술집을 보았다.
“그래.”
둘은 가게로 들어갔다. 어둑한 내부에 손님은 많지 않았다.
바텐더로 보이는 중년 남성은 연하를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미성년자는…….”
그러다가 뒤따라 들어오는 이반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붉은 눈이 의미하는 바를 아는지 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
“어서 오십시오.”
이반은 연하에게 말했다.
“주문하고 갈게. 앉아 있어.”
“네.”
연하는 벽 쪽 테이블에 앉았다. 벽에 붙은 오래된 사진 같은 것들을 보고 있는데, 이반이 앞에 와 앉았다.
“그러고 보니 국장님이 술 마시는 모습은 본 적 없는 것 같아요.”
“끊었어. 가끔 폭음하는 버릇이 있어서.”
“국장님이요?”
믿기지 않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통제할 줄 아는 사람 같았는데.
그는 마치 매끄러운 금속 표면 같은 느낌이라 거칠고, 제어되지 않고, 폭발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였다.
이반은 조금 웃었다.
“세월은 많은 걸 바꾸니까.”
“어, 그럼 지금…….”
“괜찮아. 가끔이니까.”
직원이 술을 가져다주었다.
연하는 맥주, 이반은 위스키였다. 연하는 차가운 잔에 서리가 끼어 시원하니 맛있을 것 같은 맥주를 마셔보았다.
생각보다 괜찮았다. 한 모금 더 마시는데, 이반이 가만히 보고 있었다. 연하는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자리도 갖춰졌겠다, 더 에두를 것 없이 물었다.
“절 뱀파이어로 만든 게 국장님이었어요?”
이반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맞아.”
“왜요?”
왜라…….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지 너무 많은 생각이 밀려와, 이반은 한동안 연하를 가만히 보았다.
연하는 그의 대답을 두려워하지 않는 눈이었다.
“원래는 그럴 생각이 없었어.”
마침내 그는 말했다.
“그냥 널 죽게 내버려 둘 생각이었지.”
* * *
‘세계의 멸망이라.’
그런 게 온다 하더라도, 이반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 슬슬 모든 걸 끝내고 싶은 참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불평할 수 없을 만큼 오래 살았고.’
다만 스스로 뭔가를 하는 것도 귀찮았다.
사실 할 필요도 없었다. 알아서 파멸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세상이었으니까. 전쟁이니, 평화니, 아무것도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남는 건 잿더미뿐이었으니.
모든 건 찰나의 영욕, 그 덧없음조차 덧없었다.
‘하긴, 요즘엔 세상이 한 번 멸망하고 나서야 흡혈귀들이 진정한 신인류로서 인류 대신 지구를 지배할 거라고 외치는 녀석들도 있는 것 같았지.’
따라서 멸망은 당연히 와야 할 수순이라고.
‘뭐, 잘해보라지.’
이반은 달을 보던 시선을 내렸다.
큰 문제는 아니지만 잠깐, 같이 지내던 노숙자들이 마음에 걸렸다.
“세상이 멸망하면 어떨 것 같습니까?”
옆에 둘러앉아 술 한 병을 여럿이 나눠 마시고 있는 노숙자 무리가 그를 보았다. 이 친구 또 헛소리한다는 듯.
그중 한 노숙자가 껄껄 웃었다.
“그거 좋구먼. 차라리 싹 다 죽어버리면 속 시원하겠네. 어지간히 시끄러운 세상이라야지. 뭐, 술을 더 못 마시는 건 좀 원통하겠지만.”
“술은 마실 만큼 마시지 않았습니까?”
“예끼, 마실 만큼 마셔본 술이란 게 있겠나?”
하기야, 저치들도 살 만큼 살았으니 억울할 일은 없겠다 싶었다. 이반은 일어났다.
“어디 가나?”
“산책 갑니다.”
“조심하게. 요즘 이 주변 유난히 흉흉하거든. 여럿 당했어.”
이반은 희미하게 웃었다.
“다시는 그러지 못할 겁니다.”
묘한 미소에 홀려서 멀어지는 모습을 보다가 한 노숙자가 중얼거렸다.
“묘한 친구야.”
“인간이 아니니까.”
노숙자들은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한 몸처럼 돌아보았다.
백발이 성성한 한 노인이 구부정하게 앉아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자르지 않은 듯 덥수룩한 머리카락과 여러 겹으로 껴입은 지저분한 차림은 다른 노숙자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뭔 소리야? 인간이 아니면 뭐라는…….”
한 노숙자는 말하다가 뭔가 깨달은 듯 움찔했다.
“설마?”
노인은 그들을 쳐다보지 않고 술을 홀짝였다.
“저 친구랑 같이 지낸 지 얼마나 됐는데. 조금이라도 나이를 먹었던가?”
그러고 보니…….
노숙자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럼 내가 여태까지 흡혈귀 옆에서 먹고 자고 했다고?”
“자네를 먹으려면 이미 먹었겠지. 그런 냄새 나는 몸뚱이, 십 년을 굶주렸다고 한들 먹고 싶겠어? 나라면 백 년을 굶어도 사양이야.”
“그럼 우리 몰래 누구를 습격해서 먹고 온 거 아냐?”
한 노숙자가 의심스럽다는 듯 말하자, 노인은 바로 뭐 씹은 표정이 되더니 종이컵을 바닥에 내던졌다.
“거 진짜 무식해서 같이 술 못 먹겠네. 무식 옮아! 꺼져! 요즘 흡혈귀들은 피가 아니라 꽃의 수액을 마신다는 것도 몰라?”
다른 노숙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그게 흡혈귀야?”
“그래서 아니라잖아. 뭐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던데. 아무튼 피든 수액이든 저 친구는 한동안 먹은 일이 없을걸.”
“그걸 자네가 어찌 알아?”
노인은 내던진 종이컵을 다시 집어 들고 술을 따랐다.
“항상 굶주린 눈을 하고 있으니까. 피인지, 아니면 또 다른 뭔지, 어찌 그리 굶주린 눈을 하는지……. 세상의 멸망?”
노인은 코웃음 쳤다.
“내 보기엔 그런 일이 일어나면 가장 아쉬운 사람은 저 친구일걸.”
굶주린 눈이라…….
‘그런 걸 했던가.’
이반은 생각했다.
쳐다보고 있는 앞에 위스키 병 하나가 서 있었다.
먼지 쌓인 선반에 주변 물건들은 원래 형체가 불분명할 정도로 깨지거나 부서져 있는 와중에 유일하게 멀쩡한 병이었다.
거기에 그의 얼굴이 비쳤다.
구멍 난 후드 모자를 깊이 눌러쓴 아래로 수염이 무성했다. 이 상태로는 젊은 남자인지 나이든 남자인지, 오랫동안 아무것도 마시지 않아 수척해진 얼굴도 알 수 없었다.
이반은 병을 집어 들었다.
깨진 유리창 너머로 불어든 먼지가 화산재처럼 쌓여 있어, 불이 나간 어스름한 편의점은 마치 아포칼립스 이후 세계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먼지와 흩어진 물건들로 어지러운 카운터에 지폐 한 장을 올려놓고, 주유소에 딸린 편의점을 나왔다.
따르릉.
그런데 갑자기 옆에 붙어 있는 공중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이반은 전화를 쳐다보았다.
한참.
따르릉. 따르릉.
벨소리는 끊어지지 않았다. 결국 이반은 다가가 수화기를 들었다.
[고작 열아홉 살입니다.]
상대는 대뜸 말했다. 이반은 한숨을 삼켰다.
“페인. 멋대로 위치추적 하지 말라고 했잖아. 스토킹으로 신고할 수도 있어.”
물론 그런 게 무서웠다면 애초에 그를 상대로 이렇게 끈질기게 굴지도 않았겠지만 말이다.
페인은 웃지도 않고 말했다.
[부탁드립니다. 신이 멋대로 부여한 사명 때문에 죽임을 당하기에는 너무나 어린 나이가 아닙니까?]
“MCTC는 노나? 기껏 만들어놓고…….”
[아시지 않습니까. 인력이 부족합니다. 특히 이번 친구는…… 대공이 나섰습니다.]
이반은 잠깐 말이 없었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진지하게 대해줘야 할 것 같았다.
그는 귀찮았다. 이 모든 일들, 죽고 죽이고, 욕망하고 갈구하는 인생사가 전부.
할 수만 있다면 바위나 자갈 같은 것이 되어 닳아 없어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만큼 살아보면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어려서 살해당한 니스타르도 있어. 왜 이 하나는 달라야 하지? 신이 멋대로 부여한 사명 따위 빨리 끝내는 편이 오히려 축복일 텐데.”
[그걸 결정하는 쪽은 당신이 아닙니다. 아무리 당신이어도 말이죠.]
부탁하는 쪽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였다.
처음 만났을 때 페인은 어린 소년이었다. 폐허가 된 이라크 모술의 한 거리……. 조금은 겁에 질린 것 같은, 유난히 맑은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동행한 ISLE의 조사단에 의해 서방세계로 건너온 소년은 영국의 한 명문가에 입양되었다.
그리고 환경이 변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두각을 나타내어 이튼칼리지, 육사 샌드허스트를 거쳐 엘리트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은사의 딸과 결혼해 슬하에 두 자녀까지 두고 누구도 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 그때만 해도 페인이 가슴 속에 어떤 불꽃을 품고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럼 내가 도와야 할 이유는 더욱 없군, 난 세상이 멸망해도 특별히 상관없거든.”
그가 이번에도 전화를 끊으려고 하자, 페인은 조금 다급해져 말했다.
[이바노프 씨. 당신이 세상에 많이 실망하신 것 압니다.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도 기회를 달라고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역시, 내 일은 아냐.”
[하지만……!]
“라디프.”
오랜만에 이름으로 부르자, 페인은 멈칫하는 것 같았다.
“자네는 어차피 오래 살지 못하잖아.”
페인은 말이 없었다. 허를 찔린 듯.
[어떻게…….]
저도 모르게 묻다가 의미 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했는지 말을 멈추었다.
그가 인류를 위해 일하는 동안 피난 갈 타이밍을 놓친 아내와 두 자녀는 재앙 가운데서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췌장암은 아직 치료제가 없었다.
그에게 이 세계는 더 이상 아무 의미도 없었다.
[어떻게 제 불행이 남들에게도 불행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페인은 탄식처럼 내뱉었다. 목소리에 물기가 일렁였다. 그는 거의 고통을 느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발버둥 치는 걸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제 쌍둥이가 절 위해 그랬듯이.]
IS가 점령한 도시 모술에 숨어든 흡혈귀들은 그의 쌍둥이 형제, 니스타르 소년을 납치해 석상에 못 박아 죽였다.
마치 니스타르를 세상에 내린 신을 조롱하듯.
소년 라디프는 그의 쌍둥이가 끝까지 난동을 부린 끝에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달려오기 시작해서 목숨을 구했다.
그건 자신의 쌍둥이가 오로지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한 일─ 라디프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이번에는 자신이 니스타르를 지키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