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 짐승-57화 (57/104)

57화. OUTBURST (8)

타악.

규하가 엄청난 파워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연하는 깜짝 놀랐다.

“부서졌…….”

“그러니까.”

규하는 한 자, 한 자 끊어 내뱉었다.

“왜 멀쩡한 집이 있는 애가 집에 못 가는 거냐고요?”

이반은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팔걸이에 양 팔꿈치를 대고 손을 맞잡고 있었다. 역시 정장 화보 같았다.

“두 분의 나이로 봤을 때도 이미 독립했을 시기는 지난 것 같습니다만.”

“하지만 얜 독립한 게 아니잖아요. 지척에 있는 집에도 못 가게 감금당해 있었다고요, 감. 금!”

“강 상사는 인신과 재산의 자유를 포함해서 모든 기본권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모든 루아스는 MCTC에 귀속됩니다. 그게 법이죠.”

규하는 뭔가를 깨달은 얼굴이 되었다.

“그럼 연하가 군인이라고요?”

“뛰어난 인재죠.”

연하는 그것도 칭찬이라고 부끄러워했다. 규하는 기가 막혔다.

“그러니까 그때 넌 잠깐 깼다고?”

연하는 분위기를 풀어보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규하는 한숨을 내쉬고 찻잔을 들다가 부서졌다는 걸 깨닫고 다시 내려놓았다.

“그래.”

“그때 국장님을 본 거고?”

그러니까 자신이 죽고 규하는 의식을 잃었다가 어렴풋이 깼는데, 그때 이반을 봤다고 했다.

그사이에 렉스는 달아난 테러리스트들을 추격하기 위해 자리를 뜬 후라서 보지 못한 것이었다.

규하는 이반을 훑었다.

“알아본 내가 기특할 정도로 다른 모습이긴 했지만.”

이반은 별 반응이 없었고, 연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모습?’

수염을 말하는 건가 싶었다. 기억이 나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그때 국장은 수염을 기른 상태였던 것 같으니 말이다.

규하는 다시 말했다.

“그럼 왜 제게 모든 걸 숨겼던 거죠? 연하가 살아 있다는 사실까지도 말이에요.”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싶어 연하는 긴장했다. 이반이 입을 여는 모습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지켜보았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연하는 눈을 깜빡이고, 규하는 무섭도록 인상을 썼다.

“뭐라고요?”

이반은 태연했다.

“기밀이란 그런 겁니다. 강 상사에게 물어도 소용없을 겁니다. 입대할 때 거액의 배상금이 걸린 비밀 엄수 계약서에 사인했으니까요.”

연하는 허공을 보며 생각했다.

‘입대할 때 사인했던 수많은 서류 중에 그런 걸 본 것 같기도 하네.’

떨어져 산 세월에도 불구하고 귀신같이 그 표정의 의미를 읽은 규하는 이반을 노려보았다.

“제가 이 모든 이야기를 기사화한다고 해도 말이죠.”

“그러지 않으실 겁니다.”

규하는 눈썹을 추켜들었다.

“너무 확신하시는데요.”

“강 상사가 곤란해지는 일은 하지 않으실 테니까요.”

규하는 흉포한 눈으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말을 내뱉었다.

“그때는 당신이 신 같은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정확하게 나라의 높은 분이군요. 국민의 알 권리 따위는 아주 뭣같이 생각한다는 점에서.”

“규하야.”

연하가 규하의 팔을 잡으며 말렸지만, 이반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이렇게 정리해 드리죠. 강 상사는 사고로 루아스가 되었고, MCTC에 입대했습니다. 하지만 임무에 관련되어 아무에게도 생존 사실을 알릴 수 없었습니다.”

이반은 계속 말했다.

“영원히 그 상태가 지속되지는 않았겠지만,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강 상사가 그런 선택에 동의했을 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그때 연하는 고작 열아홉 살이었어요.”

“선생님께서 가장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 나이대의 아이들이 인생의 무게가 걸린 선택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

규하가 한참 말이 없자 이반은 일어났다.

“오늘은 이곳에 머물러 주시기 바랍니다. 경호 문제가 있어서 말이죠.”

이반은 소파를 돌아나갔다. 연하는 규하의 눈치를 보면서 일어나, 문 앞에서 렉스가 건네준 코트를 걸치고 있는 이반에게 다가갔다.

“국장님…….”

“나중에 이야기하자. 오늘 밤은 서로 할 말이 많을 테니까.”

이반은 규하를 눈짓했다. 규하는 둘을 탐탁하지 않은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렉스와 눈이 마주치자, 인상을 쓰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렉스는 한숨을 삼켰다. 하지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보였다. 저 성격에 변명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을 테니.

‘할 수 있는 변명도 없지만.’

“그럼 오늘 부대로 돌아가지 않아도…….”

이반은 연하에게로 고개를 기울였다. 규하에게 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겠지만, 연하는 움찔 고개를 물렸다.

‘헉. 너무 티 나게 피했나.’

이반도 그녀가 피했다는 걸 깨달았다고 알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말했다.

“어쨌든 네 가장 중요한 임무는 여기 있으니까.”

렉스에 이어서 그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두 남자는 닫히는 문 너머로 사라졌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소리를 듣고 연하는 소파로 돌아왔다.

“너 혹시…….”

그런데 규하는 의심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저 국장인지 뭔지 하는 남자가 널 흡, 아니, 루아스로 만들었잖아. 그럼 뭐 아버지 같은 거 아냐?”

불현듯 무언가 깨달은 연하는 입가에 손을 대고 중얼거렸다.

“그럼 계속 아버지, 아버지 하던 게…….”

“뭐라고?”

연하는 규하를 보고 생각보다 강한 어조로 말했다.

“절대 아냐. 루아스 사이에 부모, 자식이 어디 있어?”

그건 아무래도 좋았는지 규하는 손을 내저었다.

“너도 비밀 엄수 따위 소리를 할 거야?”

“미안해. 그건…… 어쩔 수 없어.”

규하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리고 입가를 가리고 있다가, 연하를 보았다.

연하는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규하는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

머뭇거리며 다가가자, 규하는 연하를 안았다.

“보고 싶었어.”

규하는 한숨 같이 내쉬며 더 깊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네가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도저히 그렇게 믿을 수가 없었어.”

주저하던 연하도 결국 규하에게 팔을 둘렀다. 어른이 된 규하는 좀 더 볼륨감이 있고 뼈대가 굵어진 느낌이었지만 팔이 기억하고 있는 느낌 그대로였다.

“미안해.”

할 수 있는 말이 그것밖에 없었다.

적어도 자신은 멀리서나마 지켜볼 수 있었지만, 규하는 그 지옥에서 자신만 살아나왔다는 죄책감에 하루하루를 애끓는 심정으로 살았을 것이다.

웃으며 살 수도, 따라 죽을 수도 없이.

“뭐가 미안해?”

규하는 연하를 조금 밀어냈다.

“그냥, 전부.”

“아무것도 미안해하지 마.”

규하는 다시 연하를 안았다.

“살아 있어줘서 고마워.”

연하는 꾹 눈을 감았다.

규하와 만나게 되는 순간에 대해 여러 번 공상했다. 어쩌면 규하가 평범한 삶을 살다가 늙어 죽기 전에 인사 정도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마음과는 반대로, 조금은 자신을 꺼려 하거나 무서워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여전히 그녀이듯이, 규하도 그대로 규하였다.

규하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난 듯 다시 연하를 조금 떼어냈다.

“분명히 네 시신을 봤는데, 그건 어떻게 된 거야?”

“어, 그건 위조였을 거야. 그런 거 잘 만들거든. 기술이 너무 좋아서 나도 가끔 놀라. 아예 내 몸을 스캔해서…….”

규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여태까지 자신이 봐온 걸 어디서부터 의심해야 할지 생각하듯. 연하는 입을 다물고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다 생각나 말했다.

“참, 그날 어떻게 된 건지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줘.”

시간상 간략한 이야기를 들었을 뿐으로, 아직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했다.

규하는 한숨을 내쉬고 소파에 앉았다. 연하도 옆에 앉았다.

“그러니까…….”

* * *

규하는 눈을 떴다. 잠이 오지 않았다.

연하는 잠들어 있었다. 살짝 정줄을 놓고 자는 모습까지 어쩌면 이렇게 변한 게 없는지…….

사실 자신도 아직 열아홉 살인 건 아닌지 거울을 돌아봤다.

‘물론 그럴 린 없겠지만.’

규하는 잠든 연하를 계속 쳐다보았다. 그러다 볼을 살며시 만져 보았다.

부드럽고, 따듯했다.

이제야 연하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가슴에 무게를 가지고 내려앉기 시작했다.

몰랐다, 뱀파이어도 인간처럼 피부에 온기가 있을 줄은.

그러고 보면 렉스는 델 것 같이 뜨거웠는데…….

규하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창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연하를 보았다. 위로 손을 흔들어보아도 조용했다.

규하는 살며시 일어나 방을 나왔다. 그리고 거실을 가로질러 복도 끝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방은 깔끔했다. 팽팽한 침대 시트에 파르스름한 긴장감이 흘렀다. 밝은 달빛에 빛은 따로 필요하지 않았다.

규하는 양쪽으로 열리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시원한 밤바람이 쏟아졌다.

규하는 다시 몇 걸음 물러나서 말했다.

“거기 있지?”

잠깐은 밤바람 외에는 아무도 듣는 이가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밤바람보다도 가벼운 몸짓으로, 검은 그림자가 위층에서 창가로 내려섰다.

차가운 달빛 아래 붉은 눈동자가 불길했다. 마치 달 밝은 밤 처녀의 피를 마시기 위해 숨어든 드라큘라 백작처럼─

방으로 들어온 그가 다가왔다.

두 사람은 서로의 열기가 느껴질 정도로 가까워졌다.

달빛을 등진 남자가 아름다웠다. 이만큼 아름다운 것에는 악마적이거나 주술적인 힘이 있을 거라고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왜 옛날 사람들이 너무 아름다운 여자를 마녀라고 생각했는지 알 것 같네.’

규하는 손을 뻗었다. 매끈한 대리석 같은 볼이 따듯했다.

남자는 오랜 시간 눈보라 속을 헤매다가 겨우 따듯한 오두막에 들어온 사람 같았다. 색이 짙어지는 붉은 눈에서 실제로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렉스가 내려왔다. 규하는 그를 맞이했다.

규하는 몸이 뒤로 넘어갔다. 잠깐 무중력상태를 경험하듯이 몸이 허공에 떴다가, 천천히 침대에 내려앉았다. 침대에 흐르던 긴장감이 깨어졌다.

규하는 기분 좋은 무게감을 느끼며 입속으로 파고드는 열감을 받아들였다. 마치 이 순간을 위해 여자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규하는 자세를 바꾸어 그의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허리를 쓰다듬으며 가슴으로 다가오는 손을 잡아 눌렀다.

“가만히 있어.”

규하는 렉스의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푸르기 시작했다. 그는 타오르는 눈으로 지켜보았다.

셔츠 사이로 드러난 가슴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그러고 보니 한 번도 몸을 볼 기회가 없었는데…….

“그 촌스러운 남방 안에 꽤 볼만한 걸 숨겨놨었구나.”

가슴에 입술이 닿자, 그가 나직한 숨을 내쉬었다.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아니. 지금 넌 일종의 장난감 같은 거라고 할 수 있지.”

“마음에 드는군요. 강규하의 장난감.”

이런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던 듯, 규하는 눈을 굴렸다.

“너도 정상은 아냐.”

하지만 대답할 새도 없었다. 그녀가 더 고개를 내려, 렉스는 움찔했다.

입술을 깨물었다가, 낮은 숨과 함께 토해냈다.

“규하…….”

입술을 깨물며 버티려고 애썼으나, 머릿속 어딘가가 무너지는 것 같았다.

렉스는 당장 그녀를 잡아 올렸다.

침대가 삐걱거리며 울었다. 규하는 헐떡임 사이로 겨우 말했다.

“어디서 장난감이 멋대로…….”

렉스는 규하가 신음을 참기 위해 깨물고 있는 입술을 핥았다.

“결국 당신 즐겁게 해드리는 게 본분이니까요.”

“너…….”

어쩐지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괘씸해 입을 열었지만, 역시 말 대신 신음밖에 터져 나오지 않았다.

* * *

연하는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얼어 있었다.

‘소장님, 알고 있는 거 맞지? 내가 들을 수 있는 거?’

잠깐 잠들긴 했지만, 규하가 볼에 손을 댔을 때 깨어났다. 하지만 곧 깨어날 꿈인 듯이 자신을 보는 시선이 안타까워 일어난 티를 낼 수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정말 자신이 깨어 있는지 살피는 눈치여서 뭐 하려고 이러나 싶어 가만히 있어 봤다. 그러자 다른 방으로 가더니…….

렉스……. 읏, 렉스…….

갑자기 신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누가 들어도 마사지를 받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신음이.

연하는 벌떡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벗어나야 해.

이곳을 벗어나야 돼!

침대를 뛰쳐나와 단번에 옷을 꿰입었다. 그리고 창가로 달려가다가 신발이 없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그래서 방문을 열고 영혼 깊숙이 새겨져 있는 포복 전진으로 기어갔다.

마침 현관에서 운동화를 집어 드는데, 내내 억눌려 들려오던 소리가 폭발하듯이 커졌다.

렉스……!

연하는 루아스가 된 이래 그렇게 빨랐던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덜컹.

신발을 찾은 순간 문으로 나가는 건 포기하고 당장 창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그런데 아무도 다니지 않는 밤의 도로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