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OUTBURST (7)
규하는 갑자기 차 문을 열고 내렸다. 택시 기사를 달래던 승용차 운전자가 놀라 돌아보았다. 규하는 성큼성큼 도로로 나섰다.
“잠깐……!”
승용차 운전자는 앞으로 차가 지나가 따라오지 못하고 외쳤다.
빠아앙.
차들이 놀라서 경적을 울리며 지나갔다.
규하는 멈췄다.
차선 한가운데에, 일부러 제동거리가 짧은 트럭이 거의 다 다가온 자리에.
빠아아아앙.
트럭이 귀가 터질 듯한 경적을 울렸다. 실제로 트럭이 공기를 밀어내는 압력이 느껴졌다. 하지만 규하는 움직이지 않았다.
쿠웅, 콰아아앙.
굉음이 사방을 뒤흔들었다.
트럭은 절대 밀리지 않는 물질에 들이받은 듯이 딱 그만큼의 질량만 제외하고 앞으로 휘어 있었다. 그리고 다섯 걸음 떨어진 자리에, 규하는 그대로 서 있었다.
난데없이 솟아난 바위 덩어리처럼 트럭을 막아선 사람은 검은 마스크를 쓴 여자였다. 어제와 달리 후드에 청바지, 운동화 차림이었다.
여자는 규하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울컥한 듯 손을 들었다.
사방에서 달음박질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눈 깜짝할 새에 각 방향에서 나타난 네 사람이 여자를 휘어 감았다. 규하를 향해 날아오는 손을 막으려는 듯이.
하지만 장정 넷이 막고도 힘에 부치는지 앞으로 한 번 크게 쏠려 나왔다.
“미친, 너한테 맞으면 교통사고랑 다름없다고.”
뒤에서 힘겹게 여자의 팔을 붙잡은, 언젠가 편의점 앞에서 본 적 있는 혼혈 남자가 말했다.
규하는 여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다가섰다. 나머지 네 사람은 무언가에 압도된 것처럼 물러났다.
규하가 손을 뻗자 여자는 움찔했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네 사람은 안절부절못하면서도 어쩌지 못했다.
마스크를 벗겼다.
규하의 표정이 울 듯이 무너졌다.
세월의 흐름을 되돌린 거울을 보는 것처럼, 열아홉 그날에서 단 하루도 더 나이를 먹지 않은 자신의 얼굴이 입술을 깨물며 울음을 참고 있었다.
“신이…….”
규하는 목이 메어 말을 잘할 수가 없었다.
“신이 있을 줄 알았어.”
시계가 돌기 시작했다. 그날─ 그녀의 반쪽을 잃어버린 순간 멈춰버린 영혼의 시계가.
오랜 잠에서 깨어나 두텁게 쌓인 먼지를 털어내며…….
“널 죽게 내버려 뒀을 리가 없으니까.”
규하는 연하를 끌어안았다. 연하는 숨을 몰아쉬고, 눈을 감았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주 많은 말이 안에서 맴돌았지만, 어떤 것도 충분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규하를 안았다.
한 덩이 같은 그들을 바라보는 모두의 눈빛이 안타까웠다.
* * *
규하는 눈물을 삼키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연하의 팔을 끌어당겼다.
“집에 가자.”
연하는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집?”
“그래, 우리 집.”
“어, 하지만…….”
연하는 무어라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도움을 구하듯 네 대원을 둘러보았다. 넷은 모두 꿀 먹은 벙어리였다.
그 뒤에 택시 운전사는 영문을 몰라 하고 있었고, 트럭 운전사는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내다보고 있었다. 그는 많이 놀랐을 뿐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규하는 네 대원에게 삿대질하며 이를 갈았다.
“MCTC? 당신들 다 고소해 버릴 거야! 사람을 12년이나 집에 못 가게 감금해 놔? 이거 지구촌 뉴스감이라고!”
대원들은 당황하여 서로를 보고, 연하는 어물거렸다.
“아니, 딱히 감금당하진…….”
규하는 눈에 불을 켜고 돌아보았다. 연하는 움찔했다.
“너도 너야. 강연하 이 천치쪼다 같으니! 뭐라고 하면서 잡아뒀는지는 모르겠지만, 12년이야, 12년! 머리를 좀 굴려볼 만한 시간은 되지 않아?”
연하는 울컥했다.
“네가 몰라서 그래.”
규하는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착하고 공부밖에 모르던 어린 딸이 처음으로 반항하는 걸 본 부모처럼.
“당신들 대체 애를 어떻게 키운 거야? 당장 책임자 나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모두가 놀라 돌아보았다. 말한 것은 승용차 운전자였다.
“네? 하지만…….”
나머지 세 남자는 모르는 기색이었다.
그때 검은 리무진이 옆에 와 섰다. 그러자 아까와는 표정부터 다른 승용차 운전자가 문을 열어주었다.
“모시겠습니다.”
“이건 국장님 차…….”
연하는 반사적으로 말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운전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규하는 눈썹을 추켜들었다. 운전자를 제외하고 연하를 포함한 넷이 그녀를 조마조마하게 지켜보았다.
‘오라 마라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국장 정도 되는 책임자라면 이야기해 볼 만하겠지.’
규하는 차에 올랐다. 이어서 연하, 편의점 앞 혼혈 남자, 승용차 운전자 순서로 탔다. 나머지 두 대원은 운전자가 현장을 정리하라고 남겨두었다.
막 출발하는 리무진의 후면창 너머, 한 중사가 택시 운전사에게 명함을 건네는 모습이 비쳤다.
연하가 차가 가는 방향을 보다가 물었다.
“청사로 가는 거 아니에요?”
“보안 때문에 다른 곳으로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운전자가 대답했다. 그를 유심히 보던 규하가 말했다.
“당신, 본 적 있어요. 어디서라고 딱 짚을 순 없지만……. 당신들, 대체 뭐죠?”
“만나러 가는 분께서 설명해 드릴 겁니다.”
운전자는 모 침대 광고마냥 흔들리지 않는 차분함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규하는 옆자리에 앉은 연하를 훑었다. 시선이 닿자 연하는 손을 꼼지락거리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이 녀석이 이런 꼴을 하고 있는 것까지 말이죠.”
“이런 꼴이 어떤 꼴입니까?”
맞은편에 앉은 혼혈 남자가 물었다. 규하가 쳐다보자, 연하는 또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도영을 가리켰다.
“아, 얜 우리 팀 소령님이야.”
무슨 개족보식 소개법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규하는 도영을 위아래로 훑었다.
“맞죠? 그때 그 편의점 앞에.”
도영은 대답하지 않았고, 규하는 힘 있게 그를 보다가 관자놀이를 짚었다.
“이건 뭐 트루먼 쇼도 아니고.”
도영은 연하를 돌아보고 물었다.
“뭔 쇼?”
“옛날 영화야. 규하, 옛날 영화 좋아하니까.”
“아, 그랬지.”
규하가 심각한 눈으로 보자 두 사람은 슬그머니 말을 멈추었다. 꼭 선생님 앞에 죄지은 학생들처럼.
* * *
연하는 규하와 단둘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고민했다. 국장이 어떻게 설명할 셈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슨 생각해?”
규하가 그런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는지 물었다.
“아니…….”
“열아홉인 거지? 네 얼굴.”
연하는 조금 고개를 끄덕였다. 규하는 무언가 생각에 잠기는 것 같았다.
그때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문이 열리고, 렉스가 서 있었다.
사복 차림인 그는 웬일로 사이즈가 맞는 셔츠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여자라면 눈이 밝아질 만한 모습이었지만, 규하는 있는 힘껏 그를 노려보았다.
“역시 어제 일부러 날 막은 거였구나.”
“소장님은…….”
연하가 당황하며 말하려고 하자, 렉스는 됐다는 듯 손을 들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규하가 본인의 장점으로 꼽는 점이 있다면 우선순위를 가릴 줄 안다는 것이었다. 물론 어제처럼 예외일 때도 있지만.
렉스를 따라, 살면서 들어와 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펜트하우스로 발을 디뎠다. 거실의 창가에 한 남자가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그가 돌아보았다.
이런 상황에도 연하는 이반을 보자 부끄럽고, 어색하고, 두근거리고, 달아나고 싶기도 한, 온갖 반응이 올라왔다.
어제 그의 효과는 엄청났었다.
규하에 대한 걱정, 이 상황에 대한 슬픔, 때로는 누굴 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화 같은 게 올라오다가도, 차 안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르면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다른 건 생각하지 마.”
그가 말한 대로.
밤새 디테일 하나까지 재생되고 또 재생되었다.
팔목을 잡은 강한 손,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낸 붉은 눈, 그녀를 집어삼킬 것 같은 남자의 몸, 달아오른 입술…….
이반은 연하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의 손목밴드가 시끄럽게 울릴 때까지.
그때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그들은 비상상황 가운데 있었다.
많은 민간인들이 다쳤으며, 달아난 테러범들에 대한 추적은 계속되고 있었다. 제로팀들은 대기조들까지 전부 최고 경계 단계였다.
차는 마침 작전본부가 있는 부지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반은 그제야 그녀를 놓아주었다. 한동안 그녀를 응시했다. 연하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차창 너머에서 활주로등이 빛을 뿜고, 이 대위를 포함해 작전본부의 사람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이반은 그녀를 놓고, 몸을 돌렸다. 그가 차에서 내리는 동작을 따라 코트가 흩어져 내렸다.
사람들은 그를 만나자마자 앞다퉈 상황을 보고 하기 시작했다. 차창 너머 그를 위시한 사람들이 멀어져갔다.
“상사님? 괜찮으십니까?”
뒤에서 바람과 함께 목소리가 들렸을 때에야, 그녀 쪽 차 문도 열려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제야 연하도 정신을 차리고 차에서 내렸다.
대강 일이 정리되고 겨우 쪽잠을 자기 위해 누웠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정말 머리 아프게 고민해 봤지만 그 키스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이성 간의 의미가 있는 건지, 단순히 규하에 대해 잊게 해주려는 대안, 혹은 위로의 의미인지…….
그러고서 그를 만나는 게 처음이었다.
‘하지만 일단.’
순식간에 이 긴 생각을 다한 연하는 규하를 돌아보았다. 규하는 뚫어져라 이반을 보고 있었다.
“이분은…….”
연하가 말하려는데, 갑자기 규하가 그에게 다가갔다. 이반은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때리진 않겠지.’
규하라면 충분히 그럴 것 같아 연하는 긴장했다.
“당신.”
규하는 이반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본 적 있어요.”
“뭐?”
연하는 놀랐다.
“그럴 리가…….”
그런데 정작 이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규하는 떠오르지 않는 것을 떠올리려 하는 것처럼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뜯어보았다.
“수염…….”
‘갑자기 무슨 소리…….’
연하는 의아했다. 그러다 잠깐 위쪽을 보았다.
‘응? 수염?’
얼마 전에 자신도 수염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수염이 있으면…….”
규하는 갑자기 무언가 깨달은 것 같았다.
“당신, 거기 있었죠.”
“거기라니…….”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 끼어들었지만, 규하는 12년 만에 재회한 제 쌍둥이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날, 그 현장에.”
이반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분명히 당신이었어요. 차림은 많이 달랐지만…….”
규하는 이반을 위아래로 훑었다.
“기억하는군요.”
이반은 드디어 말했다.
‘그런데 뭘?’
“두 사람, 알아요……?”
연하는 얼떨떨해 중얼거렸다. 일이 이렇게 흘러갈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당신이었어?”
규하는 한순간에 얼굴이 험악해졌다.
“당신이 연하를……!”
그리고 이반의 멱살을 잡으려는 것처럼 손을 내뻗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렉스가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보통 인간이라면 놀랐을 텐데, 규하는 바로 다른 손으로 그를 밀치며 벼락같이 소리쳤다.
“놔, 이 새끼야!”
그러나 렉스는 밀쳐지지도, 손목을 놓지도 않았다.
“이바노프 씨는 강 상사를 살려준 겁니다.”
렉스는 규하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이바노프 씨가 강 상사를 감염시켰으니까요.”
연하는 순간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나 했다.
연하는 번뜩 이반을 돌아보았다. 그는 난감한 얼굴이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지만 역시 이렇게 되었다는 듯.
“네?”
연하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