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OUTBURST (6)
‘내가 진짜 미친년이구나.’
규하는 정말 낯을 들 수가 없었다.
아무리 마음이 급했다지만 애들이 다 보는 앞에서 그 난리치지를 않나, 아무리 아이들이 무사한 걸 확인했다지만 아직 보호자들한테 인계하지도 않았는데 남자랑…….
그것도 병원에서.
심지어 물품보관실에서.
둘 다 너무 흥분해서 실제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응급실로 돌아온 그녀를 걱정하는 아이들을 보니 양심이 너무 아팠다.
‘다 저놈 탓이야.’
규하는 입구에 서 있는 렉스를 노려보았다.
아까처럼 멀끔한 모습이 꼭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았다.
아직도 몸속에 뭉근한 열기가 남아 있는 건 자신뿐인 것 같았다. 한동안은 의자에 앉기도 힘들 만큼 진정이 되지 않았다.
규하는 끙 신음을 삼켰다.
‘나 같은 게 계속 선생질을 해도 되는지 의구심이 든다.’
“선생님.”
가연이 불렀다.
“어? 어. 왜 그러니?”
규하는 놀라 돌아보았다. 가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두 사람은 응급실 앞 복도 의자에 같이 앉아 있었다.
“말투가 왜 그러세요?”
“내 말투가 어때서?”
“꼭 찔리는 게 있는 사람처럼. 선생님 원래 끝에 니 같은 말 안 쓰시잖아요.”
규하는 헛기침을 삼켰다. 그리고 화제를 돌리기 위해 응급실 입구를 돌아보았다. 어스름이 깔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늦으시는구나.”
아직 보호자가 도착하지 않은 학생은 가연뿐이었다. 다른 학생들은 모두 부모님에게 인계한 후였다.
“아까요.”
가연이 갑자기 말했다. 규하는 뜨끔했다.
“어?”
“선생님이 부른 이름……. 그때 말한 쌍둥이분 성함이에요?”
규하는 아까 여자를 생각했다.
‘그건 정말 환각이었을까.’
너무 보고 싶은 사람을 본 것뿐이었을까…….
영안실 침대에 누운 푸르고 깨끗한 연하를 떠올렸다.
그래, 그건 분명히 연하였다.
그 시신이 연하가 아니라는 증거를 찾기 위해 얼마나 들여다보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시신인식 코드가 새겨진 띠가 둘러진 엄지발가락에 작은 점조차 그녀가 아는 대로였다.
그런데 그녀는 왜 아직도 연하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을까. 참 끈질기게도.
머리로는 연하가 죽었다고 애써 납득을 했지만, 제 가슴은 조금도 설득된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연하에 대한 흔적이 조금이라도 나타나면 이성적으로 생각하기 전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거겠지.’
쓰게 생각했다. 하지만 가연이 기다리고 있으므로, 애써 웃었다.
“주마등이 스쳤었나 봐. 아무래도 우리 사지에서 살아 돌아왔잖아?”
가연은 잠깐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 사람들은 뭐였을까요?”
갑자기 나타나 공격한 뱀파이어들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글쎄…….”
그에 대해서는 대답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사실 지금으로서는 어떤 것에도 대답할 수 없었지만.
그런데 가연이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규하는 시선을 따라 돌렸다. 가연은 그녀에게 고개를 기울이고 속삭였다.
“근데 저 뱀파이어 오빠 멋있지 않아요? 뭔가 비현실적이에요.”
아직 응급실은 분주했고, 보이진 않아도 수술실에 들어간 의사들은 격전을 치르고 있을 터였다. 따라서 군인들도 교대할 뿐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렉스는 아무래도 현장의 책임자쯤 되어보였다.
규하로서는 현장에 있기에는 지나치게 계급이 높은 그가 현장 책임자를 자처하고 있는 이유를 알 리 없었다.
“오빠는 무슨. 저 얼굴로 나이를 얼마나 먹었을지 알고…….”
규하는 말하다 말고 미간을 좁혔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 실제로는 몇 살이야?’
스물일곱이야 뱀파이어라는 걸 알기 전 이야기고…….
규하는 멈칫하고 렉스를 보았다.
그래, ‘저건’ 뱀파이어란 말이지. 요즘 말로 루아스…….
“뱀파이어가 밉지 않아?”
선생이 할 질문은 아니겠지만, 규하는 전혀 거리낌이 없어 보이는 아이가 신기해 물었다. 어쨌든 가연은 어머니를…….
그리고 오늘 공격한 것도 뱀파이어였다. 트라우마를 자극할 만한 일이었는데도, 가연은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미워요.”
가연은 태연하게 말했다.
“저희 엄마를 죽인 뱀파이어는요. 다시 만난다면 내 손으로 죽이고 싶을 만큼. 하지만 모든 뱀파이어를 미워할 순 없잖아요. 모든 인간을 미워할 수 없는 것처럼요. 그런 건 내가 불행해지는 일이거든요.”
아이가 빨리 어른이 되어야 하는 세상이 그다지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건 알지만, 규하는 똑바로 정면을 보는 얼굴을 보고 알았다.
이 아이는 괜찮다는 걸.
인생에 무슨 일이 있어도 담담히 다시 일어나 걸을 수 있는 아이라는 걸.
“저희 아버지처럼.”
가연은 쓸쓸하게 웃었다.
“우리 아버지도 옛날에는 멋있었어요.”
규하는 가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가연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여자처럼 웃고는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었다. 규하도 가연의 정수리에 얼굴을 대었다.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는데, 입구에서 남자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막 깼는지 벌집이 된 머리에 옷도 대충 꿰어 입고 있었다.
가연과 규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 이……!”
가연의 아버지는 규하를 보자마자 멱살을 휘어잡았다.
“네년이 쓸데없이 수학여행이니 뭐니 하지만 않았어도!”
멀리 있는 렉스는 움직일 뻔했던 자신을 겨우 멈추었다.
“아버지!”
소녀가 소리치려는 몸짓을 먼저 읽었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유순한 딸아이가 내지른 소리에 충격받은 눈이었다.
“우리, 선생님 아니면 다 죽었어요. 선생님이 빨리 버스에서 나가게 해줬기 때문에 살아 있는 거라고요!”
가연은 울먹이며 소리쳤다.
“이제 제발 그만하면 안 돼요? 나 너무 힘들어요.”
“너마저…….”
남자는 파랗게 질려 신음처럼 말했다.
“너마저 잃으면 살 수가…….”
“하지만 지금 우리는 살아도 사는 게 아니잖아요. 이럴 거면 차라리 같이 죽어요. 다 끝나 버리게.”
딸아이는, 막무가내로 학교에 보내지 않아도, 그가 매일 술에 절어 인사불성이 되어 있어도, 별것도 아닌 일에 목청부터 높여도 말대답 한 번 하지 않았다.
마치 아버지의 슬픔을 이해한다는 것처럼 조용한 눈빛으로 기다릴 뿐이었다.
딸아이가 어미를 잃은 슬픔을 삭이고 아내를 잃은 자신의 슬픔을 먼저 보듬는 모습을 보면 더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그들을 이렇게 만든 세상을 증오하며 무작정 엉망이 되는 것 외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내가 그 버스에서 빠져나온 걸 후회하게 하지 말아줘요.”
남자는 무너졌다. 오열하는 남자를 아이는 조용히 끌어안았다.
“우리, 살아요.”
* * *
가연과 아버지를 배웅하고, 규하는 드디어 집에 갈 수 있게 되었다. 댐 뒤에 켜켜이 쌓아둔 피로가 이제는 댐을 넘어 밀려오는 것 같았다.
긴, 정말로 긴 하루였다.
규하는 짐을 챙기기 위해 돌아보았다가 챙길 짐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버스와 함께 강물 속에 잠들어 있을 테니.
‘내 가방……. 큰맘 먹고 산 거여서 아직 할부 많이 남았는데.’
갑자기 멍해져서 지금 그녀의 인생에서 하등 중요하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렉스가 다가왔다.
“저희 대원이 댁까지 모셔다드릴 겁니다.”
규하는 다크서클이 짙은 눈으로 돌아보았을 뿐, 별말 없이 밖으로 나섰다.
입구에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렉스는 뒷좌석의 문을 열어주었다.
규하는 차에 오르기 전에 그를 보았다.
‘왜’라는 거대한 뱀이 머릿속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왜 남들은 평생 한 번 겪기도 힘든 일이 자꾸만 자신에게 일어나는지, 왜 분명히 연하 같아 보이는 여자가 자신을 모른 체하는지, 왜 렉스는 여자에게 뛰어가는 자신을 막았는지…….
하지만 규하는 묻지 않았다. 애초에 묻는다고 대답해 줄 것 같았으면 이미 말했으리라. 그리고 오늘은, 너무 피곤했다.
규하가 인사 없이 차에 오르자, 렉스가 문을 닫았다. 차는 금세 병원을 벗어나 어두운 도로로 들어섰다.
차가 다른 차들 사이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렉스는 말했다.
“별자리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갑자기 다른 목소리가 말했다.
[아까 뭘 했기에 저 다혈질인 분이 새색시처럼 얌전해진 겁니까?]
건너에서 타격 소리가 나더니 외침이 들렸다.
[네 친구냐!]
렉스는 그냥 통신을 끊었다. 그리고 도로를 돌아보았다.
‘불안하군. 가만히 있을 성격이 아닌데…….’
“렉스.”
귓가에 거칠어진 숨소리가 스쳤다.
거친 입에 비해 그녀의 몸은 너무나 달콤했다. 오히려 그 어떤 여자보다 더 그에게 순종하듯이 몸을 열고 그가 무엇을 하건 받아들일 태세였다.
그가 끝내려고 하자 온몸으로 휘감겨 오며 귓가에 칭얼거렸다.
“싫어, 그만두지 마.”
숨이 끊어질 것 같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그때 알았다.
입구에 서 있는 내내, 그녀를 다시 안고 싶다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을 살면서도 몸의 쾌락에 탐닉한 적은 없었다. 그냥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은 머릿속이 그 생각으로만 가득한 사춘기 소년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렉스는 허공을 쳐다보았다.
“미치겠군.”
* * *
“대체 뭘 했을까?”
제로 14팀 2조의 대원, 최 하사는 운전대에 팔을 걸치고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도 그 소리십니까. 막말로 소장이 선생님을 고문했다 하더라도 저희 소관은 아니잖습니까?”
조수석에 앉아 과자를 먹고 있는, 오늘은 특수한 상황 때문에 보충 임무를 나온 한 중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너무한 거 아냐?”
“고문당할 분이 아니니까 그렇죠. 오히려 소장을 고문해서 직성이 풀린 거라면 모를까요.”
한 중사는 킬킬거렸다.
“그건 그래. 이렇게 지켜보는 재미가 있는 경호 대상도 드물다니까.”
“나옵니다.”
최 하사가 갑자기 말했다. 한 중사는 바로 차 유리 너머를 살폈다. 좀 떨어진 거리에 있는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규하가 걸어 나왔다.
“정장 차림인데. 오늘 학교 쉬는 거 아니었어?”
미리 불러뒀는지 규하 앞에 택시가 와 섰다. 규하가 올라타자 택시는 바로 출발했다.
“따라가.”
최 하사는 신중하게 차를 출발시켰다.
“어디 가는 거죠?”
“어디 보자.”
한 중사는 패드를 꺼내 택시의 예정 이동 경로를 확인했다. 하지만 결과가 채 뜨기 전에, 두 사람은 서로를 보았다.
“잠깐, 이 방향은…….”
둘 다 번뜩 깨달은 얼굴이었다.
[MCTC로 간다!]
무전 너머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왁, 어떡해요? 어떡해?”
한 중사가 호들갑을 떨었다. 최 하사가 말했다.
“청사로 가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뭘 알 수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접점을 만들지 않는 게 좋아.]
“하지만 이번에 막는다고 하더라도 다음에는 어떻게…….”
[우리가 언제 다음 생각했어? 일단 지금…….]
택시 옆에 가던 승용차가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막아야지!]
쾅.
무전 너머로 소리가 나는 동시에 택시와 승용차가 부딪치며 멈추었다.
택시 기사가 뒷목을 붙잡고 내리더니 승용차 운전석으로 가서 소리치기 시작했다. 택시 후면 유리 너머 보이는 규하는 놀란 것 같았다.
두 대원은 차를 멈추지 않고 지나갔다. 그리고 우회전해서 길가에 차를 세우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아, 죄송합니다.”
도로 한가운데서 소리치는 택시 운전사에게 김 상사가 누차 사과하고 있었다. 평생 본 적 없는 웃음을 서글서글하게 지으면서 일단 차를 옮기자는 손짓을 했다.
“하여간 변신의 귀재라니까, 저 양반.”
두 대원은 고개를 젓고 말았다.
아무튼 이로써 안심이었다.
* * *
‘뭐야, 정말.’
규하는 창문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아저씨, 그렇게 심한 것 같지 않은데 그냥 보험사 부르시고…….”
“아, 손님은 가만히 계셔.”
택시 기사는 승용차 운전자가 만만해 보였던지 팔까지 걷어붙이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규하는 한숨을 내쉬고 좌석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창밖을 보았다. 택시 기사의 고함 소리가 머리 아프게 울려왔다.
자신은 왜 12년 내내 연하의 죽음을 믿을 수 없었을까. 제 눈으로 시신을 봐놓고도, 직접 화장한 유골을 묻고도.
그냥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연하의 존재가 이렇게 선명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규하는 갑자기 차 문을 열고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