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 짐승-54화 (54/104)

54화. OUTBURST (5)

“선생님!”

아이들은 응급실로 들어오는 규하를 보자마자 달려들어 울음을 터뜨렸다. 응급실은 한동안 울음바다였다.

규하도 아이들을 끌어안고 있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정말 사지에서 살아 돌아온 것이다, 이번에는 누구 하나 죽는 사람 없이.

“다들 괜찮아? 다친 사람 없어?”

이 기적을 믿을 수 없어 아이들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네, 괜찮아요.”

“안 다쳤어요.”

아직 다른 사상자는 집계되기 전이지만, 그녀 반 아이들은 모두 작은 타박상만 제외하고 무사했다.

규하는 한참 아이들 상태를 체크하고, 타박상이라도 상처가 난 아이들은 의사들이 처치하는 모습까지 보고서야 비로소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응급실 입구와 복도를 지키고 서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군복을 입은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남자건 여자건 당장에라도 전투태세에 돌입할 수 있는 자세로 총을 들고 마네킹보다 표정 없이 서 있었다.

규하는 응급실 복도로 나섰다.

“저기요.”

나이상 계급이 가장 높을 것 같은 남자 군인에게 말을 걸었다.

“아까 저희를 구해준 여자분 말인데…….”

그런데 남자는 허공에 시선을 고정하고 꿈쩍하지 않았다. 그녀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이.

“이봐요?”

남자는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규하는 미간을 찌푸리고 남자를 훑었다. 옷에 아무런 마크가 없었다.

“사람이 말을 하면…….”

갑자기 남자가 살짝 거수경례했다.

“그들은 본인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뿐입니다.”

규하는 뒤돌아보고 싶지 않았지만, 뒤돌아보았다.

렉스는 검을 들고 있지 않다는 것만 제외하고 아까와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내려다보는 붉은 눈동자가 차갑고 무감동했다.

오히려 이쪽이 가짜 눈처럼.

규하는 휙 몸을 돌렸다. 뒤쫓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응급실로 돌아와 아이들 곁에 앉았다.

갑자기 아이들이 입구를 보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이유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렉스는 응급실로 들어와 입구를 지키고 있는 군인 중 한 명에게 무어라 말했다. 군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섰다. 대신 렉스가 그 자리에 섰다.

“대박. MCTC야.”

밀리터리에 관심이 많은 기준이 말했다.

“그게 뭐야?”

다른 아이들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기준은 우매한 대중을 보듯 기막혀했다.

“다국 대테러부대 연합 말이야, 루아스들이 소속된. 몰라?”

“그럼 진짜 뱀파이어야?”

아이들이 웅성거리며 군인들 쪽을 돌아보았다.

흡혈귀의 존재가 공공연한 세상이라고 해도 일반인들이 흡혈귀를 볼 기회는 많지 않았다. 있더라 하더라도 옆을 지나가는 게 흡혈귀라고 모르기도 했고.

규하는 벌떡 일어났다. 아이들은 깜짝 놀라 그녀를 보았다.

“선생님?”

규하는 단호한 몸짓으로 입구로 다가갔다. 그리고 렉스 앞에 섰다. 그는 그녀를 처음 보는 사람인 양 무심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나가주세요. 저희 아이들, 흡혈귀한테 공격받아서 여기 와 있거든요. 아이들 심정을 좀 생각해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차별적인 말이라고 생각하는지 다른 군인이 인상을 썼다.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든 좋았다. 렉스가 시야에 있는 한 생각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실례했습니다.”

렉스는 심상하게 대답하고 응급실을 나가려고 하는 순간 응급실 문이 세차게 열렸다.

“비켜주세요!”

뒤에서 달려온 의사와 간호사들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다음 사상자 그룹이 도착했는지 병원 입구가 시끄러웠다. 구급차의 불빛이 번쩍거렸다.

규하는 가슴이 무거워졌다. 다행히 아이들은 무사했지만 12년 전 사고 때 풍경이 떠올라서…….

그때였다. 저 멀리 어지럽게 뒤섞이는 사람들 사이로,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피범벅이 된 환자를 안고 들어오는…….

“베드 가져와!”

의료진들 중 몇이 그녀를 보고 소리쳤다.

여자는 의식이 없는 환자를 침대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덤벼들 듯이 환자를 처치하는 의료진에게 공간을 내주기 위해 뒤로 물러섰다.

“비켜, 비켜요!”

의료진은 환자의 상태를 확인하고 사람들에게 소리치며 응급실로 침대를 끌고 달려왔다.

그들이 지나가는 너머, 여자가 이쪽을 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여전히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눈만은 똑바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여자는 몸을 돌렸다. 낯선 사람인 규하가 그녀에게 어떤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는 듯이.

“저기, 잠깐…….”

따라가려는데, 렉스가 팔을 내밀어 막았다. 규하는 그를 보았다.

“비켜.”

“들어가시죠.”

규하는 렉스를 무시하고 지나쳐 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팔을 잡았다. 규하는 일그러뜨린 얼굴로 돌아보았다.

“이거 놔.”

그러자 순순히 손을 놓았지만, 결코 가게 놔두지 않겠다는 의지만은 분명한 얼굴이었다.

두 사람이 대치하고 있자 사람들이 하나둘 돌아보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이 일을 하는 데 방해가 됩니다. 안으로 들어가 주시길 바랍니다.”

렉스가 무심히 말했다. 여자가 막 모퉁이를 돌아가고 있었다. 규하는 마음이 급해졌다.

“비키라고 했어.”

렉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규하는 그냥 그를 밀치고 지나갔다. 그가 다시 팔목을 잡아 그녀는 거의 반동을 일으킬 만큼 세게 돌려 세워졌다.

규하는 울컥했다.

그녀가 높이 손을 들었을 때, 경비를 서고 있는 대원들은 생각했다.

‘설마 때리려고.’

손이 내려갈 때도 렉스가 움직이지 않자 생각했다.

‘설마 맞아주려고.’

살갗이 부딪치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모두는 움찔했다.

“놔!”

힘을 완전히 빼고 있어서 고개가 살짝 돌아가긴 했지만, 렉스는 간지럽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들어가 달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규하는 더 이상 입씨름하기를 포기했다. 여자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강연하!”

렉스는 뛰어나가려는 규하의 허리를 한 팔로 안아 막았다. 하지만 규하는 개의치 않고 외쳤다.

“너 강연하지!”

“소란은 그만두십시오.”

“아니라면 얼굴을 보여줘! 강연하! 너 강연하잖아!”

규하는 울부짖었다. 렉스는 슬프다고 해야 할지, 안쓰럽다고 해야 할지, 분노와 비슷한 감정이 치밀었다.

워낙 정신이 없는 상황이라 메시지 전달에 혼선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필 사상자들이 이송되고 있는 여러 병원 중에서 딱 이곳으로 오다니.

“강연하!”

규하를 멈추게 해야 했다. 렉스는 팔의 힘으로만 그녀를 들어 올려 한쪽 어깨로 업었다. 지켜보는 모두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정작 당사자인 규하는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고래고래 소리칠 따름이었다.

“누굴 안면인식장애로 알아! 내가 널 못 알아볼 리가 없잖아! 이거 놔! 놓으라고!”

그대로 렉스가 성큼성큼 복도를 걸어가자, 사람들은 분분히 물러섰다.

“귀가 막혔어? 내려달라고 했잖아! 내려놔!”

그럼에도 불구하고 렉스는 성실한 짐꾼처럼 묵묵히 그녀를 업고 갈 뿐이었다.

모퉁이 너머로 사라진 여자는 이제 보이지 않았다.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는 또 연하에게 갈 수 없었다.

바로 눈앞에 있는데.

이렇게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거리에 있는데.

“가지마……. 제발.”

규하는 숨이 끊어질 것 같아 중얼거렸다. 렉스는 꾹 이를 물었다. 규하는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외쳤다.

“강연하!”

렉스는 지나가는 길에 있는 아무 문이나 열고 들어갔다.

쾅.

뒤로 소리가 나도록 닫았다.

그 충격에 복도가 몇 초간 후두둑 흔들려, 잠시 후 모퉁이를 돌아온 간호사가 깜짝 놀랐다.

떨림은 금세 멎었다. 간호사는 고개를 갸웃하고 걸어왔다.

마지막으로 멈춰 서서 둘러본 그녀가 여전히 이상한 점을 찾지 못하고 막 지나간 곳에는 ‘보관실’ 팻말이 붙어 있었다.

* * *

연하는 도로로 걸어 나왔다.

사방에 저녁 기운이 가라앉고 있었다. 다급한 불빛을 빛내는 또 다른 구급차가 그녀를 지나 병원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뒤얽히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연하의 앞에 검은 차가 와 멈추었다. 그리고 차 문이 열렸다. 차 안의 어둠이 그녀를 반기고 있었다.

연하는 차에 올라탔다.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 * *

공간은 좁고 어두웠다.

갓 말린 빨래의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규하는 숨을 몰아쉬었다. 입안을 온통 점령당하고 있어 여의치 않았다. 입을 틀어막은 열감이 질척한 소리를 내며 마찰했다.

몸이 흠칫 떨렸다. 하지만 뭔가 푹신한 곳에 못 박힌 채 그에게 눌려 있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차오른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가 살짝 입을 뗐다. 규하는 숨을 몰아쉬며 가만히 있었다. 두 입술에서 흘러나온 숨결이 뒤얽혔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바깥에서 이동식 침대가 지나가는 소리, 사람들이 걸어가는 소리, 누군가를 찾는 외침 같은 것들이 들려왔다.

규하도 몸의 떨림이 거의 잦아드는 것 같았다. 그의 어깨에 손을 짚은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만 놓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렉스는 말했다.

“싫어.”

규하는 오히려 팔에 더 힘을 주며 그에게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에게 기댄다기보다, 지금 얼굴을 보이기 싫어하는 것 같았다.

“네가 여기 데려온 거잖아.”

렉스는 눈을 내리떴다.

“하지만.”

맞닿은 몸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의식되었다.

혈관으로 뜨거운 피를 뿜어내는 심장의 박동, 피부의 솜털을 스치는 숨결, 떨리는 허리…….

겨우 그녀에게 닿지 않도록 힘을 주고 있는 두 손이 저절로 좁혀들어, 규하의 가는 허리를 쓸었다.

“참기가 힘듭니다.”

규하는 거리낄 것 없는 손길에 놀라 흠칫 고개를 들었다.

닫힌 블라인드의 틈으로 햇빛 한 줄기가 비쳐 들었다. 햇빛의 창이 붉은 눈동자를 뚫고 지나갔다.

충동이었는지, 극대화된 감정에 정제된 본능이었는지, 규하는 그에게 키스했다. 렉스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이 키스를 되돌려 주었다.

* * *

연하는 차창 너머를 보면서 움직이지 않았다. 밖으로 도시는 강처럼 계속해 흘러갔다.

“연하야.”

그제야 오랜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돌아보았다. 눈에는 물기가 없었다.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은 멍한 눈빛만 있을 따름이었다.

연하는 그림자에 반쯤 잠겨 있는 남자를 보았다.

붉은 눈이 어둠에 잠겨서 타오르고 있었다. 어둠 속에 도사린 위험한 짐승 같은 눈이 언뜻 침울해 보이기도 했다.

연하는 웃었다.

“안 울어요. 이건 슬픈 일이 아니니까. 규하가, 그리고 모두가 사는 일이니까.”

이반이 손을 뻗어 뒷머리를 감쌌다. 쓰다듬어 주려는 듯이.

연하는 이번에는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다.

“저 위로해 주시는 거예요?”

이반은 대답하지 않았다. 뒷머리를 감싼 손을 당기며 고개를 내린다고 생각했을 때─

연하는 눈을 크게 떴다.

붉은 눈 안쪽은 마치 꽃잎을 수없이 겹쳐놓은 것처럼 정교한 모양새로 소용돌이쳤다. 한순간 주술에 걸린 듯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뜨거운 혀가 입술을 벌리고 파고들었다. 연하는 움찔했다. 정신을 차리고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국장니…….”

이반은 밀어내는 손을 잡아 빼며 다시 입술을 겹쳐 왔다. 조금은 강압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연하는 잡힌 팔을 당겼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상대가 그여서 온 힘을 쓴 건 아니라지만 정말 미동도 없었다. 누군가가 힘으로 자신을 제압하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다음엔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 사이에 입술이 재차 부딪쳤다. 뜨거운 입술이 비벼지면서 안에서 혀가 뒤얽혔다.

연하는 흠칫 고개를 물렸다. 그가 더 깊이 쫓아왔다.

폐가 풀무가 되어 타오르는 심장에 바람을 불어넣은 듯이 온 내부가 열기로 이글거렸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숨통이 트이는 곳을 찾아 입을 벌릴수록 그가 안을 채웠다.

연하는 질끈 눈을 감았다.

‘달라.’

달랐다, 그녀가 충동에 못 이겨 했던 키스와는. 무언가 일깨워서는 안 되는 동물을 깨운 느낌이었다.

그가 거의 입술을 떼지 않고 속삭였다.

“다른 건 생각하지 마.”

녹아날 것 같은 입술이 말의 모양대로 입술을 스쳤다.

“나만 생각해.”

“피가…….”

사상자들을 옮기느라 차에 탄 것도 미안할 정도로 그녀는 피범벅이었다. 그녀는 다시 그를 밀어냈다. 역시 밀려나지 않았지만.

이반은 다시 입술을 겹쳐 왔다.

“그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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