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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짐승-53화 (53/104)

53화. OUTBURST (4)

규하는 안전벨트를 풀었다. 그리고 좌석을 발판 삼아 올라가기 시작했다.

“선생님!”

윤재가 놀라 불렀다.

“다 움직이지 마.”

규하는 몇 개 좌석을 올라가 비상용 망치가 걸려 있는 좌석 위로 몸을 뻗었다.

“서, 선생님…….”

아이들은 눈으로 보일 만큼 벌벌 떨고 있었다.

“그대로 있어.”

규하는 비상용 망치를 주머니에 넣고 가장 끝 좌석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창밖을 살폈다. 일단 사고현장에서 날 만한 소리들을 제외하고 총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규하는 바로 아래 창가에 앉은 승훈을 보았다.

“승훈아. 선생님 좀 도와줄 수 있겠어?”

승훈은 흠칫하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극도의 공포로 동공이 수축되어 있었다.

“제가 할게요.”

그 옆자리에 앉은 윤재가 말했다. 힘은 승훈이 더 좋겠지만, 성격은 윤재가 훨씬 차분하니까 차라리 나을 것 같았다.

정상적인 선생님이라면 이건 생각조차 해선 안 되는 일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대로 있다가 또 무언가 잃게 된다면…….

자신이 죽는 한이 있어도 그런 일은 용납할 수 없었다.

“할 수 있겠어?”

윤재는 긴장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전벨트 풀고 이리로 와. 조심히. 승훈이는 비켜주고.”

윤재가 용기를 내는 모습을 보고 좀 진정됐는지 다행히 승훈이 움직였다. 규하는 윤재가 나오는 걸 도와주었다.

규하는 비상용 망치로 유리의 모서리를 내려쳤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쉽지 않았지만 여러 번 내려치자 유리 전체에 균열이 일어났다.

규하가 겉옷을 벗어 팔에 감으려고 하자, 윤재가 옷을 잡았다.

“제가 할게요.”

윤재는 허세나 만용 따위 없는 진지한 눈이었다.

“그래도 제가 힘이 더 세니까요.”

“그래. 손 조심해.”

윤재는 옷을 팔에 감아 제법 능숙한 동작으로 유리를 밖으로 쳐 냈다. 그리고 둘은 각 끝에서 남은 유리들을 밖으로 쓸어냈다.

규하는 창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그리고 총소리가 났을 때 이쪽으로 피신했는지 모여 있는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학생들이 타고 있어요! 아이들 좀 받아주세요!”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하나 웅성이며 돌아보았다. 개중 몇 남자들이 나서는 모습을 보고 규하는 다시 버스 안으로 몸을 넣었다.

“맨 아래서부터 한 사람씩 올라와. 한 사람씩이야.”

그런데 아무도 올라오는 기색이 없었다. 아래를 보자, 규하가 앉았던 자리 바로 뒤에 있는 은혜가 고개를 전부 돌리지도 못하고 울먹거리고 있었다.

“모, 못하겠어요. 너무 무서워요.”

“안 무서워. 탈출하는 거잖아.”

“하, 하지만…….”

“선생님 말대로 안전벨트 맸더니 다들 무사하잖아. 선생님 믿지?”

은혜는 겨우 심호흡을 하며 앞을 보았다. 그리고 몇 번이나 안전벨트를 풀려 했지만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천 길 낭떠러지 아래를 마주 보는 상황에서 쉽게 용기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대각선 자리에 앉아 있는 가연이 안전벨트를 푸르고 일어났다.

“일어나. 도와줄게.”

은혜는 마침내 울음을 삼키고 안전벨트를 풀었다. 그리고 가연의 도움을 받아 덜덜 떨리는 팔다리로 좌석을 짚으며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제야 용기를 되찾은 몇몇 남자아이들이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것을, 규하는 가만히 있으라고 엄포를 놓았다.

규하와 윤재는 은혜가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밖에서 남자들이 은혜를 받아주었다. 그렇게 아이들은 하나씩 탈출하기 시작했다.

“가연이도 올라와.”

그때 멀리서 헬기가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규하는 창밖을 살폈다.

‘구조대인가?’

그런데 갑자기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난리를 쳤다.

“어……!”

“저, 저기!”

규하는 다급히 내려다보았다. 버스 앞 유리 너머로 다리 기둥을 타고 무언가가 빠르게 올라오고 있었다.

분명히 사람의 형체를 한…….

그것은 엄청난 거리를 점프해서 버스 앞 유리에 들러붙었다. 아이들은 자지러지도록 비명을 질렀다.

“흐, 흡혈귀야!”

아까 그 남자였다, 찻길에 서 있던.

녀석과 눈이 마주친 규하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는 씩 웃더니, 단번에 주먹으로 유리를 뚫었다.

콰장창.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그가 맨손으로 잡아 뜯은 앞 유리가 통째로 떨어져 나갔다. 남자는 안으로 들어오려는 듯 손을 넣어 안쪽을 잡았다.

그때였다. 버스 뒤가 번쩍 열렸다. 통조림을 따듯이.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하지만 돌아볼 새도 없었다. 검은 무언가가 쏟아져 들어왔다.

단숨에 아래까지 도달한 검은 사람은 흡혈귀에게 총을 연사했다. 흡혈귀는 빠르게 위로 기어 올라갔다.

천장에서 쿵쿵,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검은 사람은 주저 없이 옆 창문에 총을 쐈다. 그리고 어깨로 유리를 밀어내는 동시에 밖으로 몸을 내밀고 여러 차례 총을 쏘아댔다.

몇 번 위에서 춤을 추듯 쿵, 쿵, 움직이던 인기척이 사라졌다. 검은 사람은 다시 몸을 집어넣고 휙 돌아보았다.

규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여자?’

얼굴 절반을 가리는 검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한눈에도 아이들만큼 어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빨리!”

마스크 너머 목소리는 기계음이었다. 하지만 규하는 질문 따위 하지 않았다. 그런 건 모두가 안전해지고 난 다음이었다.

“다들 빨리 올라가!”

규하는 외쳤다.

왜소해 보이는 여자는 가연을 한 팔로 번쩍 안아 올려주었다. 가연은 깜짝 놀랐지만 역시 우선순위를 가릴 줄 아는 아이라서 최대한 빨리 올라왔다.

여자는 밖을 경계하면서 운전기사까지 데리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성인 남자를 가볍게 둘러메는 힘은, 그녀가 인간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아이들이 모두 밖으로 나가고 가연을 포함해 대여섯 명밖에 남지 않았을 때쯤이었다.

끼익.

불길한 소리가 나더니 버스가 앞으로 기울었다.

으아악, 아아악!

좌석 뒤에 몸을 숨긴 아이들이 목을 놓고 비명을 질렀다. 규하도 눈을 부릅뜨고 바람이 훤히 들어오는 아래를 바라보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쿵 소리를 내며 버스가 다시 멈추었다.

꽉 다문 입술 사이를 거친 숨이 비집고 나왔다. 이제 버스는 거의 일직선이었다. 아이들도 아직 살아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지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거의 성토하듯이 외쳤다.

“아, 이 씨발……!”

“미, 미친!”

그때 규하는 결심했다.

이 자리에서 살아나간다면 다시 욕을 하지 않겠다고.

“괜찮아요?”

규하는 아래를 보고 외쳤다. 여자는 그들처럼 좌석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리고 버스가 멈췄다 싶어지자 바로 운전기사를 둘러업고 다시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래가 훤히 뚫려 있는 상황에서 웬만해서는 흉내도 낼 수 없는 담력이었다.

그때였다. 남은 아이들이 동아줄을 붙잡은 해님 달님 남매처럼 쑥 딸려 올라갔다.

“어, 어……!”

아이들이 놀란 소리를 터뜨렸다. 규하도 놀라 외치려고 했지만, 여자처럼 검은 전투복을 입은 남자들이 아이들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여자와 다른 점은 좀 더 무장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여덟, 선생님부터…….”

여자는 힐긋 규하를 보았다.

“아뇨. 아이들부터 대피시키세요.”

마치 아이들이 대피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녀가 먼저 대피할 리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 같았다.

여자는 고통에 신음하는 운전기사를 건네주었다. 남자들은 아이들과 운전기사를 내리고 버스를 내려갔다.

여자는 뚜껑이 열린 버스 단면을 잡고 팔 힘으로만 몸을 끌어올려 가볍게 위로 올라갔다.

그녀가 뒤돌아서 규하에게 손을 내밀었다.

또렷한 검은 눈동자…….

“어서.”

짧지만 강한 어조에 규하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갑자기 여자의 눈빛이 변했다.

여자가 몸을 돌린다고 느낀 찰나였다.

눈을 감았다 뜨자 우뚝 서 있는, 아까와는 다른 흡혈귀가 팔로 그녀의 돌려차기를 막고 있었다.

순간이었지만 그 팔에 전해지는 돌려차기의 파워, 팔의 피부가 밀리는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남자는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그리고 출발 신호라도 내려진 것처럼 남자와 여자가 동시에 사라졌다. 그러고는 멀리 어디선가 시끄럽게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어떤 우악스러운 손이 규하의 목을 휘어잡았다.

“……!”

그대로 몸이 딸려 올라갔다. 빛과 바람이 얼굴을 할퀴고 지나갔다. 마치 허공이 그녀를 잡아채 올린 것 같았다. 규하는 숨을 삼켰다.

“넌…….”

12년 전 악몽의 그날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얼굴을 한, 거구의 루아스.

그가 규하의 목을 잡아 위로 쳐들고 있었다. 그녀는 졸린 목으로 힘겹게 숨을 들이켰다.

“또 너, 냐……. 이 좆같, 은 새끼.”

아직 살아나간 건 아니니까 욕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은 미뤄놔도 될 것 같았다.

“계집이 여전히 입이 걸어.”

시대가 어느 때인데 계집 타령……이라고 당당하게 외쳐 주고 싶었다. 하지만 녀석이 손아귀에 더 힘을 주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목뼈에서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개, ㅅ…… 조……ㅊㄲ…….”

규하는 최선을 다해 읊조렸다. 흡혈귀는 기막혀하는 것 같았다.

“네가 대체 어딜 봐서 니스…….”

그때였다.

“놔라.”

흡혈귀는 얼핏 제 어깨너머를 보았다.

“야크트훈트.”

어느새 흡혈귀 뒤에 렉스가 서 있었다. 흡혈귀의 목 뒤에 손잡이를 잡은 장검을 반대로 댄 채로.

규하는 눈을 부릅떴다.

“사냥개가 나타났군.”

렉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순간 알아보지 못했을 정도로 그는 낯선 모습이었다.

짧은 머리, 검은 제복, 한 번도 그와 함께 떠올려 본 적 없는 장검, 그리고……

붉은 눈.

흡혈귀는 규하를 쳐다보았다.

“이딴 거한테 저당 잡혀 있다고 생각하면 억울하지 않나? 겨우 얻은 영생인데 말이야. 너도 잘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포장하지 마.”

렉스는 차갑게 잘랐다.

“너희들은 공존이 머리 아플 뿐이니까. 닥치는 대로 부수고 죽이고 어지르면서 살고 싶은 것뿐이지.”

규하는 렉스가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 처음 보았다. 어조는 평이했지만, 그는 정말로 화가 난 것 같았다.

“그것도 네 삶의 방식이라면 내 알 바 아니지만, 여기선 허락하지 않으니까 꺼져.”

흡혈귀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리고 누구한테 하는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예거다. 퇴각해.”

이어서 사라졌다. 그가 일부러 거세게 박차고 뛰어오른 버스가 마침내 다리 끝에서 미끄러졌다.

섬뜩하게 낯선 부유감이 몸을 사로잡았다.

떨어진다─ 생각한 순간이었다. 렉스가 검을 돌려 잡고 규하의 허리를 안았다. 그리고 다리 근육의 힘만으로 도약했다.

그야말로 엄청난 높이를.

11m가 인간이 제일 공포를 느끼는 높이라던데, 단번에 훨씬 높이 올라가자 공포심이 발동할 새가 없었다. 아니면 그에게서 전혀 시선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렉스는 다리 위에 가볍게 착지했다. 그제야 투웅, 하고 버스가 수면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규하를 놓아주었다. 응시하기를 잠깐, 그녀는 흠칫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잠깐. 애들은?”

현장은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차들이 다 급히 멈춰선 모양으로 버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없었다. 꼭 재난이 닥친 도시에 사람들만 전부 사라진 것 같은 모양새였다.

“현장은 위험하기 때문에 일단 모두 대피시켰습니다.”

다시 렉스를 보았다. 저쪽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무장한 사람들이 주변을 엄호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선생님도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선생님…….

대원들이 규하를 반아치 형태로 둘러쌌다.

찰나, 기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렉스는 시선을 내려 그녀의 목을 보았다. 그때는 몰랐지만, 전혀 느끼지 못했다는 게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목이 새까맣게 멍들어 있었다.

렉스는 돌아섰다.

“잡아. 한 놈도 빠짐없이.”

그리고 누구에게 하는지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다리 아래로 뛰어내렸다. 규하는 움찔했지만 그를 잡으려 달려 나갈 뻔했던 다리에 힘을 주었다.

“가시죠.”

무장 때문에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는 대원이 말했다. 규하는 말을 따랐다. 일단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아이들이 모두 무사한지 확인하는 것, 그게 먼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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