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 짐승-52화 (52/104)

52화. OUTBURST (3)

연하는 화장실로 들어가 칸을 하나씩 열어보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했다.

‘근데 누구한테서 온 무전이었더라. 들어보지 못한 목소리였는데…….’

그때 문이 열렸다. 연하는 돌아보았다.

‘우와.’

저도 모르게 생각하고 말았다.

여자는 스킨색의 롱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약간 탄력이 있는 새틴 재질의 드레스는 얼핏 아무것도 입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여자의 몸매가 너무도 훌륭해 오히려 압도적이라고 할 만한 관능을 내뿜었다.

여자는 송곳처럼 얇고 높은 하이힐을 부딪치며 들어왔다. 그리고 화장실로는 들어가지 않고, 붉은 클러치를 세면대에 내려놓고 손을 씻기 시작했다.

연하는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뭐지.’

그녀가 모든 행동을 하면서 똑바로 연하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여자는 휴지를 몇 장 빼내 손을 닦으면서 연하를 위아래로 훑었다.

연하는 자신을 해치는 것도 아닌 남의 시선에 굳이 기분 나빠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었지만, 여자의 시선은 확실히 유쾌하지 않았다.

여자는 휴지를 통에 넣고 다시 클러치를 들었다. 그리고 분명히 작게 코웃음을 치며 말하고 화장실을 나갔다.

“너무 작군요.”

물론 서양인 특유의 큰 체구를 가진 여자에 비하면 전체적인 느낌은 작겠지만, 초면에 평가라니.

“예의 없는 여자네.”

연하는 중얼거렸다. 밖에서 여자가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아참, 들을 수 있지.’

그제야 생각했지만, 머리끄덩이라도 잡으러 온다면 먼저 무례하게 군 쪽은 그쪽이었으니 상대해줄 생각이었는데 여자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연하도 화장실을 나왔다. 그런데 복도에 렉스가 서 있었다. 그제야 여자가 멈칫한 게 그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자는 렉스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자리에 멈춰 있었다.

“소장님.”

연하에게는 뒷모습만 보이는 여자가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불렀다.

“대단하군요. 소장님을 바로 움직이는 존재란.”

“로스.”

여자는 웃는 것 같았다.

“시몬 드무스티에입니다. 안나 로스는 죽었죠. 낙원에서 쫓겨나면서요.”

렉스는 큰 감흥이 없는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네가 필립을 죽였으니까.”

연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죽였다고……?

‘그럼 설마…….’

여자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필립은 죽지 않았어요.”

그리고 자신의 가슴께를 짚었다.

“이 안에 있죠. 내가 모조리 마셔 버렸으니까.”

뒷모습이지만, 여자에게서는 어마어마한 악기가 느껴졌다. 여자는 흘긋 연하를 돌아보았다.

“기회를 주셨다면, 저 자리는 제자리였어요. 전 감염을 이길 자신이 있었으니까요. 실제로도 이겼고요.”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 없어, 연하는 미간을 좁혔다. 여자는 다시 렉스를 보았다.

“보호받는 온실 속의 화초……. 그런 게 먹힐 시대는 지났잖아요.”

여자는 렉스를 지나쳐 가면서 말했다.

“하지만 긴장하지 마세요. 오늘은 취임을 축하해 드리러 왔을 뿐이니까요.”

여자는 먼저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이어서 1층으로 내려가면서 두 사람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아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리라.

느낌이 좋지 않았다.

특히 연하로서는 지금 자신이 들은 게 무슨 의미인지 알 길이 없었지만, 그런 것 전에 무언가 일이 일어나려 하고 있다─ 그런 느낌을 받았다.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이반은 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지닌 미남과 함께 서 있었다.

여자는 계단 아래 잠깐 멈춰 섰다. 그리고 숨을 깊게 들이쉬는 것 같았다. 마치 무언가를 결심하듯.

왜인지는 모르지만, 그 순간에 연하는 깨달았다.

‘국장을 좋아하는구나, 저 여자.’

여자는 나아갔다.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이반은 돌아보았다. 특별히 렉스 같은 무표정은 아니었지만, 그의 눈에는 어떤 감정도 뚜렷이 떠오르지 않았다.

여자는 마치 왕의 간택을 기다리는 후궁처럼 그의 시선을 받았다. 마침내 입을 열려고 하는데,

“무슨 짓을 꾸미고 있지?”

이반이 차가운 미소로 물었다. 시몬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청력 반경이 압도적으로 넓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애석하게도.”

시몬은 오랜 세월을 기다려 그에게 처음으로 건네는 말이란 게 고작 이런 것인가 싶어 허무한 마음마저 들었다.

“제가 아닙니다.”

이반은 사람들 너머 렉스를 보았다. 그 의미를 깨달은 렉스는 바로 몸을 돌리려고 했다.

“소장님.”

연하는 다급하게 불렀다. 렉스는 돌아보았다.

“저도 가겠습니다.”

렉스는 이반을 보았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빠르게 사라지는 두 사람을, 경호 업무를 맡은 대원들 몇이 주변을 둘러보고 따랐다.

“저는 말리려고 했습니다만.”

이반 앞에 서 있는 시몬이 말했다.

“로스.”

시몬은 숨길 새도 없이 어깨가 움찔했다.

꿈에서도 다시 듣고 싶지 않은, 찌꺼기 같은 이름이었지만, 무엇이든 그가 불러줬다는 것만으로도 미련한 가슴은 환희로 찼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언젠가는 내게 변명이 아닌 걸 들고 와야 할 거야.”

이반은 돌아서 갔다.

서 있는 뒤로 하인리히가 고개를 기울였다.

“당신은 거짓말쟁이로군요, 안나 로스.”

시몬은 무표정하게 돌아보았다.

“제 이름은 시몬입니다.”

하인리히는 웃는 얼굴을 풀지 않았다.

시몬…….

‘왜일까.’

예수를 세 번 부정했지만 결국 스승을 위해 교회를 세운 시몬 베드로의 이름이 생각난 이유는.

* * *

‘사실 꿈을 꿨던 건 아닐까.’

규하는 창문을 보며 멍하니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그런 남자가 현실일 리 없잖아. 그래, 내가 꿈을 꿔도 너무 양심 없는 꿈을 꾼 거지.’

규하는 핸드폰을 들었다. 까만 액정은 거울처럼 그녀를 비추었다.

렉스는 한 번도 먼저 연락한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연락할 일 따위 없었다. 사실 기대하지도, 원하지도 않았다. 꺼지라고 소리친 건 자신이니까.

그런데도 그녀는 시간만 나면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미련한 여자 뽑기 대회 같은 건 없나. 지금이라면 1등을 할 자신도 있는데.’

와글와글. 시끌시끌.

규하는 꾹 관자놀이를 짚었다.

“와, 나. 이놈의 애새끼들…….”

규하는 벌떡 일어났다.

“이것들이!”

정신없이 떠들고 장난치던 아이들이 멈칫하고 동시에 규하를 보았다. 당장에라도 소리치려고 했던 그녀는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다 안전벨트 맸어?”

“네!”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하나라도 안전벨트 안 맸으면 죽는다.”

“다 맸어요.”

규하는 의자에 무너지듯이 앉아 중얼거렸다.

“그래, 저 혈기왕성한 것들이 이때 아니면 언제 맘껏 떠들어보겠어.”

그리고 선생이 웃고 떠들 마음이 없다고 녀석들이 무슨 죄랴.

버스는 막 다리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런데 길가에 남자가 서 있었다.

규하는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남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여기는 자동차 전용인데.

‘위험할 텐데…….’

그런 생각하는데, 버스가 남자 앞을 지나갔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비웃음을 머금은 눈이 멀어졌다.

규하는 앞을 보았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건 단순히 ‘좀 이상한데.’ 싶은 막연한 생각이 아니었다. 본인도 이해되지 않을 만큼 압도적인 직감이었다.

규하는 저도 모르게 외치고 말았다.

“멈춰요!”

그 순간에 놀라 제 입을 막았지만, 운전기사가 백미러 너머로 황당한 눈빛을 던졌다.

“에?”

규하의 말에 아이들이 놀라 웅성이기 시작했다.

“선생님?”

규하는 아이들을 불안하게 만들면 안 된다는 걸 알았지만 진정할 수가 없었다.

어쩐지…….

‘그날 같아.’

그날, 열차 내부는 조용했다. 열차가 선로를 달리는 소리와 진동이 희미하게 전해질 뿐이었다.

통로 건너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뒤척이는 소리, 코를 훌쩍이는 소리, 짐칸에 올려놓은 가방의 끈이 흔들리며 탁탁 부딪치는 소리…….

그런데 왠지 모든 소리가 가깝게 다가오는 느낌에 규하는 고개를 들었다. 옆자리에 앉은 연하도 그녀를 보았다.

“왜 그래?”

연하가 물었다.

“아니, 그냥.”

그녀는 기분 탓이려니 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에 세상이 거꾸로 뒤집어지는 것 같은 충격과 함께 열차가 넘어졌다.

따르릉.

갑자기 핸드폰 벨소리가 울려, 규하는 흠칫 정신을 차렸다.

옆자리에 놓아둔 핸드폰에 모르는 번호가 떠 있었다.

‘설마.’

내 인생에 그런 일이 또 있으려고.

규하는 애써 생각했다.

어쨌든 평소라면 렉스가 아닌 걸 알면서도 그일까 싶어서 정신없이 받았을 테지만, 이제 그런 소모적인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규하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

[멈추세요.]

렉스였다.

“뭐?”

[버스를 멈추세요.]

규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가 버스에 탄 건 어떻게…….”

전화가 끊겼다. 단 1초도 낭비할 시간이 없다는 듯.

규하는 핸드폰을 보았다.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머릿속에 엉망으로 뒤엉킨 실타래를 강렬한 직감 하나가 관통했다.

‘이건 기분 탓이 아니야.’

“멈춰요!”

버스 기사는 미친년 보듯이 그녀를 보았다.

“여기서 어떻게 멈춥니까?”

“멈추라고 했잖아요!”

규하는 급한 대로 물병을 잡아 던졌다. 앞창에 물건이 날아와 부딪치자, 깜짝 놀란 운전기사는 브레이크를 밟았다.

한창 달리던 버스가 갑자기 속도를 늦추자, 뒤따라오던 차들이 거세게 경적을 울렸다.

운전기사는 사나운 눈빛으로 백미러를 쳐다보았다.

“미쳤……!”

그 순간이었다. 앞에서 엄청난 폭발이 일었다.

두쿵.

진동과 폭음이 뼛골까지 울려왔다.

불꽃과 함께 앞차들이 마치 장난감처럼 날아갔다. 연이어 퉁, 퉁, 다리 철골구조물의 버팀대와 들보에서도 폭발이 일어났다.

경악한 운전기사가 온 힘을 다해 브레이크를 밟았다.

불꽃과 검은 연기가 버스를 덮쳤다. 갑자기 바닥이 사라진 듯이 버스가 쑥 꺼지면서 앞으로 쏠렸다.

아이들이 목이 째져라, 비명을 내질렀다.

쿵.

반동과 함께 버스가 멈추었다. 장막 같은 검은 연기가 걷히면서 버스 앞 유리에 전면 풍경이 비쳤다.

규하는 날숨을 삼켰다.

아직도 무너져 내리는 다리의 잔해와 여기저기 떨어지는 앞차들, 파리지옥처럼 입을 벌린 강물.

아이들의 비명은 멈추지 않았다.

규하는 고개를 돌렸다. 버스가 거의 45도로 기울어 있어 뒤에 앉은 아이들이 높이 있는 모양새였다.

“다 조용히 해!”

평소에는 목이 쉬도록 소리쳐야 겨우 말을 듣는 아이들이 한꺼번에 입을 다물었다. 짧고 굵은 외침에서 심상치 않은 것을 들었기 때문이리라.

“다들 제 짝이 무사한지 확인해.”

히끅히끅 겨우 억누른 울음 사이로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다친 사람 있어?”

“어…… 없어요.”

규하는 다시 유리 너머를 보았다.

“아무도 움직이지 마. 아무도.”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뭐 때문에 버스가 멈추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 끊어진 다리 단면의 잔해에 걸린 것 같았다. 아까 속도를 늦추지 않았더라면 앞차들처럼 강물을 향해 뛰어들고 있었을 것이다.

폭발은 마치 그들이 탄 버스를 기다렸던 것 같았다.

“곧 구조하러 올 거야. 곧…….”

그때였다. 밖에서 자동차가 스키드마크를 내면서 미끄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규하는 깜짝 놀랐다.

이어서 들려오는 소리는, 총성이었다.

무언가 움직이는 표적을 따라가는 것처럼 연달아 울리는…….

밖에서 사람들이 소리치고 달려가는 소리, 그리고 다시 울부짖기 시작한 아이들의 소리가 섞여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12년 전 악몽이 재연되는 것처럼.

다리의 폭발과 총소리…….

이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테러였다.

규하는 깨달았다.

규하는 운전기사를 보았다. 그는 다리를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온 힘을 다해 브레이크를 밟느라 다리 인대를 다친 것 같았다. 그녀를 도와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규하는 이제 비명도 지르지 못하는 아이들을 보고, 결심했다.

‘이번엔 안 돼. 어림없어.’

규하는 안전벨트를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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