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OUTBURST (2)
메시지는 힘이 느껴지는 명필로 쓰여 있었다.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어차피 얼마 가지 않을 자리긴 하지만 즐기세요.>
“셀레나가 전해달라더군요.”
렉스가 말했다. 이반은 피식 웃었다.
사실 셀레나는 그가 국장으로 가는 걸 반대했다. 그냥 연하를 데려오면 되지 않느냐고. 12년 전에 연하를 ISLE에 데려오지 않는 것부터 반대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반은 카드 아래쪽을 보았다.
<선물은 이바노프 씨가 좋아하실 것 같아 보냅니다.>
“선물?”
고개를 들고 묻자, 렉스는 탁자를 가리켰다. 아까 사람들이 보낸 선물이라고 이것저것 들여놓은 선물 더미 사이에 납작한 박스가 하나 있었다.
이반은 은회색 박스를 열어보았다. 그리고 의아하기 그지없는 얼굴이 되었다.
박스 안에 곱게 포개져 있는 것은 검은 실크 드레스였다.
“예쁘긴 하다만 설마 이걸 나한테 입으라고 보낸 건 아닐 거고…….”
그러고 보니 카드 접힌 안쪽에 말이 더 있었다.
<강 상사님이 좋아하시면 이바노프 씨도 좋아하실 테니까요.>
이반은 카드를 가리켰다.
“이 녀석 뭐 알고 있어?”
“모르겠습니까?”
“알게 뭐가 있는데? 아무것도 안 했는데.”
렉스는 무표정하게 있더니, 갑자기 말했다.
“기다리신다고 하셨는데.”
이반은 돌아보았다.
“강 상사가 나중에도 이바노프 씨를 선택할 거란 생각은 섣부른 것 같군요.”
이반은 눈썹을 추켜들었다. 렉스가 이런 이야기를 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일 당장에라도 어떤 남자와 살림을 차릴 수도 있겠죠. 그게 인간 남자라면 다행이지만, 뱀파이어라면 어떡하실 겁니까? 아무리 기다려도 안 죽는다고 죽이실 겁니까?”
이반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렉스는 개의치 않았다.
“인간 남자여도 강 상사가 그 남자를 평생 잊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외로워서 차선책으로 이바노프 씨를 찾을 순 있어도 말이죠.”
“차선…….”
이반은 황당해서 저도 모르게 따라 말하다가 말을 멈추었다. 렉스는 무표정하게 그를 마주 보았다.
“영원히 산다고 해서 영원히 기회가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침묵이 흘렀다.
“너…….”
이반은 미간을 찌푸리고 말을 꺼냈다. 렉스는 기다렸다.
“머리는 역시 실연당한 사람 같아.”
* * *
렉스는 방을 나왔다. 복도를 지나자, 엘리베이터 앞에 연하가 기다리고 있었다. 숨소리가 들려서 기다리고 있다고 알고 있었다.
“내려가세요?”
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하는 내려가는 버튼을 누르고 말했다.
“떠나신다고요, 오늘.”
“네. 대체인력이 오늘 도착합니다.”
연하는 목례했다.
“감사합니다. 지켜주셔서.”
상황이 어쨌거나 그 순간 제 감정에 솔직한 걸 보니 역시 규하와 한 핏줄이었다.
“딱히 강 상사를 위해 한 일은 아닙니다.”
“알아요.”
그러고서는 침묵 속에서 엘리베이터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연하가 작게 말했다.
“그래도 안 돼요.”
렉스는 반응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그 본인이 잘 알고 있는 이야기를 또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연하가 꿍얼거리듯이 덧붙였다.
“소장님은 애인이 있으시잖아요.”
뒤늦게 기억났는데, 그는 루아스인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렉스는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제가요?”
“네.”
렉스는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었다. 순박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이라, 연하는 시치미를 떼는 거라면 연기대상감이라고 생각했다.
“다들 알고 있던걸요. 셀레나 씨라고.”
렉스는 기가 막혔다.
“셀레나는…….”
어디서부터 아니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너무 터무니없는 오해에 설명할 의지마저 잃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클리엔테스 같다……고 해두죠.”
어쨌든 그와 ISLE의 관계는 대외비니까 이 정도로 이야기해 둘 수밖에 없었다. 연하가 모든 걸 알기 전에는.
다만 그 스캔들이 여기에까지 영향을 미칠 줄은 몰랐다.
“그래……요?”
연하는 어색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어조가 너무 강경해서, 더 의심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해서 둘은 올라탔다. 렉스는 갑자기 그녀를 돌아보고 물었다.
“설마 그것 때문에 반대한 겁니까?”
“아뇨. 뭐, 루아스이기도 하시고…….”
“강 상사와 같죠.”
“나이도…….”
“이바노프 씨보다는 어립니다.”
“네? 네.”
그쪽 나이 차이에 비하면 이쪽이 그런 말을 들을 입장은 아니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연하는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렉스는 이런 이야기가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닫고 다시 침묵을 지켰다.
엘리베이터가 거의 1층에 닿을 때쯤 연하가 물었다.
“파트로네스가 있다는 건 어떤 느낌이에요?”
“글쎄요……. 저도 수십 년 만에 뵌 거라.”
연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는…….”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해서 두 사람은 내렸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서로 마주 보았다.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는 가족이 아닙니다. 같은 감염원을 가졌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했을 뿐이죠. 특히 이바노프 씨는 클리엔테스를 두지 않는 걸로 유명하죠. 잠깐 다 같이 지낸 적이 있긴 합니다만…….”
렉스는 필립과 안나를 생각했다. 그로서도 정말 가족을 가진 것 같았던 순간을.
연하는 뒷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둘째가 사고로 죽고 다시 뵌 건 불과 얼마 전입니다.”
“아…….”
연하는 숙연한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렉스가 말을 잇지 않자 연하는 그를 보았다.
“세 번째도 있어요?”
렉스는 그녀를 똑바로 보았다.
“네. 있습니다.”
설마 그게 자신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하는 얼굴로 연하는 웃었다.
“부럽네요.”
“파트로네스가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까?”
“아뇨. 딱히?”
연하는 단번에 대답했다. 이반에게 미안해질 정도로.
“기증자가 어떤 사람일까 궁금한 적은 있지만 결국은 모르는 사람이고……. 좋을 것까지 있나? 뭐, 그 정도 느낌이에요.”
그때 무전이 들어왔는지 연하는 대답했다.
“여덟, 갑니다.”
그리고 연하는 렉스를 다시 보았다.
“그럼 가볼게요.”
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하는 돌아섰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돌아보고 말했다.
“하지만 소장님이나 국장님이 파트로네스라면 좋을 것 같아요.”
‘역시 자매는 자매군.’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렉스는 생각했다.
저런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때 위로 올라갔던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이반이 내렸다. 꽤 차가운 표정으로.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군.”
그는 렉스를 지나 걷기 시작했다. 렉스는 따랐다.
“네 녀석이 안 된다고 깽판 치고 가려는 거면 다시 생각해.”
“강 상사도 어린애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이반은 어깨 너머로 그를 보았다.
“그건 내가 제일 잘 알아.”
렉스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런데 왜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으십니까? 12년 전이라면 모르겠지만, 강 상사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나이가 됐습니다.”
이반은 기막혀하며 돌아섰다.
“언제부터 연하의 대변인으로 취직했어?”
아마 규하와 연하의 상황이 겹쳐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둘 다 자신의 인생을 뒤흔들 수 있는 정보에서 배제되어 있었고, 규하는 알았다. 그리고 그녀는 선택했다.
그에게는 최악의 결과지만, 연하도 응당 그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처음에 분명히 말하지 않았나? 무섭다고.”
이반은 말했고, 렉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진심이었습니까?”
이반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이었다.
“대체 내 말 어디가 농담으로 들리는지 좀 말해주지 않겠어?”
렉스는 잠깐 그를 보았다.
“당신은 이반 이바노프가 아닙니까?”
고대로부터 존재해온 흡혈귀 형제단 ‘흐샤야르샤’의 전 수장.
그리고 인간이었을 때 이미 왕 중의 왕, ‘샤한샤’로 불렸던 남자는 태연히 말했다.
“이반 이바노프는 수많은 이반들 중 하나일 뿐이니까.”
아무개나 다름없는 이름이 그 나름대로의 해학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고양이가 호랑이가 될 수 없듯이, 호랑이도 고양이가 될 수 없는 법이었다.
“강 상사가 이제 와서 왜 자신을 뱀파이어로 만들었느냐고 탓할 것 같진 않습니다만…….”
“아니.”
이반은 단호했다.
“그냥 파트로네스에 불과해질까 봐 무서웠던 거겠지.”
아까는 드물게 당황해서 말을 돌려 버리고 말았다.
렉스는 물끄러미 그를 보았다.
“애초에 기다릴 생각 따위 없었던 것 같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반은 탓하듯이 렉스를 보았다.
“그래도 노력 중이었는데 말이야.”
* * *
연하는 벽 앞에 서서 사람들을 훑었다.
하나 같이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서로 웃으며 인사를 나누었다.
사람들은 곳곳에 위치한 경호원들을 석상쯤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어서 그들이 쳐다보는 시선은 거의 의식하지 않았다. 그래서 연하는 특별히 시선을 숨기지 않고 그들을 관찰했다.
이반은 멀리서 그 모습을 보았다.
‘확실히…… 연하가 나중에 내게 올 거라 생각했던 건 막연한 자신감이었는지도 모르지.’
연하는 눈앞에 있는 것에서 눈을 돌리는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그때 역시 정장을 입은 도영이 연하에게 다가가 무어라 말했다. 연하가 고개를 끄덕이자 도영은 지나갔다. 근무 중이어서 그런지 둘 다 사무적인 느낌이었다.
왜인지 렉스가 말한 시나리오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연하가 다른 뱀파이어를 사랑하게 된다거나, 그녀가 사랑하게 된 남자가 우연한 기회에라도 뱀파이어가 된다거나.
그리고 그 남자가 죽지 않는다면…….
그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반은 조금 인상을 썼다.
매우 좋지 않은 생각을 할 뻔했다.
그런데 연하가 지나가는 여자들을 빤히 보고 있었다. 아주 빤히. 그래서 그도 지나간 여자들을 돌아보았다.
이런 장소에서는 으레 그렇듯이, 다들 한껏 꾸미고 있었다.
‘수상한 점이 있어서 그러는 것 같지는 않은데.’
아니라면 저렇게 꼬맹이가 사탕을 들고 지나가는 사람 보듯이 하진 않을 테니까.
어쩐지 하늘거리는 드레스 자락을 넋 놓고 보는 것 같았다.
지금 그의 방에 있는 어떤 물건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너도 입고 싶어?”
묻자, 연하는 놀라 돌아보았다. 여자들을 보느라 옆에 다가온 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아뇨.”
하지만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전 군인이니까요. 제게 맞는 건 이거예요.”
그래도 역시 여자는 여자구나 생각했는데, 역시 섣부른 판단이었던 모양이다.
하긴, 인간이었을 때 여자다운 차림을 즐겨 입었던 건 여자는 어때야 한다는 학습화된 고정관념 때문이었는지도…….
생각하는데, 잠깐 말이 없던 연하가 덧붙였다.
“단지…….”
연하는 그를 마주 보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볼이 은근히 붉었다.
“예쁘다고 생각했어요.”
눈치를 살피듯 흘긋 그를 보았다.
“국장님도 저런 걸 좋아하실까 하고.”
그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연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국장님?”
“아.”
이반은 깊은 생각에서 깨어난 듯싶더니, 조금 웃었다.
“자신에게 뭐가 어울리는지 아는 게 좋아.”
왠지 쑥스러워서, 연하는 인사하듯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반이 말하려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바노프 국장.”
이반은 돌아보았다. 그에게 말을 건 사람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디의 장관 같았다.
이반은 가면서 흘긋 연하를 보았다. 연하는 상기된 얼굴을 숨기려 애쓰고 있었다.
도대체가…… 저런 귀염성이라니.
렉스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저 모습을 셀레나가 봤다면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썸 타는 십대들 같네요.”
렉스는 시선을 옮겼다. 사람들을 훑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 보고 있는 것은 없었다.
양로원에서 그와 규하가 저렇게 보였을까 싶었다.
[여덟, 2층 여자 화장실 좀 확인해 봐.]
그때 무전이 들어와 연하는 자세를 풀고 계단을 올라갔다.
렉스는 바로 이반을 보았다. 이미 이반은 이쪽을 보고 있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고갯짓했다.
렉스는 계단을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