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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짐승-50화 (50/104)

50화. OUTBURST (1)

자동문이 다 열리기도 전에 연하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브리핑 룸에 있는 모두가 돌아보았다.

“규하는……!”

연하는 보기 드물게 사색이 된 얼굴이었다.

“어떻게……. 뭐가, 왜…….”

“진정해. 무사하니까.”

이반이 말했다.

“오히려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지.”

이반은 렉스를 돌아보았다.

“이 경우엔, 네가 근처에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해야 하나.”

연하도 오는 길에 이야기를 듣긴 했다. 소장이 트럭을 막았다고.

“증원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김 중령이 말했다.

“섣부른 증원은 위험합니다. 특히 이 경우에는 경호 대상이 그렇게 눈치가 느린 편이 아니어서 말이죠. 하지만 일단…….”

이반은 렉스를 보고 말했다.

“넌 중앙사단으로 돌아가.”

렉스는 짐작했는지 별로 놀라지 않았다.

“경호는…….”

“없이도 잘 살았어.”

이반은 차가웠다.

“대체인력이 올 수 있게 허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렉스는 그렇지 않다면 절대 가지 않겠다는 투였다.

“어쨌든 제 파트로네스를 이대로 경호도 없이 두고 갈 수 없습니다.”

모두 깜짝 놀랐다. 소장이 경호하는 걸 보고 다들 어느 정도 짐작하긴 했지만, 설마 정말 그럴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연하도 둘을 새삼스럽게 보았다.

‘소장님의 파트로네스였구나. 국장님.’

이반은 렉스를 보다가 팔짱을 풀었다.

“좋아. 하지만 최대한 서두르라고 해. 네가 또 무슨 사고를 칠지 무서워지니까.”

이반이 렉스 앞을 무심히 지나 밖으로 나섰다. 사람들도 웅성거리며 하나둘씩 흩어졌다.

렉스도 돌아서서 나가다가 뭔가 생각난 듯 연하를 돌아보았다.

“강 상사.”

연하가 보자, 어떤 물건을 바지 주머니에서 꺼내 건넸다.

“이건 뭐…….”

말하면서 만지작거리다 버튼을 누르자 허공에 홀로그램이 떴다. 규하였다. 막 고개를 돌리는 것 같은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뭐야, 웃긴 표정…….”

연하는 십여 년 만에 바로 눈앞에서 보는 것 같은 제 쌍둥이를 울듯이 웃는 눈으로 보았다.

“선물입니다.”

연하는 조용한 붉은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하지만 소장님께 준…….”

“그걸 가질 자격이 있는 건 강 상사 쪽이니까요.”

렉스는 돌아서서 갔다. 연하는 그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정말 규하를 좋아하셨던 걸까…….’

솔직히 여태까진 믿지 않았다. 니스타르에 대한 호기심 같은 거라고 믿었다.

그는 눈이 붉은 흡혈귀고, 대단한 군인이니까. 인간을 정말로 좋아할 리 없다고…….

어쩌면 동족인 그녀마저도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알렉스 야크트훈트 소장’이 아닌, 그녀가 아는 ‘렉스’라면 그런 식으로 생각할 리 없다고 알면서도 말이다.

물론 잘 알 만큼 많은 대화를 해보진 않았지만, 진중한 눈빛은 그가 어떤 남자인지 충분히 알게 해주니까.

연하는 카메라 장난감을 보았다.

‘정말 진심이었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어.’

규하의 목숨이나 평화로운 일상과 저울질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 * *

“무슨 생각이십니까?”

시몬은 한쪽 허리에 손을 얹고 서 있었다. 소파에는 대공이 방학을 맞은 학생처럼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널브러져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책은 정말 시간이 많을 때나 읽는, 대충 써낸 공상과학소설이었다.

“즐거워 보이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아서.”

대공은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심술궂은 웃음을 지었다.

“강규하를 죽일 생각은 아니었군요.”

“아니면 사냥개가 근처에 있을 때 그랬겠어?”

시몬은 책을 읽는 그를 빤히 보았다.

‘뭔가를 꾸미고 있군.’

생각했지만, 별말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가 날뛰면서 시선을 끌어줄수록 다른 쪽 일을 진행하기 쉬워질 테니.

‘그러고 보니 취임식을 한다고 했지.’

시몬은 기억해 냈다.

시선을 돌리기 위해서는, 이쪽도 한 번 얼굴을 내비쳐 줘도 좋을 것이다.

“왜 그런 얼굴이야?”

대공이 갑자기 말해 시몬은 정신을 차리고 보았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꼭 졸업식 무도회 가기 전날 고등학생 같은 얼굴이라서.”

시몬은 의외라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런 것도 아십니까?”

대공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이었다.

“누굴 외계에서 갓 떨어진 바이러스 덩어리로 생각하는 거야? 가본 적도 있어. 고등학생인 척하고. 꽤 즐거웠어. 춤도 추고, 거기서 만난 여자애랑 뒤뜰에서 키스도 하고.”

시몬이 쳐다보고 있자 대공은 어깨를 으쓱였다.

“다들 하더라고. 무슨 느낌인가 궁금해서. 별 느낌은 없었지만, 여자애는 좀 귀여웠어.”

“그래서 죽였습니까?”

시몬은 무표정하게 물었다.

“응. 되살아나면 클리엔테스 삼아주려고 했는데 매가리없이 가버리더라고.”

대공은 머리 아래 한 팔을 받치고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이바노프, 곧 취임식을 한다고 했지? 취직하더니 남들 하는 짓은 다 하려고 하는군.”

그가 그래서 취임식을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시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공은 뭔가 생각하는 얼굴이더니 휙 그녀를 보았다.

“시몬. 취임식에 다녀와.”

시몬은 눈썹을 추켜들었다.

‘이건 또 무슨…….’

대공은 빙긋이 웃었다.

“오랜만에 이바노프를 볼 수 있는 기회잖아? 선물이야.”

* * *

금발 남자가 곁을 지나갔다. 규하는 흠칫 돌아보았다.

낯선 외국인은 의아한 듯이 그녀를 보았다. 하지만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닌 듯하자 그는 다시 제 갈 길을 갔다.

규하는 외국인이 가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선생님?”

윤재가 불러 규하는 정신 차렸다.

“응?”

“애들 전부 탔는데요.”

윤재는 뒤에 서 있는 버스를 가리켰다. 버스 앞 유리에는 ‘혜문 고등학교 1-4반’이라고 쓰인 패널이 붙어 있었다.

“그래.”

수학여행이고 자시고 놀러 갈 기분 따위 나지 않는 선생과는 관계없이, 아이들은 물구나무를 설 정도로 신나 있었다.

안에서 뛰고 소리치는 아이들 때문에 버스가 흔들거리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가자.”

규하는 한숨을 삼키고 걸음을 옮겼다.

* * *

연하는 복도를 둘러보았다.

호텔 복도는 조용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대원에게 눈짓으로 인사하고 복도를 걸어갔다. 방문 앞에도 검은 정장을 입은 대원 두 명이 서 있었다.

역시 눈짓으로 인사하고 둘 중 하나가 열어주는 문으로 들어갔다.

“국장님.”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갔다가 연하는 놀랐다. 호텔방 한가운데 놓인, 그야말로 거대한 화환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반은 그 앞에 서 있었다. 머리는 쓸어 올렸고, 아직 상의를 입지 않은 검은 정복 차림이었다.

불빛이 넘실거리는 서울의 야경을 배경으로 그가 숨 막히도록 커다란 화환 앞에서 카드를 읽고 있는 모습이란, 뇌리에서 떠날 것 같지 않았다.

그가 돌아보았다. 낮고 침착한 눈이 그녀를 똑바로 보았다.

오늘은 경호 근무 때문에 입은 검은 정장과 한 갈래로 묶어 올린 머리까지 꼼꼼히.

연하는 최면에서 깨어나듯 정신을 차렸다.

“아, 시간이 돼서요.”

이반은 벽시계를 보았다.

“그래.”

그리고 카드를 내려놓고 상의를 입었다.

“어.”

갑자기 연하가 놀란 소리를 냈다. 그녀는 카드 봉투의 발신인을 보고 놀란 눈치였다.

“제노아틱스에서 보낸 거예요?”

연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화환을 보았다.

“그런 큰 회사에서 화환을 보내다니 대단하네요.”

그가 피식 웃어, 연하는 궁금해하는 얼굴로 돌아보았다.

그야말로 백지 같은 얼굴을 보니 시끄러웠던 속이 편해지는 느낌이었다.

“거기 넥타이 좀 줄래?”

연하는 옆 의자 등받이에 걸쳐져 있는 넥타이를 보았다.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이반은 받아들고 와이셔츠 칼라를 펴 올린 뒤 능숙한 손길로 넥타이를 매기 시작했다.

연하는 이반을 빤히 보았다. 그가 거울 너머로 의미를 묻듯이 그녀를 보았다.

“국장님 오늘 멋있으세요.”

그녀는 쑥스러운 듯 웃으며 덧붙였다.

“평소에도 멋있으셨지만.”

넥타이를 매는 손이 멈추었다.

아무런 사심 없이 부딪쳐 오는 누군가의 진심이 너무 낯설어서, ‘아, 이런 것도 존재했지.’라고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이반은 전신거울의 윗부분을 잡고 돌아서서 그녀를 마주 보았다.

“멋있다는 건 어떻게?”

“네?”

생각지 못한 질문이었는지 연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이 까맣고 털이 하얀 토끼 같았다. 너무 귀여워서 손이 근질거렸다.

‘조금만 쓰다듬어 보는 건 괜찮지 않을까.’

이반은 저도 모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주……?”

연하는 스스로도 이 대답이 맞는지 의심스러워하며 대답했다.

“그런 설명으로는 잘 모르겠어.”

“어, 그게…….”

연하는 어물거렸다. 저도 모르게 우러난 칭찬 한마디가 이렇게 곤란한 상황을…….

그런데 즐거워하는 그의 눈을 보고, 바로 부루퉁한 얼굴이 되었다.

“또 놀리시는 거죠?”

“아니.”

“아니긴요. 분명히 놀리시는 거…….”

그는 그만둬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입은 저절로 지껄이고 있었다.

“듣기 좋아서. 네가 칭찬해 주는 거.”

그런데 이번에 연하는 눈을 거의 화등잔만 하게 뜨고 쳐다볼 따름이었다. 거의 메두사라도 본 것 같은 반응이었다.

이반은 조금 난감한 웃음을 지었다.

“그건 무슨 반응이야?”

연하는 애써 정신을 차렸다.

그러니까, 도저히 이 얼굴, 이 목소리, 이 말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지 해석하느라 뇌에 과부하가 와서 잠깐 모든 반응체계가 꺼졌다.

‘내가 뭘 모르긴 하지만…….’

보통 아무 사이도 아닌 여자에게나 일개 하급자, 동족이라는 것 외에 공통점이라고는 없는 상대에게 이렇게 묘한 여지를 주는 말을 하나 싶었다.

게다가 이런 꿀이 배어날 것 같은 얼굴, 유혹하는 것 같은 목소리라니…….

‘너무 나 좋을 대로 해석하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일개 하급자에게 이럴 것 같지는 않았다. 국장이 여자라면 가리지 않는 난봉꾼이 아닌 한.

그리고 국장에 대한 여자들의 총평은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아서 오히려 아쉽다.’ 쪽이었다.

“국장님.”

연하는 결심한 듯이 고개를 들었다.

“저…….”

그런데 연하가 입을 연 순간, 무전이 들려왔다.

[이상 없음.]

그녀가 근무 중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소리였다. 연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그때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연하는 돌아보았다.

코트 아래 정복을 입은 사람이었는데, 모자 때문에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연하는 별이 두 개 박힌 견장을 보고 반사적으로 거수경례했다. 그리고 나서야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렉스 씨?”

첫 번째로 놀란 이유는 그가 너무 ‘소장’다운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머리 자르셨어요?”

그리고 두 번째는 머리가 짧았기 때문이다. 모자도 모자지만 그래서 처음에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 소장님.”

놀라서 평소처럼 말하고 나서야 지금이야말로 그래선 안 된다고 깨닫고 말을 고쳤다.

이반은 연하에게로 기울어져 있던 몸을 들었다.

“나중에 이야기하자.”

“아, 네.”

안 그래도 이 방에 별이 너무 많아 얼른 나가고 싶었다. 가끔은 옆집 사람들처럼 친근하게 느껴지지만, 역시 둘 다 까마득한 상급자인 것이다.

연하가 나가자, 렉스가 안주머니에서 카드 봉투 같은 것을 꺼내 건네주면서 말했다.

“연방 FDA에서 가네샤의 승인 요청을 기각했습니다. 표본 범위가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라는군요.”

이반은 봉투를 받아들고 미간을 좁혔다.

“그럴까 봐 모두 지켜서 제출하지 않았어?”

“그쪽에도 로스의 입김이 닿은 것 같습니다. FDA 국장 장인의 대학 후배가 그쪽 형제단 소속이라는군요.”

이반은 ‘아’ 소리를 내고는 봉투를 가볍게 흔들었다.

“장인의 대학 후배까지는 미처 체크하지 못했군.”

비꼬는 걸 알면서도 렉스는 여전히 진지했다.

“푸거-들뢰크와 염문도 있고 인간들 쪽은 로스가 꽉 쥐고 있군요.”

“어쨌든 하이마를 개발하는 데 일등공신이었으니까.”

이반은 넥타이를 모두 매고 거울 속 자신을 보았다.

“인간 쪽 유력 인사가 포진한 형제단의 집사라……. 하나는 인정해 줘야겠군. 제대로 배웠다고.”

“우리가 뿌린 씨앗은 우리가 거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반은 무심한 얼굴로 카드 봉투를 열었다.

“로스는 현신일 뿐이야. 인간들이 바라고 희망하는 욕망의 현신. 로스가 아니었어도 그 자리는 누가 채워도 채웠을 테지.”

금박이 박힌 고급스러운 카드를 꺼내 펼치면서 말했다.

“결자해지는 해야겠지만, 인간이 인간인 한 이 아수라장은 계속 반복될 거야. 지금까지 쭉 그래왔듯이.”

이반은 시선을 카드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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