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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짐승-49화 (49/104)

49화. 매화가 피는 풍경 (5)

규하는 정신을 차렸다.

“잠깐만.”

규하는 가방을 뒤져서 핸드폰을 꺼냈다.

“네, 여보세요?”

규하는 상대가 하는 말을 잠깐 듣고 있다가 깜짝 놀랐다.

“뭐? 알았어. 금방 갈게. 거기 꼼짝 말고 있어.”

규하는 다급하게 그를 보았다.

“미안해. 먼저 가볼게. 우리 반 애들이 불량배들 싸움에 휘말린 것 같아. 지금 경찰서에 있다네.”

렉스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규하는 급하게 돌아섰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난 듯 돌아보았다.

“잠깐, 너 전화번호……. 아니, 연락해. 알았지?”

연락처를 받을 시간이 없을 만큼 마음이 급하지만, 그 대답만은 들고 가야겠다는 듯 그를 보았다. 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규하는 안심한 듯이 바로 큰길가로 뛰어나가서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는 곧 시야에서 멀어졌다.

연락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드디어 결심할 수 있었다. 다시는 그녀 근처에 나타나지 않으리라고.

처음에는 화를 내고, 걱정하고, 불안해하겠지만, 종내에는 괜찮아질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늙어 반추해 봤을 때 그래도 인생에 좋았던 기억을 남겨놓고 사라진 미스터리한 남자가 하나 있어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그는 손에 남은 장난감 카메라를 보았다.

“대체 뭐 하시는 겁니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렉스는 돌아보았다. 휴일날 집 근처 슈퍼를 나온 것처럼 추리닝차림을 한 사십대 남자가 양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서 있었다.

아마 잘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시비를 건 불량배들은 제로팀의 솜씨일 것이다. 좀처럼 그가 규하에게서 떨어질 기미가 없자 손을 썼을 터.

“이건 징계감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남자는 표정이 묘해졌다.

“이해할 수가 없군요, 왜 하필 저분인지. 아니면 알고 싶으신 게 있습니까?”

“무슨 의미입니까?”

렉스는 그를 보았다.

“니스타르라면 뭔가 다를 거라고 생각하신다던가…….”

그랬을까?

첫째 날에는 그랬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신의 사도라고 하기에는 무엇 하나 특출 날 것 없는 규하의 인간적인 매력이 그를 매료시켰다.

미소, 성품, 위트……. 심지어 거친 말투도.

살기를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마저.

어쩌면 니스타르의 임무란 다른 것이 아닐지도 몰랐다. 수많은 다른 인간들처럼 평범하게 와서 살다가 평범하게 돌아가는 것.

그런 삶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

“어쨌든 아무리 소장님이셔도 이건…….”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이 없을 겁니다. 약속드리죠.”

남자는 말문이 막힌 것 같았다. 잔소리할 타이밍을 빼앗긴 부모처럼.

남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 여자는 많지 않습니까.”

나름 위로라고 하는 모양이었다.

렉스는 돌아섰다.

“지부에서도 생각보다 인기가 많으신 걸로…….”

렉스는 갑자기 멈칫하고 휙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의아하게 그를 보았다가 무전을 듣고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전방에 수상한 트럭 출현.]

렉스는 그대로 뛰어올라 사라졌다.

“소장……!”

그가 외치는 소리는 금세 멀어졌다.

순식간에 근처 건물 옥상에 올라온 렉스는 아래를 둘러보았다. 규하가 탄 택시는 금세 찾았다.

직진하는 택시 앞에 사거리가 있었다. 막 정지신호가 들어오려 했다.

택시는 신호에 걸리지 않기 위해 조금 속도를 높였다. 그리고 오른쪽 도로에서 달려오는 화물트럭도 속도를 높였다.

푸른 눈이 심각해졌다.

지금 힘을 써서 구한다면 규하는 그가 흡혈귀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럼…….’

반사적으로 생각한 렉스는 그런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렉스는 바로 다리에 힘을 주고, 뛰었다.

* * *

“하여간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지, 이 녀석들.”

규하는 투덜거리며 핸드폰 화면을 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싸움에 휘말렸을 경우에 대한 법적인 조언을 검색한 페이지가 떠 있었다.

빠앙.

그런데 멀리서 얼핏 소리가 들렸다. 규하는 눈을 들었다.

“어…….”

차창 너머, 거대한 화물트럭이 속도를 늦추지 않고 달려오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그녀의 자리부터 들이박을 각도였다.

하지만 절체절명의 순간에 누구나 그렇듯이, 어떤 반응도 하지 못했다. 단숨에 가까워지는 트럭을 멍하니 보는 것밖에는.

‘박는다─’

그녀는 마지막에도 태평하게 생각했다. 트럭이 거의 코앞이었다.

굉음이 났다.

안전벨트를 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충격으로 튕겨져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나마 그 정도 충격으로 무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트럭을 막아선 사람 덕분이었다.

규하는 눈을 크게 떴다.

‘뭐…….’

그가 양손으로 짚은 트럭 앞부분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우직, 우지직,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트럭은 조금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콰아아앙.

오히려 이를 드러낸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거세게 밀어붙였다. 타이어가 바닥에 스키드마크를 새기는 소리가 귀를 터뜨릴 것 같았다.

남자가 밀리면서 택시에 등이 닿았다.

드득.

택시 문이 안쪽으로 우그러지기 시작했다. 그 상태로 끝도 없이 밀려났다.

밖에서 온갖 파편들이 터져 올랐다. 하지만 너무 현실감이 없어서, 규하는 영화를 보듯이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익숙한 티셔츠를 입은 등에 근육이 무시무시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거대한 트럭이 옆으로 휘청거렸다. 말도 안 되지만, 남자가 힘으로 밀어낸 것처럼.

쿠웅.

트럭은 그대로 거인의 주먹처럼 땅을 치며 넘어지고, 택시는 더 밀려나서 크게 한 바퀴를 돌아 멈추었다.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위잉…….

귀에 이명이 너무 짙어서 규하는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일그러진 차 문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뜯겨 나가고, 가로수 빛이 쏟아졌다.

“괜찮습니까?”

다급함이 묻어나는, 낯익은 목소리와 함께.

규하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차 문을 뜯고 나타난 렉스를 더 이상 크게 뜰 수 없는 눈으로 쳐다볼 따름이었다.

뒤에서 쨍한 빛이 내리쳐 푸른 눈동자가 순간 붉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규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흡혈……귀……?”

순간 그의 눈에 스치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였다. 저편에 넘어진 트럭의 운전석 문이 날아갔다.

쾅.

그리고 트럭 운전사가 뛰어내려 차들을 밟고 사라졌다. 그쪽도 전혀 인간 같지 않은 몸놀림으로.

렉스는 번뜩 뒤를 돌아보았다.

저희는 떨어질 수 없습니다. 부탁드립니다.

그의 청력이 뛰어나다는 걸 이용해 경호원들이 멀리서 말했다.

“알겠습니다.”

“뭐?”

물론 그 말을 들을 수 없는 규하는 반문했다.

렉스는 그녀를 한 번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바로 고개를 돌리고 앞에 멈춰 있는 차를 밟고 올라갔다.

그리고 가볍게 뛰어오른 순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 * *

사전에 도주로를 확보해 놓고 철저하게 준비한 공격이었다.

그래도 평소라면 놓치지 않았을 테지만, 잠깐 주저한 것이 좁힐 수 없는 거리를 만들었다.

현장에 돌아오자 이미 경찰과 레커차, 구급차 등이 와 있었다.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경찰이 렉스를 막으려 했다. 그러자 그는 손목밴드를 들어 보였다. 뭔가 조회해보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석연찮았지만 손목밴드를 찍고 화면을 본 경찰은 깜짝 놀라더니 바로 길을 열어주었다.

그 모습을 규하가 모두 보고 있었다. 뒷문이 열린 구급차 앞에 서서 누군가와 통화하며.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렉스는 몇 걸음 떨어진 자리에 멈춰 섰다. 규하는 정신을 차린 듯 전화통화로 주의를 돌렸다.

“네, 부탁드려요. 그럼 다시 전화 드릴게요.”

규하는 전화 상대에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실소했다.

“인간이 얼마나 보고 싶은 대로 보는 동물인지 새삼 알겠네.”

오히려 왜 몰랐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는 어디로 보나 흡혈귀였다. 사람을 홀리는 아름다운 외모, 윤기가 도는 도자기 같은 피부, 큰 키…….

“흡혈귀라고?”

규하는 기가 막혀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인생은 결코 그가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다.

“죄송……?”

규하는 들불이 번지듯이 확 얼굴이 사나워졌다. 따귀를 때리려는 것처럼 손을 들었다가 멈칫했다. 그러고는 그냥 손을 거뒀다. 닿는 것도 무섭다는 듯이.

렉스는 눈이 어두워졌다.

규하는 눈에 고통에 가까운 감정이 어렸다.

“나는 널 좋아하게 됐어. 근데 이제 와서 죄송하다고?”

“죄송하다고 말씀드린 건 저에 대해 정확하게 말씀드리지 않아서입니다. 다른 것에 대해서 사과드린 게 아닙니다.”

규하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뭐가 이렇게 당당해? 넌 흡혈귀들이 내 쌍둥이를 죽였다는 말을 듣고도…….”

규하는 말을 멈추었다. 말을 꺼냈을 뿐인데도 마치 그날이 어제였던 것처럼 생생한 고통이 올라왔다.

이제는 무뎌졌다고, 그럴 때도 됐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흡혈귀들이 바로 내 눈앞에서 연하를 죽였어. 웃으면서.”

규하는 꾹 주먹을 쥐었다. 눈에 물기가 일렁였다.

“그러고는……!”

규하는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을 추스르는 것처럼 다시 숨을 삼켰다. 겨우 내는 목소리가 떨려왔다.

“심지어 넌 첫날부터 알고 있었어. 그런데…….”

렉스는 조용히 말을 듣고 있을 뿐이었다. 푸르고 깨끗한 눈동자…….

푸르고 깨끗한 연하가 떠올랐다.

“네 사정이 뭐였어도 신경 쓰지 않았을 거야. 세상천지 기댈 곳 없는 고아여도, 반대로 병든 어머니와 여덟 남매를 책임져야 하는 장남이었더라도…….”

렉스는 아무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미안해.”

규하는 갑자기 말했다.

“자신이 없어. 널 보면서 그날을, 그 흡혈귀들을 떠올리지 않을 자신이. 그러니까 사라져. 제발, 내 앞에서…… 내 인생에서…….”

이렇게 미련했다. 이런 결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꼭 결말을 봐야만 그만둘 수 있었다.

“미안해하지 마십시오.”

규하는 움찔했다.

“당신이 미안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렉스는 돌아섰다.

* * *

규하는 경찰서 문을 나섰다. 밖은 이미 어두웠고, 입구에서 국어 선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강 선생.”

“선생님, 애들은 어떻게 됐어요?”

규하는 그녀를 보자마자 물었다. 교통사고 조사 때문에 경찰서에 가야 해서 국어 선생에게 애들 쪽으로 대신 가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다 집에 보냈어.”

“뭐래요?”

“애들 문제는 심각한 건 아냐. 지레 놀라서 부모님에게는 연락을 못하고 강 선생한테 전화했던 모양이야. 상대 쪽에서도 합의하고 조용히 넘어가길 원하는 것 같더라고. 강 선생은 어때? 괜찮아?”

“네. 타박상 하나 없어요. 굉장하죠?”

규하는 웃었다. 국어 선생은 한숨을 내쉬었다.

“강 선생 어째 요즘 사고가 많네.”

규하가 대답하지 않자, 분위기가 조금 어색해졌다. 국어 선생은 좀 주저하는 것 같더니 말을 꺼냈다.

“저기, 말하기 좀 조심스러웠는데…… 강 선생 12년 전에 열차 사고도 겪었다면서?”

아무리 쉬쉬해도 소문은 나기 마련이라, 학교에서도 어지간한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다만 눈치를 보느라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언제 적 일인데.’

그렇게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오늘은 때가 좋지 않았다.

“남들은 평생 한 번 겪을까 말까 한 일인데, 어지간히 악운이 센가 보다.”

규하는 지친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요.”

규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밤거리는 조용했다. 기름진 어둠 속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무서웠다.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저 바깥을 배회하고 있는 느낌…….

불현듯 자신이 어둠 속에 혼자 서 있다고 깨달은 사람처럼 공포감이 밀려왔다. 경찰서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눈이 부실 정도로 밝았는데도.

“강 선생?”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받으며 국어 선생이 불렀다. 그 소리에 규하는 정신을 차렸다. 국어 선생은 미안해하는 미소를 지었다.

“내가 괜한 이야기를 했네. 미안해. 그러고 보니 그때 그 남자랑은 어떻게 됐어? 연락 안 왔어?”

국어 선생은 화제를 돌려보려는지 밝게 물었다. 규하는 웃었다. 그녀가 뭘 알겠는가.

“네. 안 왔어요.”

“그래? 아깝다.”

“그러게요. 악운도 운이라고 다른 운은 참 지지리도 없네요.”

국어 선생은 생각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울 것 같은 얼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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