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매화가 피는 풍경 (4)
“그래도 정말 알 수가 없네.”
규하는 고개를 저었다.
“뭐가요?”
“너 말이야. 이제 좀 알 만하다 싶으면 뭔가 새로운 점이 나오고, 또 알 만하다 싶으면 새롭고…… 뭐가 진짜 너인지 알 수가 없어.”
“보시는 그대로입니다.”
렉스는 똑바로 그녀를 보았다.
규하는 입을 다물었다.
가끔 그가 저렇게 보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식사 나왔습니다.”
그때 여자 웨이터가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전식을 각자 앞에 내려놓았다.
플레이팅이 예술작품처럼 아름다워서, 규하는 ‘요리도 예술’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실감했다. 망치는 게 아까울 정도였지만 한 입 떠먹자마자 탄성을 내고 말았다.
“맛있어.”
규하는 얼굴이 어린애처럼 밝아졌다. 단순히 맛있는 음식을 맛보는 것만으로도 삶의 기쁨 같은 광선이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다행이군요.”
렉스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규하는 예기치 못한 타이밍에 날아온 왕자님 미소에 심장이 덜컥했다.
‘……?’
물론 렉스는 그 소리를 들었고.
“응. 정말 맛있네.”
규하는 분분히 시선을 내리고 열심히 포크를 놀렸다.
‘어떤 부분에서……?’
렉스는 알 수 없어졌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체하며 식사하는 규하를 보며 생각했다.
‘하지만 나쁘지 않군.’
이럴 땐 자신이 인간이 아닌 게. 반응을 바로바로 알 수 있으니까.
규하는 갑자기 창밖을 보았다. 노을 지는 도시가 강처럼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그래도 살다 보니 이런 곳에서 식사하는 날이 다 나오네. 역시 똥 밭에 굴러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낫다는 건가.”
렉스는 흘긋 그녀를 보았다.
“보통 남자친구와 와보지 않습니까?”
규하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그거? 떠보는 거야?”
“아뇨, 딱히…….”
반사적으로 말하려던 그는 입을 다물었다.
“거침이 없으셔서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사실 그는 옛날 남자고, 사상적인 면에서는 많이 진보했어도 이런 연애라고 할까, 남녀 사이 일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거쳐 간 여성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의 인생에서 여성은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셀레나는 그런 그를 두고 ‘전형적인 워커홀릭’, ‘인간이었다면 과로사할 팔자’, ‘소장님을 사로잡은 걸 보니 일한테 성별이 있다면 절대 여자는 아니다.’ 라는 등 말했다.
규하는 다시 식사하면서 태연히 말했다.
“주저하면 사라져 버리거든. 특히 이런 세상에서는.”
규하는 어려서 가치관을 바꿀 정도로 엄청난 상실을 경험했고, 주변은 언제 발이 꺼져버릴지 모르는 불안한 지대였다.
“영웅의 조건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나?”
갑자기 그의 파트로네스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인생은 어차피 비극, 하지만 그것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받아들이고 뚜벅뚜벅 걸어 나갈 용기는 아무에게나 존재하지 않았다.
“가족이…….”
말을 꺼내자, 규하는 그를 보았다.
“그립습니까?”
규하는 찡그린 웃음을 지었다.
“지금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거야?”
그가 말하려고 하자, 규하는 알 만하다는 듯이 덧붙였다.
“알아. 대화 주제를 생각해 본 거겠지.”
“당신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포크가 멈추었다.
“뭐라고 말만 잘하잖아.”
규하는 힐끔 그를 보고는 말했다.
“당연히 그리워. 난 아직도 연하가 저 모퉁이를 돌아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규하는 레스토랑 저편을 쳐다보았다. 안쪽으로 통하는 모퉁이가 있고, 그 앞 테이블에는 잘 차려입은 가족이 식사하고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 남매……. 스물쯤 되어 보이는 남매는 그리 친해 보이지도, 사이가 나빠 보이지도 않았다. 평범한 형제남매들이 그렇듯.
“열아홉 살이었어. 내 쌍둥이가 죽었을 때.”
규하는 중얼거렸다.
“정말 예쁜 나이인데 말이야. 수업을 하고 있다 보면 연하가 살아 있었으면 나 대신 여기에 서 있었을 텐데 생각할 때가 많아.”
규하는 모퉁이 앞 테이블에 앉은 남매를 보며 다른 것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 연하가 그대로 커서 선생님이 된 모습 같은 것.
연하가 군복을 입은 모습 같은 건 상상도 할 수 없으리라.
“그럼 오히려 이건 모두 꿈이 아닌가 싶어. 꿈에서 깨면 연하가 선생을 하고 나는…….”
규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시선을 다시 돌렸다.
“글쎄, 수영을 계속했으려나? 아니면 전혀 다른 일을 했을 수도 있겠지.”
규하는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아, 군인 같은 거 괜찮았을지도.”
렉스는 와인을 마시는 척하면서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나 예전에 적성검사 했을 때 군인 나왔었거든.”
만약 그녀가 뱀파이어가 되어 MCTC에서 일했다면 그야말로 무시무시했을 것이다. 조금 무서웠을 것 같기도 했다.
규하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물었다.
“그나저나 이거 맛있다.”
“좀 더 드시겠습니까?”
“좋지.”
렉스는 와인을 더 부어주었다. 규하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고는 두 손을 모았다.
“자, 그럼 네 차례야.”
“제 차례요?”
“너도 뭔가 이야기해 줘야지. 나도 알고 싶으니까.”
렉스는 잠깐 말이 없다가 갑자기 말했다.
“얼마 전에 들어온 신입이 있는데.”
규하는 한쪽 눈썹을 추켜들었다.
자기에 대해 말해달라고 했는데 갑자기 웬 신입……?
“좀 자기만의 세계가 있다고 할지……. 멸치가 몸에 좋다는 말만 듣고 볶음 멸치 1kg짜리를 다 씹어 먹었더군요.”
“뭐? 봉지로 나온 거 전부?”
“네. 전부요.”
규하는 피식 웃었다.
“그게 뭐야.”
“재단사분을 침입자로 착각해서 엎어 메치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빈 적도 있고…….”
규하는 좀 더 웃었다.
“골 때리는 신입이네.”
그녀가 이렇게라도 쌍둥이의 소식을 접할 수 있다면…….
정작 살아 있다거나 군인이 되었다거나 하는 중요한 정보는 알릴 수 없지만, 이런 사소한 이야기 정도라면 괜찮을 테니까.
“근데 그 신입, 여자야?”
“네.”
“그래……?”
규하는 미묘하게 말을 끌며 와인을 마시는 체했다. 잠깐 이유를 알 수 없었던 렉스는 뭔가 깨달았다.
“따로 좋아하는 남자가 있습니다.”
조금 뜸을 들이고 덧붙였다.
“아마.”
“아마는 뭐야?”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요.”
렉스는 눈을 위로 들어 이반에게 팔찌를 만들어주라던 말에 화들짝 놀라던 연하를 떠올렸다. 그리고 다시 규하를 보았다.
“아니, 자각하고 있는 것 같긴 하군요.”
“그럼 남자는?”
역시 남의 연애사만큼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없는지 규하는 금세 흥미를 가지고 물었다.
“남자 쪽도 자각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자각쯤이야 애초에 하고도 남았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그럼 뭐가 문제야?”
“신입이 좀 어린 편이어서요.”
그래봤자 규하와 동갑이지만-1분 차이라고 했던가? 아이러니하지만 연하가 먼저 태어난 쪽이라고 들었다.- 그의 파트로네스와 밸런스를 맞추자니 그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봤자 같은 성인 아냐?”
“그렇긴 하죠.”
규하는 쯧쯧 혀를 내찼다.
“그럼 남자가 뻘짓 하고 있네.”
그렇게 간단히 정의할 수 있는 문제였던가 싶어서 렉스는 조금 얼떨떨해졌다.
“그런 건가요?”
“아니면 그만큼 간절하지 않은 거야. 간절한데 차 떼고 포 뗄 게 어디 있어? 간절하면 무조건 붙잡는 거야. 움켜쥐는 거지.”
규하는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간절함이란 그런 거야.”
* * *
“와, 진짜 잘 먹었다.”
규하는 배를 두드리며 호텔 로비를 나섰다. 렉스는 머지않은 곳에 보이는 한강을 가리켰다.
“산책하시겠습니까?”
“좋아.”
호텔이 약간 높은 지대에 있어서 두 사람은 인적이 드문 언덕길을 걸어 내려갔다. 그동안 고급 차들이 연달아 옆을 지나갔다.
규하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렉스는 의아해하며 그녀를 보았다.
“왜 웃습니까?”
“아니, 이런 차림으로 걸어와서 이 호텔 레스토랑의 가장 좋은 자리에서 밥을 먹었다는 게 갑자기 웃겨서.”
규하는 웃음을 전부 거두지 않고 말했다.
“너도 어지간히 또라이구나.”
또라…….
“제가요?”
“왜? 주변 사람들이 이야기해 준 적 없어?”
렉스는 조금 고개를 저었다.
“그다지…….”
규하는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생각보다 직급이 높은가 봐. 그래서 사람들이 차마 말하지 못한 게 아니고서야.”
렉스는 정말 그랬던 건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사단으로 돌아가게 되면 꼭 물어봐야겠군.’
생각하며, 한강변으로 들어섰다. 아직 공기가 조금 서늘하지만 산책이나 운동을 나온 사람들이 꽤 있었다.
아니면 장난감을 흔들며 뛰어가는 아이들, 느긋하게 걷는 노부부, 시끌벅적한 젊은 그룹들, 손을 잡고 걷는 커플…….
“한강변은 참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아. 그렇지?”
규하는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그가 처음 서울에 와 봤을 때와 비교하면 그런 말이 나오지 않을 테지만, 그때는 이름도 달랐으니 논외로 치기로 했다.
후웅.
갑자기 허공에 뭔가 반짝이는 게 날아갔다.
빛을 내는 비행 장난감이었다.
멀리서부터 네온 불빛이 번쩍거리듯이 빛을 발하는 걸 보긴 했는데, 가까이 오니 꽤나 많았다.
헬기나 비행기처럼 실제와 닮은 꽤 정교한 것도 있었고, 팅커벨이나 유니콘 같은 것들도 있었다.
공터에 거의 벼룩시장이라도 열린 것처럼 잡상인들이 여기저기 자리를 펴놓고 장난감을 팔고 있었다. 몇몇 아이들은 날아다니는 것들을 쫓아 이리저리 달리고 있었다.
현대의 반딧불이라고 할까.
“이런 장난감들은 아직도 파네.”
규하는 양옆으로 늘어선 가판대를 보고 지나가며 말했다.
장난감들이 더 정교해지고 기술이 가미된 것으로 바뀌었다는 점을 빼면 꼭 옛날 같았다.
이런 곳에서 저런 반짝이는 장난감을 보면 십중팔구 가지고 싶어 하는 아이들의 심리나, 아이들이 조르면 끝까지 거절하지 못하는 부모들의 심리가 여전하기 때문이겠지만 말이다.
규하는 한 가판대 앞에 멈춰 서서 장난감을 하나 들어 올렸다.
“예전에 이런 거 보면 연하랑 꼭 하나씩 샀는데 말이야.”
렉스는 규하를 보았다.
그녀는 이제 꽤 편하게 연하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것도 꼭 살아 있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하나 살까? 이거 어때?”
규하는 하나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렉스는 진지하게 생각한 바를 말했다.
“쓸모가 있을까요?”
규하는 눈알을 굴렸다.
“이런 게 참 쓸모가 있어서 사겠다. 그냥 기념, 작지만 확실한 행복, 경제의 선순환을 위한 도움, 뭐 이런 거지. 여기 파시는 분도 오늘 나온 교통비는 벌어 가셔야 할 거 아냐.”
“아가씨가 뭘 좀 아시네.”
장난감을 파는 상인이 웃고는 말했다.
“이건 뭐예요?”
규하는 작은 큐브처럼 생긴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다가 용도를 알 수 없자 물었다.
“찍은 걸 홀로그램으로 쏴주는 거예요.”
“아아……. 이거 괜찮네. 두 개 주세요.”
규하는 계산하고 돌아서면서, 렉스에게 하나를 내밀었다.
“자, 기념.”
렉스는 얼결에 장난감을 받아들었다.
“여기 풍경 같은 거 찍어서 가끔씩 쏴보면 추억도 되고…….”
규하가 말하며 돌아보는데,
삑.
소리가 나고 렉스가 장난감 홀로그램 카메라를 눈높이에 들고 있었다.
“너 지금 나 찍었어?”
규하는 황당해했다.
“기념이라기에.”
렉스는 태연한 얼굴이었다.
“하필 찍어도 그런 표정을……. 그럼 나도 너 찍는다.”
렉스는 규하가 카메라를 들어 올린 손을 잡아 막았다. 규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투덜거렸다.
“넌 내가 방심한 순간에 찍은 주제에…….”
렉스는 규하에게 키스했다.
모든 것이 멈추는 것 같은 순간이었지만, 빛나는 비행 장난감들은 여전히 사방을 날아다녔다.
부웅, 위이잉…….
아이들이 즐거워하며 뛰어다니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입술이 떨어지고, 규하는 그를 조금 노려보듯이 올려다보았다.
“너…….”
“죄송합니다.”
그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전혀 죄송한 표정이 아니었다.
차분한 푸른 눈동자가 그녀를 담고 있었다.
이 남자가 좋았다.
자기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고,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은 남자인데, 이상하게 이 눈을 보면 전부 다 상관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갑자기 벨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