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매화가 피는 풍경 (3)
“안다고?”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술 먹고.”
규하는 기가 막혔다.
“내가 언제…….”
말하다가 멈칫했다.
‘잠깐, 뭐지? 이 기억은?’
* * *
“혹시 그날 열차 테러로 몇 명이 죽었는지 알아?”
규하는 맥주를 흔들며 말했다. 맥주가 얼마 남지 않아 캔 안에서 찰찰찰 소리가 났다.
렉스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녀가 갑자기 털어놓기 시작한 이야기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면 알고 있다고 해야 할까? 320명 중에 95명이라고.
“320명 중에 무려 95명이야.”
규하는 그 규칙 없는 숫자를 잊을 수 없는 것 같았다.
“그중에는 우리 가족도 있었어. 사고의 충격으로 고통을 느낄 새도 없었을 거라고 하더라.”
규하는 피식 웃었다.
“조금만 더 제정신이었다면 그걸 위로라고 건네는 경찰이라는 작자의 뚝배기를 깨버렸을걸. 그런데…….”
규하는 말을 잊은 듯이 테이블 아무 곳에나 시선을 멈추었다.
부상으로 충격으로 어지러운 눈앞에 연하의 시신이 있었다. 영안실 침대에 누운 연하는 푸르고 깨끗했다.
모든 세속의 빛이 탈색되어 오히려 푸른 얼음으로 빚은 것 같았다. 한없이 맑고 투명해서…….
규하는 풀린 눈을 들어 렉스를 보았다.
편의점의 희미한 빛을 받은 조각 같은 얼굴이 미동도 없었다. 사실 이미 눈앞에 있는 게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어디 가게 앞에 세워놓은 배우의 입간판을 들고 왔구나.’
어렴풋이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다.
“그거 알아? 연하는 사망자 중에서 테러리스트의 직접적인 공격으로 죽은 유일한 사람이었어. 경찰 말로는 ‘이유는 불명’이라대? 그러면서 그러는 거야. 혹시라도 연하가 흡혈귀를 추종하거나 저주하는 광신도 모임 같은 곳에 관련 있지 않았느냐고.”
규하는 이를 갈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새끼 뚝배기를 깨버렸어야 하는 건데.”
그러면서 꾹 움켜쥔 과자가 손안에서 부스러졌다.
규하는 손을 털어내고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물론 말이야, 연하는 도를 아냐고 물으면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다고 하고, 하느님 어머니를 모시는 모임에 오지 않겠냐고 물으면 언제까지 가면 되느냐고 묻는 녀석이었지만. 그래도 흡혈귀라니…….”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서 규하는 짧게 웃었다.
“차라리 쑥이나 미나리 같은 걸로 사는 편이 더 속 편할 녀석이라고.”
맥주 캔 표면에 고인 서리가 물방울이 되어 미끄러져 내렸다. 마치 눈물처럼.
규하가 캔을 붙잡자, 물방울은 깨져 사라졌다.
규하는 맥주를 들이켜고 거세게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갑자기…….
“그래서 그 새끼가 아가리 털린 것 같은 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하는데 내가 진짜 야마가 돌아서…….”
아까 하던 이야기를 마구 토해내기 시작했다.
‘취했구나.’
렉스는 결론지었다.
* * *
그녀를 응시하는 푸른 눈을 보며, 규하는 주춤 고개를 물렸다.
“워…….”
기억나 버렸다.
하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처음 보는 사람한테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만났을 때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혹시 그날 내가 마신 거 맥주 다섯 캔이 아니라 보드카 다섯 병이었어?”
아니, 보드카 다섯 병을 생으로 때려 넣지 않았고서야…….
“그렇게 말하셨죠. ‘오빠, 사람 말을 참 잘 들어주네. 그럼 이것도 좀 들어줄래?’라고.”
중간에 ‘입간판이니까 당연하겠지만.’이라는 이해하지 못할 말을 하긴 했지만, 어쨌든 그런 말을 듣고는 더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는 흡혈귀라고.
“힘드셨을 테니까요.”
“거기까지.”
규하는 갑자기 손을 들었다. 그를 막듯이.
“그렇게 사람 마음 흔들고 그러는 거 아냐.”
“예?”
렉스는 영문을 모르는 얼굴이었다. 규하는 바가지에 묻은 거품을 씻어내며 흘긋 그를 보고 말했다.
“그쪽도 참 숙맥이네.”
렉스는 여전히 따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게…….”
규하는 거품이 씻겨 나가는 바가지를 보며 중얼거렸다.
“나쁘지 않아.”
그러고는 규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척 다 씻은 바가지들을 모아 정리하고 일어났다. 그리고 호스를 들고 주변을 슥슥 물로 쓸어냈다.
솔직하고 거침없는 사람이었다. 여태 그럴 만한 상대를 만나지 못했을 뿐, 아마 사랑을 하는 데서도 그럴 것이다. 그가 그럴 만한 상대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고 바랄 뿐이었다.
호스에서 뿜어져 나간 물줄기가 허공을 날아 바닥에 몸을 부서뜨렸다.
열어놓은 창문 너머로 매화 냄새가 났다. 평화로운 일상……. 사물 곳곳에 편재한 신의 냄새였다.
규하가 렉스를 보았다. 저물어가는 햇빛이 그녀의 얼굴을 쓸었다. 아마 꽤 오랫동안 서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
인식하지 못했지만, 어느새 그는 그녀에게 고개를 기울이고 있었다.
규하의 얼굴 위로 그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하지만 그녀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고개가 점차 가까워졌다.
“선생님, 렉스 씨, 이것만 하시고…….”
동훈 목소리가 들려, 둘은 흠칫 떨어졌다.
그러면서 규하가 급하게 방향을 트는 바람에 호스에서 뿜어져 나온 물이 가로로 렉스의 배를 치고 지나갔다.
규하는 놀라서 얼른 호스를 치웠다.
“이런, 미안.”
렉스는 제 배를 내려다보았다.
“괜찮습니다.”
티셔츠는 젖었지만, 다행히 바지는 젖지 않아서 민망한 모양새는 아니었다.
“저런, 갈아입을 옷 드릴까요?”
동훈이 말했다.
“아뇨. 괜찮습니다.”
“아직 좀 쌀쌀해서 젖은 티셔츠 입고 가면 감기 걸려. 기다려.”
규하가 발을 헹구고 밖으로 나갔다. 그 사이에 렉스는 티셔츠의 젖은 부분을 모아 물을 짜냈다. 그리고 탁탁 터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규하와 동훈이 그를 보고 있다가 동시에 휙 고개를 돌렸다. 렉스는 의아해졌지만 나머지 정리를 하기 위해 호스를 들었다.
“봤어요?”
“봤어요.”
렉스는 돌아보았다. 두 사람은 복도를 걸어가면서 수군덕거리고 있었다. 역시 보통 사람이라면 들을 수 없는 거리였지만…….
“말랐다고 생각했는데…….”
규하는 입가에 손을 대고 중얼거렸다. 동훈은 맞장구를 쳤다.
“그냥 마른 거랑 옷 때문에 티 나지 않는 건 느낌이 다르죠. 근데 사람 배가 진짜 저럴 수 있는 거였구나.”
렉스는 저도 모르게 제 배를 내려다보았다.
“그래봤자 소파 하나 제대로 못 드는 근력인데요. 근육이 아깝다, 근육이 아까워.”
규하는 툴툴거렸다. 동훈은 갑자기 물끄러미 규하를 보았다.
“선생님, 여길 빠지게 하는 남자는 없어도 데려올 남자는 있었네요.”
“쟤가 멋대로 따라온 거라니까요.”
“그런 것치고는 너무 즐거워 보이시는데요?”
“즐거워 보이긴…….”
규하는 또 툴툴거리더니 덧붙였다.
“좋아 죽는 거죠.”
“와, 선생님. 이러시는 건 정말 처음 아니에요? 놀라운데요.”
규하가 이쪽을 돌아보려 했다. 목 근육의 움직임으로 알 수 있었다. 렉스는 바로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리고 호스를 정리하는 척했다.
“이상하게 좋다는 느낌이 들어요. 모르는 게 더 많은데 뭐랄까, 그런 건 별로 상관없어지는 느낌 알아요?”
그리고 두 사람은 모퉁이 너머로 사라졌다.
문득 렉스는 자신이 살아온 세월을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뭘 하며 살았던 걸까.’
그 긴 세월 동안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니 말이다.
지난 세월을 떠올려 보면 수많은 이미지들이 지나가지만, 이런 느낌을 주는 이미지들은 없었다. 어쩐지 시린 듯하고, 빛나는 듯한.
* * *
“갑자기 도와준다고 수고 많이 하셨어요.”
동훈이 입구에서 그들을 배웅하며 말했다.
“덕분에 계속 미뤄두던 창고 정리를 끝냈네요. 감사합니다.”
“아뇨. 저도 즐거웠습니다.”
렉스가 말하자, 동훈은 조금 웃었다.
“선생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부탁은 무슨 부탁이요. 다 각자 사는 거지.”
규하는 투덜거렸다. 이제 렉스도 좀 알 것 같았는데, 동훈도 그녀가 부끄러워 그런다고 알았는지 웃을 뿐이었다.
둘은 양로원을 나왔다.
한동안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슬슬 노을빛이 깔리는 거리에 침묵이 감돌았다.
“저기.”
갑자기 규하가 용기를 낸 듯이 돌아보았다.
“저녁 먹을래?”
그러고는 급히 덧붙였다.
“시간 있으면.”
“네.”
렉스는 스스로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빨리 대답했다. 규하는 속으로 ‘아자’ 소리를 냈다.
그녀 뒤로 저 멀리 경호원 둘이 그러면 안 된다는 듯이 미친 듯이 손짓을 했지만 렉스는 보지 못한 척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자신에게 이런 의뭉스러운 구석이 있었는지 처음 알게 되었다고 할까.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규하는 귀엽게도 신이 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정말 쇠를 씹으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아서 그렇게 대답했을 뿐인데, 규하는 찡그린 웃음을 지었다.
“여자친구가 그렇게 대답하는 순간 남자들 머릿속에서는 지옥이 펼쳐지는 거 알지? 제일 어려운 대답이라고.”
그렇다면…….
안 그래도 식사 이야기를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곳이 있었다.
“그럼 제가 아는 곳으로 가시겠습니까?”
“네가 아는 곳? 좋지.”
* * *
“……저기.”
어쩐지 규하는 잔뜩 굳어 있었다.
“네.”
렉스는 영문을 몰랐지만 일단 대답했다.
“네가 아는 곳이라고 했지?”
“네.”
“나도 여기가 어딘진 알아.”
하긴, 그녀는 계속 이 도시에서 살았으니까…….
“다행이군요.”
규하는 그가 뭔가 이상한 말이라도 한 것처럼 쳐다보았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은 그의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잔뜩 목소리를 낮추고 외쳤다.
“들어올 엄두를 못 내서 그렇지!”
그녀 뒤로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고급스러운 호텔 레스토랑의 정경이 펼쳐졌다.
레스토랑 자체는 모던한 디자인이었지만 곳곳에서 대기하고 있는 웨이터들은 성별에 관계없이 단정한 가르송 복장을 하고 있었다.
“특히 이런 차림으로는!”
규하는 누가 보기라도 할까 봐 겁난다는 듯이 메뉴판으로 은근슬쩍 제 옷을 가리려는 헛된 노력을 했다.
“따로 드레스 코드는 없는 곳입니다.”
주변 테이블에 앉은, 고급스러운 차림을 갖춰 입은 선남선녀들이 창가 자리에 앉은 그들을 힐끔거렸다.
교양 있는 사람들이라 대놓고 그러진 않았지만, 분명히 어울리지 않는 그림을 합성해 놓은 것 같은 그들을 의아해하고 있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규하는 기가 막힌 것 같았다.
입구에서 그들을 맞이한 직원들은 둘을 한 번 훑고는 정중하면서도 단호한 미소를 지으며 거절하려 했다. 그 입 모양은 분명히 ‘실례합니다만.’이라고 말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렉스를 알고 있는 것 같은 매니저가 뛰어나왔다. 그러고는 바로 프리패스였다.
이 레스토랑에서 가장 목이 좋은 창가 자리로 정중하게 안내받았다. 규하는 순간 자신이 영부인이라도 되는 줄 알았다.
동훈이 준, ‘버리긴 아깝지만 그렇다고 어딘가에 입고 나가기는 좀 그래서 누군가가 옷을 더럽혔을 때 내주기 좋은 티셔츠’ 따위를 입고 있는 렉스는 아주 태연했다.
늘 이런 곳에서 식사해 온 것처럼.
‘이번 달 월급이 얼마 남았더라.’
규하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기를 때렸다. 하지만 애써 생각하다가 그만둬 버렸다.
‘에라, 모르겠다. 몇 끼 굶어도 안 죽겠지.’
규하는 포기하고, 등받이에 등을 기대앉아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일단 들어온 이상 오히려 당당하게 있는 게 ‘알고 보면 재벌’ 느낌이라도 줄 법했다.
“경호원이 이렇게 끗발이 좋은 직업이었어?”
“경호하는 분이 꽤 요인이어서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자신의 파트로네스라면 세계에서도 손에 꼽는 요인이니.
“그래?”
다행히 규하는 의심하지 않고 납득하는 눈치였다.
“좋은 사람이네. 경호원도 이런 곳에서 식사하게 해주고.”
렉스는 그냥 더 말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좀 수상해 보일 줄은 알았지만, 보답의 의미로 괜찮은 식사 한 끼 대접하고 싶었다. 본의는 아니어도 세상을 떠받치고 있느라 고생하는 그녀에게.
괜찮다면 그가 인류를 대표해서 말이다.
“그래도 정말 알 수가 없네.”
규하는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