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매화가 피는 풍경 (2)
동훈이 본관에서 나오다가 두 사람을 보았다. 렉스는 그가 누군지 알기에 목례했다. 동훈도 얼떨결에 인사하고는 규하를 보았다.
“누구…….”
“일꾼이요. 마음껏 부려먹으세요. 말도 걸지 않고 여기까지 따라올 정도로 한가한 것 같으니까.”
“네?”
당연하겠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동훈을 두고 규하는 어깨를 으쓱이고 앞서갔다.
“안 그래도 오늘 창고 정리해야 하죠? 마침 일꾼이 필요했는데 잘됐네요.”
동훈은 렉스를 돌아보고 난감한 웃음을 지었다.
“어쩌다가 강 선생님을 알게 되셔서. 고생이 많으시네요.”
“선생님, 뒷담화는 저 안 듣는 데서 해주시겠어요?”
규하가 바로 돌아보고 말했다.
“뒷담화하다가 걸리면 무슨 화를 입으려고요.”
동훈은 대답하고 렉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여기 일 생각보다 힘든데, 괜찮으시겠어요?”
“네.”
렉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렇게 대답하고 말았다. 동훈은 머쓱한 얼굴로 웃었다.
규하와는 전혀 다른 타입이었지만, 일반적이지 않다는 의미에서 비슷한 점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럼…….”
동훈은 슬그머니 규하 옆으로 갔다. 렉스는 창문을 돌아보았다. 정원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런데 앞에서 둘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스토커라기엔 너무 잘생겼고……. 선생님 혹시?”
“아니에요.”
규하는 거의 정색했다. 렉스는 표정이 변하진 않았지만, 그들을 보았다.
둘은 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겠지만, 알다시피 그는 듣고 싶지 않아도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규하가 덧붙였다.
“아직.”
렉스는 다시 창문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이렇다 할 만한 표정은 없었다.
왜냐하면 한심했기 때문이다, 그런 말을 듣고 좋아하는 자신이.
세 사람은 복도를 지나 창고로 갔다. 동훈은 불을 켜고 말했다.
“기부 들어온 물건들인데, 손이 부족해서 정리하지 못했거든요. 사용할 수 없는 건 솎아내서 버리고 쓸 만한 건 좀 씻어야 할 것 같아요.”
렉스는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저기서 기부받은 것 같은, 통일성 없는 물건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소파 같은 큰 물건들도 있었고, 책이나 옷, 사용처를 알 수 없는 운동기구까지 별게 다 있었다.
그런데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자, 문밖에서 노인들이 물끄러미 그를 보고 있었다.
“못 보던 얼굴이네?”
규하가 말했다.
“제 친구예요.”
“강 선생 친구? 남자친구?”
렉스와 규하는 시선이 마주쳤다. 규하는 박스를 꺼내 돌아서면서 말했다.
“몰라요. 저쪽한테 물어보세요.”
규하는 노인들을 지나 복도로 나갔다. 노인들은 전부 렉스를 쳐다보았다.
“남자가 그러면 안 돼. 확신을 줘야지.”
“자네 설마 강 선생을 상대로 어장 관리하고 그러는 건 아니지?”
렉스는 당황했다.
“아뇨. 그게…….”
규하는 피식 웃었다.
그가 정말 당황한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경호원이라서 유난히 침착한 건지 아까 그녀한테 걸렸을 때도 그다지 당황하는 것 같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노인들은 무료한 양로원 생활에 모처럼 재미있는 일이다 싶었나 보다. 렉스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자, 확실히 말해봐.”
한 노인이 렉스를 밀면서 말했다. 복도에 있는 규하는 그들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었지만 모르고 박스를 내려놓는 척했다.
렉스는 노인들을 돌아보았다.
“확실히 라면……?”
“있잖아. 사귀자, 좋아한다, 뭐 그런 거.”
“어서.”
노인들은 렉스를 규하 쪽으로 떠밀었다. 엉겁결에 규하에게로 가자, 그녀는 의뭉스럽게 돌아보았다.
“왜?”
“저…….”
렉스는 입을 열었다. 뒤에 있는 노인들은 하나 같이 응원하는 표정이었다. 규하는 그들이 귀여워서 웃음이 나올 것 같기도 했고, 설마 정말 말하려나 싶어서 기대되기도 했다.
“걸레는 어디 있습니까?”
노인들은 바로 손을 내저으며 돌아섰다.
“글렀어.”
“텄어.”
“딴 놈 알아보라고 해.”
노인들이 흩어지고, 규하는 흘긋 렉스를 보더니 갔다.
“가져다줄게.”
렉스는 한숨을 삼켰다. 그로서도 속 시원하게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여기.”
규하가 걸레를 가져다주었다.
“부탁해도 되지?”
“이미 빠져나가긴 늦은 것 같은데요.”
규하는 피식 웃었다.
“잘 아네. 비번을 이렇게 보내게 돼서 억울하겠지만.”
“비번이요?”
렉스는 무슨 소리인가 싶어 되물었다.
“비번인 거 아냐?”
렉스는 순간 깨달았다.
“그렇죠.”
“싱겁긴.”
규하는 말하고 다시 창고로 들어갔다. 렉스도 따랐다.
한참 박스를 옮기다가, 한쪽에 꽤나 구식으로 보이는 커다란 1인용 소파를 보았다.
“이것도 옮겨야 합니까?”
동훈은 돌아보았다.
“아, 그건 무거우니까 같이해요.”
그제야 렉스는 자신이 소파를 혼자 들려고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도. 지금 그는 ‘인간 남자’니까.
“엄청 무거워 보이네요.”
어느새 규하도 와서 돕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그쪽 들어주세요. 네.”
얼결에 밀려 렉스가 왼쪽, 동훈이 오른쪽, 규하는 뒤쪽을 잡았다.
“자, 하나둘 셋 하면 드세요. 하나, 둘, 셋!”
동훈과 규하는 얼굴이 붉어지도록 힘을 썼다.
반면 렉스는 거의 힘을 쓰지 않았다. 인간 남성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훈은 규하만큼 말라서 별로 참고할 만하지 않았다.
“조심, 조심!”
그들은 비틀거리며 문을 빠져나와 밖에 소파를 내려놓았다. 거의 쿵 소리가 나도록.
규하는 소파를 짚고 숨을 몰아쉬었다.
“어우, 힘들어. 밥 못 먹고 왔어? 왜 이렇게 힘을 못 써? 경호원이라며.”
동훈은 그새 비지땀을 흘리며 말했다.
“아, 경호원이세요? 그러면…….”
“I will always love you 이야기는 제가 먼저 했어요.”
“역시, 선생님은 뭘 좀 아신다니까.”
“누가 아니래요.”
그러면서 뭐가 웃긴지 껄껄대며 웃었다.
두 사람은 꽤 친해 보였다.
규하는 봉사활동을 다니며 만난 사람들과 그나마 마음을 트고 지내는 것 같았다.
평범한 직장인이 다 그렇겠지만 대학 친구들은 가뭄에 콩 나듯이 만나고, 주변에 또래라고는 동료 선생들밖에 없으니.
고등학교 동창들은 전혀 만나지 않았다. 연락이 와도 이런저런 이유를 대고 나가지 않는 것 같았다.
입학할 땐 둘이었다가 혼자 졸업한 고등학교는 마치 목에 걸린 가시 같아 보였다.
“그러고 보니 너 머리 안 불편해?”
규하가 갑자기 그를 보고 물었다.
그는 머리카락은 그대로 풀고 캡 모자를 쓰고 있는 상태였다.
“끈이 없어서요.”
“나도 이거 하나밖에 없는데.”
규하는 자신이 묶고 있는 걸 의미하는지 뒷머리를 긁적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노란 고무줄은 많은데요.”
어느새 창고로 다시 들어간 동훈이 몸을 내밀고 말했다.
“머리 다 쥐어 뜯겨요. 얘도 머리가 길어서.”
“그러고 보니 경호원이 그렇게 머리가 길어도 돼요?”
“사복 경호원 같은 것도 있으니까 그런 거 아닐까요?”
다행히 그가 어떤 거짓말을 생각해 내야 하기 전에 규하가 알아서 대답해 주었다.
그러면서 옆에 있는 바구니를 뒤져서, 선물을 쌌던 걸 버리기 아까워 넣어 놓은 것 같은 끈을 하나 꺼내 들었다.
“어쩔 수 없다. 임시방편으로 이거로라도 묶어.”
하필 빨간색이었다.
받아들려고 하는데, 갑자기 규하가 끈을 다시 가져갔다.
“아니다. 내가 묶어줄게. 혼자 묶기 힘들 테니까.”
규하는 개를 부르듯 손짓했다.
“돌아서 봐.”
렉스는 이미 모두 포기한 상태였으므로, 저항 따위 하지 않았다. 얌전히 돌아섰다.
규하가 머리카락을 모아 잡았다. 감각기관이라고는 없는 머리카락이었는데, 렉스는 뒷목이 오싹해져서 놀랐다.
갑자기 뒤에 서 있는 그녀가 전부 인식되었다. 숨소리, 피부의 온기, 입술을 오므렸다 펼 때 나는 작은 소리,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손길…….
심장이 뛰는 소리.
규하 역시 태연한 체하고 있지만, 그녀는 보이는 것만큼 태연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만큼이나.
“양심적으로 리본은 참았다.”
규하는 손을 뗐다.
“너무 잘 어울릴 것 같긴 하지만.”
렉스는 뒤쪽을 돌아보았다. 한 갈래로 묶어서 끈을 늘어뜨린 상태였다.
끈에서 규하에게로 시선을 옮겨갔다. 규하도 그를 보았다. 햇빛이 그녀를 비추었다.
“우리 강 선생 시집가나?”
갑자기 말소리가 들려 둘은 흠칫 돌아보았다. 흩어졌다고 생각했던 노인들이 조금 떨어진 곳에 옹기종기 모여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개중 살짝 정신이 없는 할머니 하나가 소리 높여 말했는지 노인들은 그녀를 탓했다.
“이놈의 여편네 주책은.”
“게다가 진도는 왜 이렇게 빨리 나가? 지금이 무슨 6.25야?”
노인들이 모여드는 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팔려 있었다는데 렉스는 말문이 막혔다.
규하는 노인들이 분분이 흩어지는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다들 밝으시군요.”
렉스는 말했다.
“응. 요양사가 좋으니까. 본받을 게 많은 사람이야.”
“제가 듣고 있어서 말씀해 주시는 건 아니고요?”
동훈이 창고 안에서 고개를 내밀고 말했다.
“그러게요. 왜 거기서 없는 척하고 계신 거예요?”
규하는 말하며 그쪽으로 갔다.
“아니, 뭐랄까……. 그게 그렇게 된다고요. 그 사이에 있으면.”
동훈은 꿍얼거렸다.
* * *
알고 있었지만, 잊고 있었다고 할까.
‘사람이 모여 사는 곳에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렉스는 생각했다.
처음에는 소위에 준하는 OF-1 코드를 받고 군 생활을 시작했지만 전시에 가까운 상황이어서 그는 대령까지도 순식간에 진급했다.
그래서 오히려 군에서는 제 방 정리도 제 손으로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곳에선 창고 청소에, 노인들 목욕 시중에, 저녁 준비까지…….
쉽게 지칠 리 없는 몸이건만, 오랜만에 멍을 때리고 싶어졌다.
잠깐 쉬면서 창가 앞 의자에 앉아 있는 렉스는 창밖을 보았다. 노인들이 가꾸는 텃밭과 정원이 조그맣게 있고, 마당이라고 하기엔 조금 넓은 공간 너머에 정문이 있었다.
슬슬 매화가 꽃봉오리를 틔우고 있다는 것 외에 특별하다 할 만한 풍경은 아니었다.
“자.”
규하가 캔 음료수를 내밀면서 옆에 앉았다.
딱.
캔을 따는 소리가 청량했다.
규하는 시원하게 음료수를 들이켰다.
“근데 아까부터 뭘 그렇게 유심히 봐? 뭐 있어?”
규하는 그가 보고 있는 창밖을 살피면서 물었다.
“옛날에 살던 곳이 떠올라서요.”
옛날에 살던 곳이라면…….
‘아, 버려졌다고 했지.’
규하는 기억해 냈다.
고아원에서 살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고아원을 나와 경호 일을 하면서 한 사람의 몫을 하고 사는 걸 보니 기특하면서도 짠한 마음이 밀려왔다.
큰일 났다. 모성애가 발동하기 시작했다.
몰랐는데, 자신이 이런 타입에 약했던가 보다. 생긴 건 여자쯤은 트럭으로 있을 것 같으면서 숙맥이고, 불우한 환경에 지지 않고 성실한.
그때 동훈이 다가와 말했다.
“두 분, 혹시 마지막으로 욕실 청소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래요.”
규하는 일단 대답하고 렉스를 돌아보았다.
“괜찮지?”
그렇게 물으면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지만, 렉스는 어쨌든 대답했다.
“네.”
둘은 일어나 욕실로 갔다. 공용 욕실이어서 일반 가정집 욕실보다는 작은 목욕탕 같은 느낌이었다.
“반으로 나눠서 하자. 오른쪽은 네가 하고, 나머지는 내가 하고. 오케이?”
“네.”
둘은 바지를 걷고 들어가 욕실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규하는 바가지를 모아와 닦다가 제법 능숙하게 청소하는 렉스를 보았다. 동화 속 왕자님같이 생긴 녀석이라 뭐 할 줄 아는 거나 있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일하는 모습이 어색하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흡혈귀한테 죽었어.”
규하는 갑자기 말했다.
렉스는 멈칫하고 그녀를 보았다. 규하는 대수로울 것 없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전처럼 일부러 거리를 둔다기보다 분위기를 어둡게 만들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나도 뭔가 털어놔야 할 것 같아서. 너무 심각하게 들을 필요는 없어. 오래전 이야기고…….”
“압니다.”
이번에는 규하가 멈칫하고 그를 보았다.
“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