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 짐승-45화 (45/104)

45화. 매화가 피는 풍경 (1)

“소장이랑…… 규하 누나? 뭐야, 이거? 왜 이렇게 되는 거야?”

도영은 진심으로 당황한 것 같았다. 연하는 표정이 뚱해졌다.

“나도 몰라. 잠깐 눈 뗐는데 이렇게 되어 있었어.”

“남녀 사이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탄식 같기도 감탄 같기도 한 어조였다. 어쩐지 후자에 더 가까워 보였다.

“하지만 규하는 소장님이 뱀파이어라는 걸 모른단 말이야.”

호칭이 어느새 렉스 씨에서 소장님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만큼 멀어진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리라.

하여간 바위인지 곰인지 사람인지 헷갈리는 녀석에게 규하는 가장 예민한 부분이니까. 그야말로 새끼를 지키는 어미 곰, 보물이 들어 있는 동굴을 지키는 바위 문이라고나 할까.

“아마 소장한테도 생각이 있어서…….”

도영은 자기도 모르게 편을 들어주고 말았다. 연하는 다시 도영에게서 사진을 뺏어 들었다.

“이게 생각이 있어 보여? 당연히 찍힐 줄 알면서도 이랬다는 건데. 이성적인 사람인 줄 알았는데 무슨 생각인지…….”

“이성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거거든.”

“그럼 뭐가 상관있는 건데?”

연하는 애꿎은 도영을 다그치듯 보았다.

약간 화가 나 있기 때문인지 연하는 평소보다 표정이 또렷하고 눈이 번쩍였다.

“소령님?”

빤히 쳐다보고 있었던지, 연하는 살짝 고개를 젖히며 불렀다.

연하는 그를 꼬박꼬박 ‘소령님’이라고 불렀다. 실제로 또래인 데다 같은 팀에서 구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반말을 하게 됐지만, 그게 그의 계급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절대 너, 너, 부르는 법은 없었다.

“이 얼굴로 그러면 다른 사람들까지 소령님을 어리게 생각하고 얕잡아볼 수 있잖아. 그럼 안 되지. 소령님은 팀을 이끌어야 하는데.”

한 번 연하는 그렇게 말했었다.

반말과 존칭이 섞인 묘한 말투는 천진함과 사려 깊음의 이상한 조화였다.

갑자기, 공군기지 활주로에 마주 서 있는 국장과 연하의 모습이 떠올랐다.

반면 연하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도영의 눈이 어두웠다. 불이 꺼져 있기 때문인지 햇빛 아래서는 때로 밝은 에메랄드빛까지 띠는 눈이 거의 검은색으로 보였다.

향수 냄새가 연하를 감싸왔다.

언젠가 도영이 향수를 쓴다는 걸 깨닫고 ‘역시 프랑스인.’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부드러우면서 남자다운 향이었다.

그제야 연하는 어쩐지 둘의 거리가 가깝다는 걸 깨달았다. 홍채가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도영이었으니까. 연하는 그가 뭔가를 할 거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숨결이 입술에 닿았다.

삐잉. 삐잉. 삐잉.

갑자기 화재 경보가 터졌다.

연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뭐야?”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순식간에 사람들이 달려 들어왔다.

그런데 도영이 움직이지 않았다. 연하는 조종석 턱에 엎드린 채 움직임이 없는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소령님? 왜 그래?”

도영은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 내가 뭘 하려고 한 거지.’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느낌이었다.

상대는 강연하였다. 루챠챠를 돼지처럼 퍼먹고, 매일 멍이나 때리고, 힘든 임무를 끝내고 겨우 공수한 헬기 구석에 박혀 돌아올 때는 한 덩어리로 얽혀서 자도 아무 느낌이 없는.

“소령님, 어디 아파?”

“아니…….”

도영은 일단 몸을 들고 아래쪽에 달려가는 대원을 보고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가짜 화재 경보인 것 같습니다. 어느 간 큰 놈이 터뜨린 것 같은데.”

대원은 말하고 뛰어갔다. 도영은 고개를 돌려 연하를 보았다.

이건 아무래도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는 문제 같았다.

그는 강연하를 이성으로서 좋아하는가?

설마, 이 얼뜨기 뱀파이어를?

도영은 연하의 양볼을 잡아 늘리며 생각했다.

“소응니.”

연하는 늘어진 볼 때문에 불분명한 발음으로 그를 불렀다.

지금도 얼빠진 얼굴이 귀엽다고는 생각하지만, 그건 고양이 새끼나 강아지, 혹은 아기, 심지어는 계란찜의 소담한 곡선이 귀엽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계란찜 같은 무생물과 동급인 귀여움이라고 할까……. 역시 그는 좀 더 성숙한 여성이 취향이었다.

“윽!”

도영은 갑자기 아픔에 찬 소리를 터뜨렸다. 연하가 제 볼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을 콱 깨물어버렸기 때문이다.

도영은 연하를 확 밀어냈다.

“미쳤어?”

“그러니까 놓으라고 했잖아.”

생각에 빠져 듣지 못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을 이렇게 물어버리다니.

“아, 이 자식이, 누가 뱀파이어 아니랄까 봐. 그리고 너 송곳니 세웠지? 너무 아픈데?”

“세웠으면 소령님 손가락 뚫렸어.”

두 사람이 그러고 있는 격납고 천장을 넘어, 사람들이 달려오는 복도의 벽을 넘어, 경보음에 놀란 대기 요원들이 있는 방을 지나, 위로, 위로, 위로…….

주먹이 복도 벽에 달린 패널에서 떨어졌다.

깨진 유리가 파스스 떨어져 내렸다.

“국……장님?”

이 대위는 돌발 행동에 놀라 눈이 화등잔만 한 상태였다.

이반은 돌아보고 빙긋이 웃었다.

“파리가 앉아 있어서.”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가고 있던 길을 갔다. 이 대위는 박살이 난 화재 경보를 보면서 멍하게 중얼거렸다.

“파리…….”

그야말로 엄청나다고 할 수밖에 없는 힘에 흔적조차 남지 않은 파리에게 삼가 명복을 비는 바였다.

앞서가던 이반은 한숨을 삼켰다.

‘나도 모르게 저질렀군.’

이반은 허공을 보고, 갑자기 그로서도 확신이 서지 않는 자문을 던졌다.

‘기다릴 수 있는 거겠지.’

* * *

“소령님.”

같이 격납고를 나오는데 연하가 불러 도영은 돌아보았다. 연하는 의심스럽다는 얼굴이었다.

“근데 혹시 나한테 키스하려고 한 거야?”

평소엔 겨울잠 자는 곰이 형님하자고 하는 눈치 주제에 또 이럴 때는 어찌 이리 기민한가 모르겠다.

“미쳤냐?”

하지만 도영은 생각하기 전에 이미 말하고 있었다.

“내가 너한테 왜? 네가 홀딱 벗고 달려 들어봐라. 내 거기가 서나.”

“아.”

어쩐지 굉장히 거슬리는 외마디라 도영은 눈썹을 추켜들었다.

“뭐야?”

“상상했어. 토 나올 것 같아.”

“꺼져.”

“응.”

연하는 오히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는 양 선선히 대답하고는 돌아서서 갔다. 도영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역시, 그에게 강연하는 계란찜이었다.

* * *

“와, 나, 인간이 이렇게 피곤할 수도 있는 걸까요.”

규하는 마당 테이블에 엎드려 중얼거렸다.

“그러게 좀 쉬지 않고 이번 주에도 나오셨어요.”

양로원의 요양보호사인 동훈이 바구니를 안고 지나가다 말했다. 규하는 고개를 들고 관자놀이를 괴었다. 그나마도 거의 무너질 것 같은 자세였지만.

“오 일 내내 일하고 오늘은 때려 죽여도 못 일어난다고 해도 남자친구 전화 한 통에 벌떡 일어나는 게 여자랍니다. 그리고 풀 메이크업에 10센티 하이힐을 신고 온종일 돌아다닐 수 있죠. 그렇게 생각하니까 안 나올 수가 없더라고요. 제가 이렇게 쓸데없이 정직해요.”

“남자친구도 없으시면서.”

규하는 어깨를 으쓱였다.

“없으니까 일요일에 여길 나오죠.”

“있을 때도 빠진 적 없으시잖아요.”

“여길 빠지게 만들 정도로 날 빠지게 만드는 남자가 없었나 보죠. 오, 라임.”

동훈은 피식 웃고는 요양원 본관 건물로 들어갔다. 규하는 하늘을 보았다. 온몸에 힘을 빼고 털썩 늘어졌다.

말도 안 되는 연상 작용이지만 하늘을 보니 비슷한 눈동자가 떠올랐다.

보고 싶다─고, 생각해 버렸다.

대체 이런 기분이 얼마만 인지 손가락으로 셀 수도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규하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보았다.

<들어온 메시지 없음>

‘왜 연락을 안 해?’

규하는 이를 갈았다.

‘먹튀야? 그런 거야?’

렉스는 연락이 없었다. 열흘째.

둘째 날까진 일이 있겠지 했고, 나흘까진 사고가 났나 걱정했고, 엿새째까진 분노했고, 일주일이 넘어가자 무념무상이 되었다.

이제는 연락하면 죽여 버리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지만, 울지도 않는 핸드폰을 보는 건 이미 버릇이 돼버렸다.

‘번호는 분명히 제대로 적어줬는데.’

규하는 어두운 핸드폰 액정에 비치는 자신을 보다가 중얼거렸다.

“키스가 별로였나.”

하다하다 이젠 이런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선생님, 좀 도와주시겠어요?”

그때 동훈이 입구에서 불렀다. 규하는 한숨을 내쉬고 일어났다.

“네, 갑니다.”

반면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렉스는 기가 막혔다. 키스가 별로였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오해를…….

그는 팔짱을 끼고 있는 제 팔을 보았다.

하긴, 그러고 나서 아예 사라져 버렸는데 무슨 생각인들 하지 못할까.

‘차라리 키스라도 하지 않았다면…….’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지난 일에 대한 건 괜한 생각이었다.

렉스는 건물 안쪽으로 사라지는 규하를 보았다.

그녀는 바빴다. 퇴근하고 누워 영화나 보는 것처럼 말했지만, 오히려 그럴 시간이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방과 후에도 늦게 나오는 편이었고, 주말에는 고아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양로원에서 노인들을 돌보았다. 그런 일이라도 없을 때는 밖에 나가 쓰레기라도 주웠다.

니스타르라서 그런 건가 하기에는, 불평불만이 너무 많았다. 아침마다 갈까 말까 고민하는 소리가 거의 앓는 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어떤 날은 다 준비해서 문을 나오면서도 ‘쨀까.’ 중얼거리기도 했다.

그때였다.

“……님. 소장님!”

렉스는 고개를 들었다.

지금 누군가가 부른 것 같은…….

“소장……!”

멀리서 다급하게 말을 막는 소리가 나고, 가까이서 믿을 수 없어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렉스?”

렉스는 움찔 돌아보았다.

규하가 고아원 문밖 골목길 안쪽에 서 있는 그를 보고 있었다. 기가 차고, 황당하고, 무어라 형용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마구 올라오는 표정이었다.

너무 생각에 깊이 빠져 있었다.

자신이 이런 실수를 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짧은 황망함이 가시자, 규하는 대차게 인상을 썼다.

“너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따라왔습니다.”

당황했지만 얼굴빛은 변하지 않았다. 반면 규하는 흠칫했다.

“따라왔다고? 어디서부터? 왜 말을 걸지 않고…….”

렉스는 잠깐 말이 없다가, 조금 주저하듯 말했다.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할지 모르겠어서…….”

임기응변이긴 하지만, 거짓말은 아니었다. 만약 그녀에게 말을 거는 게 허락되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규하는 기가 막혔다.

‘미쳤구나, 강규하. 스토커 같다고 학을 떼야지! 왜 귀엽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럼 왜…….”

왜 연락하지 않았느냐고 물어보면 너무 전화를 기다린 것 같나? 좀 질척거리는 것 같나? 그런 여자는 싫어하나?

딱 연애 초기 여자의 증상 같은 ‘너무 많은 생각’이 순간 휘몰아쳤다. 규하는 한숨을 삼켰다.

‘내가 언제 그런 걸 신경 썼다고.’

“연락은 왜 안 했어?”

“바빴습니다.”

규하는 인상을 썼다.

“변명이야. 아무리 일이 바빠도 문자 하나 보낼 틈은 있잖아?”

“보안상…….”

그러고는 말이 없었다.

‘아, 경호원이라고 했지.’

하지만 열흘 동안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도 수백 번은 탄 걸 생각하면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규하는 다시 심기일전했다.

“그럼 일하러 가기 전에라도 보냈어야지.”

“아…….”

렉스는 그런 수가 있는지 미처 몰랐다는 듯 외마디를 냈다.

실제로는 조금 다른 의미였지만.

지금까지 그가 한 말에 거짓말은 없었다. ‘나는 흡혈귀입니다.’라는 대전제를 말하지 않은 것만 제외하면.

하지만 여기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서는 넘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결국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면 렉스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죄송합니다.”

렉스는 은사에게나 할 것 같이 정중하게 목례했다.

그가 쓴 캡 모자의 정수리를 보며 규하는 할 말을 잃었다.

허무해졌다. 이 남자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일부러 뭔가를 속이거나 사기를 칠 사람이 아니라는 것만은 알았다.

‘그냥 여자의 마음은 1도 모르는 숙맥이겠지.’

규하는 한숨을 내쉬고 손짓했다.

“들어와.”

렉스는 대문 너머 양로원을 보았다.

“하지만 전…….”

규하는 인상을 썼다.

“밖에서 계속 기다릴 셈이야?”

“괜찮다면…….”

“안 괜찮아. 누가 보면 나 스토커 생긴 줄 알아.”

그러고는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따라가지 않고 있자, 그녀는 휙 돌아보았다. ‘뭐 해?’하고 묻듯이.

그게 또 ‘이리 와.’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면 피해망상이겠지만, 렉스는 어쩔 수 없이 따라 들어가며 흘긋 뒤를 보았다.

‘이건 정말 실수인데.’

믿어줄지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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