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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짐승-44화 (44/104)

44화. BREATH (4)

연하는 복도를 뚜벅뚜벅 걸어갔다.

“아, 강 상사님…….”

한 대원이 인사하려는 듯 부르려고 했지만, 연하는 그도 그냥 스쳐 지나갔다.

“강 상사님?”

대원이 의아해하며 불렀지만, 전진밖에 모르는 로봇처럼 성큼성큼 걸어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세면대 앞에 섰다.

잠깐 그대로 서 있는가 싶더니, 갑자기 수도꼭지 아래 머리를 집어넣었다.

사물을 인식한 자동 수도꼭지는 사정없이 찬물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솨아아아.

물이 계속해서 머리를 내려쳤다.

연하는 양쪽으로 세면대를 짚은 채 한참이나 가만히 있더니, 머리를 집어넣은 만큼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촤악.

물이 사방으로 튀면서 얼굴에도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물을 양동이로 들이부은 것처럼 옷이 흠뻑 젖어 들었다.

연하는 얼굴을 쓸고 머리를 쓸어 올렸다.

찬물 샤워에도 소용없이, 거울에 비친 얼굴이 그야말로 새빨간 색이었다. 달궈진 숯처럼 지글거리는 머리에서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나 국장을 좋아하는구나.”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겪어봐서 흡혈이란 행위 자체가 상당히 묘한 기분을 들게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안 그래도 처음에 그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키스하려고 했었고.

이번에도 단순히 국장과 그렇고 그런 짓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면 그쪽으로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바보는 아니니까.

“국장을 좋아해…….”

멍하니 중얼거리는데,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어맛, 깜짝이야.”

한 여자 직원이 들어오다가 물에 빠진 생쥐 꼴 같은 그녀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여기 배수관 터졌어요?”

여자는 화장실을 둘러보며 물었다.

“아니에요. 쓰세요.”

연하는 말하고 화장실을 나왔다. 역시 복도에 지나가는 사람들도 젖은 그녀를 보고 놀라거나 의아해했다.

그런 반응에 연하는 어쩐지 머쓱해졌다.

‘그런데…….’

연하는 곰곰이 생각했다.

‘내가 흡혈을 당한 건 오늘을 빼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는데.’

12년 전 감염될 때.

아까 국장의 송곳니가 닿았을 때 불현듯 수염의 감촉이 중첩되어 떠올랐다. 그건 아무래도…….

‘내 기증자, 남자였구나.’

아예 정신을 잃고 나서 감염된 줄 알았는데, 얼핏 의식이 있었던 모양이다. 갑자기 기억난 걸 보면.

연하는 허공을 보았다.

‘많은 깨달음을 얻은 날이네.’

* * *

연하는 익숙한 음각 팻말이 걸린 문 앞에서 심호흡했다.

사고를 쳐 놨으니 조간만 호출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막상 호출을 받고 오자 어떤 얼굴로 그를 봐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깨닫고 얼굴을 마주 보는 건 처음이었다.

숨을 흡 삼켰다가 내쉬고, 한 걸음 내디뎠다.

지잉.

자동문이 열렸다.

책상 앞에 렉스가 서 있었다. 국장은 없었다.

“렉스 씨.”

연하가 불러도 렉스는 창밖을 쳐다본 채 움직이지 않았다.

“렉스 씨?”

그제야 렉스는 인기척을 느낀 듯 돌아보았다. 평소처럼 침착하면서도 어딘가 얼이 빠져 보였다.

‘착각인가?’

생각하는데, 다시 사무실 문이 열리고 국장이 들어왔다.

연하는 긴장했지만 애써 티 내지 않고 거수경례했다. 이반은 그녀를 한 번 보고 책상을 돌아가 종이 파일을 내려놓고 앉았다.

‘원래도 잘생긴 사람인데 더 잘생겨 보이네.’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 못 했는데, 가능한 모양이었다.

“알렉스 야크트훈트 소장, 강연하 상사.”

두 사람은 교장 선생님 앞에 불려간 문제아들처럼 똑바로 섰다.

“둘 다 이게 장난 같은 건 아니겠지.”

연하는 할 수 있는 말이 있을 리 없었다.

“죄송합니다.”

“강 상사는 3개월 감봉이야.”

“감사합니다.”

이반은 렉스를 보았다.

“소장은 총장이 따로 결정할 거고.”

“근데 저…… 한 말씀만 드려도 될까요?”

이반은 말한 연하를 보았다.

“그래.”

“저는 그렇다 쳐도 소장님께서는 구해주신 건데…….”

“그것조차도 문제긴 하지만, 저쪽은 그것만이 아냐.”

이반은 파일을 열고 사진 한 장을 들어 올렸다.

“하?”

연하는 자신이 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해 소리를 내었다. 렉스는 시종일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으나 이번만은 확실히 움찔했다.

“이게 무슨…….”

연하는 자기도 모르게 열중쉬어를 풀고 이반에게서 사진을 거의 뺏다시피 가져왔다. 사진 속에는, 두 남녀가 얽혀 있었다.

한참 보다가 겨우 이해한 모양이었다. 연하는 날카롭게 렉스를 돌아보았다.

슈퍼맨을 보는 꼬마의 눈빛은 온데간데없고, 애지중지 키운 막내딸을 노리는 소도둑놈을 보는 아버지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규하한테 접근하지 마세요!”

연하는 이를 물고 으르렁거리더니 이반을 돌아보았다.

“물러가도 되겠습니까?”

“물러가.”

연하는 다시 한 번 렉스를 노려보고는 사무실을 나섰다. 렉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즐거워 보이시는군요.”

사진이 찍힐 줄 알았고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식으로 사용할 줄은 몰랐다. 이반은 훗 웃었다. 의기양양한 사내애 같은 얼굴이었다.

“기분 탓이야.”

그리더니 다른 각도에서 찍은 사진을 가늠했다.

“예전부터 생각했는데 넌 그냥 무채색을 입어. 꼭 패션센스라고는 없는 녀석들이 색에 집착하더군. 참, 한 사이즈 작은 걸로. 어떤 건 두 사이즈 작아도 되겠어.”

렉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반은 무표정한 얼굴로 사진을 내려놓았다.

“오늘부로 강규하한테 접근 금지야, 어떤 경우에도. 강 상사가 뛰어들지 못해서 멀리서만 지켜본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 테지.”

렉스는 사진을 보았다.

저런 얼굴을 했던가.

“그럼 가봐.”

렉스는 목례하고 몸을 돌렸다. 그런데 뒤에서 이반이 말했다.

“너도 참 희한한 구석이 있어. 꼭 불가능한 길로 가려고 하더군. 이 MCTC도 그렇고. 인간과 흡혈귀가 힘을 합쳐 세계를 지킨다는 건 듣기엔 좋을지 몰라도, 이상이란 게 원래 소리는 그럴듯하게 나는 법이지.”

MCTC를 창단할 때 이반은 이미 모든 걸 포기한 상태였다. 그가 한 일은 ‘유대인들’과 페인 총장을 만나게 해준 것뿐이었다. 렉스조차도 유대인들과 접촉할 권한은 없었으니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반이 쳐다보고만 있어 렉스는 덧붙였다.

“MCTC 말입니다.”

“아니까 괜한 말 할 필요 없어. 나가봐.”

이번에는 렉스가 쳐다보고만 있었다. 이반은 서류로 내렸던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할 말 있으면 해.”

렉스는 사양하지 않았다.

“이바노프 씨는 왜 참으시는지 모르겠군요.”

“참는 게 아냐.”

이반은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기다리는 거지.”

* * *

“선생님.”

규하는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었다.

“선생님?”

“네?”

규하는 놀라 돌아보았다. 수업을 끝내고 온 사무실 옆자리 국어 선생이었다.

“괜찮으세요? 어제 쓰러져서 실려가셨다면서요?”

규하는 커피를 내려놓으며 자리에 앉았다.

“멀쩡합니다. 학교 다닐 때 제일 부러운 게 여름에 운동장 좀 뛴다고 쓰러지는 애들이었는데, 그 꿈을 늦게 이뤄보네요.”

“바람처럼 나타나서 구해준 분이 있었다던데. 애들 말로는 엄청 멋있었다고…….”

규하는 어깨를 으쓱였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교감한테 대판 깨지고 온 길이랍니다. 애들 교육에 안 좋은 짓을 하다하다 이제는 애들 다 보는 앞에서 남자하고 키스했다고요.”

국어 선생은 질렸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하여간 무식한 티는 혼자 다 내요. 원래 과호흡에는 마우스 투 마우스가 제일 좋은데.”

“아시네요. 보통 비닐봉지나 종이쇼핑백만 생각하던데.”

“제 동생이 배우지망생이었는데 오디션 보러 갔다가 너무 긴장해서 과호흡을 일으킨 적 있거든요. 하여간 걔가 뭐든지 호들갑스럽다니까요. 아무튼 그때 인공호흡 해준 사람이 현장 카메라 감독이었는데, 지금 둘이 결혼해서 잘 살아요.”

“어머.”

규하는 입을 가리는 손짓을 했다.

“욕 나오게 로맨틱하네요.”

국어 선생은 능글맞게 웃었다.

“강 선생님도 혹시 모르죠? 애들 말로는 진짜 백마 탄 왕자님 같았다던데. 금발 막 휘날리면서.”

“연락처도 모르는걸요.”

“아쉽네. 바로 물어보셨어야지.”

“그러게요.”

‘연락처보다 더한 걸 나누긴 했지만.’

몸을 돌린 규하는 책상 거울을 흘긋 보았다. 얼굴이 조금 붉어진 것 같았다.

이 나이에 남자랑 키스한 걸 떠올리며 얼굴이 붉어질 줄은 몰랐다.

그리고 연락처를 나누진 않았지만, 이쪽이 연락처를 주긴 했다.

그런 키스를 한 주제에 끝나자마자 부끄러워하는 숙맥처럼 90도로 인사하고 가버리려고 하기에 덥석 붙잡았다.

“잠깐.”

그리고 규하는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내 손안에 쥐어주었다.

“연락해.”

병원에서 나올 때부터 언제 줄까 타이밍만 노리던 참이었다. 또 연락처를 주지 않으려 한다면 이쪽이라도 억지로 알려주려고 했다.

그런데 키스를 할 줄이야…….

그런 뜨거운 키스는 간만, 아니, 거의 처음이라 그녀도 쪽지를 쥐어주기 무섭게 뒤돌아 가버렸다. 그러지 않으면 저도 모르게 물을 것 같아서.

들어갔다 가지 않을래? 라고.

‘경호원이라.’

규하는 생각했다.

‘나쁘지 않지. 좀 위험해 보이긴 해도 형사처럼 범인을 잡으러 뛰어다니진 않잖아. 형제는 있나? 난 형제가 많은 게 좋은데.’

규하는 실소했다. 키스 한 번 했을 뿐인데 이미 애 이름까지 생각하고 있는 짝이었다. 하지만 이런 기분, 나쁘지 않았다.

정말 오랜만…… 아니, 거의 처음인 것 같으니까.

손을 옆으로 옮기는데 핑크색 편지가 눈에 띄었다. 규하는 편지를 들어서 빤히 보다가는 내려놓았다. 그리고 창밖을 바라보고 중얼거렸다.

“하긴, 그럴 리가 없겠지.”

제 눈으로 연하의 시신을 확인해 놓고 말이다.

봄이 이르게 찾아오려는지 바깥에 벌써 매화 냄새가 났다.

* * *

연하는 미간을 잔뜩 좁히고 사진을 보았다.

사실 늘 멀리서 지켜보다 보니 본의 아니게 규하의 개인적인 순간들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규하가 알게 되면 머리끄덩이 잡고 화낼 일이겠지만…….’

대학생 때 과동기와 했던 첫키스나, 몇 년 전에 친구한테 소개받은 남자와 한 키스, 종종 썸남들과의 그렇고 그런 짓.

하지만 규하는 한 번도 격정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멀리서도 그 정도 보디랭귀지는 읽을 수 있었다. 규하는 좋아하는 것은 투지를 다해 부딪쳤다. 그래서 대체로 고양이들은 규하를 싫어했다.

오다가다 만난 그 남자들이 규하에게 처음 보는 길고양이만큼이라도 마음을 동하게 했다면 그런 시어빠진 시금치 같은 시들한 반응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냥, 어떤 의무감을 가진 게 아닌가 싶었다.

대학 졸업반이 되도록 첫키스조차 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주변에서 레즈비언이 아니냐는 시선을 살 정도로 오랫동안 솔로로 지내는 자신에 대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쌍둥이가 어려서 끝내야 했던 삶을 악착같이 살아야 한다고…….

어두운 집, 식어 있는 부엌, 혼자 보는 고전 영화, 쳇바퀴 같은 일상…….

모든 게 시어빠지고 재미없지만, 누군가는 원했어도 가질 수 없는 삶을 누구보다 성실하게 묵묵히 살아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건…… 다르다고 해야 할까.

‘아니, 분명히 달라.’

물론 그건 좋았다. 규하가 결코 의무감만으로 살길 원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왜 하필.’

소장 측에서 보면 이건 분명히 미필적 고의였다.

“뭐 하냐?”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다.

연하는 정신을 차렸다. 격납고에 보관된 전투기 조종석에 앉아 있는 그녀를 전투기 날개에 올라온 도영이 보고 있었다.

도영은 무심코 연하가 들고 있는 사진을 보고 허, 소리를 냈다.

“이 자식, 뭐 이상한 걸 보고 있…….”

그러다가 사진의 두 주인공을 다시 보고는, 아까 그녀보다도 더 크게 소리를 냈다.

“하?”

도영은 바로 사진을 뺏어갔다.

“소장이랑…… 규하 누나? 뭐야, 이거? 왜 이렇게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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