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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짐승-43화 (43/104)

43화. BREATH (3)

“참, 상처는 어떠세요?”

“다 나았어.”

연하는 지극히 의심스러워하는 눈으로 이반을 보았다.

“그럼 보여주세요.”

이반은 가만히 있었다. 연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역시 다 낫지 않았죠.”

이반은 조금 웃었다.

“그럼 도움을 좀 받을까?”

“그러실래요?”

연하는 드디어 도와줄 수 있다는 생각에 마냥 기뻐하는 얼굴로 단추를 푸르기 시작했다. 이반은 천진난만하기까지 한 그녀를 웃는 얼굴로 보았다.

저번처럼까지는 아니지만 연하는 어느 정도 앞섶을 열어 목덜미가 드러나도록 하고 그를 보았다.

자, 어서 드세요, 하고 말하듯.

이반은 연하의 허리 뒤로 손을 짚고 가볍게 끌어당겼다. 그가 너무 가까워져, 그녀는 흠칫했다.

이반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피를 마시려면.”

“아, 네.”

그가 고개를 기울여오자, 연하는 예상치 못하게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요즘 국장님하고 분위기가 묘하다던데요.”

왜 하필 지금 그 말이 생각났을까.

그러고 보니 집은 너무 조용했고, 둘은 너무 가까웠다.

지금까진 전혀 의식하지 않았는데, 그의 머리카락이 닿을 듯 말 듯 스치는 느낌에 이상하게 피부가 울렁거렸다.

목덜미에 입술이 닿았다.

연하는 움찔하려는 몸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그러고 보니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흡혈하려면 어쩔 수 없이 동반되는 행위들을 생각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건 일종의 의료 행위였다. 수혈을 해주는 것 같은 거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이반은 박동이 느껴지는 혈관을 따라 입술을 미끄러뜨렸다. 아마 필요 이상으로 길게.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냥 이를 박아 넣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텐데, 솔직히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그는 이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연하의 피부는 보는 것처럼 부드러웠다. 목덜미를 따라 올라가자, 배냇머리 같은 귀밑의 머리카락이 얼굴을 간질였다.

어리고 연한 향기가 콧속을 채웠다. 최근 느낄 수 없었던 욕구가 밀려왔다.

사실 늙고 교활한 흡혈귀에게 어린 동족은 인간이나 다름없는 먹이였다.

그래서 진화하는 과정에서 혈액형이 다른 감염원을 공격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동족의 포식자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쨌든 더 강하고 경험이 많은 동족을 상대로는 단단한 피부와 날카로운 손톱만으로는 부족하니까.

“강 상사.”

이반은 마지막 이성을 붙잡고 불렀다.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연하가 밀어내길 바라며. 하지만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이성을 깨울 수 있어도, 그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연하는 질끈 눈을 감았다. 그가 귀 뒤에 얼굴을 파묻었다. 등줄기가 섬뜩했다.

이건 스킨십이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먹잇감을 가늠하는 쪽에 가깝다는 걸 알았다.

고양이라 생각하고 부주의하게 쓰다듬었던 것이 실은 호랑이여서 거대한 몸을 편 것처럼, 그가 압도적으로 느껴졌다.

동물로서 달아나고 싶은 마음과 여자로서 달아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뒤엉켰다. 밀고 당기는 힘 사이에서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있는데, 그가 목덜미에 나직한 숨을 내쉬었다.

뜨거운 숨이 차가운 소름을 전달하는 이율배반적인 느낌이 올라왔다.

그리고 목덜미에 날카로운 것이 닿았다.

‘언젠가 비슷한 느낌을 겪었는데.’

순간 그 생각이 섬광처럼 지나갔다. 흐릿한 기억 너머 목덜미에 닿는 입술, 송곳니…….

‘……수염?’

연하는 불현듯 미간을 좁히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그가 손으로 등허리를 쓸어 올리면서─

연하는 몸을 떨었다. 바늘에 손끝을 찔렸을 때처럼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국…….”

반사적으로 말하려던 연하는 이를 꾹 물었다. 한 방향으로 끌려 나가는 격렬한 혈액의 흐름에 손끝과 발끝이 저릿저릿했다.

연하는 애써 참으며 오히려 나머지 한 팔로 그의 어깨를 안았다.

그가 더 강하게 빨아내면서 그녀를 끌어안았다.

연하는 고통스러워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길어지고 있어서, 참다못한 신음을 터뜨렸다.

“읏……”

그 작은 소리가 신경을 건드린 듯, 이반이 정신을 차렸다.

모든 것이 인식되었다.

그가 붙잡고 있는 가느다란 팔목, 맞닿은 몸, 떨리는 숨…….

그는 들러붙어 있어 쩍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것 같은 입을 뗐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연하는 숨을 몰아쉬면서 그를 보았다.

그는 아직 전부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않은 것 같았다. 내리뜬 눈이 몽롱했다. 그리고 입술 안쪽이 자신의 피로 젖어 있었다. 이반은 그것을 깨달은 것처럼 검지로 입술을 훑었다.

이내 그녀를 보는 눈이,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용암의 색깔이란 꼭 이럴 거라고 생각했다.

연하는 그에게 키스했다.

충동을 이기지 못해 와락 부닥치는 것에 가까웠다.

“연…….”

그가 순간 정신을 차린 듯이 부르려고 했지만, 연하는 이미 들리지 않았다. 본능이 외치는 대로 무작정 입술을 비비면서 무게를 실어 그는 점차 뒤로 기울었다.

이반은 얼른 한 손으로 바닥을 짚어 몸을 지탱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건 뭘까.’

이건 키스라기보다…… 개가 주인을 보고 흥분해서 핥는 느낌이었다.

오히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설마 이 녀석 키스도 해보지 않은 건가.’

헐떡이며 입술을 비빌 줄밖에 모르는 모습을 보아하니 거의 확실했다.

서른하나나 먹은 여자의 첫키스 상대가 자신이라는 데 감동이 느껴질 지경이었지만…….

‘역시 이건 키스로 쳐선 안 되겠지.’

사실 흡혈욕은 성욕과 비슷한 점이 있어서 어린 흡혈귀들은 둘을 구별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는 연하의 어깨를 잡아서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이미 흥분할 대로 흥분한 연하는 팔에 힘을 주면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거의 본능적인 행동 같았다.

이반은 곤란했다. 이러면 아무리 그라도 참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연하가 그에게 무게를 거의 싣고 있어서, 몸의 굴곡이 전부 느껴졌다.

솔직히 좋아하는 여자가 육탄전으로 덤벼오는데 이 정도까지 참을 수 있는 남자가 있다면, 이반은 기꺼이 그를 파트로네스로 모실 의사도 있었다.

그가 아무 반응이 없자 연하는 입술을 뗐다. 흐려진 눈이 정체를 모를 열기로 달떠 있었다.

숨이 뜨거웠다.

“국장님…….”

목소리마저도 뜨거웠다. 그를 원하는 열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손을 들었다.

아니, 손을 올리려는 찰나였다.

열기로 부옇게 흐려진 눈에 반짝 빛이 돌아오더니, 연하는 사색이 되었다.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깨달은 것처럼.

“죄, 죄송합니다!”

연하는 벌떡 일어났다. 이반은 그녀가 이대로 달아나려 하는 것을 깨달았다.

“잠…….”

이반은 연하의 팔목을 잡았다.

그런데 그도 미처 조절하지 못한 힘에 연하가 뒤로 휘청했고, 중심이 흐트러지면서 카펫에 발이 미끄러졌다.

차라리 그대로 넘어지는 편이 나았을 텐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연하는 몸을 훌쩍 휘면서 네 발로 내려섰다.

타악, 하고.

그러니까 어떤 자세가 만들어졌느냐면, 그를 가운데 두고 네 팔다리가 모두 땅을 짚은 채 배가 천장을 보는 활 자세였다.

체조였다면 10.0이 나올 만한 완벽한 활 모양이었으나, 짧은 정적이 흘렀다.

“저 지금 엄청 볼썽사나운 거 맞죠?”

연하는 울고 싶은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이반은 입가를 가렸다. 웃지 않을 생각이었다. 정말로.

그런데 웃음이 터졌다.

“웃지 마세요.”

어느새 자세를 바로 한 연하가 옆에서 말했지만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세상에, 이 타이밍에 웃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 했는데.

“국장님!”

연하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화가 났다는 걸 피력하듯 눈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이반은 겨우 웃음을 멈추었다.

“미안해.”

연하는 뚱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아직 웃고 계시잖아요.”

이반은 손을 짚고 일어나 다른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 내가 좀 흥분했던 거 같아서.”

연하는 허를 찔린 듯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일어났다.

“기다려.”

이반이 복도 너머로 사라지고, 연하는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흐트러진 제 옷매무새를 보았다. 거의 활짝 열려 있는.

‘힉.’

얼른 옷매무새를 추스르는데, 그가 돌아왔다. 휴대용 드레싱 밴드를 가지고 온 것 같았다.

그는 옆에 앉아 밴드를 뜯어 목에 붙여주었다.

“죄송해요.”

연하는 차마 그를 보지 못하고 웅얼거렸다.

“괜찮아. 흔한 일이야.”

연하는 주춤거리며 그를 보았다.

“흔한 일……이요?”

“흡혈은 성관계와 비슷한 점이 있으니까. 순간 묘한 기분이 드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야.”

그는 마치 성교육을 해주는 보건교사처럼 객관적인 투로 말했다.

“성…….”

연하는 저도 모르게 따라 말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사고였다고 생각해.”

정말 그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입술에 묻어 있던 핏물도 지워서, 피를 마신 적도 없는 것 같았다.

혈색이 한결 좋아 보인다는 점을 빼면 달라진 건 없었다.

처음부터 딱히 건강해 보이지 않는다거나 혈색이 나빠 보인다거나 하진 않았지만, 피를 마신 것과 마시지 않은 건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이반은 웃었다.

“오히려 내가 미안해야지. 나이도 먹을 만큼 먹고 참지 못했으니.”

거짓과 진실의 경계는 어디까지일까.

그는 분명히 참지 못했지만, 그가 참지 못한 건 성욕으로 둔갑한 흡혈욕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 흡혈욕을 가장한 성욕이었을 것이다.

연하는 지금 그가 어떤 자제력을 발휘하고 있는지 꿈에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가, 볼게요.”

연하는 갑자기 일어났다. 이반은 잡지 않았다.

그게 못내 서운하게 느껴져서, 연하는 자신이 미쳐 가는구나 싶었다. 먼저 가겠다고 일어나 놓고 잡지 않는다고 서운해지다니.

‘정신분열증도 아니고 말이야.’

그는 현관까지 배웅해 주었다. 연하는 신발을 신고 말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그는 여전히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너도. 잘 자.”

연하는 거수경례하고 문을 나섰다.

그녀 뒤로 천천히 문이 닫혔다.

그는 꽤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마침내 돌아섰다. 부엌으로 가 냉장고를 열고 팩을 꺼내 유리잔에 따랐다. 연한 사과주스 빛이 나는 액체가 찰랑거렸다.

그는 한 모금 마셨다.

내려놓고, 유리잔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플로스는 맛에까지 신경 쓴 완전식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야말로 무미,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반은 갑자기 생각난 듯 옷을 걷고 옆구리에 붙은 패드를 떼어냈다. 옆구리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패드를 구겨 탁자 위에 던져 놓았다.

오늘 일로 한 가지 확실하게 깨달은 점이 있다면, 그는 연하를 원한다는 점이었다.

왜 하필 강연하인가─라기보다, 왜 그녀가 아니었겠는가?

심지가 굳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사실 연하만큼 사랑스러운 생물은 이만큼 살고도 본 적이 없었다.

평소 약간 넋을 놓고 있는 것 같은 표정, 갑자기 총기를 띠는 눈동자, 웃을 때면 한없이 풀어져서 어쩐지 상대까지 무장해제시키는 얼굴, 의외로 볼륨감이 있는 몸…….

생각하자, 그녀를 그냥 놓아준 것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미치겠군.’

이반은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 아래 그림자 속에 놓인 잔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그가 연하에게 원하는 것이 일시적인 연애감정이나 충동적인 호기심이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이런 사태는 막내 클리엔테스를 데리러올 때만 해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하지만 역시 인생은 어떤 모퉁이에서 서프라이즈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법이었다.

그는 잔을 들어 고개를 들고 한 모금 더 마셨다.

평화로운 삶을 살고 난 쌍둥이 자매가 늙어 죽고 나면, 연하는 마침내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때 연하가 원한다면 MCTC도 그녀를 옭아맬 수 없도록 해줄 수 있었다.

기다릴 것이다. 연하가 그에게 올 준비가 될 때까지.

그는 결심했다.

‘어쨌든 시간은 썩어나도록 많으니까.’

급할 건 없었다.

한동안은 살아야 할 목적도, 의미도 없던 삶이었다. 이런 기다림이라면 오히려 달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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