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BREATH (2)
“택시를 타는 게 낫지 않습니까?”
규하는 일단 타라는 듯 고갯짓하고 먼저 버스에 올랐다.
“세상에서 제일 아까운 게 택시비거든.”
버스가 급하게 출발해서 규하가 비틀거리자, 렉스가 팔을 뻗어 막았다. 덕분에 균형을 잡은 그녀는 그를 위아래로 보았다.
“뭐 경호원이야? 가만 보니 이런 데 익숙하네.”
“네.”
어쨌든 지금은.
“아, 경호원이었어?”
규하는 렉스를 새삼스럽게 보고 2인용 좌석의 안쪽에 앉았다. 옆에 앉으라는 이야기인가 생각하고 있자 규하는 ‘안 앉아?’ 하고 묻듯이 보았다.
렉스는 규하의 옆자리에 앉았다. 처음 타보는 버스의 좌석은 생각보다 좁았다. 그녀의 허벅지가 닿아서…….
“보디가드 영화 봤어?”
렉스는 정신을 차렸다.
“I will always love you는 진짜 명곡이지. 마지막에 I will always love you가 울려 퍼지면서 여자주인공이 비행기에서 달려와서 남자주인공한테 키스하는 장면은……. 크.”
“옛날 영화를 잘 아는군요.”
“좋아하기도 하지만, 퇴근하고 집에 가면 혼자 할 만한 게 별로 없어서. 최신 영화를 모두 섭렵하고 나면 어련히 고전까지 돌아가게 되어 있거든.”
말하다가 갑자기 헛웃음을 지었다.
“나 원래 이렇게 짠내 나는 캐릭터가 아닌데, 왜 자꾸 네 앞에서는 짠내를 풍기는지 모르겠네.”
규하는 창틀에 팔꿈치를 걸치고 턱을 괴었다. 그리고 물끄러미 그를 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왜 꼭 내가 짠내 나는 순간에만 나타나는지.”
아마 그건…… 강연하가 근처에 있을 때이기 때문에.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리 없어, 렉스는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부터 반말을 하시는군요.”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내가 연상 같은데? 몇 살이야? 한…….”
규하는 렉스의 얼굴을 살폈다.
“스물여섯?”
“스물일곱인 것 같습니다.”
“인 것 같다는 뭐야?”
“어렸을 때 버려져서 정확한 나이를 모릅니다.”
규하는 렉스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시선으로 의미를 묻자, 다시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막상 당해보니 어쩔 줄 모르겠네. 부지불식간에 사연으로 치고 들어오는 거. 반성해야겠다.”
“저도 딱히 쓸쓸하게 웃으며 이야기한 건 아닙니다. 오히려…….”
렉스는 정면을 보았다가, 조금 눈을 내리떴다.
“그때가 제일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났나 봐.”
무슨 말인가 싶어 돌아보자, 바깥의 나무 사이로 잦아드는 해가 마지막 빛을 발했다. 그 빛을 받아 어렴풋이 웃는 규하가 반짝거리는 것 같았다.
규하는 희미하게 웃었다.
“원래 일 힘들고 적성에 안 맞는 건 참아도 사람 거지같은 건 못 참잖아.”
렉스는 오랫동안 잊고 지낸 사람들을 생각했다.
“네, 좋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버려진 갓난쟁이였던 그를 거두어준 사람들, 가족으로, 아들로 받아주었던 사람들…….
지키기 위해 신마저도 버렸지만, 결국 지키지 못했던 사람들.
“우리 둘 다 운이 좋았네. 이쪽도 부모님이 돌아가셨지만, 그래도 다 컸을 때여서 그럭저럭 살아나갈 만했거든. 보험금도 꽤 나왔고. 아니면 대학도 못 갈 뻔했는데, 덕분에 지금 밥 벌어서 먹고살고 있지.”
그 돈에는 연하가 가불을 받은 몇 년 어치 연봉이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수영을 계속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규하는 사범대로 진학했다.
청소년 국가대표 후보군이었으면 꽤 재능이 있었던 걸 텐데.
“교사가 된 이유가 있습니까?”
규하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와, 막 치고 들어오네.”
“이제 이 정도는 물어도 되지 않습니까?”
“은인이라 이거야? 의외로 생색내는 타입이었구나.”
또 콧잔등을 찡그렸지만 진심으로 불쾌해서는 아닌 것 같았다.
“그냥, 좀 쪽팔려서. 내 쌍둥이 꿈이었거든. 나 쌍둥이라고 이야기했나? 나랑 똑같이 생긴 얼굴로 그러지 좀 않았으면 싶을 정도로 어리바리한 녀석이었지만, 좋은 선생이 됐을 거야. 제 인생을 바꿔줄 선생을 잃은 학생들이 불쌍해서.”
규하는 바깥을 보며 중얼거렸다. 열어둔 창문 틈으로 불어드는 바람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래서 나라도 그 자리를 채워야지 생각한 것까진 좋았는데, 제 깜냥이란 게 있다는 걸 몰랐지 뭐야. 그래서 결국 주정뱅이, 마귀할멈, 욕쟁이 교사밖에 못 됐지만.”
“그래도 아이들을 좋아하시는 것 같던데요.”
“응. 좋아해. 사고뭉치들이지만 발칙하고 귀엽잖아. 녀석들하고 씨름하고 있으면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겠는 게…….”
규하는 아이들을 생각하는지 웃었다. 하지만 자신이 그렇게 웃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웃는 걸 멈추었다. 렉스는 그게 시드는 꽃을 보는 것보다도 아쉬웠다.
뒤늦게 렉스는 자신이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어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쩐지 어색해져, 두 사람은 정면을 바라보았다.
버스가 덜컹거리며 흔들리고, 몸이 스쳤다. 둘은 말없이 앉아 있었다.
* * *
이반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팔짱을 끼고 창밖을 보았다. 한참 있다가 옷장에서 겉옷을 꺼내 걸치고 사무실을 나섰다.
천천히 걸어 관사에 도착했다. 구름다리와 로비를 지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두운 내부에 불이 들어왔다.
소파에 둥그스름한 검은 뒤통수가 보였다. 이번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으면서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반은 소파를 돌아가서, 그녀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연하는 멍하게 그를 보았다가 뒤늦게 깨어난 눈빛으로 돌아왔다.
“아, 오셨어요?”
이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응시하는 눈동자에서 무언가를 감추듯이 연하는 시선을 돌렸다.
“어, 또 멋대로 들어와 있어서 죄송해요. 그냥 방에 가기 싫어서…….”
그가 팔을 잡았다.
“강 상사.”
연하는 횡설수설 나오는 말을 멈추었다.
다리를 가슴 앞에 모은 자세 그대로 제 무릎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입을 열었지만 아무런 말하지 않고 다시 다물었다가 겨우 말했다.
“규하가…… 괴로워했어요.”
말하는 순간 알았다, 참을 수 없다는 걸.
“근데 난 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연하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울지 않으려 했는데.
그냥, 그의 얼굴만 보고 돌아가려고…….
“숨을 쉬지 못해서…….”
누가 먼저라고 할 건 없었다. 그는 팔을 뻗었고, 그녀는 품에 안겨들었다.
연하는 그의 목을 안으며 울음을 토해냈다. 이반은 그녀의 뒷머리를 감싸고 허리를 안아 더 깊이 품었다.
응급실까지 따라간 연하는 두 사람이 응급실을 나오기 직전 사라졌다. 경호원들은 아무도 그녀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직감이라 해야 할지, 감각을 집중해 보기도 전에 그녀가 어디 있을지 알 수 있었다.
조금은 자신의 직감이 틀렸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건 작은 속삭임에 불과한 소리였다.
그녀가 감정적으로 무너졌을 때 자신을 찾아왔다는 사실에, 이기적인 남자는 기뻐했다.
* * *
“아, 여기야. 내려야 해.”
규하는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둘은 아슬아슬하게 버스에서 내렸다. 그리고 그녀의 집으로 이어지는, 다소 인기척이 없는 길을 걸었다.
그들이 처음 만났던 무인 편의점을 지나 골목 어귀를 돌아갔다. 가는 동안 대화는 없었다.
규하는 아파트 단지로 들어가기 전 골목에 멈춰 섰다. 렉스도 따라 멈추었다.
“고마워, 오늘.”
렉스는 그녀를 보았다.
신의 사도라고는 하지만, 니스타르는 지극히 인간적이었다.
이사야나 예레미야 같은 성경의 예언자들처럼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도, 의지로 재앙을 내릴 수 있는 것도, 흡혈귀처럼 강한 육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렉스가 그날 편의점 앞에 앉은 그녀에게로 돌아갔던 이유는.
대체 이 무엇 하나 특출할 것 없는, 심지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의인답지도 않은 존재를 통해서 신이 하려는 말이 뭔지 궁금해서.
‘하필 그 니스타르가 강규하였던 건 우연이었지만.’
중앙근위사단은 신의 사업보다 지상의 사업에 더 관심이 많은 곳이었기 때문에 총사령부를 떠난 후로는 니스타르와 마주칠 일이 없었다.
그런데 신에 의해 신앙의 깊이를 의심받는 욥처럼 모든 걸 빼앗긴 니스타르를 보자,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질문이 떠올랐다.
‘사랑하는 아들, 딸을 이토록 고난에 들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참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던지, 규하는 조금 인상을 썼다.
“왜 그렇게 봐?”
‘사람 기분 묘해지게.’
뒷말은 삼켰다.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말…… 거짓말이었다는 거 알면서 왜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습니까?”
규하는 어깨를 으쓱였다. 역시 눈치채고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 사이에 어떤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닌걸. 네 나름대로 사정이 있겠지. 그리고 내가 말했잖아.”
규하는 척 그를 가리켰다.
“있을 놈은 있다고.”
막을 새도 없이, 렉스는 견고한 무표정을 허물어트리며 웃고 말았다.
적어도 강규하는 멋진 사람이었다.
어린 그녀는 확실한 악의를 가진 비인간적인 존재들을 상대로도 용기를 잃지 않았다. 그녀는 인간 여자라는, 육체적으로 가장 약한 존재이기에 오히려 영웅적이었다.
무섭지 않았을 리가 없건만, 약한 육체는 그녀에게 걸림돌이 아니었다. 일어나고자 하는 의지, 오로지 그것이 중요할 뿐이었다.
험난한 세상, 강한 상대, 악한 의지, 그런 건 다른 이들의 문제였을 뿐, 본인이 할 일은 그저 일어나는 것뿐이었다.
아무래도 반해 버린 것 같았다.
가당치 않은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렉스는 규하를 잡았다.
끌어당겨 볼을 감싸며 입 맞추었다. 규하는 당황하지 않았다. 기다렸던 것처럼 그의 목에 팔을 감아왔다.
그 몸짓에, 정말로 참을 수 없어지고 말았다.
렉스는 규하를 끌어안았다. 두 몸이 부딪치며 규하가 헉 소리를 터뜨렸다. 품 안의 몸이 얼마나 연약한지 알기에 힘을 조절했지만, 그나마도 셌던 모양이다.
조금 팔을 푸는데, 규하가 그의 목에 감은 팔을 더욱 조이며 부딪쳐 왔다.
“렉스…….”
뜨거운 입술로 속삭였다. 그제야 다른 의미로 낸 소리였다고 깨달았다. 그는 다시 그녀에게 부딪치듯이 키스했다.
입술이 뜨겁고 부드러웠다. 그를 환영하듯 벌어지는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입술이 여러 각도로 재차 부딪쳤다.
그때였다. 그녀가 이쪽으로 혀를 넣으려고 하자, 렉스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 부드럽게 떼어놓았다. 규하는 숨을 몰아쉬며 그를 보았다. 이유를 묻듯.
입안에 들어왔다가 자칫 송곳니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죄송, 합니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연하가 MCTC에 제시한 조건은 쌍둥이 자매 강규하가 흡혈귀나 대테러부대 같은 것과는 관련이 없는, 그저 평범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다가 가는 것.
그에게는 그 간절한 소망을 방해할 권리가 없었다.
막 어깨를 떠나려는 손을 그녀가 잡았다. 손가락 하나로도 뿌리칠 수 있는 손을, 그는 온 힘을 다해도 뿌리칠 수가 없었다.
돌아서서 가야 한다고, 다시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만 할 뿐이었다.
“죄송하다고 하지 마.”
그를 보는 검은 눈동자에 물기 같은 빛이 돌았다.
렉스는 다시 규하를 끌어당겼다. 뱃속에서 치솟아 오르는 욕망을 토해내듯이 그녀에게 키스했다.
성마른 키스였지만 규하는 거절하지 않았다.
* * *
연하는 작게 훌쩍였다. 울음은 거의 잦아들어 있었다.
“규하가 죽을까 봐 무서웠어요.”
“죽지 않아.”
그 말에 연하는 미간을 찌푸리고 이반을 돌아보았다.
그는 그녀와 같이 바닥에 앉아 소파에 기대고 있었다. 벗은 정장 상의와 풀어낸 넥타이는 소파의 팔걸이에 걸쳐져 있었다.
“정말 죽을 것 같았다면 경호원들이 나섰을 테니까.”
그건 그렇지만…….
냉정하게 말하는 그가 못내 미워 눈을 흘겼다.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미안해.”
연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나름대로는 그녀가 우려하는 사태는 없었을 거라는 확신을 주려고 했던 거였다고 깨달았다.
“사과하지 말아요. 내가 나빠지잖아요.”
“넌 나쁘지 않아.”
그는 어떤 신념이라도 주지하듯 똑바로 그녀를 보고 말했다.
연하는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정면으로 돌려 한 지점을 응시했다.
“나쁘지 않은 사람은 없어요. 나쁘지 않아서도 안 돼요.”
울면서 비는 것만으로는 아무도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연하는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이반은 당장에라도 다시 쏟아낼 것 같으면서도 꾹 참는 옆모습을 보다가 물었다.
“모두를 구하고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받아야 한다고 하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연하는 갑작스러운 질문이 이해되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생각보다 깊이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선택지가 천국하고 둘 중 하나라면요.”
“어째서 천국이 아냐?”
연하는 오히려 이반이 그렇게 묻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혼자 올라간 천국이 의미가 있어요?”
이반은 연하를 빤히 보다가, 조금 웃었다.
“그렇구나.”
침묵이 감돌았다.
연하는 가만히 앉아 있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돌아보았다.
“참, 상처는 어떠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