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BREATH (1)
렉스가 서 있었다. 아무 말도 없이.
연하는 깜짝 놀랐다.
“렉스 씨.”
‘이 사람은 너무 기척이 없다니까.’
렉스는 연하가 놀라면서 떨어뜨린 것을 주워 건네주었다.
“더 만드셨군요.”
무슨 말인가 하다가, 예전에 그가 미산가 팔찌에 대해 물어본 적 있다는 것이 기억났다.
결국 규하가 술 먹고 떨어뜨린 것을 찾아주려 한 거라고 알게 됐지만…….
“네.”
연하는 팔찌를 받아들며 말했다.
“렉스 씨도 하나 만들어 드릴까요?”
“전 괜찮습니다. 저보다 국장님께 만들어 드리세요.”
“네? 구, 국장님한테 왜요?”
연하는 왠지 뜨끔해져 말을 더듬고 말았다. 렉스는 그런 반응이 오히려 이해되지 않는 얼굴이었다.
“좋아하실 테니까요.”
연하는 말문이 막혔다.
“그걸 렉스 씨가 어떻게 알아요?”
연하는 괜히 그를 탓하듯이 말하고는 가버렸다. 렉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귀엽군.’
지금까진 연하가 어떻게 돌 같은 그의 파트로네스를 녹였는지 알지 못했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니까 유난히 꿋꿋하고 씩씩한 모습이 좋은가보다 막연히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런데 혹시…….’
렉스는 저 멀리 가는 연하를 보다가 생각했다. 하지만 금세 생각을 떨쳐 냈다.
‘아니겠지.’
* * *
연하는 창문을 열고 미끄러져 들어갔다.
교무실은 비어 있었다. 하지만 여러 사람이 오가는 장소 특성상 오래 비어 있진 않을 테니 빨리 움직여야 했다.
연하는 규하의 책상으로 가서 핑크색 봉투를 내려놓았다.
규하가 끊어진 팔찌를 보면서 속상해하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이러면 안 되는 걸 알지만, 전해주고 싶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선생님께서 가지고 다니시는 팔찌가 끊어진 것 같아 만드는 김에 하나 더 만들었어요.>
오는 길에 일부러 가게 점원한테 부탁해서 편지도 동글동글한 여고생 필체로 보이게 적었으니까.
이름은 적지 않았지만, 그 정도는 수줍은 성격의 학생이려니 생각하고 넘길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더 눈에 잘 띌까 요리조리 놓다가 막 돌아서려는데, 문이 열리고 수학 선생이 들어왔다. 밖에다 대고 외치면서.
“이 녀석들! 뛰지 마!”
마침 아이들이 뛰어가는 바람에 소리가 섞여서 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후드를 뒤집어쓴 채인 연하는 수학 선생에게 꾸벅 인사하고 지나쳐 갔다.
“어, 그래.”
수학 선생은 그녀를 전혀 의심스럽게 보지 않았다.
‘다행이다.’
연하는 생각하며 문을 나섰다. 그때 누군가와 부딪쳤다.
* * *
“선생님, 내일 봬요!”
막 교무실로 들어가려는데, 저 멀리 가연이 친구들과 가면서 외쳤다.
규하는 손을 흔들어주었다. 다행히 가연이 교우관계는 좋아서 일단 학교에만 온다면 걱정할 일은 없었다.
몸을 돌리다가 교무실에서 나오는 학생과 부딪혔다.
“어, 미안.”
후드를 쓴 학생은 말도 없이 거의 90도로 인사하더니 지나갔다. 규하는 자신의 책상으로 가서 패드를 내려놓았다.
그런데 책상에 낯선 물건이 올려져 있었다.
“이건 뭐지?”
핑크색 봉투는 뭔가 물건이 들어 있는 것처럼 두툼했다. 아무 생각 없이 봉투를 열고 물건을 꺼냈다.
미산가 팔찌였다.
‘뭐…….’
그것의 의미를 깨닫지 못해 규하는 미간을 찌푸리고 옆을 돌아보았다. 교무실은 일상의 공기에 잠겨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학생, 교복을 입고 있지 않았어.’
규하는 당장 교무실을 박차고 나갔다. 막 들어오던 영어 선생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강 선생, 왜 그래요?”
“후드. 회색 후드 입은 학생 어디로 갔어요?”
영어 선생은 규하의 박력에 밀려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어, 오른쪽인 것 같은데.”
규하는 당장 오른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강 선생!”
뒤에서 영어 선생이 불렀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모퉁이를 돌자, 삼삼오오 떠들며 몰려나오는 학생들 사이로 얼핏 회색 후드가 비쳤다. 여전히 후드를 눌러쓰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165cm, 아니, 170cm 정도…….
연하보다 큰 것 같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거기, 너……!”
많은 아이들이 서로 떠들고 웃는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는지, 후드를 쓴 학생은 빛이 쏟아지는 정문을 나섰다.
규하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놀라 그녀를 돌아보았다.
“어, 선생ㄴ…….”
개중에는 규하를 알아보고 부르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그녀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후에 아이들이 이야기한 바에 따르면 귀신이라도 본 얼굴로 넋을 놓고 쫓아갔다.
넋을 놓았다고는 볼 수 없는 엄청난 속도로.
정문을 나간 규하는 다급하게 양쪽을 돌아보았다.
학생, 학생들, 또 학생들.
사방에 같은 교복을 입은 아이들밖에 없었다.
“일어나.”
규하는 운동장과 교문을 지나 무작정 거리로 나갔다.
학생들밖에 없던 풍경은 점차 그러데이션이 희미해지듯이 일반인들이 그녀를 힐끔대며 지나가는 풍경으로 바뀌어 갔다. 그럼에도 후드는 시야에 나타나지 않았다.
“당장 일어나.”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운동을 쉰 지 오래돼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멈출 수가 없어서 계속 달렸지만, 결국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규하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장난하지 마! 연하야, 연하야! 강연하! 제발, 제발……!”
영안실 침대에 누운 연하는 푸르고 깨끗했다.
규하는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그때 그녀를 사로잡은, 영혼이 산산이 부서지는 고통은 진짜 육체가 느끼는 고통과 다름없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연하가 먼저 태어나서, 그녀는 태어난 이래 단 한 번도 혼자 숨을 쉬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날 두고 가지 마.”
도로 건너편 건물 사이의 골목, 렉스는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역시 그 팔찌는…….’
애써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역시 강규하에게 주려고 만든 모양이었다.
규하는 숨을 몰아쉬면서 몸을 뒤로 젖혔다가 앞으로 숙였다. 이쪽 건물 옥상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때였다.
규하가 갑자기 주저앉자 렉스는 움찔하며 팔짱을 풀었다. 행인들도 놀라서 하나둘 멈춰 섰다. 규하는 호흡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과호흡.’
렉스는 바로 깨달았다.
규하는 경찰 조사 당시에도 여러 번 같은 증상을 보였다.
스스로도 낯설지 않아서인지 과호흡이 온 사람치고는 침착하게 숨을 몰아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폐 속에 갇힌 숨이 다시 밖으로 나오지 않아 점점 파랗게 질려갔다.
렉스는 뛰쳐나가려는 다리를 겨우 붙잡았다. 그는 더 이상 그녀의 인생에 뛰어들 자격이 없었다.
“아가씨, 괜찮아요?”
다행히 한 중년 여성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규하는 숨을 헐떡이면서 겨우 말했다.
“비닐…… 비닐, 봉…….”
용케 알아들은 중년 여성이 자신의 핸드백을 뒤지다가 슬슬 주변에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외쳤다.
“혹시 비닐봉지 있는 사람 있어요?”
“어, 저, 여기! 여기!”
규하는 누군가가 건네준 봉지를 입에 대고 숨을 규칙적으로 들이쉬고 내뱉었다.
그래, 처치 방법을 알고 있으니까 금방…….
하지만 비닐봉지가 소용이 없자, 규하는 가슴을 치면서 숨을 뱉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될 리가 없었다.
그녀가 느끼고 있는 괴로움과 공포를 대변하듯 일그러진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과호흡으로는 죽지 않는다.
경호원들은 나서지 않을 터였다. 그들은 정말로 그녀의 목숨이 위험한 순간이 아니면 어떤 경우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이 그들의 ‘코드’였다. 다리가 부러져도, 팔 하나가 떨어져 나가도, 그저 살아만 있다면…….
저렇게 괴로워해도.
제발…… 누가 좀…….
옥상에서 지켜보는 연하가 울먹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렉스는 꾹 눈을 감았다.
“아가씨!”
중년 여성이 기겁해 외쳤다. 렉스는 눈을 떴다. 규하는 힘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더는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달려 나갔다.
단숨에 차가 들이치는 도로를 건너, 몰려든 사람들을 헤치고 들어갔다.
렉스는 거의 의식을 잃기 직전인 규하를 똑바로 눕혔다. 까라지는 눈이 얼핏 그를 알아보는 것 같았다. 보라색으로 질린 입술이 희미하게 달싹였다.
렉스는 그녀에게 입 맞추었다.
모두 한동안 얼어 있었던 것 같았다.
멀리서 달려오는 구급차 소리에 사람들이 하나둘 동결 상태에서 깨어났다. 누군가가 미리 불렀는지 구급차가 멈추더니 제복을 입은 응급구조사들이 내리며 소리쳤다.
“비켜주세요!”
렉스는 겨우 숨을 쉬기 시작한 규하의 목 아래와 무릎 아래에 팔을 넣어 안아 들었다. 그리고 막 이동식 침대를 꺼내는 응급구조사들에게 다가갔다.
* * *
“학교가 발칵 뒤집혔어요. 본 애들이 많거든요.”
규하는 이마를 짚은 채로 말이 없었다.
응급실 침대에 앉은 규하 옆에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온 영어 선생과 반장 윤재가 서 있었다.
“그런데 저분은……?”
영어 선생은 응급실 한쪽에 앉아 있는 렉스를 눈짓했다. 윤재가 대답했다.
“선생님을 구해주신 분이래요.”
두 아이가 있는 사십대 아줌마이자 다소 푼수 끼가 있는 영어 선생은 흥분을 숨기지 못했다.
“어머머, 너무 괜찮다.”
“선생님.”
규하가 부르자, 영어 선생은 그제야 학생 앞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머쓱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윤재는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교장 선생님께서 오늘은 이대로 퇴근하셔도 된대요. 제가 댁까지 바래다 드릴게요.”
“윤재 네가?”
“혼자 가실 순 없을 테니까요.”
“어머머, 윤재 너 혹시 강 선생 좋아하니?”
영어 선생은 또 금세 호들갑을 떨었다. 반면 침착한 성격으로 반장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지만 그만큼 귀여운 맛이 없는 윤재는 성격대로 말했다.
“선생님께서 매력적인 여성인 건 분명하지만 이 정도 나이 차이는 저로서도 좀 극복하기 힘든 데요.”
“넌 뭐 쓰잘머리 없는 소리를 하고 있냐.”
규하는 휘휘 손을 내저었다.
“내 집은 내가 알아서 찾아가니까 열일곱 살은 학원이나 가라.”
“학원 안 다녀요.”
“그래, 훌륭하다.”
규하는 침대에서 내려와 구두를 신었다. 그리고 옷걸이에 걸린 코트를 들고 렉스에게 다가갔다.
응급실 풍경을 구경하던 렉스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이 꼭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 같았다.
“약속 없지? 지금까지 기다린 거 보니.”
그녀가 기다리라고 하긴 했지만 말이다.
“집까지 좀 바래다줘.”
렉스는 막 응급실 문 너머로 사라지는 윤재와 영어 선생을 돌아보았다. 꼭 조금 전에 나눈 대화를 들은 것 같은 반응이라 규하는 뜨끔했다.
거리상 들렸을 리 없지만 말이다.
아무튼 렉스는 군말 없이 일어났다.
“입원하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
“구급차 타고 온 것도 쪽팔리거든.”
규하는 문을 나서며 대답했다.
“많이 괴로워했습니다.”
규하는 렉스를 돌아보았다. 그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래, 그녀는 많이 괴로웠다. 12년이나 지난 후에도 연하의 죽음이 어제였던 것처럼 생생해서.
연하를 제 손으로 묻고도 언제든 그녀가 저 모퉁이를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헛된 희망을 놓지 못해서…….
갑자기 렉스가 그녀의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그러자마자 뒤로 이동식 침대가 바쁘게 지나갔다.
“아, 고마워.”
규하는 렉스를 올려다보고, 문득 그가 생각보다 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의 팔을 잡고 있는 손도.
처음에 한 순간이지만 여자로 착각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남자’였다.
‘응? 지금 무슨 생각을?’
혼자 놀라는데, 렉스는 그녀를 놓고 앞서갔다. 그리고 몇 걸음 가다가 오지 않느냐는 듯이 돌아보았다.
저런 점도 아주 남자고 말이다.
규하는 고개를 내젓고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