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흡혈귀와 아이스크림 (1)
청사를 나오는 길인 연하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국장님?”
그건 분명히 그녀가 익히 알고 있는 국장이었다.
“강 상사.”
이반도 그녀를 보았다.
“여기서 뭐 하세요?”
이반은 빙긋이 웃었다.
“아이스크림 먹는데.”
과연 그 말대로 국장은 아이스크림을 들고 벤치에 앉아 있었다. 평소처럼 고급스러운 양복에 코트를 걸친 차림으로.
무엇보다…….
연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잿빛 하늘 아래 청사 앞 광장은 을씨년스럽고도 황량했다. 입김이 폴폴 올라오는 날씨여서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걸음을 재촉하기 바빴다.
연하는 다시 이반을 보았다.
“이 날씨에요?”
그라는 남자가 이런 차림으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는 것부터 지적해야 할지, 장소와 날씨의 부적절성에 대해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너무 지적할 게 많아서 문제였지만, 어쨌든 가장 이질감이 느껴지는 것에 대한 것부터 이야기했다.
이반은 눈에 자색이 좀 더 짙어지는 특유의 웃음을 지었다.
“온도 차에 민감하지 않다는 게 루아스의 좋은 점이잖아.”
아니, 그건 분명히 그렇지만…….
“하지만 이런 곳에서 혼자……?”
물론 진짜 혼자는 아니었다. 한 1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렉스가 서 있었다. 늘 그렇듯.
하지만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건 국장 혼자였기 때문에 혼자라고 한 것이었다.
“저기.”
이반은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는 손으로 손가락만 뻗어서 도로 건너편에 있는 카페를 가리켰다. 연하는 렉스에게 고갯짓으로 인사하고 손끝을 따라 돌아보았다.
“갈 때마다 아이스크림이 맛있어 보이더라고. 한 번 먹어 보고 싶었는데, 마침 시간이 남아서.”
아이스크림이 유명한 집이라고 언뜻 듣긴 한 것 같았다.
그녀가 군것질을 좋아하긴 하지만 열정적으로 맛집을 찾아다니며 먹는 스타일은 아니어서 가본 적은 없었다.
“강 상사도 하나 먹을래?”
연하는 이반을 보았다. ‘이런 날씨에.’라고 하긴 했지만, 그가 제안한 이상─
“네.”
또 당연한 듯이 대답하고 있었다.
이반은 일어났다.
그가 일어나자 이런 사람이 파스텔 색감의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는 그림이 정말 뭔가 거짓말 같았다.
연하는 막 그들을 따라 움직이려 하는 렉스를 보았다.
“렉스 씨는…….”
“아까도 권했는데 안 먹는다더라고.”
이반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렉스를 보았다.
“저러니 뱀파이어들이 인간미가 없다는 소리를 듣지.”
연하는 난감한 웃음을 지었다.
‘정말 이 둘은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이반과 연하는 같이 길을 건너서 카페로 갔다. 렉스는 꽤 뒤에 따라와서 카페에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기다렸다.
“어서 오세요.”
카운터 뒤에 서 있는 젊은 여자 직원이 인사했다.
많은 가게들이 기계화되긴 했지만, 아직 감성이나 편의성 면에서 인간 직원을 쓰는 가게도 적잖았다.
“또 오셨네요.”
여자 직원은 짐짓 웃으며 이반에게 말했다. 아까 아이스크림을 사 갔기에 기억하는 것 같았다.
이반은 조금 웃으며 연하를 가리켰다.
“같이 먹어줄 사람이 생겨서요.”
그러고는 연하에게 말했다.
“뭐 먹을래? 골라봐.”
“네.”
연하는 아이스크림 진열대 앞으로 가면서 고개를 조금 갸웃했다.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왜 갑자기 기분이 나빠지는지.
분명히 그와 함께 카페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발걸음이 풍선을 달아놓은 것 같았는데…….
“아이스크림은 먹을 만하세요?”
“추천해주신 게 맛있더군요.”
뒤에서 직원과 국장이 대화하는데 신경이 쏠렸다.
어쨌든 국장은 붉은 눈도 그렇고 한눈에도 루아스 티가 나니까 루아스라는 걸 알 텐데 여자 직원은 별생각이 없어 보였다.
사실 그런 사람들도 꽤 많았지만, 어쩐지 생각해 버렸다.
‘왜 저렇게 쓸데없이 오픈마인드인 거야?’
하고.
그리고 연하는 편견을 가지지 않는 착한 사람을 두고 그렇게 생각한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미안해요, 착한 사람.’
연하는 속으로 사과했다.
“저희 집에서 가장 잘 팔리는 거거든요.”
여자 직원은 말하고 대답을 기다렸지만, 아이스크림을 사가지 않았어도 기억할 수밖에 없는 손님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아이스크림 진열대 앞에 뒤돌아 서 있는 ‘같이 먹어줄 사람’을.
그는 한 템포 늦게 직원이 한 말을 깨달은 것처럼 돌아보고 대답했다.
“그렇군요.”
직원은 유난히 오래 고민하고 있는 여자 손님을 보았다.
어려 보이지만, 외모로 나이를 짐작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서-특히 이곳은 MCTC 청사 앞이니까.- 실제로 어린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 아닌 것 같았다. 손님이 그녀를 보는 눈을 보면.
흘긋 손님을 보자,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마치 비밀로 해달라고 말하듯.
직원은 웃으며 연하에게 다가갔다.
“추천해 드릴까요?”
연하는 정신을 차린 것처럼 고개를 들었다.
“아, 괜찮아요. 이걸로 할게요.”
그녀는 딸기나 블루베리 계열을 좋아해서 늘 그런 쪽 맛으로 먹기 때문에 어차피 처음부터 먹고 싶은 건 정해져 있었다.
“새콤달콤 러블리 라즈베리 키스의 맛 나왔습니다.”
기다리고 있으니 직원이 아이스크림을 떠서 건네주며 말했다.
“이름이 굉장하네요. 국장님 건?”
“이름?”
이반은 딱히 이름은 신경 쓰지 않았는지, 그가 샀던 아이스크림 앞에 꽂혀 있는 팻말로 시선을 돌렸다. 연하도 따라 시선을 돌렸다.
<민트와 초코가 함께 빠진 사랑의 마그마>
연하는 애써 웃음을 감추었다.
이름을 지은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자기만의 세계가 있다고 해야 할지, 감수성이 풍부하다고 해야 할지…….
“그러게. 굉장하네.”
이반도 웃고 말았다.
연하가 계산하기 위해 아이스크림을 다른 손으로 옮기는데, 이미 이반이 손목을 내밀고 있었다.
“어, 제가…….”
“괜찮아. 다음에는 강 상사가 사.”
“그럴까요?”
연하는 역시 자연스럽게 다음을 기약한 거였다고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옆에서 듣는 직원도 눈치챈 것 같았지만 말이다.
‘뱀파이어들도 연애를 하는구나.’
직원은 신기했다.
하긴, 인간이 영원히 살게 되었다고 사랑하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영원히 사는 만큼 더 오랫동안 함께 할 수 있는 배우자를 찾고 싶어 하지 않을까?’
직원은 막연하게 생각했다.
“안녕히 가세요.”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카페를 나와 다시 광장으로 걸어갔다.
“여기 앉을까?”
“네.”
그리고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잠깐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청사 앞이라서 거의 정장이나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오갔다.
개중 몇은 이쪽을 보고 국장인가 아닌가 긴가민가하는 것 같았지만 굳이 와서 확인까지 하고 가진 않았다.
“좋네요.”
연하는 갑자기 중얼거렸다.
“이 날씨에 혼자 광장에서 아이스크림 먹는 거. 뭔가 자유로워진 느낌이랄까?”
“이해했구나.”
이반은 꼬고 앉은 다리 위에 양팔을 교차해 걸친 채 말했다.
“그리고 단 건 기분을 좋게 해주니까. 뭔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이 들잖아.”
정말로 그랬다.
‘그런데 의외로 소탈한 것 같네. 미슐랭 쓰리스타 레스토랑 같은 곳에서만 밥 먹을 것 같은 사람인데.’
연하는 생각하고 국장을 보았다.
“국장님은 다 드셨네요.”
그는 카페에서 나올 때쯤에 다 먹고 남은 종이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나왔다.
“좀 드실래요? 이 부분에는 입 아직 안 댔거든요.”
연하는 아이스크림을 내밀었다.
“그럴까?”
이반은 연하가 아직 먹지 않았다고 가리킨 부분을 조금 먹고 다시 돌려주었다. 그리고 입술에 살짝 묻은 아이스크림을 엄지손가락으로 훑고 카페에서 나오면서 가져온 휴지에 닦았다.
“키스의 맛이 이런 건가?”
연하는 무슨 소리인가 했다가 아이스크림 이름을 기억해 냈다.
‘키스의 맛이라니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이름을…….’
또 우스워서 생각하는데, 아이스크림을 입으로 가져가다가 멈칫했다.
갑자기 아이스크림에서 국장의 입이 닿았던 부분이 의식되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아이스크림을 먹기가 주저되었다.
그의 입술을 먹는 것 같아서…….
‘히익. 그게 무슨 말이야.’
연하는 단번에 문제에 부딪치듯이 덥석 아이스크림을 한입에 욱여넣었다. 이반은 그녀가 난데없이 그러는 데 조금 놀란 것 같았다.
그리고 차가운 걸 한꺼번에 먹었다면?
“으윽……. 머리 아파요.”
연하는 벤치가 비어 있는 방향 쪽으로 엎어져서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렸다.
“갑자기 그렇게 먹으니까 그렇지.”
이반은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연하의 팔을 잡아 끌어당겨 일으켜 세웠다.
“괜찮아?”
연하는 머리를 붙잡은 채로 제대로 앉았다.
“뱀파이어가 돼도 왜 이런 기본적인 건 변하지 않는 걸까요?”
“아마 몸이 작동하는 방식은 비슷하니까?”
연하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남은 아이스크림을 먹기 시작했다.
“그래도 맛은 있네요.”
이반은 피식 웃어버렸다.
일상이 즐겁다고 느낀 마지막 순간은 언제였을까.
이렇게 아무 의미 없는 일상이 세상 모든 의미를 지닌 것처럼 반짝거렸다.
아니면 반짝거리는 건 아이였는지, 아이스크림을 먹는 둥그스름한 볼 위로 햇빛이 은은하게 흘렀다.
연하는 고개를 젖혀, 무거운 구름 틈새로 빛이 새어 나오는 하늘을 보았다.
“아, 햇빛 나왔다.”
이렇게 과학이 발전한 세상이지만 유전학적으로 인간은 수십만 년 전 들판을 뛰어다니며 사냥할 때와 다르지 않다고 하듯이, 뱀파이어도 마찬가지였다.
수십만 년 전만 해도 뱀파이어들의 선조는 개체수도 비슷한 인간을 무서워할 이유가 없었고, 당당하게 햇빛 아래를 걸었다.
뱀파이어들이 정체를 숨기기 위해 인간들 사이로 숨어들기 시작한 건 인간들이 지구를 모두 덮을 정도로 많아지면서부터였다.
그러니까 뱀파이어들에게 자연스러운 상태는 오히려 햇빛 아래였다.
뱀파이어로 사는 게 불편한 점이라고 한다면 역시 피를 마셔야 한다는 것 정도였는데, 그리고 그게 다른 장점을 다 희석시킬 만큼 불편한 점이었지만, 이제 드디어 그들은 흡혈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연하는 하늘을 본 채로 아이스크림콘의 마지막 부분을 쏙 입안으로 집어넣고 우물거렸다.
흡혈귀와 아이스크림.
꽤 괜찮은 조합이지 않은가, 하고 이반은 생각했다.
“맛있었어요.”
연하는 웃고는 일어났다.
“이제 국장님은 어디로 가세요?”
“사무실로 돌아가 봐야지. 강 상사는?”
“저는…….”
연하가 멈칫했다.
순간 이반은 연하의 눈동자에 무언가 반짝이는 빛이 비치는 것을 보았다.
“국장님!”
연하가 외치며 그를 덮쳐들었다. 그리고 모든 일은 동시에 일어났다.
멀찍이 서 있는 렉스가 당장 이쪽으로 뛰려는 것처럼 자세를 잡았다. 그때 이반도 연하의 그림자 너머 건물 저편에서 날아오는 총알을 보았다.
이대로라면 연하가 맞을 각도였다.
이반은 연하를 끌어안으며 몸을 틀었다.
까앙.
마치 쇳덩이로 쇳덩이를 치는 것 같으면서도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렉스가 그들 앞에 서 있었다. 급한 대로 총알을 막기 위해서였는지 권총을 내밀고 있었는데, 총알이 총신을 치고 지나간 흔적이 있었다.
이반은 당장 연하를 확인했다.
“괜찮아?”
연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국장님은…….”
렉스는 휙 총알이 날아온 곳을 보았다.
청사 근처는 이런 위험성 때문에 어지간한 뱀파이어 저격수 사정거리 안에는 높은 건물이 없었다. 사정거리를 벗어난 곳에서 날아온 것 같았다.
렉스는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어서 안으로.”
2차 공격이 있을 수도 있었다.
두 사람은 더 말할 것 없이 일어나 청사로 가기 시작했다. 다른 건 모두 안전이 확보되고 난 다음에 할 일이었다.
렉스가 주변을 경계하면서 그들을 따라왔다.
“국장님!”
정문으로 통하는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데, 급하게 소식을 들었는지 무장한 팀이 달려와 그들을 둘러싸 보호했다.
그대로 정문을 통과하는 동안 두 번째 공격은 없었다.
웅성웅성.
총성을 들은 사람들, 소식을 들은 사람들, 소식을 전하기 위해 달려가는 사람들, 달려 나온 대원들, 무장한 팀, 온갖 사람들이 섞여 로비는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일입니까?”
“1시 방향, 흰 건물에서 날아왔습니다.”
긴급하게 출동한 팀 리더가 물어오자, 렉스가 정문 건너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국장님, 괜찮으세요?”
연하는 바로 이반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그는 살짝 찡그린 표정으로 말이 없었다.
“국장님?”
코트 안으로 손을 넣었다가 빼자, 핏물이 묻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