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 짐승-37화 (37/104)

37화. 변화 (2)

‘집이라.’

귀환을 알리는 관용어적인 표현이었지만, 그 말대로 이곳은 연하의 집이었다. 사실 한순간도 집이 아닌 적이 없었다.

이곳에서 태어나 자랐고, 비록 지금은 떨어져 살고 있지만 쌍둥이 자매도 이곳에 있었다.

그에겐 연하가 집을 떠나게 할 권리가 없었다.

이번 일만 일단락되면, 그는 떠날 것이다. 연하는 데려가지 않을 셈이었다.

언젠가 연하가 이곳을 집으로 여길 만한 요소를 모두 잃어버려 스스로 그에게 오고 싶어 하지 않는 한.

‘정을 들이는 것이 아닌데.’

이반은 쓰게 웃었다.

‘단순히 정 이상의 것이 들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 * *

귀환하는 수송기 내부는 조용했다. 옛날처럼 동체 전체를 울려오는 엔진소리는 없었다.

임무를 무사히 끝낸 대원들은 대개 벽에 달린 접이식 그물 의자에 앉아 잠들어 있었고, 다른 대원들처럼 헬멧만 벗은 전투복 차림인 연하는 무언가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실로 팔찌를 엮고 있는 것이었다.

옆자리에 앉은 도영은 프랑스어 책을 읽고 있다가 연하를 보았다.

“또 그거 만들어?”

연하는 시선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응.”

팔찌는 거의 끝부분이었다. 대체로 푸른색이었지만 길이를 보니 여자 것 같았다.

도영은 연하가 아직 지우지 않아서 이마에 찍혀 있는 붉은 티카를 보았다. 사실 대원들 전부에게 찍어줬지만 대부분 대원들은 땀 때문에라도 지워지고 난 뒤였다.

“빌었던 소원 있어?”

“소원?”

연하는 의아해하며 그를 봤다가 제 이마에 있는 티카를 기억해 낸 것 같았다.

“글쎄……. 뭐, 그냥 막연하게 생각했던 건 있지.”

“뭔데?”

연하는 쑥스러워하는 소녀처럼 팔찌를 보고 말했다.

“가족하고 살고 싶다고.”

그러더니 ‘아’ 소리를 내고 바로 덧붙였다.

“물론 우리 팀도 가족이지만.”

자는 줄 알았던 한 중사가 ‘크’ 소리를 냈다. 도영과 연하는 연하 왼쪽에 앉은 그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씩씩하게 그런 말을 하시면 울 것 같잖아요.”

맞은편에 앉은 대원들도 부스럭거리면서 눈을 떴다. 각자 한 마디씩 하면서.

“근데 이게 전쟁 영화면 그런 이야기하는 건 사망 플래그인데.”

“하여간 영화들 다 반성해야 돼. 가장 죽이기 만만한 게 군인이지.”

“동네북이야, 아주.”

연하는 피식 웃고 다시 팔찌를 짜면서 말했다.

“하지만 불평하면 안 된다는 건 알아요. 덕분에 규하가 안전하게 살고 있으니까.”

대원들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시선을 교환했다.

“안 그래도 쿠마리는 무슨 여신의 화신이라고 해서 어린 여자아이들 중에 뽑아서 살아 있는 신으로 숭배하는 거라죠?”

한 중사는 비스듬한 자세로 앉아 말했다.

“개인적으로 쿠마리 같은 건 미신에 아동학대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다른 대원이 덧붙였다. 한 중사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쩌다 얻어걸린 걸 수도 있고. 아무도 모르지.”

또 다른 대원이 오래전부터 궁금했다는 듯이 물었다.

“차라리 니스타르를 다 모아서 경호 철저한 곳에서 살게 하면 안 되는 걸까요?”

“안 돼.”

맞은편에 앉아 있는 대원이 아주 확신에 차서 대답했다.

“그럼 우리가 직장을 잃잖아.”

“에라, 자식아. 세계가 존립하는 것보다 네 밥벌이가 더 문제냐?”

한 중사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종이 부스러기 같은 걸 집어서 대원에게 던졌다.

“농담이고요. 하지만 그렇게 하면 니스타르가 모여 사는 곳 한 군데만 공격하면 끝이잖아요. 그리고 만팔천 명이 전부 한 곳에서 산다고 동의한대요? 모여 사는 조건이 뭔지도 설명할 수 없는데.”

“하긴, 니스타르라고 밝힐 순 없으니.”

“나무를 숨기려면 숲으로 가라는 말도 있잖아요.”

한 중사는 창밖을 보았다. 구름이 서서히 걷히고, 퍼즐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는 대지가 나타났다.

“뭐, 니스타르가 있건 없건 어차피 우리가 하는 일은 비슷하니까.”

세계를 지키는 것.

각자 군인이 된 사정은 다르지만, 이쪽 일은 그 정도 사명감 없이는 하기 힘든 일이었다.

적어도 자신이 세계를 수호하는 영웅이라는 중2병스러운 자부심 정도는 있어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들 말로는 하지 않아도 그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알았다.

“고마워요.”

연하는 웃으며 말했다. 대원들은 흘긋 서로를 보았다.

“이상한 분이네. 저희는 저희 일을 할 뿐이라고요.”

그러고는 괜히 투덜거리며 딴청을 피웠다. 연하는 웃고는 다시 팔찌를 엮기 시작했다.

* * *

그들이 타고 온 수송기 C-130A가 소속된 오산 공군기지 활주로 너머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들이 네팔로 떠난 사이 간밤에 비가 내린 모양이었다. 활주로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매끄러운 웅덩이 위로 해가 비춰 사방이 붉게 타오르는 것 같았다.

“오늘도 오산 에어포스 에어라인을 이용해주신 고객 여러분들 감사드립니다. 남은 가시는 길까지 안녕히 가라, 자식들아.”

막 중앙 램프도어(화물 적재문)를 통해 땅에 내려선 팀은 수송기 위에 서 있는, 오늘 C-130A를 조종한 공군 조종사를 돌아보았다.

“감사합니다.”

ERU 3팀은 피식 웃으며 인사하고, 하나둘 대기하고 있는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활주로에 고인 물웅덩이를 헤치며 달렸다. 마치 붉게 타오르는 들판을 달리는 것 같았다.

중무장한 대원들을 계속 태우고 다니느라 의자 겉가죽이 다 벗겨진 버스는 승차감이 매우 좋지 않았지만.#

덜컹.

버스가 가볍게 흔들렸다.

도영은 옆자리에 앉아 창밖에 시선을 두고 있는 연하의 옆모습을 보였다. 황금빛 광선에 비춰 둥그런 볼이 반짝였다.

새삼스럽지만, 참 어린 나이였다.

연하가 죽었을 때.

가슴이 뻥 뚫려서, 현대 의학기술로도 도저히 살릴 수 없는 상태였다고 들었다.

그렇다고 감염이라고 가망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연하는 어쨌든 삶으로 돌아왔다.

이런 삶으로.

가족에게 생사도 알릴 수 없고, 그나마 팀을 잘 만나서 그렇지 아직도 대개 마초 근성으로 가득한 우락부락한 남자들 사이에서 몸이 가장 튼튼하다는 이유 하나로 탱커 역할을 하는.

누군가가 한 말에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캔디는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거라지만, 이렇게 꿋꿋하면 지켜보는 사람으로서는 기특함까지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끼익.

버스가 멈추자 다들 앞으로 몸이 한 번 쏠렸다.

“푹 쉬어.”

앞서 버스에서 내린 도영이 마지막으로 내리는 연하를 돌아보고 말했다.

“너도.”

연하는 손을 들어 보이고 걸어갔다. 도영도 막 걸음을 옮기려는데, 격납고 앞에 MCTC 마크가 새겨진 전용기가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햇빛을 비춰 마크 부분 표면이 잘 닦아놓은 거울처럼 반짝였다. 막 출항 준비를 끝낸 것 같았다.

“어…….”

그때 연하가 놀라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도영은 돌아보았다.

“국장님.”

격납고에서 걸어 나오는 것은 국장이었다.

‘전용기……. 과연 그렇겠지.’

국장급은 시민들을 테러에 휘말리게 할지도 모르는 위험 때문에 전용기를 타고 다녀야 하는 규칙이 있으니까.

국장은 연하 앞에 멈춰 섰다. 뒤를 따르는 렉스와 이 대위는 알아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멈추었다.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세요?”

연하는 얼떨떨해 물었다. 국장은 전용기 쪽을 가리켰다.

“일 때문에 잠깐 나가게 돼서.”

연하는 전용기를 돌아보았다. 나중에야 자카르타에서 열리는 MCTC 심포지엄에 참여하기 위해 가는 길이라는 것을 알았다.

연하는 다시 국장을 보았다. 그런데 국장이 그녀를 빤히 보고 있었다. 연하 역시 그를 마주보았다.

이코노미 잡지 표지에서 걸어 나온 것 같은 붉은 눈의 남자와 전투복을 입은 어린 소녀의 모습은 모든 기준과 규격에서 벗어난 이상한 그림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 사이에는 섣불리 끼어들을 수 없는 공기가 있었다.

국장이 계속 쳐다보고 있어 연하는 의아해졌는지 고개를 조금 젖혔다.

“국장님?”

국장은 멀리서 돌아온 것처럼 말했다.

“수고했어.”

이어서 국장이 무어라 말했다.

푸슉.

그때 마침 컨테이너를 실은 지게차가 지나가는 소리 때문에 인간의 귀에는 무슨 말인지 들리지 않았다.

연하는 웃었다. 손을 휘두르며 무어라 말하는 모습이, 임무 도중 있었던 일을 설명하는 것 같았다. 국장도 웃는 눈으로 그녀가 하는 말을 들었다.

그들이 꽤 오랫동안 그러고 있자, 이 대위가 다가가 말하며 전용기 쪽으로 손짓했다. 연하는 거수경례했다.

“그럼 나중에 보자.”

그때 마침 지게차가 다 지나가서 국장이 하는 말이 들렸다.

“다녀오세요.”

국장은 연하가 이상한 말이라도 한 것처럼 보더니, 조금 웃었다.

“그래. 다녀와서 보자.”

연하는 전용기로 걸어가는 국장을 지켜보았다. 그가 탑승 계단을 올라갈 때까지.

그러다 연하는 지켜보는 시선을 느낀 것처럼 도영을 보았다. 그러고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돌아서서 걸어갔다.

“그렇게 해서 뚫리겠어요?”

도영은 돌아보았다. 간 줄 알았던 한 중사가 어느새 뒤에 서 있었다.

“뭘 그렇게 보세요?”

“보긴요.”

도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 중사는 연하가 사라진 쪽을 한 번 보고 따라왔다.

“좀 질투나지 않습니까?”

“질투요?”

도영은 한 중사가 외계어로 말하기라도 한 것처럼 쳐다보았다.

“우리 상사님인데, 요즘 국장하고 친하게 지내시는 걸 보면 말이죠.”

도영은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여긴 고등학교가 아닌데요.”

한 중사는 어깨를 으쓱였다.

“동족은 어쩔 수 없는 동족인가 봐요. 하긴, 외로우셨겠죠.”

“저 녀석이요?”

“그렇잖아요. 말을 터놓고 지낼 만한 동족 친구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소령님과 친하긴 해도 그건 동성 친구와 이성 친구가 다르듯이 다른 거죠.”

한 중사는 묘하게 웃었다.

“하긴, 그것도 좀 다른 것 같긴 하지만.”

도영은 그건 무슨 소리냐는 듯이 쳐다보았다.

“저 두 사람, 좀 묘하잖아요.”

한 중사는 ‘하긴’ 하고 덧붙였다.

“사실 강 상사님도 이제 연애 좀 하실 때도 됐죠.”

“하지만 강 상사는…….”

도영은 말하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중사는 난감해하는 것 같은 웃음을 지었다.

“설마 소령님, 강 상사님이 영원히 열아홉일 줄 아셨어요?”

“그런 건…….”

아니었지만, 도영은 멈칫했다.

정말 아니었을까?

연하는 늘 그곳에 있는 존재였다. 나이를 먹지도, 어디론가 가지도 않고.

그런 연하를 보며 어딘가 심리적인 안정감을 느낀 건 사실이었다. 돌이켜보면 군인이 된 후로 가장 즐거웠던 지난 2년간의 삶이 막연히 계속될 거라고 믿어왔는지도 몰랐다.

말해봤자 분위기만 우울해지기 때문에 다들 쉬쉬하지만, 초인적인 존재가 테러리스트가 된 이후로 이 바닥의 사상자 발생률은 엄청났다.

‘오죽하면 그 꼴을 다 보고도 이 바닥에 붙어 있는 건 어딘가 멀쩡하지 않은 녀석들밖에 없다고 할 정도니까.’

그렇기 때문에 죽지도 늙지도 변하지도 않는 존재는 사기 면에서도 이 바닥에 상징적으로 필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연하는 대원들에게 숭상받았다. 정신적인 위안을 주는 존재로.

하지만 살아 있는 한 변하지 않는 존재는 없었다.

그리고 마땅히 그래야만 했고.

삶은 계속 흘러가고 있으니까.

‘그런데 왜일까?’

어쩐지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는.

도영은 알 수 없었다.

# 쿠마리로 선발되면 말을 할 수도, 원할 때 밖에 나갈 수도, 스스로 걸어 다닐 수도 없다. 현재도 인권침해, 아동학대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

# 마크 오언, 케빈 모러, 「노 이지 데이(NO EASY DAY)」, 이동훈, 길찾기(2013). p.227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