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 짐승-36화 (36/104)

36화. 변화 (1)

“필립과 안나는 가난하지만 행복한 부부였지.”

필립은 자기가 별 볼 것 없는 인간이었을 때 믿고 따라준 안나를 깊이 사랑했다. 안나로서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지만, 필립은 그냥 그런 사람이었다.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그렇게 얻게 된 것을 소중히 여기는.

이반은 그게 필립의 위대한 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일관성은 어지간한 성자가 아니고서야 발휘하기 힘드니까.’

반면 안나는 발톱을 감춘 짐승이었다. 아마 인간으로 살았다면 평생 그 발톱이 발현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안에 숨은 날카로운 끝을 느끼지만 사회, 법, 도덕이 부여한 틀을 감히 벗고 나오지 못하는 수많은 인간들 중 하나로 삶을 마쳤을 것이다.

인간 처녀 안나는 제법 명석한 편이었고,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은 필립 로스라고 알았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그렇다면 새 술은 새 부대에─

“계기만 없었다면 두 사람은 가난하지만 행복한 부부로 끝났겠지.”

비록 그것이 뿌리부터 거짓이었어도 평생 드러나지 않았다면 적어도 필립에겐 진실이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길거리를 걷는 노부부가 되었을 터.

“아뇨.”

렉스가 갑자기 말해, 이반은 돌아보았다.

“필립은 그날 뒷골목에서 죽었겠죠. 저도, 강 상사도. 그 일은 이바노프 씨의 잘못이 아닙니다.”

렉스는 말했다. 이반은 놀랐다고 해야 할지, 이 녀석 나름대로 위로라고 하는 모양이었다.

이반은 조금 웃었다.

“알아. 하지만 난 운이 나쁜 편이니까.”

렉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인간이었을 때 모든 걸 가지고 태어난 그가 운이 나쁜 편이라고 한다면…….

하지만 사소한 부분까지 따지면 그 좋은 운들이 모두 이후에 온 나쁜 운들에 상쇄된 느낌이 있긴 했다.

이반은 어둠 저편을 심각한 눈으로 보았다.

“연하까지 내 불운에 휩쓸리기 바라지 않았달까.”

12년 전 연구소의 유리벽 너머에 온갖 생명 유지 장치를 달고 누운 연하는 어리고, 약하고, 평범했다.

처음 아일에 왔을 때 안나처럼.

그때 이 세상 사람들을 모두 줄 세워놓고 가장 무해할 것 같은 사람을 가리키라고 한다면 대부분 안나를 가리켰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안나 스스로도 이후 그녀가 한 일 중 어떤 일도 자신이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테니까.

그렇다면 그는 또 한 번 ‘계기’가 되길 원하지 않았다. 죽음 앞에서도 형제부터 걱정하는 다정한 존재가 다른 어떤 것이 되길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떠나는 길을 선택했다.

다행히 간간이 들리는 이야기로 아이는 사소한 문제는 있지만 대체로 잘 적응해 살아가는 것 같았다.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그대로 각자 삶을 살아가면 된다고.

그는 아직도 남 걱정밖에 할 줄 모르는 착한 아이가 좋은 삶을 살길 바랐다. 그 이상은 바라지 않았다.

* * *

탁한 어둠 속에 이국적인 건물들이 어렴풋한 윤곽을 드러내고 서 있었다. 옹기종이 모여 늘어선 모습이 마치 이국의 신들이 웅크려 앉아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신들을 잠에서 깨울까 두려워하듯, 소리를 죽인 발걸음들이 어두운 담장 밑으로 신속하게 지나갔다.

가장 선두에 있는 대원이 수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맞은편에 있는 팀부터 안쪽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하늘이 뚫려 있는 네모난 정원 같은 공간이 나왔다. 사방을 빙 두른 사원 건물의 나무 창문들이 마치 어둠 속에 도사린 눈처럼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려앉은 정적이 정원을 가로지르는 검은 발목들을 휘감았다 흩어졌다.

그때였다. 한 문에서 현지인 여자가 나오더니 그들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

여자가 무어라 외치려는 순간, 갑자기 기둥 뒤 어둠에서 나타난 대원이 그녀를 끌어안아 입을 막았다.

“해를 끼치려는 게 아닙니다. 조용히 해주세요.”

현지인 여자는 겁에 질린 눈으로 입이 막힌 채로도 뭐라고 마구 외쳤다. 대원은 귀 쪽을 누르며 의아해하는 기색이었다.

“뭐라고 하는지 못 알아듣겠습니다. 인터프리터가 오작동…….”

“일단 조용히 하게 해.”

한 중사가 목소리를 낮춰 말하자 다른 대원이 여자에게 다가가 장갑을 낀 손을 내밀고 속삭였다.

“조용하세요. 부탁입니다.”

그 대원의 인터프리터는 제대로 작동할 텐데도 여자는 듣지 않았다. 점점 더 흥분하는 것 같았다.

도영은 빨리 작전을 끝내야 할 필요를 느꼈는지 앞으로 휙휙 손짓했다. 그때 그 뒤에 있는 대원, 연하가 기척을 느낀 야생동물처럼 고개를 들었다.

“위에야.”

콰장창.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도영은 빠르게 손짓했다. 연하는 당장 현지인 여자가 나온 문으로 달려 들어갔다.

“엄호해!”

요즘 같은 때에도 사원엔 AI가 장착되어 있지 않은지 인기척을 느껴도 불은 켜지지 않았다.

연하는 한 사람이 겨우 올라갈 수 있는 좁고 굽어 있는 어두운 계단을 달려 올라갔다.

기하학적인 모양으로 짜인 창문 너머로 스며드는 달빛에 비춘 2층에 막 발을 디디려는 찰나였다. 옆에서 팔이 뻗어져 나왔다.

연하는 공격을 피해 뒤로 몸을 훌쩍 휘었다. 거의 중국 기예단에 가까운 각도로 몸이 휘면서, 아래쪽 계단을 손으로 짚고 내려섰다.

철컥.

동시에 총을 들어 발포했다.

탕.

탕. 탕탕탕.

그대로 연사하면서 계단을 빠르게 달려 올라갔다. 총알 세례에 두 팔로 얼굴을 가린 뱀파이어가 팔을 내저으며 울부짖었다. 그리고 자세를 낮추며 덤벼들었다.

연하를 붙잡았다.

아니, 덤벼든 그를 연하가 붙잡았다는 쪽이 맞을 것이다.

연하는 그대로 바닥을 짚은 두 다리에 힘을 주고, 그를 들었다.

“……!”

그는 자신이 들린다는 데 놀라는 눈치였다.

그사이에 연하는 그를 밖으로 던져 버렸다. 창문과 벽을 뚫고 거대한 몸집이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콰장창창.

나머지 팀이 그를 제압하는 소리를 들으며, 연하는 어설트 라이플의 총구를 겨누면서 안쪽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오른쪽에 있는 창문이 부서져 활짝 열려 있고, 다른 뱀파이어가 열 살도 채 돼 보이지 않는 소녀를 붙잡고 있었다.

소녀는 잠자리에서 끌려 나온 것처럼 잠옷 차림에 검은 머리카락을 길게 푸른 채였다.

사진에서처럼 선명한 붉은 옷을 입지도, 어린 목에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화려한 장신구나 특유의 화장을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한 번에 그들의 VIP 보호대상자, ‘쿠마리’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투항해!”

연하는 총구를 겨누며 외쳤다.

“혼자 오다니 배짱도 좋군.”

뱀파이어는 혼자 달려 들어온 인간쯤이야 눈 깜짝할 새에 허리를 반으로 나눠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쿠마리를 놓으면서 공격하려는 듯 손을 뻗었다.

엄청난 속도였지만, 연하는 손이 날아오는 모습을 보았다.

그 손을 잡아 끌어당기며 그대로 한 바퀴 굴러 위로 올라가면서 아래 깔린 뱀파이어의 이마에 총구를 겨누었다.

철컥.

뱀파이어는 이를 드러내고 울부짖었다.

“그딴 건 우리한테……!”

“닥쳐.”

연하는 서늘하게 말하고 가차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또 한 번.

탕.

정확하게 세 대.

총성이 멈추자 뱀파이어는 정신을 잃은 채였다. 이마는 딱밤을 아주 세게 연달아 맞은 것처럼 살짝 안쪽으로 패여 있었다.

“여러 대 맞으면 기절하면서.”

누구든 이만한 운동에너지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었다.

그때 뒤에 기척이 느껴졌다.

연하는 홱 돌아보았다.

어느새 다가온 다른 뱀파이어가 손을 내지르고 있었다. 거의 닿기 직전이었다. 이 정도 거리에서는 연하도 반응할 수 없었다.

쾅.

갑자기 뱀파이어는 등을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가슴이 앞쪽으로 크게 휘면서 바닥에 처박혔다.

그 뒤에 한 중사가 산탄총을 들고 서 있었다.

그 뒤에서 도영을 필두로 팀이 신속하게 올라왔다. 그리고 부채를 펼치듯이 원형으로 두 번째 뱀파이어에게 총구를 겨누며 감쌌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마.”

두 번째 뱀파이어는 기절하지 않았는지 시선으로 그들을 훑었지만,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손가락만 까딱해도 벌집으로 만들어 버리리라는 사실을 아는 것 같았다.

수갑으로 포박하고, 도영은 무전을 쳤다.

“클리어. 타깃 확보.”

연하는 한 중사를 보고 척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나이스샷.”

한 중사는 조금 으쓱해했다.

그때 여자가 무어라 소리치며 대원들을 제치고 달려왔다. 연하도 지나쳐, 소녀를 온몸으로 끌어안았다.

아마 쿠마리의 어머니 같았다.

어머니는 쿠마리를 끌어안고 벽 쪽으로 최대한 붙으면서 계속해 소리쳤다.

연하는 헬멧을 벗었다.

“진정하세요.”

어떤 말을 해도 진정하지 않을 것 같았던 쿠마리의 어머니가 흠칫 말을 멈추었다.

시커먼 외계인처럼 보였던 사람들 중 하나가 쿠마리보다 고작 몇 살밖에 더 많아 보이지 않는 소녀라는 데 놀란 것 같았다.

“당신들은…… 뭐죠?”

쿠마리 어머니는 아직도 두려워하는 눈빛을 지우지 못하고 물었다.

“저희는 쿠마리를 도와드리러 왔습니다.”

갑자기 여태 가만히 있던 쿠마리가 어머니에게 뭐라고 속삭였다. 거의 입술을 열지 않은, 말보다 웅얼거림에 가까워서 연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반면 어머니는 바로 알아들은 것 같았다.

“하지만…….”

하지만 석연치 않아하며 주저하다가, 방 한쪽에 있는 장롱에서 작은 도자기 함을 꺼내왔다.

어머니가 함을 열어주자, 쿠마리가 붉은 염료를 손끝으로 찍어서 다가왔다.

손을 들고 그녀를 올려다보는 모습이 뭔가를 원하는 것 같아 허리를 숙이자, 다짜고짜 미간에 찍어주었다.

“이건……?”

연하는 제 눈으로는 보일 리 없는 것을 눈을 올려 보았다.

나중에야 그게 이쪽 사람들이 이마에 찍는, ‘제3의 눈’이라는 ‘티카’라는 걸 알았다.

“당신의 소원이 이뤄졌습니다.”

쿠마리 어머니가 말했다.

“소원이요?”

연하는 어리둥절했다.

“쿠마리께서 가만히 있는 건 소원이 이뤄졌다는 의미니까요.”

“무슨 소원이요?”

“그건 본인이 알고 있겠죠.”

연하는 제 눈썹 위쪽을 긁적였다.

‘뭔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쿠마리가 그녀를 축복해 주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연하는 무릎을 접고 앉아 쿠마리와 시선의 높이를 맞추었다.

소녀는 어른들도 당황하고 무서워하는 일을 겪었는데도 아주 침착했다. 검은 눈동자가 깊고 유연했다.

연하는 삼라만상을 품은 것처럼 초연한 아이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왠지 모르게 다들 숨을 죽이고 두 소녀를 지켜보았다.

쿠마리……. 힌두교의 아름다운 여신, 탈레주의 화신.

직감이지만 알 수 있었다. 이 아이는 진짜 신의 사도, 니스타르였다.

그녀의 쌍둥이처럼.

연하는 미소 지었다.

“오래오래 사셔야 합니다.”

* * *

이반은 상황실의 패널을 보고 있었다.

패널에는 여러 개로 분할된 화면들이 떠 있었다. 개중 하나는 연하가 막 다시 쓰는 헬멧에 카메라가 있어 조금 어리둥절해 하는 쿠마리를 비추는 위치가 달라졌다.

무전이 울렸다.

[제로 14팀, 임무 완료. 집으로 돌아간다.]

이반은 팔짱을 풀고 돌아섰다.

“들어가십니까?”

이반은 고개를 끄덕이고 상황실을 나섰다. 밤이 깊은 시간이라 청사는 조용했다.

복도를 지나는데, 일전에 연하가 들여다보던 자판기가 눈에 띄었다. 그는 왠지 모르게 자판기 앞에 가 섰다.

“국장님?”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자, 얼굴이 낯익은 장교가 의아한 얼굴로 서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아, 음료수 뽑으시려고요? 뭐가 안 됩니까?”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게 자판기가 안 돼서 그런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제 걸로 뽑으시죠.”

장교는 이반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제 손목밴드를 자판기 패널에 찍었다.

삑.

자판기 버튼에 불이 들어왔다.

선택하길 기다리는 장교의 얼굴을 보니 이제와 오해를 정정하기도 그래서, 이반은 아무 버튼이나 눌렀다.

덜컹.

음료수가 떨어졌다.

“여기 있습니다.”

장교는 음료수를 꺼내 건넸다.

“고맙습니다.”

이반은 조금 웃고 말했다.

“아닙니다.”

장교는 웃으며 인사하고 제 갈 길을 갔다. 이반은 음료수 캔을 보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집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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