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 짐승-35화 (35/104)

35화. 롯의 아내 (4)

텅.

막 기름통을 젖은 책 더미에 던졌을 때였다.

‘기척.’

열어놓고 온 입구 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났다.

안나는 다급하게 성냥을 꺼내 불을 붙였다. 인이 타는 냄새가 콧속을 자극했다. 일렁이는 불속에 무표정한 제 얼굴이 비치는 것 같았다.

찰나 그녀는 생각했다.

‘내 스스로가 재앙이 된 기분이네.’

아직 존재했다면 인류를 더 일찍 진일보시켰을 지식을 담은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에 내린 대재앙 같은.

그녀는 방화범의 기분을 이해할 것 같았다. 그건 바로 나 아닌 것의 생사를 쥔 기분이었다.

성냥을 탁 털어냈다.

성냥이 책 더미에 떨어진 순간이었다. 마치 폭발하는 것처럼 불길이 치솟았다.

“안쪽이다!”

사나운 야수를 풀어놓은 듯이 날뛰는 불길을 뒤로하고, 그녀는 안쪽으로 달려갔다. 많은 사람들이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카이브를 나와 안나는 정신없이 숲을 달렸다. 숲 너머 아침이 오고 있었다. 나무들 사이로 햇빛이 언뜻언뜻 비쳤다.

현재 MCTC 중앙근위사단 제1예거 연대의 전신은 뱀파이어들로 구성된 아일의 보안관 팀 ‘하운드’였다.

옛날 마을 경찰과 비슷한 존재로, 아일의 이런저런 교통 정리를 담당하고 있었지만 아일은 워낙 평화로운 곳이었으므로 거의 유명무실했다.

그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는 건 그녀도 거의 처음이었다.

그녀를 붙잡기 위해.

어제까지만 해도 이바노프 가의 일원이었던 그녀를 마치 숲의 짐승처럼.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그녀를 사살할 의도는 없어 보였지만, 안나는 불안한 시선으로 나무들 사이로 스치는 그림자를 보았다.

휙.

바람이 일고, 앞에 그림자가 나타났다. 안나는 깜짝 놀라 멈춰 섰다.

“로스 양.”

오가며 얼굴을 본 적 있는 한 하운드가 서 있었다. 그의 뒤로 바닷물에 씻긴 듯이 하얀 태양이 사방으로 광선을 뿜으며 태어나고 있었다.

그는 손을 내밀었다.

“가방을 이리 주시죠.”

안나는 주춤 물러섰다. 그녀의 뜻이 분명해 보였는지, 하운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지 마십시오.”

주변으로 하운드들이 다가왔다. 넷 정도. 생각보다 숫자가 많지 않았다. 그녀를 붙잡는 데는 넷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처럼.

그때였다. 바람이 일었다.

누군가가 홱 스쳐 지나가는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나뒹굴었다.

하운드들과 누군가가 얽히고설켰다. 나치가 미사일이라도 떨어트린 것처럼 땅이 파이고, 나무가 날아갔다.

그녀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멍청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빛 같은 움직임을 따라가는 동체 시력에 익숙해질 틈도 없었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미친 듯이 움직이는 눈이 터질 것 같았다.

마침내 주변이 조용해졌을 때, 하운드들을 웬 뱀파이어들이 제압하고 있었다. 모두 처음 보는 자들이었고, 거의 남자였지만 아주 간간이 여자도 섞여 있었다.

그리고 단정한 차림을 한 하운드들에 비해 다소 넝마 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다. 꼭 오랫동안 세상을 헤매고 다닌 유랑극단처럼.

“너희들은 뭐냐!”

한 하운드가 날카롭게 외쳤다. 침입자는 차갑게 웃었다.

“우리가 누군지 알고 있잖아.”

침입자는 그야말로 거대한 검을 치켜들었다. 무기에 무지했던 안나는 나중에야 그게 클레이모어라는 걸 알았다.

클레이모어는 정확하게 하운드의 목을 내려쳤다.

스각.

날아간 목이 뿜어낸 피가 안나를 덮쳤다.

“……!”

평소라면 정신을 놓고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하지만 역겨운 붉은 액체가 전혀 역겹게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으로, 그녀는 자신이 무엇이 되었는지 깨달았다.

그런데 피와 흙으로 엉망이 된 그녀를 내려다보는 뱀파이어들 사이로, 꼬마가 걸어 나왔다.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다웠지만, 꼬마는 꼬마였다.

스물 초반쯤 되었을까 한.

“평민 아내가 왕자를 죽이고 직접 이바노프 가의 공주가 되었군.”

그는 세상 무엇도 올려다보지 않는 오만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대단한걸. 좀 감탄했어.”

* * *

시몬은 유리에 비친 자신을 보았다. 그녀의 외모는 그 운명의 날에 멈춰 있었다.

정확하게 서른셋.

그녀는 열여섯에 필립과 결혼했고, 스물에 아일로 갔다. 그리고 서른셋에 흡혈귀가 되었다.

그 순간부터 주름 하나 늘지 않았지만, 느낌은 천지차이였다. 유리에 비친 얼굴은 안나 로스가 아니었다.

부드러운 금발에 연한 푸른 눈동자를 한 안나 로스는 늘 화장기 없는 수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때로 필립이 비싼 화장품 같은 걸 선물하고는 했지만, 써본 적도 없고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볼륨감을 더해가는 몸매를 감추는 낙낙한 원피스 따위를 입고 다녔다.

상냥하고 순진한 아내답게.

‘늘 뭐가 그렇게 부끄럽고, 수줍었는지.’

어쩌면 참한 아내의 가면을 벗는 순간 내부에 끓어오르는 열망이 터져 나올까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밤 참지 못하고 그의 방으로 뛰어들까 봐. 그리고 터질 듯이 익은 몸을 드러내고 애원할까 봐.

‘물론 지금이라면 오히려 당당하게 방문을 열고 들어섰겠지만.’

대공은 그녀가 아카이브에서 훔쳐낸 자료를 읽고는 말했다.

“이바노프. 재미있는 상상을 하는군.”

사실 그녀가 감염을 겪자마자 무리해서 며칠 의식이 없는 동안 멋대로 읽은 거였지만.

“피 대신 꽃을 먹는다라?”

대공은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 꽃에 대해선 들어본 적 있어. 애초에 최초의 흡혈귀들은 모기처럼 열매나 꽃의 수액 같은 걸 먹었다지. 하지만 점차 피를 마시게 된 이유가 뭔데? 몸집이 커져서 식물성 영양분으로 충분하지 않게 됐으니까 그런 거 아냐.”

대공은 코웃음 쳤다.

“그런데 이제 와서 꽃으로 뭘 하겠다고? 꽃은 충분한 영양분이 되지 않아.”

과거를 잘 알진 몰라도, 미래를 읽는 능력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때 대공은 이렇게까지 과학이 발전한 세상을 상상하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었다. 사실 유연한 사고가 가능한 흡혈귀는 많지 않았다. 오히려 오래 살아서 옛날에 형성된 의식 구조가 견고하기 때문이었다.

“하여간 세상일엔 관심 없는 주제에 묘한 일엔 관심을 보인단 말이야. 그 녀석은 대체 뭘 하고 싶은 거야?”

대공은 중얼거리고 자료를 던져 버렸다.

“그땐 저로서도 그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정확히 알 순 없었죠. 하지만 당장은 아니더라도 곧 쓸모가 있을 거라고 직감했습니다.”

이바노프가 그렇게 관심을 보이는 일이니까.

그리고 그녀는 틀리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블란두스 박사가 진행하는 연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죠.”

어느 날 밤, SN은 블란두스 박사의 자택을 습격했다. 그리고 박사의 일가족을 모두 죽이고 집에 불을 놓았다.

SN의 소행이라는 것을 숨기지도 않았다. 꽃 같은 것으로 흡혈귀를 모독했다고 명분을 붙였지만, 사실 필요한 건 최신 연구 자료와 블란두스 박사의 목숨뿐이었다.

위대한 건축물의 비밀이 새어 나갈까 봐 그것을 지은 노예들을 같이 묻어버리는 것처럼.

“제노아틱스는 발 빠르게 하이마를 개발했죠.”

그리고 안정성 따위는 개나 준 상태로 FDA(식품의약국)에 승인을 밀어붙여 먼저 세상에 내놓았다.

형제단 단원이었던 당시 FDA 국장에겐 따로 로비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하이마 승인요청 자료를 옆으로 치워놓고는, 국장 임기가 끝난 후 제노아틱스의 자문역으로 받아달라고 했을 뿐이다.

“그도 하이마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 정확히 내다본 거죠.”

세상은 우스울 정도로 손쉽게 그녀의 발치에 굴러 떨어졌다.

이렇게 쉬운 거였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ISLE은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박사가 죽고도 유지를 이은 연구팀이 모든 절차를 밟아 개발한 플로스는 질적으로 월등할 수밖에 없었죠.”

시몬은 솔직히 인정했다.

하인리히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로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조금만 아는 사람이라면 MCTC가 하이마 대신 플로스를 선택한 이유를 전혀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특허권 분쟁에서 자유롭기 위해 인도 법인 제약회사를 인수하는 꼼수는 썼지만요.”

ISLE가 원한 건 돈 따위가 아니었다. 세계의 프레임을 바꾸는 것이었다.

흡혈귀라 불리는 그들이 피를 마시지 않고서도 살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

인간과 충분히 공존할 수 있다고 증명해 보이는 것.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건 질적으로 뛰어난 대체식량이었다. 하이마가 그럴듯한 모조품이라는 건 하이마가 세상에 등장한 순간 알았을 것이다.

플로스가 등장하자마자 당연하게도 하이마의 시장점유율은 곤두박질쳤다.

“하지만 하이마 사업은 선수를 선점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시몬은 돌아보았다.

“이제, 진정한 사업에 착수해야 할 때죠.”

하인리히는 말문이 막힌 얼굴이었다.

“왜 그런 얼굴이시죠?”

시몬은 무심히 물었다.

“뜻밖이군요. 이렇게 가감 없이 이야기해 주실 줄은.”

시몬은 어깨를 으쓱였다.

“저희 관계는 신뢰가 생명이니까요. 물론 인간이었을 당시 제가 자랑스러운 건 아닙니다. 그건…… 천박한 감정이었죠.”

그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생각만 해도 혐오감이 이는 듯.

“우리는 이를테면 물입니다, 종지에서 큰 그릇으로 옮겨 담아진. 그만큼 외연이 확장돼서, 종지로서 가졌던 감정이나 가치관 같은 건 존재한 적이나 있을까 싶을 만큼 희석될 수밖에 없죠.”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던 강연하가 대테러부대의 전투원으로서 버틸 수 있었던 이유도 비슷했을 것이다. 몸이 바뀌면, 정신은 따라 바뀔 수밖에 없으니까.

흔히 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몸에서 나온다고 하듯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몸은 정신의 한계마저도 확장시켜주는 법이었다.

물론, 어떤 방향으로 어디까지 갈지는 오롯이 본인의 몫이었다.

“안나 로스는 전근대에 살았던 가난한 가정의 둘째 딸이었죠. 시대와 환경이 부여한 한계를 넘지 못했기 때문에, 끝까지 사랑 타령 같은 걸 했겠죠.”

시몬은 불타는 도시를 비춘 창에 손을 댔다. 도시는 마치 제 손에 잡힐 것만 같았다.

“결과적으로 그 덕분에 뱀파이어가 되긴 했지만, 별로 다시 생각하고 싶진 않군요.”

시몬은 돌아보고 빙긋이 웃었다.

“당신들이 벗고 나오고 싶은 것도 그런 것 아닌가요?”

하인리히는 미소로 화답하며 다가왔다.

시몬은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녀는 추하고 더러운 인간성을 벗고 완벽해졌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건 영원하고 아름다운 것들뿐이었다.

젊음, 아름다움, 부, 명예, 그리고…….

시몬은 하인리히를 보았다.

상류층의 화신 같은 남자.

젊고, 건강하고, 잘생기고, 부자에, 성격까지 나쁘지 않은, 어떤 여자라도 꿈꾸는 로맨스소설 속 남자주인공 같은 남자.

그녀는 미소 지었다.

‘하지만 이건 아냐.’

시몬은 그에게 키스하며 생각했다.

‘고작 이런 걸로는 안 돼.’

그녀에게 어울리는 건, 한때 세상을 가졌던 남자─ 이반 이바노프니까.

* * *

이반은 소파에 깊이 등을 묻고 앉았다. 렉스가 물었다.

“마실 걸 드릴까요?”

“됐어. 네가 그런 것까지 할 필요 없어.”

말하고 돌아보았지만, 렉스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부엌에서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뭔가를 따르고 있는 것 같았다.

곧 부엌에서 나와 잔을 건네주었다. 이반은 등받이에 댄 팔로 관자놀이를 괸 채 잔을 받았다.

“너도 참 내 말을 안 듣지. 인간사에 관여하지 않는 편이 좋을 거라고 기껏 충고해 줘도 무시로 일관하고.”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무시한 것처럼 됐을 뿐입니다.”

“그게 그거야.”

이반은 잔을 기울여 마셨다. 그러다가 뭔가 깨달은 것처럼 잔을 보고는 말했다.

“이건 쓸데없이 크리스털이군. 예산도 적은 지부에서 이런 거 구비할 돈은 있었나 봐.”

“정말 국장 같으시군요.”

“나름 즐기고 있어. 하루하루 성실히 일해서 돈을 버는 건 오랜만에 느끼는 즐거움이랄까.”

이반은 잔을 내려놓았다. 테이블에 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달칵 울렸다.

“필립과 안나는 가난하지만 행복한 부부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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