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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짐승-34화 (34/104)

34화. 롯의 아내 (3)

‘조만간 나만 이 자리에 없겠지.’

저녁 식탁을 둘러보았을 때 안나는 그 잔혹한 진실을 온몸을 떨며 깨닫고 말았다.

내일이 되면 그녀는 하루 더 늙을 것이다. 모레가 되면 이틀 더. 그리고 그 끝에는 죽음이 기다렸다.

항상 지척에 서서 그녀를 조롱하고 있는 듯한 죽음이.

‘시간이 없다.’

그때만큼 어떤 명제를 확실히 깨달은 적도 없었다.

* * *

“안 돼. 감염은 아무나 이길 수 있는 게 아니야.”

필립은 그녀를 감염시키는 일을 거절했다. 울고, 애원하고, 화내고, 몸으로 유혹하고, 동정심에 호소해도 그 사안에 관해서만은 확고했다.

“내가 죽으면 그 모습으로 다른 여자와 살 속셈이지? 내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지?”

초조함을 이기지 못해 히스테리를 부렸을 때, 필립은 날이 갈수록 우아함까지 더해져 귀공자 같은 얼굴로 눈물을 흘렸다.

“만약 네가 감염을 이기지 못하고 죽으면? 그럼 내가 널 죽인 거나 다름없어.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리 없잖아.”

“하지만 내가 이대로 늙어 죽으면…….”

“난 널 따라갈 거야. 영원한 삶 같은 건 필요 없어.”

필립은 그녀를 끌어안았다.

‘대체 왜?’

생각할 정도로 필립은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어리고 상냥했지만, 그건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도 더 나아질 전망이 없는 인간 필립 로스의 아내일 때 가치가 있는 요소에 불과했다.

심지어 더 이상은 어리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필립을 증오하기 시작했다. 자신은 모든 것이 찬란하고 영원한 다이아몬드의 세계에 살면서 그녀는 이 낡고 헤지는 넝마 같은 세계에 버려두었다.

‘이대로 시들어 죽어버리라고.’

더 이상 그가 말하는 사랑을 믿을 수 없었다.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낭만주의자인 그는 영원히 젊고 아름다운 몸이 되어서도 늙어가는 아내를 사랑한다는 내러티브가 마음에 들 뿐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나와 함께 영원히 살 방법을 강구하지 않고 그런 변명이나 하고 있을 리 없잖아.’

안나는 손톱을 깨물었다.

어쨌든 필립은 그녀를 감염시키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감염시키게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부엌의 칼꽂이에 꽂혀 있는 칼에 시선이 멈추었다. 칼을 잡는 데 주저는 없었다. 찌르는 순간 아플까 봐 고민한 정도였다.

감염을 이기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하지 않았냐고?

그녀는 누가 그렇게 묻기라도 한 것처럼 코웃음을 쳤다.

설마, 그럴 리가.

필립의 사랑이 감염을 이기게 만들었다면, 그녀의 사랑이 감염을 이기지 못할 리 없었다.

* * *

“안나!”

필립이 울부짖었다. 실수로 폐를 찔렀는지 입 밖으로 피가 흘러넘쳤다. 고통은 생각보다 심했다.

“살려…… 살…….”

더 길게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처음으로 인식한 것은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압도적인 허기였다. 뱃속의 굶주린 야수가 영혼까지 갉아먹는 것 같았다.

그제야 왜 필립이 그녀를 한사코 뱀파이어로 만들기 거부했는지 깨달았다.

이건 괴물의 식욕이었다.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안나는 전율하며 깨어났다. 모든 것이 붉거나 어두웠다. 마치 색이 반전된 사진 같았다.

검고 기름진 웅덩이가 스멀거리며 퍼져 나갔다. 그리고 우두커니 서 있는 구둣발 아래로 스며들었다.

얼어붙어 안나를, 정확히는 그녀 아래 늘어진 필립을 보는 붉은 눈이 있었다.

“이바…….”

그녀는 당황해 일어났다. 게걸스럽게 식사하는 장면을 들킨 숙녀처럼.

이반이 다가오는 만큼 물러났다.

철퍽.

맨발에 액체가 밟혔다.

이반은 목이 난자당해 열려 있는 필립 곁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깔끔한 바지에 검은 핏물이 스몄다.

“필립.”

그의 목소리가 떨리는 건 그때 처음 들었다.

“이바……ㄴ…….”

아직 살아 있었는지 필립은 핏물을 토해냈다.

“의사를 불러와!”

알렉스가 문가를 돌아보고 소리쳤다.

그제야 알렉스도 있었다고 깨달았다. 사람들이 부산하게 뛰어가고 달려오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누군가가 부서뜨릴 듯이 응급상자를 내려놓았다.

이반은 와이셔츠를 걷은 자신의 팔에 튜브를 연결했다. 그 사이에 사람들은 거즈를 몽땅 풀어 필립의 목을 지혈했다.

하지만 안나는 앞에서 펼쳐지는 격렬한 현장이 전혀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감각이 설정값이 변경된 기계처럼 널뛰었기 때문이다.

오감의 거리감이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자꾸만 달라졌다.

필립!

피를 너무 많이 잃었어요. 돌이킬 수 있는 한계를 넘었어요.

필립, 필립!

피를 더 가져와.

정신을 놓지 마. 필립!

목소리들이 머릿속을 꽝꽝 울려왔다.

“필립!”

갑자기 현실감이 돌아왔다.

필립이 피에 물든 손으로 이반의 팔을 잡고 있었다.

“안나를, 용서……ㅎ, 세…… 단지…….”

필립의 손에 균열이 갔다.

아니, 괴사하는 혈관을 따라 빠르게 검어지는 부분이 균열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균열은 옷 아래에서 기어 나와 목을 타고 순식간에 얼굴을 뒤덮었다.

이내 그의 눈에는 공허한 응시밖에 남지 않았다.

마지막 숨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은 손들이 하나둘 필립을 떠났다.

하지만 이반은 끝까지 필립의 손을 잡고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흘러내린 머리카락 때문에 옆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이바노프 씨.”

안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나를 봐주세요. 나, 이렇게 감염을 이겼어요. 오로지 당신을 위해서…….’

당장에라도 말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반은 필립의 목과 무릎 아래로 손을 넣어 안아들었다. 마치 빈 대롱을 들어 올리는 것 같았다.

그는 안나를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섰다. 그의 팔 아래로 필립의 손이 떨어졌다.

온통 금이 간 필립은 마치 아이가 부주의하게 가지고 놀다가 바닥에 떨어뜨린 도자기 인형 같았다.

* * *

동이 터오는 문가에 그림자가 나타났다. 안나는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다가 급히 일어났다.

셀레나가 서 있었다. 눈가가 붉었다. 직감적으로 필립은 죽었다는 걸 깨달았다.

안나는 발작적으로 말했다.

“사고였어요.”

피가 말라붙어 온몸에 금이 간 곳마다 뻑뻑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를 신경 쓰지 않았고 뭘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샤워조차 할 수 없었다.

“절대 이렇게 될 줄은…….”

“닥쳐.”

안나는 움찔했다.

“감염을 이겨낸 건 인정해 줄게.”

셀레나는 더 이상 그녀에게 정중하게 말하지 않았다.

늘 ‘아가씨’라고 부르면서, 다정하게 대해주었는데.

“하지만 너 스스로를 속일 수 있어도 난 속지 않아. 넌 필립이 방해된 거야. 눈을 뜨기도 전에 필립을 죽여야겠다고 마음먹었겠지. 그리고 본능대로 행동한 거야. 필립은 차마 널 공격하지 못했고.”

맹렬한 악의까지 느껴지는 셀레나의 말에 안나는 떨고 말았다. 그녀가 여태 살면서 겪은 최대의 악의라고는 집세를 내지 못했을 때 집주인의 가시 돋친 말투 정도였다.

하지만 이건…….

“필립은.”

셀레나는 무언가를 겨우 삼켜 넘기는 것 같았다.

“필립은 우리도 그렇게 괴물은 아닐 거라고 생각할 수 있게 해준 아이였어. 그래서 모두 필립을 높이 평가했지. 넌 그 아이를 낮잡아봤을 뿐이지만. 정말, 표정을 어찌나 숨기지 못하던지.”

모두 알고 있었다…….

손이 떨려왔다.

‘철저하게 상냥한 아내 역할을 연기했다고, 아무도 내 본심은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때에야 그녀는 필립이 진정으로 찬란하고 영원한 다이아몬드 세계에서 살게 되었다고 깨달았다.

그가 이 헤지고 넝마 같은 세계에 떨어지는 일은 다신 없을 것이다.

“하지만 널 보니 알겠어. 우리는 정말로 괴물이구나.”

그건 증오로 이글거리는 것 같기도, 왈칵 울어버릴 것 같기도 한 눈이었다.

셀레나가 돌아서는 모습을 본 안나는 저도 모르게 말을 꺼냈다.

“이바노프 씨는…….”

셀레나는 질렸다는 시선을 던졌다.

“이바노프 씨가 널 죽이지 않는 건 필립이 용서해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야. 그 아이의 선의를 우리가 망칠 수 없으니까. 단지 그뿐이야.”

셀레나는 이를 갈았다.

“꺼져 버려.”

* * *

“하지만 그게 자만이었죠.”

시몬은 도시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저 하나 따위 세상 어디에 있든지 언제든 단죄할 수 있다고 생각했겠죠.”

시몬은 훗 웃었다.

“물론 그게 틀렸다는 말은 아니지만요.”

* * *

셀레나가 사라지고, 안나는 망연히 서 있었다. 웅성이며 주변을 맴도는 인기척도 점차 사라졌다.

그녀는 혼자 남겨졌다. 다시는 누구도 곁에 오지 않을 것처럼.

어느 순간 꾹 주먹을 움켜쥐고 돌아섰다.

그 길로 그녀는 숲으로 향했다.

바스락. 바스락.

깊이 드리워진 나뭇잎을 헤치며 나왔다. 바위 안쪽에 틈이 있었다.

섬 가운데엔 숲이 하나 있었다. 애초에 생겨난 모습 그대로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깊고 빽빽한 숲이었다. 그리고 또 그 가운데에는 아카이브가 숨겨져 있었다.

어지간한 사람도 모르는 아카이브였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필립의 아내였으니까.

물론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는 몰랐다. 최근 이바노프 남자들이 주목하는 어떤 일에 관련된 자료가 있다는 것만 알았다.

“인간과 우리가 공존하는 세상이 올 거야.”

이바노프 남자들은 모여 앉아 자주 그렇게 이야기했다.

“언젠가는.”

그녀가 듣기에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였지만, 감히 남자들이 하는 이야기에 끼어들지 않았다. 차를 마시며 조신하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때가 되면 꽃은 분명히 쓸모가 있을 거야.”

“하지만 꽃은 충분한 영양분이 되지 않습니다. 금방 아사할 테죠.”

알렉스가 말했다.

이바노프 가가 혈액을 섭취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였다. 동물의 피를 마시거나, 꽃을 먹거나.

동물의 피는 역하다는 단점이 있었고, 꽃은 대량 생산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이 두 가지마저 힘들면 섬에 사는 인간 주민들의 도움을 받았다. 물론 그건 정말 최후의 수단이었다.

오갈 곳 없는 그들을 받아준 이바노프 가를 위해 주민들은 그 정도는 선뜻 나섰지만, 이바노프 가는 그 방법은 최대한 자제했다.

공존하기 위해선 주민들에게 언제고 먹잇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줘선 안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왜 그냥 피를 마시지 않는 거지.’

안나는 자주 생각했다.

포식자로서 자신들이 가진 권리를 누리지 않는 세 남자가 답답할 때가 있었다.

남자들이 하는 일에 어련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반론을 제기하진 않았지만 말이다.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는 혈연관계가 아니라지만, 세 남자를 보면 어딘지 비슷한 사람들끼리 맺어지는 것 같았다.

“해결 방법은 있을 거야.”

이바노프는 조용한 눈으로 말했다.

끼이익.

안나는 은행 금고 같은 철제 손잡이를 온 힘을 다해 돌렸다.

기백 키로는 족히 나갈 것 같은 철제 손잡이는 특별한 방범 장치가 없어도 어지간한 흡혈귀도 돌리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녀는 돌려내고 있었다.

쿵.

그녀는 역시 기중기쯤 있어야 할 것 같은 문을 밀어내고 들어섰다.

숨을 몰아쉬며 둘러보았다.

아카이브는 천장이 높은 초기 방공호 같은 형태였다. 생각보다 넓은 공간이었고, 안쪽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는 것 같았다.

박물관에나 있어야 할 것 같은 유물과 보물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거나 하진 않았다.

이바노프는 그런 것에 탐을 내지 않았다.

그가 살아오면서 조금만 탐을 냈어도 대영박물관도 초라해 보일 컬렉션을 가질 수 있었을 텐데, 무슨 디오게네스처럼 물질적인 것을 탐내거나 모으거나 하는 법은 없었다.

책을 제외하면.

그것도 당대에는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책이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특별한 유물이 된 경우지만, 마치 고대에 화재로 소실된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이 현신한 것 같은 도서관이 아카이브 안에 존재했다.

“어디, 어디에…….”

그녀는 정신없이 자료가 있는 섹션을 뒤지기 시작했다.

우르르.

자료들을 모조리 책장에서 쏟아내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 대충 손에 잡히는 대로 모두 배낭에 집어넣었다.

그때 디지털 저장매체가 있었다면 좀 더 많은 자료를 들고 나올 수 있었을 테지만, 당시에는 그게 최선이었다.

안나는 주변을 둘러보고, 커다란 통을 가져와 붓기 시작했다.

촤악.

코를 찌르는 기름 냄새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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