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 짐승-33화 (33/104)

33화. 롯의 아내 (2)

“하지만 이해되지 않는군요.”

하인리히는 말했다.

“그런 연대가 가능했다면 왜 일찍 무언가 하지 않았는지.”

“예컨대?”

시몬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물었다.

“글쎄요. 세계 정복 같은?”

뭐, 그가 흡혈귀였어도 요즘 같은 세상에 그런 세련되지 않은 일을 하진 않았겠지만 말이다.

“흡혈귀는 위험하지만 태만한 짐승이니까요.”

시몬은 단언했다.

“영원히 사는 데다가 인간은 상대도 되지 않는 육체 능력……. 당장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간절함이란 있을 수 없죠. ‘꽃’을 활용할 생각을 하지 못한 것도 그런 특징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죠.”

“처음에 블란두스 박사의 연구소를 지원한 건 ISLE이 아니었나요?”

시몬은 가볍게 웃었다.

“동행한 ISLE의 조사단이 아니었다면 블란두스 박사는 그 거대한 균열에서 빠져나오지도 못했겠죠.”

“덕분에 박사는 살아 돌아와 꽃에서 쿨리시다이닌을 정제해 내는 데 성공했고…….”

하인리히는 손가락 하나로 볼을 짚었다.

“우리 제노아틱스는 그 기술을 샀죠.”

직후 박사는 ‘꽃’ 같은, 흡혈귀를 모독하는 물건을 평화의 토대라고 말하는 건방진 인간을 단죄하고자한 흡혈귀 그룹의 테러로 사망…….

그리고 그 테러리스트 그룹에 은밀하게 흘러 들어간 거대 제약기업의 자본.

박사의 죽음에 대한 의혹이 일자 때마침 다른 정치적 이슈를 터트려 호도해 버린 정계.

‘뭐, 그런 흔한 이야기지.’

그리고 남은 것은 가장 먼저 하이마를 상용화해 기업계의 슈퍼스타가 된 제노아틱스였다.

꽃을 피 대신 먹으려는 아이디어를 누가 먼저 냈는지, 어느 기업이 박사의 연구소를 지원했는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모두 애초에 ISLE에서 꽃에 관련된 연구 자료를 빼내온 누군가 덕분이었죠.”

하인리히는 빙긋이 웃었다.

“당신, 안나 로스.”

시몬은 한참 그를 보았다.

“다 알면서 떠보시다니, 그리 매너 있는 행동은 아니었군요.”

“인정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진실을 이야기할지 알아야 했거든요. 어쨌든 당신은 저희 형제단을 만드신 분이고, 또 집사 역할을 맡고 계시니까요.”

“진실을 알고 싶으신가요?”

시몬은 담배를 눌러 끄고 창가에 섰다.

창밖의 불빛이 그녀의 몸을 황금빛으로 훑었다. 금으로 빚은 것 같은 여인이 몹시 견고해 보여, 남자는 성욕이 일었다.

그가 다가와 벌거벗은 어깨를 쓸었다. 시몬은 창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하기 시작했다.

“제 전 남편 필립 로스는 석탄 공장에서 일하는 평범한 노동자였죠.”

산업혁명을 거치고 절정기에 이른 영국, 공장들이 뿜어낸 연기로 하늘마저 검게 물든 맨체스터의 외곽…….

이제는 기억도 흐릿한 그곳에서 그녀는 살았다.

눈부신 기술 발전이 전 영국을 밝히더라도 손바닥만 한 그녀의 신혼집은 밝혀주지 못하는 흐릿한 어둠 속에서.

“어느 날 필립의 귀가가 늦어지더군요. 필립은 그대로 일주일간 행방불명이었어요. 그런데 일주일이 넘어가던 밤에 갑자기 나타났죠.”

* * *

안나는 며칠째 제대로 자지 못해 초췌한 몰골이었다.

그날도 화장대에 앉아 걱정과 불안이 휘몰아치는 불면의 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필립, 대체 어디에…….”

피곤한 눈을 꾹 내리감으며 중얼거렸다.

끼익.

그런데 나무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흠칫 고개를 들었다.

그들의 허름한 단칸방으로 필립이 들어왔다. 마치 그날 아침에 나갔다가 공장에서 퇴근하고 오듯이 태연하게.

“필립, 대체 어디 있다가……!”

응어리진 모든 감정이 쏟아져 나오려는 찰나였다.

“안나.”

필립이 다가와 숄을 걸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필립은 항상 다정했지만, 그때의 부드러움은 이루 말할 데 없었다. 그런데 마치 어두운 정원에 늘어진 차가운 나뭇가지가 어깨에 닿은 것처럼 소름이 끼쳤다.

아마 그녀를 응시하는 눈빛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치 허물을 벗은 뱀 같은…….

선뜻 뭐라 할 수 없는 이질감이 있었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와 다정한 녹색 눈동자를 지닌 외모는 필립이 가진 유일한 장점이었지만, 그건 오히려 보기에 편하다는 느낌이었지 이런 차갑고 냉정한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어쩐지 키도 커진 것 같았다.

‘아니, 분명히 커졌어.’

“소개해 줄 분이 있어. 내 목숨을 구해주신 분이야.”

그러면서 필립은 문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아무것도 이해되지 않았다.

“목숨을……?”

나중에 알게 됐지만, 필립은 일주일 전 귀가하는 길에 강도를 만났다.

허둥지둥 지갑을 꺼내주려 했는데 하필 그날따라 지갑을 공장에 두고 온 것이다.

화가 난 강도는 그를 찔렀고, 필립은 어두운 뒷골목이라 발견하는 사람이 없어 과다출혈로 죽었다.

그의 삶만큼 보잘 것 없는 죽음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그 자리를 지나가는 비인간적인 존재가 있었던 것이다.

끼익.

나무 바닥이 울고, 누군가가 집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시선을 돌렸다.

글쎄, 뭐라 해야 할까…….

그건 인간의 형태를 한 신비의 코덱스, 여태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세계와의 접촉이었다.

* * *

지금 생각해도 무지렁이에 불과한 공장 노동자 필립 로스 따위를 그가 선택할 이유는 없었다.

특히 클리엔테스를 만들지 않기로 유명한 그라면.

그가 발견했을 때 낭자한 핏물에 잠긴 필립은 거의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하지만 필립을 계속해서 읊조리고 있었다.

“안나…….”

애초에 그를 뒷골목까지 이끈 것도 그 끊이지 않는 읊조림이었다고 했다.

필립은 앞에 누군가가 있다고 생각되자, 손을 뻗어 그의 구두를 잡았다. 삶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담은 손아귀 힘으로.

“선택은 내가 한 게 아냐.”

나중에 그는 그렇게 말했다.

“돌아오기로 선택한 건 필립이지.”

필립이 다른 존재가 되어 살아 돌아온 날, 자신을 ‘이바노프’라고 소개한 남자는 두 사람을 국외의 어떤 섬으로 데려갔다.

그때만 해도 전설에나 등장하는 존재로서 숨어 살아야 할 때였기 때문이다.

대항해시대 이후 뱃길이 열렸다 해도 서민들이 바다를 건너는 일은 쉽지 않았으므로, 그들이 근거지로 육지와 격리된 섬을 택했던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섬은 단순히 ‘아일(Isle, 섬)’이라고 불렸다.

내지에만 있다 보면 섬이라는 걸 까먹을 정도로 큰 곳이었고, 바닷가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잘 관리된 중세식 성이 고즈넉이 서 있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살았다.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왕자, 공주처럼.

‘한동안 꿈을 꾸는 거라고 생각했지.’

그녀는 아직도 처음 도개교를 통해 웅장한 성문으로 들어갈 때 느꼈던 위압감, 설렘, 머리가 아찔해지는 환희를 기억했다.

그날 이후 그녀의 삶은 변했다. 육지에 나갔을 때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는 사소한 불편을 제외하면, 내일 먹을 빵을 걱정하던 삶이 너무 달라져서 눈앞이 어지러울 정도였다.

무엇보다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가 친절했고, 그들 부부를 존경심을 가지고 대했다.

특히 필립의 지위는 압도적이었다.

“어쨌든 촌수로는 높다고 해야 하나, 삼촌뻘이란 느낌이니까요.”

셀레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아일의 모든 것을 관리하는 수장에 가까운 존재였다. 모두 그녀에게 물어보았고, 그녀가 모든 걸 결정했다.

하지만 진짜는, 모두가 바라보는 정점은…….

신록이 우거진 정원에 그는 앉아 있었다.

면바지에 셔츠를 입은 가벼운 차림이었다. 그의 무릎에 놓인 책에 햇빛이 쏟아졌다. 페이지를 넘기는 큰 손에 뼈가 불거졌다.

한참을 넋 놓고 바라보다 용기 내어 부르면, 그녀를 보고 웃었다.

그는 무자비한 지배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때로는 경계가 뚜렷하지 않을 정도로 격의를 따지지 않고, 유쾌한 구석마저 있었다. 왕의 위엄이란 굳이 강요할 필요가 없다는 것처럼.

‘넋을 놓고 그를 바라본 적이 몇 번이었던가.’

볼이 붉어지는 설렘은 온몸이 끓는 열병이 된 지 오래였다.

부덕한 여자라고 손가락질할지 모른다. 그녀를 향한 사랑으로 죽음에서조차 돌아온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를 담은 비정한 심장이라고 비난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자들을 진정한 열망을 모르는 불쌍한 영혼이라 부를 것이다.

그가 집으로 들어오는 순간 그녀는 계시를 받듯이 알았다. 그가 바로 제 영혼의 사랑, 심장의 주인이자 육체의 연인임을.

* * *

“왔어요? 앉아요.”

셀레나가 말했다.

각자 하루를 보낸 사람들이 저녁 식사를 위해 식당에 모여들고 있었다.

성은 매우 커서 평소에는 거의 부딪치지 않고 개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바노프 가는 적어도 일주일에 두세 번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

“알렉스 씨.”

미리 와 서류 같은 것을 보고 있는 알렉스가 고개를 들었다.

사실 동화 속 왕자님 이미지에 가장 부합하는 것은 어깨까지 내려오는 눈부신 금발을 가볍게 묶은 알렉스였다.

서늘한 냉기가 느껴지는 아름다운 얼굴은 거의 웃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예의가 바르고 몸가짐이 차분했다. 궁중 예법이라도 몸에 익은 사람처럼.

영국에서는 얼마 전 발매된 ‘드라큘라’라는 소설이 대성공을 거두는 바람에 드라큘라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졌지만, 이바노프 가 사람들은 그녀가 흔히 생각하던 전설 속 괴물과는 다른 점이 많았다.

사실 늙지 않고 피를 마셔야 한다는 점 외에는 다른 생물에 가까웠다.

일단 성물을 끌어안고 자도 아무렇지 않다는 것부터.

“필립.”

“다녀오셨습니까?”

필립이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알렉스는 섬 바깥일을 담당하기 때문에 육지에 나가는 일이 많았다. 섬에 필요한 모든 물건을 배로 실어 보내거나, 때로는 갈 곳 없는 사람들을 데려오고는 했다.

그런 사람들은 대체로 이 섬의 주민이 되어 살았다.

즉, 이 섬에는 생각보다 그녀를 포함한 인간들이 많이 살았다. 거의 성 아래 마을 하나를 이룰 정도로.

“응. 요즘 바다 건너에서 재밌는 일이 벌어지고 있더군. 날 수 있는 동력장치를 만들어서 사람이 하늘을 날았다나 봐.”

알렉스가 말하자, 필립은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설마요.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

“드라큘라도 실존하는데 하늘이라고 날 수 없을까요?”

셀레나가 짓궂게 말했다.

“아, 그것도 그렇군요.”

필립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바보 같은 웃음.’

안나는 속으로 꾹 억누르며 생각했다. 하지만 알렉스는 필립을 다정한 눈으로 보았다.

필립에게는 이 얼음 조각 같은 왕자님마저 녹이는 이상한 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제 클리엔테스 형제가 무작정 예쁜 것인지.

파트로네스, 클리엔테스 관계를 가져본 적 없는 그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유대감 같은 게 있는지도 몰랐다.

그때였다.

공기의 질이 변했다고 느꼈다.

안나는 긴장했다.

땅을 닮은 냄새가 물씬 밀려오고 뒤로 거대한 존재감이 지나갔다.

그리고 그녀 외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가운데 자리에 앉았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신경 쓰건 말건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고개도 쉽게 돌려볼 수 없을 만큼 긴장하고 있는데, 그는 가만히 사람들 대화를 듣고 있다가 어느새 자연스럽게 섞여들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가 아주 오래전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대화했다.

“안나.”

안나는 흠칫 정신을 차렸다. 필립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괜찮아?”

필립 너머로 그도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몸이 좋지 않다고 했죠.”

잊고 있었던 것처럼 알렉스가 말했다. 그들은 병에 걸리지 않으니까.

“괜찮습니까?”

“괜찮아요. 정말.”

그녀는 다급히 손을 저었다.

안 그래도 필립도 몇 년 전부터 알렉스를 도와 육지 일을 하기 시작했는데, 오늘은 그녀가 미열이 있어서 섬에 남았다.

안나는 괜찮다고 만류했지만 필립은 결국 그녀 곁에 남았다.

“이것 좀 먹어봐.”

필립은 늘 그렇듯 안나를 챙겼다. 다들 그런 필립이 익숙한 얼굴이었지만, 그녀는 부끄러웠다.

“필립.”

그러지 말라는 듯 힘주어 불렀다.

“왜, 이거 좋아하지 않아?”

셀레나는 이쪽을 보다가 미소 지었다.

“정말 필립 씨 같은 뱀파이어는 본 적이 없다니까요.”

필립은 여전히 신실한 남편이었고 안나를 깊이 사랑했다. 오히려 전보다도 더.

“필립에겐 되살아나야 한다는 동기 자체가 안나였으니까.”

그가 말했다.

그런 필립을 자랑스러워하는 목소리는 그가 아들 같은 이를 배신하는 일은 없으리란 사실을 더욱 확실히 해주었다.

물론 그전에도 그녀의 사랑이 이루어지리란 전망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안나는 또 절망했다.

그는 십 년 전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았다.

물론 셀레나도, 알렉스도, 필립도.

하지만 필립의 어린 아내로 불렸던 그녀는 이제 삼십대가 되었다.

‘조만간 나만 이 자리에 없겠지.’

저녁 식탁을 둘러보았을 때 그녀는 그 잔혹한 진실을 온몸을 떨며 깨닫고 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