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롯의 아내 (1)
“아이는 영문도 모르고 살해당했고, 인간이 아닌 존재로서 되살아났지. 아니, 되살림을 당했다는 쪽이 맞겠지.”
아무도 그녀의 동의 따위 구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아이는 누구도 탓하지 않았다.
바보같이 순진해서, 아무것도 몰라서, 새파랗게 어려서…….
처음에는 그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어, 저 아이는.”
그것이 온몸에 사제폭탄을 두른 폭탄 자살 테러범이든, 진압 방패 너머 구름떼처럼 밀려드는 반 뱀파이어 시위대든, 상관과 동료들의 경멸이든, 심지어 난독증이든.
파란 윤기가 흐르는 것 같은 명징한 눈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주변에 일고 있는 폭풍우를.
그녀를 다시 보았을 때 그는 그것을 확신했다. 저 눈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의 것이 아니라고.
“인생은 애초에 비극일 수밖에 없지만, 그런 인생의 본질을 깨닫고 수용하는 데는 영웅적인 용기가 필요하지.”
이반은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렉스를 돌아보았다.
“한 마디 불평도 없이 폭풍우 같은 인생을 묵묵히 살아가는 저 아이를 보고 있으면 인간 정신의 위대함이 뭔지 알 것 같거든.”
그럼에도 처음부터 연하를 포기한 이유는 그가 그녀에게 해줄 게 없기 때문이었다.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라고 부르지만, 사실 그건 인간으로서의 버릇을 버리지 못한 가족놀이에 가까웠다. 냉정하게 말해서 비상용 피 보관용통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아버지라고 주장해도 진짜 아버지가 될 수 없고, 그렇다고 다른 무언가가 되어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연인이라면…….’
입가에 절로 자조적인 웃음이 스쳤다.
그런 것은 믿을 수 없었다.
그는 누구보다 사랑의 존재를 믿었으나, 여자와 남자 사이의 사랑에는 회의적이었다.
그건 오늘 아침 자른 사과보다도 변하기 쉽지 않으면, 뇌를 재구성하는 것처럼 파괴적이었다.
특히 사랑이란 것이 그의 두 번째 클리엔테스, ‘다정한 필립’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생각하면.
* * *
검은 새틴 구두가 화려한 러그에 발을 디디자, 황금빛으로 장식된 로비에 서 있는 웨이터가 우아한 미소를 지었다.
“어서 오십시오.”
웨이터는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안쪽을 가리켰다.
“테이블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레스토랑 천장에는 다비드의 ‘사비나 여인들의 중재’의 긴박하고도 장엄한 순간이 묘사되어있었다.
새하얀 보가 덮인 테이블에는 금 촛대와 은 식기가 샹들리에 빛 아래 반짝거렸다.
테이블 사이로 걸어가자, 붉은 드레스를 입은 굴곡진 몸에 어김없이 남자 손님들의 시선이 멈추었다.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는 몸은 꽉 조아놓은 나사처럼 팽팽한 긴장감을 내뿜었다.
웨이터는 레스토랑의 한가운데 자리로 그녀를 안내했다.
“드무스티에 씨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자리에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매끈한 몸에 정확하게 맞춘 고급 양복을 입은 보기 드문 미남이었다. 그리고 혼혈화가 진행된 근래에 보기 드문 금발에 푸른 눈을 지닌, 순수한 아리안 혈통이란 게 실존한다면 그 화신 같은 남자였다.
남자는 일어나 그녀를 맞았다.
“오셨습니까?”
남자는 테이블을 돌아와 의자를 빼주었다. 그녀는 창문 너머 빛나는 에펠탑을 한 번 보고 의자에 앉았다.
“죄송해요. 제가 좀 늦었나요?”
“딱 적당한 만큼 늦으셨죠.”
웨이터가 그녀의 잔에 샴페인을 따라주었다. 투명한 잔 안에 청명한 기포가 끓어올랐다.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푸거-들뢰크 씨 아닙니까?”
한 중년 사내가 남자를 반갑게 아는 체했다. 남자는 일어나 중년 사내와 악수했다.
“간만에 뵙습니다.”
“이거, 이런 곳에서 뵙는군요.”
두 남자는 간만에 보는 반가운 지인처럼 웃으며 대화하다가 기다리고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남자가 사내를 소개했다.
“MCTC 서울의 부국장님입니다.”
그녀는 완벽한 네일아트가 된 손을 내밀었다.
“제노아틱스의 총괄 홍보 매니저 시몬 드무스티에라고 합니다.”
“당신은…….”
부국장은 그녀의 붉은 눈, 일반적인 여자보다 큰 키, 자신만만하게 내민 손을 보았다.
“뱀파이어군요.”
그러면서 남자를 보았다. 어떻게 뱀파이어와 함께 있을 수 있냐는 듯이.
시몬은 부국장에게서 어떤 냄새를 맡았다.
아주 미세하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땅을 닮은 냄새.
시몬은 엉거주춤 올라와 있는 부국장의 손을 잡았다. 부국장은 흠칫했지만 손을 빼내지 못했다.
시몬은 손에 조금 힘을 주며 나직이 말했다.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부국장님.”
부국장은 왠지 모르게 섬뜩해진 얼굴이었다. 하지만 체면이 있어 차마 티내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부국장이 가고 나서 둘은 자리에 앉았다. 남자는 손가락으로 가볍게 턱을 괴고 말했다.
“자격이 있는 자는 아닙니다만.”
시몬은 희미하게 웃었다.
“판단은 제 몫이 아니니까요.”
* * *
“읏, 하아…….”
어두운 호텔 방 안, 신음소리가 울렸다.
“하…….”
값비싸 보이는 카펫에 옷가지가 늘어져 있었다.
어두운 정장 사이로 피가 흐른 것 같은 붉은 원피스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검은 새틴 하이힐이 널브러져 있고, 속옷가지들이 이어졌다.
끼익. 끽.
그 끝에 침대가 거칠게 울었다. 인영은 한 덩어리처럼 뭉쳐 있었다. 남자를 올라탄 여체가 들썩였다.
남자는 신음을 터뜨렸다. 황홀경에 젖어 있었지만 언뜻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시몬은 수면을 뚫고 솟구치듯 고개를 들었다.
입가가 온통 붉었다. 흥건한 핏줄기가 턱을 타고 풍만한 가슴으로 흘러내렸다. 여자 드라큘라 같은 섬뜩한 모습이었다.
시몬은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로 사라졌다. 한동안 물소리가 나더니 피를 모두 닦아낸 깔끔해진 모습으로 돌아왔다.
남자는 아직 숨을 몰아쉬며 침대에 한쪽 다리를 세우고 늘어져 있었다.
그는 알몸 그대로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는 그녀를 흘긋 보았다.
“오늘은 좀 양이 많았군요.”
“죄송해요. 쉽게 조절이 되는 게 아니라서 말이죠.”
부국장에게서 맡은 냄새가 그녀를 흥분시켰다. 그저 스쳐 지나갔을 뿐일 텐데도 부국장에게 남아 있던 그의 냄새.
이바노프의 냄새.
시몬은 옆 테이블에 놓인 담배를 들어 입에 물고 남자를 보았다.
“잠자리에서 피를 빨리고 싶어 하다니, 당신도 정상은 아니군요.”
남자는 가운을 끌어다 입고 일어났다. 그리고 거울을 보고 목덜미에 남은 자국을 확인하며 말했다.
“정말 죽을 걱정 없이 죽음을 경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하인리히 푸거-들뢰크.
중세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서 깊은 금융가 푸거 가의 방계인 푸거-들뢰크 가의 상속인으로, 이제 겨우 서른 후반이지만 제노아틱스뿐만 아니라 여러 기업체의 주주였다.
그는 담배와 마약은 일절 하지 않았고 술은 딱 기분이 좋을 정도로만, 그럴 분위기일 때 마리화나만 가끔 피웠다.
흥청망청 인생과 몸을 낭비하는 퇴폐한 귀족들은 옛말이었다. 이 시대의 귀족들이 자신의 몸을 대하는 방식은, 그들이 부를 쌓는 방법만큼이나 세련되고 교묘해졌다.
‘교묘한 만큼 약간 변태스럽긴 하지만.’
이 정도는 맞춰주기 어렵지 않았다.
어쨌든 그의 위치를 생각하면 그럴 만한 가치는 있으니까.
“아내 분이 자국을 보면 곤란하지 않으시겠어요?”
시몬이 물끄러미 보며 묻자, 하인리히는 거의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럴 일이 있으면 다행이겠군요.”
시몬은 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그는 소독과 치료를 동시에 해주는 드레싱 밴드를 건네주었다.
시몬은 밴드를 뜯어 목덜미에 남은 흔적 위로 붙여주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물을 한 잔 따라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한 모금 마시고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대더니 물었다.
“이반 이바노프가 누구죠?”
담배에 불을 붙이려는 손이 잠깐이지만 멈칫했다. 곧 태연하게 불을 붙였다.
“MCTC 서울에 새로 부임한 국장입니다.”
“그런 걸 묻는 게 아니라는 거, 잘 알 텐데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지만 눈빛이 차가웠다. 시몬은 담배를 빨아들였다.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남자에게 섣부른 거짓말은 위험했다.
다 알면서도 묻거나, 지금은 몰라도 조만간 알게 될 테니.
“ISLE을 아실 겁니다.”
시몬은 담배 연기를 내쉬고 말했다. 하인리히는 눈썹을 추켜들었다.
“여기서 그 이름을 들을 줄은 몰랐군요.”
시몬은 담배를 한 번 재떨이에 털었다.
“하지만 ISLE이 MCTC 루아스 섹션의 실제 소유주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죠.”
하인리히는 한참 그녀를 쳐다볼 뿐이었다. 시몬도 그를 말없이 마주보았다. 마침내 그는 잔을 옆에 내려놓고 말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 이야기를 하시는군요.”
“MCTC는 NATO 같은 다국적 연합군이죠. 특히 루아스 섹션은 어느 정부 것도 아니에요. 아니, 인류의 것조차 아니죠. 그럴 이유가 있겠어요?”
그녀는 오만하고 완고해 보였다. 마치 인간을 대하는 흡혈귀들의 태도를 상징하듯.
“인류는 ISLE과 계약을 맺을 수 있었던 것뿐이에요. 평화의 조건으로 군사력을 제공받기로.”
어쨌든 뱀파이어 군대라는 건 엄청난 메리트가 있으니까 인류의 입장에서는 방법만 있다면 어떻게든 손에 넣어야했을 것이다. 대여든, 할부든.
“민간에서는 뱀파이어의 식량문제가 해결됐기 때문에 평화가 찾아왔다고, 꽤 낭만적인 이야기를 하죠.”
시몬은 묘하게 웃었다.
“저희 제노아틱스로서는 고마운 이야기지만요.”
시몬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얼굴을 원래대로 하고 계속 말했다.
“하지만 사실은 양측 모두 전쟁을 계속할 여력이 없었다는 쪽이 맞죠. 둘 다 살기 위해서는 공존이 필수적이었고, 위쪽에서는 이미 종전 분위기가 돌고 있었죠.”
시몬은 테이블 위에 놓인 화분 장식에 깔려 있는 유리구슬 하나를 들었다. 그리고 만지작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그때 SIS의 국장이었던 라디프 페인이 무슨 수를 썼는지 ISLE과의 계약서를 들고 왔고, 바로 대테러부대 MCTC가 발족했죠. 흔히 MCTC의 토대라고 불리는 SIS.”
시몬은 유리구슬을 엄지와 검지로 집어 들었다. 조명 빛을 비춘 유리구슬이 서늘하게 빛났다.
“하지만 중요한 퍼즐은 ISLE이죠. 이반 이바노프의.”
유리구슬에 비친 하인리히는 전혀 웃지 않았다.
“ISLE의 최고경영자는 다른 사람인 걸로 아는데요.”
시몬은 짧게 웃었다.
“셀레나 추를 말하는 건가요? 혹시 알렉스 야크트훈트라는 이름은 아시나요?”
하인리히는 말이 없었다. 머릿속에 들어 있는 방대한 인맥 지도를 훑고 있으리라.
“아쉽게도 들어본 적 없군요.”
“MCTC의 중앙근위사단장입니다. 조용한 성격이라 잘 나서지 않기 때문에 들어보시지 못했을 법합니다. 셀레나 추는 알렉스 야크트훈트의 세 번째 클리엔테스죠. 그리고 알렉스 야크트훈트는…….”
시몬은 고개를 들었다.
“더 말하는 건 시간 낭비죠. 아시겠죠? 피라미드 끝에 누가 있는지?”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 관계는 옛날 귀족가문의 족보처럼 어디에 성문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상류 흡혈귀 사회의 기본소양처럼 일정한 서클 안에서 구전으로 전해졌다.
따라서 ‘족보’를 안다는 것은 상당히 고급 교양이었다.
옛날 그녀였다면 알 수도 없었던.
“이반 이바노프는 지금은 ISLE의 운영에 참여하지 않고 주식도 일절 가지고 있지 않죠. 하지만 그들의 유대관계로 봤을 때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는 명확하죠.”
시몬은 이바노프 뒤에 서 있는 이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할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그쪽은 건드리지 않는 일이 현명하니까.’
어차피 그 유대인들이 이번 일에 관여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어쨌든 도움을 받는 건 이바노프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을 테고…….’
그들은 역린을 건들이지만 않는다면 바위에 다름없는 존재니까.
“하지만 이해되지 않는군요.”
하인리히는 말했다.
“그런 연대가 가능했다면 왜 일찍 무언가 하지 않았는지.”
“예컨대?”
시몬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물었다.
“글쎄요. 세계 정복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