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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짐승-31화 (31/104)

31화. 영웅의 조건 (2)

그래서 삼촌이 니콜라를 구했으리라고, 도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삼촌이 니스타르였다는 사실이 뭘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여전히. 어쨌든 그때 전 너무 어렸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죠.”

제로팀 대원들 중에는 그처럼 니스타르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사람들이 많았다. 자식이거나, 친척이거나, 친구 혹은 연인이었거나.

개중에서도 니스타르의 쌍둥이는 많지 않았다. 대개 니스타르와 함께 죽임을 당하기 때문이다.

연하도 그 ‘대개’였을 것이다. 기적적으로 감염을 이기지 못했다면.

“강 상사가 바라는 건 규하 누나가 죽는 날까지 평범하고 안전한 삶을 사는 거죠.”

그건 연하가 가진 유일한 욕망이었다. 죽은 사람으로서 사는 것조차 기꺼이 받아들일 정도로.

“전 강 상사를 돕고 싶습니다. 규하 누나가 니스타르여서가 아니라, 누군가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죠.”

니스타르 본인에게도 니스타르임을 알리지 않는 이유는,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니스타르의 존재도 언제가 뱀파이어처럼 밝혀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니스타르의 존재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이 분분해질 테고, SN만이 아닌 어떤 단체가 테러를 가할지 알 수 없었다.

도영은 국장을 보았다.

하얗게 바란 공기 속에, 그는 비인간적으로 보였다. 원래도 그런 사람이지만, 유난히 옷을 입고 있는 대리석상 같았다.

하얗고, 우아하며 늠름했다.

마치 신이 이런 피조물을 그대로 썩혀 바람에 흩날려 보내기 아까워 영원한 재료로 다시 빚어놓은 것처럼.

“국장님께서 강 상사한테 신경 쓰시는 이유는 뭡니까?”

도영은 안 그래도 물어보고 싶었던 것을 물어보았다.

“개인적으로 페인 총장과 친분이 있었거든. 부탁을 받았다고 해두지.”

‘신경 쓰고 있다는 점은 부정하지 않는군.’

도영은 생각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페인 전 총장을 만나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총장이 마치 인류애가 집약된 것처럼 훌륭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알았다.

처음으로 니스타르에 대한 체계적인 보호 시스템을 도입했고, 그 일에 뱀파이어들을 합류시켰다. 마치 같이 사는 세상을 함께 지키자고 말하듯.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뱀파이어에게 가족을 잃은 그와 뱀파이어인 국장이 같이 서 있는 모습.

도영도 처음에는 가치관에 혼란을 느낄 정도로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평화의 상징으로 꽃을 들고 온 이 뱀파이어들을 누군가는 받아들였고 누군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받아들이기로 한 쪽이었다. 연하를 보고서는 더더욱.

“강 상사에겐 호기심을 느낄 요소가 많죠. 하지만 제 일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 녀석이니까요.”

이 정도면 알아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뭐 한 번 어떻게 해볼 속셈으로 우리 애한테 직접거리면 죽는다.

그때 운전기사가 돌아와 차문을 열어주었다. 국장은 그쪽을 한 번 봤다가 다시 도영을 보았다. 조금 웃는 듯한 얼굴로.

“강 상사는 좋은 친구를 뒀군.”

도영은 가볍게 거수경례했다.

“들어가십시오.”

이반은 차에 올랐다. 그들을 내내 말없이 뒤따라오던 렉스까지 타자, 운전기사는 차문을 닫고 운전석으로 돌아갔다.

차가 출발했다.

* * *

돌아가는 내내 이반은 무언가 생각하는지 바깥을 본 채로 말이 없었다.

밖에서 넘어온 네온 조명의 무지개 빛깔이 반듯한 옆모습을 훑고, 턱을 괸 자세 때문에 드러난 손목시계의 매끄러운 알 위로 색색이 지나갔다.

렉스도 방해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거의 청사 근처에 왔을 때쯤이었다.

이반은 창밖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것처럼 고개를 들었다. 렉스도 시선을 돌렸다.

밖에 연하가 걸어가고 있었다. 후드를 쓰고 있었지만 몸태라든가 걸음걸이를 보고 알 수 있었다.

“잠깐.”

이반은 운전기사에게 손짓했다. 차가 멈추었다. 그리고 문이 열리자 어떤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렉스가 내렸다.

연하는 갑자기 옆에 와 서는 차를 의아하게 봤다가 렉스를 보았다.

“어…….”

막 입을 여는데, 차창이 내려갔다. 연하는 반사적으로 그쪽을 보았다.

“국장님.”

“타. 데려다줄게.”

이반은 말했다. 사실 청사가 머지않았지만, 연하는 사양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연하는 차에 올랐다. 그런데 렉스는 타지 않았는데 문이 닫혔다.

연하는 차창 너머로 멀어지는 그를 의아하게 보았다.

“렉스 씨는…….”

“괜찮아.”

태우고 가지 않아도 괜찮다는 건지, 내버려 둬도 괜찮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물을 틈은 없었다.

“어디 다녀와?”

연하가 다녀올 데라면 뻔했지만, 이반은 물었다. 연하는 후드 모자를 벗으며 대답했다.

“네. 규하한테요.”

“금방 왔네.”

“너무 오래 근처를 맴돌면 안 될 것 같아서요.”

연하는 대답하고 그를 보았다.

“국장님께서는…….”

그녀는 왠지 모르게 후드 모자를 벗느라 헝클어진 제 머리를 슬그머니 매만졌다.

푹신한 가죽좌석에 긴 다리를 꼬고 앉은 남자는 드러난 발목에 양말까지 고급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이반은 왜 그러는지 의아한 눈치였지만 조금 웃고 말했다.

“옆에 열어볼래?”

“옆에요?”

연하는 차문을 보았다. 하지만 뭘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거길 눌러봐.”

연하는 옆을 짚고 눌렀다. 아무 반응이 없어서 몇 번 더 꾹꾹 눌렀다.

“좀 더 옆에……. 아니, 여기.”

그가 안 되겠다 싶었는지 옆으로 옮겨와 팔을 뻗었다. 졸지에 그와 문 사이에 갇히게 된 연하는 모든 움직임을 멈추었다. 아마 숨마저도.

이반이 연하가 누르던 바로 옆을 누르자, 뚜껑이 양 옆으로 밀려나면서 미니 냉장고 같은 공간이 나타났다.

그가 미니 냉장고에서 꺼낸 무언가를 손에 쥐어주었다. 연하는 반사적으로 받아들고 내려다보았다.

“어. 루챠챠.”

이 알록달록한 주스는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건강에 좋지 않으니까 가끔씩만 먹어. 알겠지?”

“네. 감사합니다.”

연하는 바로 기분이 좋아져서 씩씩하게 대답했다.

이반은 챙기면서도 손녀한테 사탕이니 초콜릿이니 하는 걸 쥐어주는 노인이 된 기분이었지만, 좋아하는 얼굴을 보니 그걸로 됐다 싶었다.

그런데 연하가 바로 마시지 않고 허벅지에 내려놓은 두 손으로 잡고 있기에 물었다.

“먹지 않아?”

연하는 루챠챠를 한 번 보고 그를 보고 웃었다.

“아까워서요.”

그렇게 좋을까 싶어 이반은 조금 난감한 웃음을 지었다.

“많이 있어.”

“그래도 국장님께서 저 주시려고 준비해 두신 거잖아요. 그냥 마셔 버리기는 아까워요.”

이반은 연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어쨌든 이 아이는 그의 것이었다.

이런 세상에도 뱀파이어 사회에는 아직 제대로 된 법이 없었다. 그들 측에서 어느 정도 틀을 잡긴 했으나, 여전히 고대로부터 쌓여온 불문율, 관습, 조리가 지배하는 사회였다.

특히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 사이에 관여하는 일은 금기에 가까웠다.

그래서 한때 파트로네스에 의한 클리엔테스 학대 문제가 불거지기도 했지만, 오래 사는 뱀파이어 특성상 파트로네스 층이 쉽게 물갈이되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쉬쉬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니까 이 아이를 그의 것으로 삼아도, 설사 한 번 농락하고 버린다 하더라도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가 그렇게 원하기만 한다면.

“소장이 싸우는 모습이 꽤 인상 깊었던 모양이더구나.”

갑자기 말하자, 연하는 이해되지 않는 얼굴이었다.

“네?”

“나는 쳐다보지도 않던데.”

말하고 보니 그때 기분이 생생해서 심술궂은 말투가 나오고 말았다. 하지만 연하는 예상과 달리 그다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봤어요.”

그날 렉스를 본 건, 서커스를 보고 난 아이 같은 것이었다. 잠깐 시선을 뺏기긴 했을지언정 지속되는 게 아니었다.

어느새 시선은 돌아서서 가는 국장을 쫓고 있었다. 일거수일투족을 눈도 깜빡이지 않고 보았다.

귀, 어깨, 등, 허리, 다리, 그리고 손까지…….

그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도 눈을 돌리지 않았다.

“계속.”

약간 물기 어린 검은 눈동자가 신뢰와 애정, 경외로 젖어 있었다.

이반은 손을 들었다. 볼을 감싸자 연하가 움찔했다. 그는 귀밑으로 연결되는 턱을 엄지손가락으로 훑었다.

“상처가 났네.”

연하는 보이지 않는 제 턱을 눈짓했다.

“아, 어제 유리 파편에 긁혔어요.”

“치료받지 않았어?”

“생채기인데요, 뭐.”

역시 연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반은 잠깐 그녀를 보았다.

“낫게 해줄까?”

연하는 놀라는 눈치였다.

“그런 것도 가능해요?”

“응.”

갑자기 그가 다가왔다. 위험할 정도로 가까이.

순간 차분한 눈이 깊이 들여다보였다. 뜬금없지만 연하는 생각했다.

‘원래 푸른 눈 아니었을까?’

너무 잘 어울리니까.

그런데 푸른 눈 너머에 무언가가 중첩되어 있었다. 컬러렌즈 너머 가까이 들여다보아야만 보이는 본래 눈일 수도 있고, 아니면─

시선을 빼앗겨 쳐다보는 사이, 그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측면으로 고개를 기울이자 숨결이 목에서 느껴졌다.

연하가 정신을 차린 건 그 순간이었다.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몸을 아래쪽으로 쑥 뺐다. 그리고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이반을 보았다.

“국장님 설마 낫게 해준다는 게…….”

“생채기는 침 바르면 낫는 거 아냐?”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전혀 웃지 않았다. 오히려 진지한 얼굴이었다.

“아니, 그게…….”

연하는 당황해 우물거리며 괜히 시선을 돌렸다가 제 몸 옆을 짚고 있는 그의 손을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몸을 아래쪽으로 빼는 바람에 연하는 반쯤 드러누운 자세가 되었는데, 한 팔을 잡고 있는 그가 딸려오면서 그녀 옆에 손을 짚어서 3/1쯤 비스듬해진 자세였다.

그제야 자세가 인식되었다.

맞닿은 허벅지도.

“소홀히 했다고 화나신…… 거예요?”

얼마 전에도 그녀가 몸을 함부로 다루는 것 같자 그가 썩 유쾌해하지 않았던 기억이 났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바로 맞췄다고 알 수 있었다.

“죄송해요.”

그는 손을 떼고 몸을 일으켰다.

“추행으로 신고당해도 할 말은 없겠구나.”

“안 해요.”

연하는 작게 중얼거렸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연하는 바닥 쪽을, 이반은 천장 쪽을 보았다.

차가 멈추었다. 얼마 오지도 않은 것 같은데 어느새 청사 정문이었다. 문이 열려, 연하는 내리기 전에 말했다.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들어가.”

연하는 거수경례하고 차에서 내렸다. 차에서 얼른 내리고 싶기도, 전혀 내리고 싶지 않기도 해서 기분이 이상했다.

이반은 돌아서서 가는 뒷모습을 끝까지 바라보았다.

차는 다시 출발했다. 하지만 관사가 머지않았으므로 얼마 가지 않아 멈추었다. 그리고 차문이 열리자, 렉스가 서 있었다.

이반은 그를 한 번 보았을 뿐 별 말없이 차에서 내렸다.

거리에 늘어선 주황빛 가로등들에 하나둘 불이 들어오고 있었다. 늦은 오후와 저녁 그 경계 어딘가의 시간이었다.

“어째서 저 아이입니까?”

갑자기 렉스가 물었다. 이반은 돌아보았다.

“페인 총장님께서 강 자매를 도와달라고 하셨을 때만 해도 내켜하지 않으시지 않았습니까?”

어째서냐고.

“구해…… 주세요.”

물씬한 피 웅덩이에 누운 아이는 거의 목소리도 내지 못했다.

어리고, 가련했다.

“구해주세요. 규하…….”

아이는 자신을 살려달라고 하지 않았다. 죽음이라는 광폭한 존재 앞에 헐벗겨진 아이가 내뿜는 이타적인 광휘는 과연 눈부셨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오랜 세월 지층이 쌓여 단단해질 대로 단단해진 심장의 껍질은 뚫지 못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죽음을 보았을 것 같은가?

대체로 평범하거나 나쁜 죽음이었지만, 개중에는 니스타르에 못지않은 의롭고 좋은 죽음도 많았다.

이미 자신은 틀렸음을 깨달은 아이가 형제라도 살리려고 하는 마음은 기특하지만 특별히 인상에 남을 만한 것은 아니었다.

거기까지였다면.

이반은 다시 렉스를 보았다. 렉스는 평소 같은 얼굴이었지만 어둑한 빛 아래 좀 더 비장해 보였다.

“영웅의 조건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 있나?”

“영웅의 조건…… 말입니까?”

그가 그런 이야기를 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이반은 어슴푸레한 가로등을 올려다보았다.

“아이는 영문도 모르고 살해당했고, 인간이 아닌 존재로서 되살아났지. 아니, 되살림을 당했다는 쪽이 맞겠지.”

아무도 그녀의 동의 따위 구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아이는 누구도 탓하지 않았다.

바보같이 순진해서, 아무것도 몰라서, 새파랗게 어려서…….

처음에는 그도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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