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 짐승-30화 (30/104)

30화. 영웅의 조건 (1)

“이것과 같이 영상을 보내왔습니다.”

누가?

되묻기 전에, 벽 패널에 영상이 떴다. 연하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려서 보았다.

그 청년이었다, 그들을 공격했던.

그때는 대공이라는 코드네임을 몰랐기 때문에 막연히 보고만 있는데, 영상 속에서 대공은 말했다.

[깨어난 걸 축하해. 정말 감염을 이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정말 이렇게 살고도 세상엔 예측하지 못할 일들이 가득하다니까.]

그렇게 말할 때 그는 정말 꽤 즐거워 보였다. 게다가 평범한 차림을 하고 평범한 사무실용 탁자에 앉아 있어서, 정말 그가 그런 잔인한 일들을 한 사람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쉬고 싶을 테니 본론만 이야기하지. 되살아났다고 신나서 네 쌍둥이를 만나러 가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대공은 빙긋이 웃었다.

[네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순간 네 쌍둥이를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이고 말 거니까.]

연하는 말문이 막혀 그냥 영상을 쳐다보기만 했다.

[왜냐고?]

대공은 영상 속에서 연하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그리고 일견 다정해 보이기까지 하는 미소를 지었다.

[테러리스트한테 뭘 기대해?]

영상이 끝나고, 한참 침묵이 흘렀다. 라디프는 조용히 말했다.

“선택은…… 연하 양의 몫입니다.”

선택이라고? 그녀가 뭘 선택할 수 있단 말인가?

정확한 규모조차 알 수 없는 초인적 테러리스트 네트워크가 규하를 노리도록 내버려 두는 것?

그 어떤 나라의 정규군도 소재지를 파악하지 못한 테러리스트 네트워크의 리더를 잡는 것?

그때는 선택할 수 없는 것을 선택하라고 하는 페인 총장이 미웠다.

하지만 연하는 결국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규하에게 죽은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것을.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곧 괜찮아졌다. 규하가 괜찮았으니까.

한동안은 집밖에도 나가지 못할 정도였지만 살아야 한다고 결심한 것처럼 정부가 지원하는 테러 피해자 상담 모임에 나가고, 서류를 싸안고 지원금도 받으러 다니고, 곧 학교도 다니기 시작했으니까.

그래서 연하도 살았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연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규하가 타고 간 버스는 오래 전부터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괜찮은 거지?’

* * *

니스타르.

유대 신화에 등장하는, 세상의 존립을 정당화하는 의인들.

이들은 전 세계에 흩어져 살며, 한 니스타르가 죽으면 세상 어디선가 바로 다른 니스타르가 태어난다고 전해졌다. 그리고 전설에 의하면, 자신이 니스타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바로 사망하게 된다고 했다.

“자신이 세상을 정당화하는 인물씩이나 된다고 의식하면서 교만의 죄를 짓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이반은 말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죽는 경우는 없다더군요.”

한 걸음 뒤에 걷는 도영이 대답했다.

사실 그건 거의 전설에 불과한 것 같았다.

“특히 요즘 인간들은 비과학적인 건 잘 믿지 않으니까.”

“하지만 과학이 받침 되면 아무리 터무니없어 보이는 소리도 믿죠. 저 밖에 끝도 없는 우주가 있다던가 하는 것처럼.”

그들은 국장이 타고 갈 차로 걸어가고 있었다. 곧바로 가면 금세 닿는 거리지만, 굳이 병원 정원을 둘러서.

아직 쌀쌀한 날씨여서 정원에 나와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도영은 하늘을 보았다.

“사실 제가 가보지 않아서 그런지 우주가 있다는 소리가 가끔 팅커벨보다 허황되게 들리는데 말이죠.”

“의심이 많다는 건 좋은 군인의 자질이 아닌데.”

도영은 어깨를 으쓱였다.

“별로 군인이 되고 싶었던 적은 없습니다.”

국장은 그를 빤히 보았다.

“우리 엘리트 장교가 별로 군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고 하는군.”

도영은 잠깐 말이 없었다. 다음 이야기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 입을 열었다.

“사실 줄리앙 삼촌이 세상을 정당화하는 의인이라고 들었을 때 이해가 되지 않더군요. 저희 삼촌 같은 염세주의와 회의론에 찌든 인간혐오증 환자가 의인이라니.”

솔직히 삼촌을 사랑하는 건 둘째 치고, 줄리앙 삼촌은 인격적으로 문제가 많았다.

학대받으며 자란 고양이보다도 예민하고 날카로운 성격에, 프랑스인 특유의 비꼬는 말투로 무장한 독설 폭격기에, 온갖 포비아와 알러지의 전시장이라 할만 했다.

서양 예술사 교수였던 그가 울려 보낸 학생만 해도 대강당을 채울 것이다.

“삼촌이 얌전해질 때는 오로지 저희 아버지가 곁에 있을 때뿐이었죠.”

도영의 아버지 엘리오는 건강한 정신과 육체를 지닌, 그야말로 눈부신 애국심을 가진 군인이었다. 두 사람이 쌍둥이 형제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차라리 아버지가 니스타르라고 했다면 이해됐을걸요.”

삼촌을 노린 흡혈귀들이 미처 계산하지 못한 것은, 그의 아버지가 GIGN의 베테랑 군인이라는 점이었다.

아니, 알고 있었어도 그래봤자 인간이 뭘 할 수 있겠냐고 생각했겠지만, 아버지는 필사의 항전으로 흡혈귀 두 마리를 집채 통구이로 만들어 버렸다.

하늘 높이 솟구치는 불길은 그들의 보금자리를 맹렬하게 집어삼켰다. 니콜라를 구하려다 죽은 줄리앙 삼촌의 시신과 함께.

도영은 차가운 공기 속에 헐벗은 나무에 의미 없는 시선을 맞추었다.

“이상한 일이죠. 삼촌은 그렇게 니콜라를 싫어했는데.”

애초에 줄리앙 삼촌이 가족이 아닌 누군가에게 ‘친절’이나 ‘배려’ 같은 인간적인 면모를 실수로나마 보여줄 리 만무했다.

게다가 삼촌은 식자로서 상식이 부족한 친구들을 좀 많이 멸시했는데, 하필 그의 절친이 글자라고는 간판의 글씨도 읽기 싫어하는 녀석이었던 것이다.

여담이지만 그런 녀석이 육사를 나와 지금은 정보국에서 일한다니, 정말 인간 승리의 드라마가 따로 없지 않은가?

“의인이란 그런 거지.”

“하지만 삼촌이 니스타르여서 그랬다고 하면, 삼촌의 희생이 도매로 넘어가는 기분이랄까요. 그 성격에 죽기보다 싫은 일을 한 거였을 텐데.”

* * *

그날은 어머니가 일이 늦게 끝나는 날이어서 집에 남자 셋뿐이었다.

삼촌이 그 성격에 여자라고 만날 수 있을 리 없어서, 그는 그 나이에도 그들 가족과 함께 살았다.

도영과 아버지 엘리오는 장을 보러 나갔고, 그사이에 니콜라가 집으로 왔다. 만나기로 해놓고 도영이 약속을 잊어버린 것이다.

큰 문제는 아니었다.

니콜라가 삼촌을 역병보다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벨소리에 문을 연 줄리앙 삼촌은 니콜라를 보았고, 들어오라든가 가란 말도 없이 그냥 들어가 버렸다. 니콜라는 쭈뼛거리며 따라 들어갔다.

줄리앙 삼촌은 부엌 테이블로 돌아갔다. 얼핏 보이는 삼촌의 예리한 옆모습, 노트북, 테이블 위에 어지러운 서류 같은 것들이 기억난다고 말했다, 나중에 니콜라는.

니콜라는 세상 불편하게 거실에 앉아 기다렸다. 그냥 가버릴까 생각했을 때쯤, 문이 열렸다.

“왔…….”

반색하며 돌아봤는데, 들어온 것은 젊은 남자 둘이었다.

어린 니콜라도 본능적으로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건 문의 잠금장치가 소리도 없이 부서져 있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남자들은 아주 아름답고, 차가웠기 때문이다. 비인간적으로 느껴질 만큼.

줄리앙 삼촌도 부엌에서 나왔다. 남자들은 삼촌을 돌아보았다.

“줄리앙 드페흐 씨?”

삼촌은 바로 뒷걸음질 쳐 부엌으로 달아났다.

‘저 개새끼.’

니콜라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남자 하나가 그에게 손을 뻗었다. 니콜라는 그냥 얼어 있었다. 사실 아이큐가 약간 모자란 초등학생이 무얼 할 수 있었겠는가?

그때 부엌문에 줄리앙 삼촌이 나타났다.

사냥용 샷건을 들고.

삼촌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샷건을 쐈다.

정확하게 남자의 어깨를 쏜 사격실력에 놀라기도 전이었다. 입구에 서 있는 두 번째 남자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 * *

현실로 돌아온 도영은 국장을 보았다. 국장은 말없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나중에야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삼촌은 오래 전부터 이상한 예감에 시달려 왔다더군요.”

“묘한 예감?”

국장은 조용히 되물었다.

“자신이 비명횡사할 거라는 직감이요. 그것도 어떤 악의에 희생돼서 말이죠.”

물론 주변인들은 우울증 증상이라며 삼촌에게 심리치료를 받도록 권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전혀 다르게 반응했다.

“그럼 사격 연습을 해보는 건 어때?”

그날 일은 도영도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햇빛 아래서도 지독히 우울한 얼굴을 한 삼촌의 어깨를 주먹으로 툭 치며 말했다.

“쉽게 당하진 않는다는 걸 보여주라고.”

아마 삼촌은 아버지의 그런 면을 사랑했을 것이다.

“정말 가지가지 한다.”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으나, 삼촌이 사격 연습을 하면서부터는 살해당할 것이니 하는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그냥 내버려 두었다고 했다.

참고로 삼촌은 까다롭고 예민했을 뿐 진짜 우울증 환자는 아니었고, 그의 부모님은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우울증 환자에게 무기를 쥐어주는 위험한 행동을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삼촌은 몸을 쓰는 일과는 거리가 있어서 금세 그만둘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몇 달 후에는 실력이 무섭게 좋아져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고, 어머니가 말했다.

“하지만 그래봤자 인간이었으니까요.”

도영은 우울하게 말했다.

* * *

모든 일이 너무 빨리 일어나서 니콜라도 전부 제대로 기억하진 못했다.

다만 두 번째 남자가 사라졌고, 산탄은 문에 가 박혔다. 두 번째 남자는 어느새 삼촌 옆에 나타났다고 했다.

삼촌은 순간적으로 흠칫 총구를 돌려 쏘았다.

타앙.

총성이 울렸다.

니콜라는 자신이 비명을 질렀는지 지르지 않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삼촌은 무너졌다. 두 번째 남자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연기가 올라오는 산탄총을 쥐고 있었다.

카펫에 피가 스멀거렸다. 삼촌은 쓰러진 그대로 드러누워 똑바로 니콜라를 보았다.

“‘꺼져.’였어.”

나중에 니콜라는 울음을 참느라 벌겋게 부어오른 눈으로 말했다.

“삼촌이 나한테 마지막으로 한 말.”

그 시점에 도영과 아버지 엘리오는 집으로 돌아왔다.

집안에서 총성을 들은 아버지는 당장 뛰어 들어가며 그에게 신신당부했다.

“여기 있어!”

도영은 불안해하며 기다렸다. 그런데 갑자기 뒷문으로 니콜라가 뛰쳐나왔고, 엉엉 울면서 알아듣지 못할 말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 이상한 사람들……. 삼촌이…… 초, 총……. 꺼지라고…….”

그때 신고를 받았는지 국가 헌병대#가 현장에 도착했다.

남색 유니폼을 입은 헌병들 몇이 그들을 좀 떨어진 곳으로 대피시키고, 나머지 헌병들이 총을 꺼내들며 문으로 다가갔다.

그 순간이었다.

집에서 폭발이 일었다. 가스가 터진 것처럼.

도영은 타오르는 집을 보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와 삼촌을 부르짖으며 얼마나 울었는지, 헌병들이 갑자기 소리치며 집 뒤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생존자가 있다!”

도영도 달려갔다.

아버지는 아직 살아 있다고 믿기 힘든 모습으로 정원에 쓰러져 있었다. 폭발 직전에 몸을 날려 탈출한 것 같았다.

그날 이후 아버지가 두 다리로 서는 일은 없었고,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던 GIGN에서도 의병제대해야 했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울고 있었다.

아버지는 낮이었고, 삼촌은 밤이었다.

아버지가 제우스라면 삼촌은 하데스였다.

둘은 극명한 대척점에 서 있었지만, 둘이서 하나였다. 도대체 둘이 어떻게 쌍둥이냐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그 사실을 의심하진 않았다.

아버지는 삼촌의 모든 것을 이해했다.

“줄리앙에겐 주변의 모든 것들이 너무 예민하게 와닿는 거야. 사람들이 싸우는 소리, 노숙자들이 기침하는 소리……. 주인이 걷어찬 옆집 강아지가 낑낑거리는 소리마저도. 심지어 짓밟히는 풀에조차 줄리앙은 고통스러워해. 그런 게 예술적인 기질이라는 거겠지.”

그건 단순한 예술적 기질이었을까, 아니면 의인의 자질이었을까.

지금 와서 알 수 없는 문제지만, 어쨌거나 아버지는 삼촌을 있는 그대로 사랑했다.

반면 삼촌은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일면식도 없는 타인을 지키기 위해 자진해서 위험에 뛰어드는 군인 따위를 하다니, 네 아버지는 정말 제정신이 아니야.”

한 번 삼촌이 그렇게 투덜거리던 모습을 기억했다.

하지만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여 주는 사람을 삼촌도 같은 방식으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지키려 하는 것을, 지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 프랑스 일부 지역에서는 국가 헌병대가 경찰 역할을 대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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