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 짐승-29화 (29/104)

29화. 숨은 자 (2)

“쳐요. 저번에는 가연이가 하도 부탁해서 합의해 줬는데, 이번에야말로 당신 큰집 보내고 가연이 새 인생 살게 할 테니까. 요즘 아동복지센터 잘 돼있어요. 좋은 집에다가 입양까지 일사천리로 보내줄 걸요.”

가연이 살며시 규하의 소매 끝을 잡았다.

“선생님…….”

규하는 찡그린 웃음을 짓고 말았다.

“알았다, 계집애야. 하여간 자기 아빠라고 끔찍하게 생각한다니까. 내가 네 아빠 한 대 치면 꺼지라고 말할 기세다?”

“에이, 그건 아니에요. 저도 사람인데, 선생님이 더 좋죠.”

남자가 발끈했다.

“뭐, 이……!”

규하는 상대하기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젓고 부엌으로 갔다.

밖에서 우당탕탕 깨지는 소리가 났지만 따라오지는 않았다. 경험을 통해 규하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밥은 먹었어?”

규하는 따라 들어온 가연에게 물었다.

“네. 라면하고 밥 남은 거 하고…….”

“네 아버지는 김치찌개 끓여다 바치고?”

싱크대에 남은 설거지거리를 보고 말하자, 가연은 입을 다물었다. 규하는 고개를 내저었다.

“어떤 의미로 대단하다. 요즘 같은 시대에도 이런 집이 있다니. 인간은 참 쉽게 변하지 않아.”

규하는 겉옷을 벗어 방 안에 던지고 부엌부터 청소하기 시작했다.

“선생님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이 꼬락서니를 해놓고 참으로 그러지 않으셔도 되겠다.”

가연도 만류해 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는 터, 바로 그녀를 돕기 시작했다.

설거지를 끝내고 한참 바닥을 쓸고 있는데, 옆에서 쓰레받기를 들고 있는 가연이 슬그머니 물었다.

“선생님은 어떻게 저희 아버지가 무섭지 않아요?”

“저게 무섭냐? 소리만 시끄럽지. 안 그래도 고막 터지겠다.”

가연은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다.

“저번에 아버지가 정말 선생님 죽이는 줄 알았단 말이에요…….”

볼 한 대 맞고 멱살이 잡혀 탈탈 털린 것뿐인데 어린 눈에는 심각하게 비쳤나 보다. 하긴, 긴 머리카락이 막 휘날리는 게 극적인 효과를 줬을 법도 했다.

“진짜 무서운 건 저런 게 아니거든.”

“그럼 뭐가 진짜 무서운 건데요?”

소중한 사람이 눈앞에서 죽어가는 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

하지만 애한테 그 정도 말은 가릴 줄 알았다.

규하는 가연의 이마를 툭 치고 말했다.

“나다, 인마. 들어는 봤냐? 인천의 피바다 강규하라고.”

* * *

“아, 미친. 관절이 파괴되어 버린 것 같아.”

규하는 걸레를 집어던지고 마루에 주저앉았다. 같이 걸레질을 하던 가연이 키득거렸다.

“선생님, 또 오버하신다.”

“너도 내 나이 돼봐라, 이게 오버 같은지.”

“선생님이 얼마나 젊고 예쁘신데요.”

규하는 옆에 있는 유리에 자신을 비춰보았다.

“하긴, 내가 아직 좀 쓸 만해. 그치?”

“저도 선생님 같은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아서라. 나 같은 선생은 본받을 게 못 돼. 너희들 말대로 주정뱅이, 마귀할멈, 욕쟁이, 임용고시에 인성검사가 있었으면 절대 교사 따위 되지 못했을 성격파탄자 아니냐?”

가연은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고개를 움츠렸다.

“그걸 어떻게 아시는…….”

마루 끝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가연의 아버지가 코웃음 쳤다.

“알긴 아네.”

그 말은 깨끗하게 무시하고 규하는 가연에게 말했다.

“내 귀는 장식이겠냐. 다 들린다, 이놈들아. 정말 교사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세상이라니까.”

“네년이 그 따위로 행동하는데 참도 존경받겠다, 쌍것.”

가연의 아버지가 또 말했지만, 규하는 신경 쓰지 않았다.

“네 아버지는 자꾸 뭐라고 웅얼대시냐? 사실 난 선생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았어. 선생은 내 쌍둥이가 하고 싶어 했지.”

굽힌 무릎에 기댄 팔로 턱을 괸 규하는 마당 쪽을 보았다.

“너희들 뒤치다꺼리 하니라 데이트도 제대로 못하는 이런 팍팍한 삶이 뭐가 좋다고 그렇게 노래를 불렀는지 모르겠다. 뭐, 잘하기야 했겠지만. 너희들하고 정신연령이 비슷했을 테니까.”

가연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말은 평소처럼 거칠게 하지만, 규하는 오히려 즐겁고 편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요? 선생님 쌍둥이는 지금 뭐 하시는 데요?”

“뭐 하긴, 죽었겠지.”

두 사람은 멈칫하고, 등 돌리고 앉은 남자를 보았다.

습─ 담배를 빨아들인 그는 시선을 느끼고 같잖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하는 꼴이 딱 죽은 년 대하는 말투구만.”

“오, 아버지 예리할 때가 다 있네?”

규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는 바로 ‘미친…….’ 하고 말하는 입 모양이었다. 가연은 어색하게 웃고 변명처럼 말했다.

“저희 아버지 경찰이었잖아요.”

“그러게 썩어도 준치라더니.”

가연의 아버지는 담배를 한 번 더 빨아들이고 물었다.

“어쩌다 죽었어?”

“흡혈귀한테요.”

다시 담배를 입가로 가져가던 손이 멈칫했다. 규하는 피식 웃었다.

“흡혈귀한테 가족을 잃은 건 자기만인 줄 알고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처럼 굴다가 나도 그렇다니까 여태까지 했던 행동들에 대한 후회의 쓰나미가 밀려오고 스스로가 병신 같고 그렇죠? 그래 보이는 표정인데.”

“뭐, 이……! 쌍년이! 당장 꺼져!”

가연의 아버지는 당장 목청을 높였다. 규하는 무릎을 짚고 일어났다.

“안 그래도 가렵니다. 나도 퇴근 좀 합시다. 이렇게 개인의 삶이 없어서야, 원.”

“누가 너더러 오래! 미친년!”

“내 얼굴 보기 싫으면 가연이를 학교에 보내요. 아니면…….”

구두를 신고 내려온 규하는 척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I’ll be back. 이거 알라나? 고전 영화인데.”

온갖 욕설을 내뱉는 아버지를 슬그머니 피해 내려온 가연이 규하를 밖까지 배웅했다.

“그럼 선생님 간다.”

가연은 우물쭈물하더니 물었다.

“자매 분 이야기 사실이에요?”

“왜? 내가 너희 아버지 개과천선 시키려고 지어낸 이야기 같아서?”

가연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규하는 제 턱을 짚고 고개를 갸웃했다.

“참 희한하단 말이야. 다들 왜 이렇게 날 인간쓰레기로 알지? 멀쩡히 살아 있는 가족을 팔아먹을 정도는 아닌데.”

“너무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니까…….”

규하는 피식 웃었다.

“일부러 계속 이야기하는 거야. 가뜩이나 어릴 때 죽어서 점점 시간 내서 기억해 주는 사람도 없을 텐데, 내가 이야기하지 않으면 정말 죽은 존재가 돼버릴 것 같아서.”

신이 있다면 절대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녀석인데.

규하는 숙연해진 가연을 보고 웃었다.

“그럼 간다. 내일 보자.”

“안녕히 가세요.”

가연은 규하가 내려가는 모습을 배웅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직 담배를 피우는 아버지 옆에 앉았다.

오랫동안 제 발끝만 보고 있는데, 갑자기 그가 쯧 혀를 내차고 말했다.

“학교 가라. 저 망할 년 꼴 보기 싫으니까.”

* * *

규하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무의식중에 손에 잡힌 것을 꺼냈다. 그리고 끊어진 실 팔찌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이걸 어떻게 고치나…….’

하여간 술이 원수였다.

“과학은 신의 계시다!”

갑자기 어떤 남자가 벌컥 외쳤다. 규하는 없는 애도 떨어질 만큼 놀랐다.

“아, 씨발 깜짝이야.”

길 한편에 서 있는 남자는 옛날 명동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오히려 무당을 연상케 하는 시뻘건 ‘예수 천국 불신 지옥’ 팻말을 건 모습이었다.

머리에는 시선을 받지 못하면 죽어버릴 것 같은 비장미까지 느껴지는 화려한 깃털과 반짝이가 달린 헬멧을 쓰고 있었다.

“인류는 과학의 발전으로 무지와 오류에서 벗어났다고 자신만만하지만, 옛날에는 빈번했던 기적과 성령의 재림이 사라져 버린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남자는 거의 신들린 듯이 소리를 질러댔다.

“신께서는 과학이라는 새로운 기적 뒤에 모습을 숨기고 계실 뿐이다! 철 덩어리를 타고 우주로 날아가고, 인간 몸의 최소분자까지도 들여다볼 수 있는 이 모든 일들이 소경이 눈을 뜨고 나사로가 되살아나는 기적과 무엇이 다른가?”

규하는 슬금슬금 걸음을 옮겨 남자를 빙 돌아 길을 걸어갔다.

“신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시는 자이다. 숨어서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돕는 무한한 사랑이시다!”

사랑이시다!

반쯤은 연설 같고 반쯤은 찬송가를 부르는 듯한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꽤 긴 거리를 따라왔다.

‘또라이들은 왜 멸종하는 법이 없나 몰라.’

규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뭔가 발견한 듯 몸을 숙였다.

“오, 럭키.”

과연 장엄한 사랑이어라.

그녀가 집어든 것은 만 원짜리 지폐였다.

신나하며 주머니에 넣으려는데, 버스 역 부스 뒤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난민이 눈에 띄었다.

규하는 멈칫했다.

두꺼운 모직 담요를 두른 그가 무기력하게 안고 있는 캔에는 종이가 꽂혀 있었다.

<배가 고픕니다. 도와주세요.>

그때 누군가가 옆을 지나갔다. 치맛자락을 팔랑이며 가뿐히…….

단정한 교복을 입은 소녀는 난민을 보더니 가방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돈을 바구니에 넣었다. 하지만 인사하는 난민을 보고 고민하더니, 지갑에 들어 있는 돈을 모두 꺼내 건넸다.

갑자기 반대편에서 달려온, 같은 교복을 입은 소녀가 무어라 소리치며 다시 돈을 집어넣으려 했다. 그러자 원래 소녀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뒤에 온 소녀는 잔뜩 인상을 썼지만, 결국 멋대로 하라는 듯 손을 놓았다.

두 소녀의 환영이 사라진 자리, 난민은 여전히 빈 캔을 안고 있었다. 규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꼭 이렇지. 애초에 줍게 하질 말던가.”

규하는 캔에 돈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인사하는 난민을 지나 막 도착한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가 사라지고, 난민은 몸을 들었다.

한번은 퇴근길의 직장인이었고, 한번은 학교 인근 공사장 인부였지만 지금 남자는 인종마저 달라 보였다.

남자는 물건을 정리해 일어나 건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남자는 택배 기사 차림으로 박스를 들고 건물을 나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길가에 서 있는 택배 차량에 올라탔다.

차는 바로 출발했다.

조수석에 앉은 남자는 귀 뒤쪽을 누르고 말했다.

“포인트 알파, 별자리로 돌아간다.”

그리고 손을 내리는데, 맞은편 길에 캡 모자에 후드를 눌러쓴 연하가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연하는 인사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차창 너머로 그녀의 모습이 멀어졌다.

같은 제로 14팀이라고 해도 서울 지부 ERU 3팀으로 위장한 1조는 경호 임무를 맡지 않았다.

수색이나 니스타르에 대한 긴급 구출, 그리고 평범한 대테러부대 팀처럼 테러리스트에 대한 타격 임무, 요인 경호 등을 수행했다.

그래서 나머지 조가 교대로 경호 임무를 맡았다. 따라서 1조에 속한 연하와 그들은 거의 같이 일하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연하가 워낙 자주 주변을 맴돌아서, 때로는 같이 일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안타깝네요.”

갑자기 운전기사가 말했다. 조수석에 남자는 돌아보았다.

“뭐가?

“강 상사님이요. 유일하게 남은 가족인데, 저희 보호대상자를 만날 수 없는 이유가 대공 때문이었죠?”

* * *

연하는 택배 차량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몸을 돌렸다.

규하는 오늘도 안녕해 보였다. 여전히 힘이 넘쳤고, 입은 거칠었다. 참 사람이 저렇게 한결같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연하는 피식 웃었다.

‘그래서 다행이지만.’

그런데 갑자기 그녀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어떤 기억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리고 이것…….”

그날 이야기를 끝낸 라디프는 갑자기 침대 아래서 무언가를 들어올렸다.

“보여드릴까 고민했습니다만, 감춰서 될 일은 아닌 것 같아서.”

그가 들어 올린 것은 새빨간 장미가 가득한 꽃바구니였다.

연하는 붉은 장미 다발을 보는 순간 가슴이 섬뜩해졌다. 낭자하던 핏물이 떠올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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