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숨은 자 (1)
“규하가요?”
연하는 어리둥절했다.
“물론 당신도 그렇습니다만, 쌍둥이 분은 좀 더 특수한 임무를 띠고 이 세상에 왔습니다.”
“왔다고요? 어디서요?”
일단 장소부터가 현실감이 없어서 생각나는 대로 물었다. 엄마 아빠는 어디서 돈이 나서 이렇게 크고 비싸 보이는 병실을─
라디프는 눈꼬리에 주름을 잡으며 웃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면서도 선한 인상이 더 부드럽게 변했다.
하지만 왠지 슬퍼 보이는 미소였다. 곤란하게 만들 생각은 아니었으므로 연하는 미안해졌다.
“그건 저로서도 정말 알 수 없군요. 백방으로 알아봤지만, 규하 양 같은 분들이 어디서 오는지는 오리무중이네요.”
“어…….”
연하는 소리를 냈다.
“규하는 저랑 같이 우리 엄마 뱃속에서 왔는데요. 진짜예요. 저희 태어날 때 동영상 찍은 것도 있는데…….”
“압니다. 봤으니까요.”
‘봤다고?’
어떻게?
마음속 질문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라디프는 웃었다.
“제가 본 건 아니니 걱정 마십시오. 어쨌든 조금 더 비유적인 말이었지만……. 아직 혼란스러운 상태라는 걸 잊었군요.”
그러더니 라디프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무언가 긴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것처럼.
“쉽게 말씀드리자면, 세상에는 규하 양 같은 분들이 있고, 우리는 그분들을 ‘니스타르’라고 부릅니다. ‘숨은 자’라는 뜻이죠. 혹시 기독교인가요?”
연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를 모르시겠군요.”
“들어보긴 한 것 같은데…….”
‘타락해서 불탔다는 도시였나.’
생각하고 있는데, 라디프가 말했다.
“성경의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주 타락해서 신께서 기어코 멸망시키기로 결심한 두 도시입니다.”
‘아, 맞구나.’
연하는 맞혔다는 데 기뻤다. 하지만 그런 티를 낼 수 없었던 이유는, 그가 매우 진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그 도시에 정의로운 자가 오십 명 있는데도 멸망시키겠냐고 물었고, 신께서는 만약 정의로운 자를 오십 명 찾을 수 있다면 도시 전체를 용서한다하셨습니다. 설사 오십 명이 아닌 마흔다섯 명만 찾아도, 혹은 마흔 명, 서른 명, 스무 명, 열 명만 찾아도 말이죠.”
연하는 자신이 이야기를 제대로 따로 가고 있는지 헷갈렸다. 그런 표정을 읽었을 테지만, 라디프는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우리의 소돔과 고모라에도 이 정의로운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있는 한 세상은 멸망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신의 손으로는 말이죠.”
라디프는 덧붙였다.
“전설에는 서른여섯 명이 있다고 하지만, 다행히 실제로는 좀 더 많습니다. 만 팔천여명 정도라고 하죠. 규하 양은 그들 중 한 사람입니다.”
연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진심으로 하는 말씀이세요……?”
“제 말이 사이비종교처럼 들릴 거라는 거 압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뱀파이어들은 상상 속의 존재였죠.”
연하는 주저하다 말했다.
“아니…… 규하 같은 욕쟁이가요?”
생각지 못한 말이었는지, 라디프는 조금 놀란 것 같다가 얼핏 웃었다.
“저희는 니스타르라는 존재에 대한 단서가 포착됐을 때부터 추정 인물들을 추적해 왔습니다. 그리고 니스타르는 많은 숫자가 쌍둥이 중 하나로 태어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죠.”
라디프는 창밖을 보았다. 연하는 나중에야 우거진 정원의 풍경이 창 패널에 띄운 영상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사막 한가운데 지은 연구소 지하에 있는 중이었으니까.
“쌍둥이란 참 묘한 존재입니다. 어떤 문화권에서 그들은 악마로 박해받았고, 다른 곳에서는 신의 사도로 추앙받았죠.”
라디프는 다시 연하를 돌아보았다.
“니스타르가 자연사가 아닌 죽음을 맞으면 재앙이 내립니다.”
“재앙……이요?”
“네. 어떤 종류로든 많은 사상자를 내는 재앙이 내립니다. 증거는…….”
연하는 라디프가 증거를 보여주길 기다렸다. 그가 하는 모든 말을 믿어서라기보다, 그냥 소설을 읽는 것처럼 뒷내용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지금 상황조차 꿈인지 생시인지 잘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이미 보셨을 겁니다.”
연하는 의아했다.
“봤다고요?”
라디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연하는 천천히 무언가 깨닫고 싶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설마요. 요즘 일어난 재앙들이 그거 때문이라고요?”
“최근 일어난 재앙들은 대부분 직전에 저희가 니스타르로 의심해 온 인물들이 사망하고 일어났습니다. 한 번이나 두 번, 아마 몇 번까지는 우연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수백 번에 이르는 우연이라는 게 있을까요?”
“하지만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연하 양.”
라디프는 낮고 침착한 목소리로 불렀다.
“전 이성적인 사람입니다.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믿고 싶은 것을 믿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속성을 깨고 나오려고 부단히 노력했죠.”
똑바로 그녀를 보는 눈은 도저히 미친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오히려 너무도 명료해서 사람을 압도시켰다.
“저는 신이 타락한 우리를 버릴 것이다, 이런 모호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한 단계씩 발효되는 멸망의 프로젝트가 세워져 있다는 근거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만팔천 번의 재앙……. 과연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요?”
연하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라디프는 파일을 연하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래서 저희는 그분들을 지키기 위해 존재합니다.”
연하는 파일을 내려다보았다.
검은 파일 가운데는 은박으로 원형 문장이 찍혀 있고 그 안에 굵직하게 MCTC, 원을 따라 작은 글씨로 쓰여 있었다.
“변변찮지만 다국 대테러부대 연합, 줄여서 MCTC라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기사단이라는 별칭을 선호합니다만……. 대테러부대의 외형을 지키고 있으니 누가 알아서 붙인 별명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본래는 니스타르를 지키기 위한 비밀결사 같은 느낌이니까요.”
“비밀결사라면 프리메이슨 같은…… 그런 건가요?”
모든 일에 현실감을 느끼지 못해 그냥 생각나는 대로 물었다.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라디프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어쨌든 신설이라 그들 같은 전통과 역사는 없지만요. 하지만 절박함에서는 저희를 따를 수 없을 겁니다. 이번 사태에서 밝혀졌듯이 저희가 제대로 하지 않으면, 정말로 끝이니까요.”
라디프는 갑자기 연하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규하 양을 지켜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누군가에게 감사받아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하지만 니타르? 니르타스? 뭐라고 하셨죠? 그런 존재가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아요? 애초에 누가…….”
라디프는 손을 들었다. 말을 막듯이.
그는 묘한 카리스마를 가진 사람이었으므로, 연하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이 만팔천여 명의 니스타르들은 유전자 구조가 미묘하게 다릅니다. 거의 인류와 유사하기 때문에 정밀하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지만 말이죠.”
라디프는 조금 웃었다.
“신의 사도를 구별하는 방법이 인간의 기술이라는 점이 아이러니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연하는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인류는 유사 이래 처음으로 지구상에 있는 거의 모든 개인의 의료정보를 가진 시대를 맞이했죠. 즉, 드디어 ‘숨은 것’을 구별해 낼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뭔가 다른 것이 있다는 건 꽤 오래 전에 밝혀졌습니다만, 그게 무엇인지 알게 되는 데는 시간이 좀 더 필요했죠.”
이건 또 무슨…….
“그럼 규하가 인간이 아니라는 말씀이세요?”
라디프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현생인류 중에도 오래 전에 멸종한 네안데르탈인의 DNA를 가진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을 인간이 아니라고 하진 않죠.”
라디프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런 건 모두 이론적인 이야기일 뿐입니다. 전 오히려 당신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요?”
“그렇잖아도 오랫동안 왜 하필 쌍둥이인가 궁금했습니다. 신은 의지를 분명히 드러내는 분이 아니니까 지금도 추측할 뿐이지만, 아마…….”
라디프는 다른 쪽을 보고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니스타르의 분신, 원래 니스타르와 한 몸이었고, 니스타르를 지키기 위해 같이 이 세상에 오는 자, 그것이 나머지 쌍둥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라디프는 연하를 돌아보고 웃었다.
“당신은 알고 계셨을 겁니다. 당신의 쌍둥이가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검은 눈이 유연하게 깊어졌다.
“느끼지 않으셨습니까? 문득문득 찾아오는 예감 같은 것이지만, 때로는 빛나는 것 같고, 때로는 시간이 멈추는 것 같기도 한…… 세상에서 당신의 형제만이 색을 가졌다고 느껴지는 순간의 섬광, 혹은 느낌, 예감, 직감, 그 어떤 것이라도 당신의 형제가 선택받았다는 확신 말입니다.”
연하는 규하를 좋아했다. 너무나, 좋아했다.
그들이 한날한시에 태어난 쌍둥이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종종 규하만 있으면 세상 무엇도 필요하지 않은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고는 했다.
때로는 그 기분이 너무 압도적이어서, 계시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규하…….”
연하는 갑자기 말했다.
“규하는 어디 있어요?”
많이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왜 일어나자마자 그 생각부터 하지 못했는지…….
일어나려 하는데 덜컹, 소리가 나며 두 팔이 당겨졌다. 팔목에 엄청나게 두꺼운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연하는 깜짝 놀랐다.
‘왜 이런 게…….’
이런 걸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도 이상했다.
라디프는 당황해하는 그녀를 진정시키듯 팔을 가볍게 짚었다.
“걱정 마십시오. 풀어드리겠습니다. 의료진의 안전 때문에 취한 조처였을 뿐이니까요.”
“네?”
연하는 더 놀랐다. 그럼 그녀가 의료진을 해치기라도 한단 말인가.
“어쨌든 익숙해지실 때까지는…….”
“뭐에요?”
“새로운 당신에요.”
연하는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환자복을 입고 있다는 것 외에 달라진 건 없었다.
“저는…… 전데요.”
라디프는 웃었다. 또 그 슬픈 미소였다. 하지만 이번 미소가 묘한 점은, 안도감이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꼭 장인이 평생 쌓아온 기술을 전수할 후계자를 만난 것처럼.
“영원히 그러실 겁니다.”
* * *
규하는 참다못한 욕지거리를 토해냈다.
“아, 이런 간나 새끼.”
이마에 송골송골한 땀을 닦으며 허리를 펴자, 까마득히 높은 달동네의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욕을 안 하려고 해도 안 할 수가 없잖아. 높이 살긴 왜 이렇게 높이 살아? 고소공포증 돋으려고 하네.”
규하는 욕쟁이 할머니처럼 끊임없이 투덜거리며 언덕을 올랐다. 그리고 계단 끝까지 올라가 철문을 두드렸다.
대답이 없었다. 몇 번 더 두드리자 남자의 시끄러운 고함이 들렸다. 잠시 후에 한 소녀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나왔다.
“누구…….”
소녀는 벽을 짚고 숨을 고르는 규하를 보자마자 얼굴이 밝아졌다.
“선생님!”
“야, 이 계집애야. 왜 또 학교는 안 왔어? 꼭 날 이 미친 듯이 높은 데까지 오게 해야겠어?”
소녀는 속사포 같은 질타에 슬그머니 기가 죽었다.
“아버지가 가지 말라고…….”
“이런 미친년이 또 왔어! 당장 안 꺼져!”
한 남자가 마당으로 뛰어 내려왔다. 맨발에 며칠은 갈아입지 않은 것 같은 티셔츠, 추리닝바지 차림이었다.
제법 몸집이 있어서 위압적임에도 불구하고 규하는 태연히 안으로 들어갔다.
“애 학교는 왜 안 보내요?”
“내 딸년인데 내 마음이지! 꺼지라니까!”
남자는 청각에 문제라도 있는 사람처럼 목청껏 고함을 질러댔다. 규하는 주춤 고개를 물렸다.
“어후, 냄새. 또 술을 얼마나 퍼마신 거예요? 같은 주당으로서 저희 매너 좀 지켜요. 마셔도 깔끔하고 담백하게.”
“우라질 년이 육갑을 하네!”
규하는 집을 훑어보았다.
역시 엉망이었다. 여기저기 치워보려는 노력의 흔적은 보이지만 고사리 손으로 치워봤자 얼마나 깨끗하겠는가.
규하는 남자를 지나 집 쪽으로 갔다.
“어딜 들어가!”
남자가 그녀를 붙잡으려는 순간, 규하는 빠르게 몸을 뺐다. 그러자 이미 술이 얼큰한 남자는 자기 혼자 넘어졌다.
“사람 치네!”
“내가 언제요?”
남자는 벌떡 일어나 때릴 듯이 위협했다. 하지만 규하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오히려 똑바로 쳐다봐서, 묘한 기백에 눌린 남자가 움찔하며 멈추었다.
“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