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아일 (2)
“다만 문제는…….”
그건 연하도 알 것 같았다. 아무래도─
“우리 MCTC가 제노아틱스와 재계약하지 않고 가네샤와 새로 계약한 거겠죠.”
자신이 소속된 MCTC와 관련된 이야기니까.
대답은 도영이 했다.
“맞아요. 후발주자가 더 안정적이라는 이유로.”
리웨이가 패드 밖으로 쓸어 올리자, 패드에서 이미지가 실체화되는 것처럼 허공에 글자가 떴다.
“더 문제는, 가네샤가 속해 있는 이 ‘ISLE’ 그룹이었죠.”
허공에 뜬 건 연하도 익히 알고 있는 ISLE 그룹의 로고였다.
로고는 항공기 모양으로 바뀌었다.
“ISLE은 항공기에 들어가는 전자제품이나 레이더를 만드는 회사라서 록펠러나 보잉만큼 민간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죠.”
정식 이름은 International Sky League Enterprise, 약자로 ISLE이어서 ‘아일’이라고 발음했다.
‘그런데 섬(Isle)이라니, 꽤 시적인 이름이란 말이야.’
연하는 자주 생각했다.
“웃기지 않아요? 항공 쪽 회사가 갑자기 제약회사를 인수하다니.”
리웨이는 정말 코웃음을 쳤다.
“그런데 평범한 항공 부품 회사라고 알고 있었던 이 ISLE이 뱀파이어가 공론화되자마자 발 빠르게 관련 사업들을 전방위적으로 시작했던 거였죠. 마치 이런 날을 준비라도 해왔던 것처럼.”
리웨이는 패드를 보며 중얼거렸다.
“ISLE이 준비해왔던 거에 비하면 제노아틱스가 하이마를 개발한 건 어린애 장난처럼 보일 정도랄까…….”
리웨이는 어깨를 으쓱이고 덧붙였다.
“인간이었다면 몇 대는 내려왔을 기간 동안 회사를 운영해 온 CEO가 뱀파이어였으니까 가능한 이야기였겠죠.”
“그런데 이 ISLE과 우리 MCTC의 유착관계에 대한 스캔들이 터졌었죠?”
도영이 알 만하다는 듯이 말했다. 연하도 한참 떠들썩했던 걸 기억했다.
리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네샤가 공익을 위해 거의 무료에 가까운 헐값으로 플로스를 공급하기로 했다고 밝혀지면서 일단락되긴 했지만…….”
“그런데 지금 ISLE 이야기가 왜 나왔어?”
연하는 물었다.
“애초에 유착관계에 대한 스캔들이 왜 터졌는지 알아?”
연하는 고개를 저었다.
“너도 알다시피 ISLE의 CEO가 엄청 파워풀한 미인인데, 셀레나 추라고, 목격됐거든. 소장이랑 둘이 있는 모습이.”
“둘이?”
“단둘이. 호텔에서.”
리웨이가 다시 패드 밖으로 쓸어 올리자, 허공에 기사가 떴다.
기사에는 아주 멀리서 줌을 당겨서 찍은 흐릿한 사진이 붙어 있었다.
호텔 복도에 두 사람이 서 있었는데, 금발을 한 남자는 뒤돌아 서 있어서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몸의 실루엣도 그렇고 정황상 렉스가 확실한 듯하지만.
옆에 서 있는 여자는 검은 원피스에 하이힐을 신었고, 검고 긴 머리에 웨이브를 넣은 헤어스타일이었다. 옆모습만 봐도 상당한 미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동양인, 성으로 보아 중국계인 것 같았다.
“소장에 대한 소문은 잘 알고 있었지만 설마 야크트훈트 소장이 그 남자일 줄은 몰랐지.”
리웨이는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아무튼 보통 이 셀레나 추가 ISLE을 설립했다고 생각하지만, 설립자는 따로 있어. ‘요하네스 아달스테인손’이라는 사람이지.”
요하네스 아달…… 뭐?
‘꽤나 혀가 뻑적지근해지는 이름이네.’
연하는 생각했다.
“막 사업이 본궤도로 들어서던 시기에 경영권을 승계하고 물러나서 이름 외에는 거의 정보가 없지만…….”
삐빅. 삐빅.
리웨이가 한참 이야기하고 있는데, 연하의 손목 밴드에서 소리가 났다.
“대기 해제다. 가볼게.”
연하는 밴드를 내려다보고 일어났다.
도영도 소파 팔걸이에 걸친 발을 내리고 일어났다. 그 모습을 보고 리웨이는 찡그리고 웃었다.
“소령님은 뭐 강연하 껌딱지에요? 소령님은 대기 해제도 아닐 텐데.”
도영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이었다.
“일 있어서 가는 거거든요. 만년 대기조인 얘가 바쁘겠습니까, 지휘관인 제가 바쁘겠습니까?”
“어련하시겠어.”
도영은 눈알을 굴리고 연하를 따라 의무대를 나섰다.
둘이 나가자, 리웨이는 패드로 시선을 돌렸다.
“요하네스라…….”
영어로 하면 존.
“러시아어로는 이반이지.”
리웨이는 중얼거렸다.
* * *
도영은 복도를 걸어가며 툴툴거렸다.
“네 꽁무니나 쫓아다닌다는 오해라니. 대체 내 억울함은 어디다 토로해야 하냐?”
“어쩔 수 없잖아.”
연하는 시선으로 복도 끝에서 반대 끝으로 훑고 다시 도영을 보았다.
“기밀이니까.”
사실 밴드에 떠있는 코드는 대기 해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제로팀 호출을 의미했다.
그때 복도를 돌아오는 익숙한 인영이 눈에 띄었다.
“어, 렉스 씨.”
렉스가 보자, 연하는 뒤늦게 깨닫고 말을 고쳤다.
“아니, 소장님.”
“본래대로 부르셔도 됩니다. 어쨌든 지금은.”
도영이 보기에 그는 오늘도 도무지 ‘알렉스 야크트훈트’ 같아 보이지 않는 차림이었다.
그러고 보면 첫날 제복을 입은 모습은 그럴 듯했는데, 차라리 제복을 입어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도영은 기사에서 본 셀레나 추를 떠올렸다.
아름다운 만큼 위협적인 맹수과의 미인과 소장은 그다지 매치가 되지 않았지만, 의외로 그런 쪽 취향인 모양이었다.
있잖은가, 무서운 누나들.
“안녕하세요.”
연하는 거수경례 대신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네. 안녕하세요.”
렉스도 목례로 대답했다.
“렉스 씨도 가세요?”
“예.”
렉스는 연하가 살갑게 말을 붙이는 게 어색한 모양이었다. 도영도 연하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누군가와 대화하려 하는 모습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경계심이 0그램도 없는 녀석이었다. 다만 상대가 자신을 경계한다는 걸 알기에 먼저 다가가지 않을 뿐이었다.
“렉스 씨.”
가면서 연하가 뭔가 결심한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혹시 저한테 싸우는 법을 알려주실 수 있으세요?”
“정신이 갇혀 있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으면 됩니다.”
렉스는 주저 않고 대답했다. 생각보다 너무 주저하지 않아서, 연하는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네?”
“뱀파이어의 육체는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들 원래는 인간이었기 때문에, 정신이 그 한계를 쉽게 넘지 못할 뿐이죠.”
“제가 인간이라는 걸 잊어야한다는 말인가요?”
연하는 미간을 좁혔다. 렉스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보았다. 붉은 눈동자는 진지했다.
“아뇨. ‘인간이었으니까 이만큼밖에 뛸 수 없다’는 생각을 버려야한다는 의미입니다.”
연하는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다가 물었다.
“렉스 씨는 그런 생각을 어떻게 버리셨는데요?”
“버리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그런 생각을 가지지 않았으니까요.”
연하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얼굴이었다.
“전 신의 아들이었으니까요.”
헐, 재수…….
도영은 반사적으로 생각했다.
아무리 알렉스 야크트훈트라지만 이런 자신감이라니.
그런데 연하가 진지하게 묻는다는 말이.
“현역이지 않으세요?”
렉스는 드물게도 할 말을 잃은 얼굴이었다.
“좀 더 비유적인 말이었습니다만…….”
도영은 큭 웃어버리고 말았다.
“아, 실례.”
두 사람이 돌아보자 도영은 말하면서 손을 들었다.
“곰한테는 안 된다니까요.”
“그게 무슨 말이야?”
연하가 물었다.
“네가 이겼다는 말이다.”
“내가 뭘 이겨?”
도영은 ‘아, 이 새끼가.’ 말하듯이 연하를 보았다. 그럼에도 연하는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고.
렉스는 두 사람을 내버려 두고 앞서 갔다.
“가시죠. 기다리시겠군요.”
* * *
“오셨습니까?”
헬기장에 오르자, 대기하고 있는 제로팀 대원 둘이 인사했다. 그들처럼 사복 차림이었다.
렉스는 시선을 돌렸다.
이반은 헬기장 가에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지평선까지 내뻗은 회색 도시를 내려다보는 등이 마치 도시의 지배자 같았다.
높은 고도에 바람이 불어와 그의 코트자락을 흩날리고, 렉스의 머리카락을 훑고 저 너머로 사라졌다.
‘어쨌든 전부 버리고 떠나기 전까지, 그리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을 테지.’
ISLE은 그들이 함께 쌓아올린 꿈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바노프 클랜이 모두 모여 살았던 시절, 인간이 하늘을 나는 불가능한 꿈처럼 불가능한 꿈을 꾸었던 그 시절…….
모두가 함께 있었다. 그, 자신, 셀레나, 필립, 그리고…….
때로는 궁금했다.
‘필립을 잃게 된 그 사고만 없었던들 아직 모든 게 그대로였을지.’
세상사에 환멸을 느낀 그의 파트로네스는 모든 걸 버리고 떠났고, 대신 셀레나가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노력하지 않았더라면 ISLE은 그대로 공중분해 되었을 것이다.
“이바노프 씨는 돌아오실 거예요.”
어느 날 셀레나는 말했다. 철인 10종 경기 정도는 거뜬히 치를 수 있는 체력을 가졌는데 눈 밑이 거무스름했다.
“어떻게 확신하죠?”
반면 렉스는 지극히 회의적이었다. 수년 간 그의 파트로네스를 봤다는 자는 없었다.
셀레나는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웃었다.
“별은 아직 빛나고 있으니까요.”
렉스는 뒤를 돌아보았다. 바람 가운데, 연하가 서 있었다.
‘별이라.’
그를 넘어 이반 쪽을 보고 있는 연하는 천천히 놀라는 얼굴이었다.
“어…….”
반면 도영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유는 알만했다.
렉스 옆으로 이반이 지나갔다.
“푸른 눈……이네요?”
연하는 얼떨떨해 말했다. 넥타이를 하지 않은 정장에 코트 차림으로 다가오는 이반은 푸른 눈이었다.
‘아, 지금 만나러 갈 사람 때문이구나.’
연하는 다음 순간 깨달았다.
뱀파이어의 존재가 공공연한 세상이지만, 괜히 경계하게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 특히 이번처럼 상대가 주의를 요하는 상태일 때는.
“붉은 눈이 아니어도 그다지 인간처럼 보이지 않으시는군요.”
도영이 말하자, 연하를 보던 푸른 시선이 그에게로 옮겨왔다.
“상사를 존경할 줄 모르는군.”
“계급은 계급일 뿐이죠.”
부하들의 존경과 신뢰는 계급이 보증해 주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참으로 군인다운 태도이긴 하지만, 렉스 눈에는 이 애송이가 내일의 태양을 보고 싶지 않은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반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자네 아버님도 군인이셨지. GIGN(프랑스 국가 헌병대 소속 대테러부대)#?”
“네.”
도영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게 다였다. 하지만 이반은 별로 무안해하지 않고 연하에게 말했다.
“가자.”
“네.”
연하는 대번에 대답하고 이반을 따라갔다. 도영은 기가 막혔다.
‘저, 저…… 삽살개 같으니.’
배신감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리웨이가 왜 그렇게 분통을 터뜨렸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국장이 헬기 안에서 물었다.
“오늘 가긴 할 건가?”
도영은 떨떠름하게 헬기에 올랐다.
* * *
군병원 옥상 헬기장에 내리자 의사 한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십대쯤 된 남자 의사는 자신을 대령이라고 소개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국장은 손을 맞잡았다.
“이반 이바노프입니다.”
“서울 지부 최초 루아스 국장님이시라고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대령은 뒤따라 헬기에서 내리는 넷, 즉 도영과 연하, 대원 둘을 힐긋 보았다. 옷차림은 다양했지만 모두 신분을 감추기 위해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대령 또한 기밀 사항을 다루기에 대충 그들이 누구인지 짐작하는 것 같았다.
“병동 하나를 전부 비우고 극비리에 관리했습니다. 이건 검사 결과입니다.”
대령은 이반에게 패드를 건넸다. 이반은 패드를 보았다.
“만나보러 가시겠습니까?”
“부탁드리죠.”
대령은 그들을 안내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자, 과연 병동은 텅 빈 것처럼 아무도 없는 느낌이 났다.
어쩌면 을씨년스럽기까지 한 복도에 그들의 발걸음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뒤따라오던 대원 하나는 복도 어느 지점에 멈춰 서서 보초를 서듯 그들이 온 방향을 보고 섰다. 얼마 가지 않아 대령은 한 병실 문 앞에 섰다.
“여기입니다.”
그가 병실 문을 열어주었다.
이반이 먼저 들어가고 다음에 대령, 연하가 병실로 들어갔다. 나머지 대원은 좀 더 걸어가 다른 대원처럼 다른 방향을 보고 섰다.
렉스와 도영은 복도에 남았다. 모두 평온한 기색이었으나 주변을 경계하는 눈빛은 날카로웠다.
# Groupe d’Intervention de la Gendarmerie Nationa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