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 짐승-25화 (25/104)

25화. 아일 (1)

태양빛은 쨍했고, 물은 투명하고 잔잔했다. 푸른 하늘에 붉게 박힌 점 같은 해가 검은 선글라스 표면에 비쳤다.

절로 낮은 허밍이 새었다.

“오셨습니다.”

야외 수영장 밖에 서 있는, 은발에 가까운 금발을 가진 백인 남자가 말했다.

거의 무인도처럼 거대한 섬 모양의 튜브에 누워 있는 청년은 선글라스를 밀어 올렸다.

해처럼 밝은 붉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벌써? 하여간 이런 소식은 빨리 전해진단 말이지.”

청년은 선글라스를 내려놓고 물속으로 뛰어들어 헤엄쳐 왔다. 남자는 물속에서 바깥까지 연결된 계단을 걸어 올라온 그에게 타월을 둘러주었다.

청년은 젖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야말로 천사가 강림했다고밖에 볼 수 없는 눈부신 미모였다.

겉으로만 봐서는 누구도 이 빈 청년 합창단원이 자란 것 같은 청년이 히틀러, 빈 라덴, IS의 지도자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에 이은 인류의 악적으로 평가받는 SN의 리더라고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어디 있어?”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실감나는 사자 조각상 두 개가 지키는 대문을 지나자, 베르사유에 못지않은 저택이 펼쳐졌다. 금과 붉은 벨벳으로 장식된 내부에 높은 창문들이 사방으로 열려 있었다.

가운데 뒤돌아 있는 여자의 흰 세미정장이 어딘지 웨딩드레스 같았다. 얼룩 한 점 없이 깨끗하고, 흰 물처럼 서늘한 느낌을 주었다.

옷자락 사이로 크리스털이 박힌 샌들 하이힐이 반짝였다. 생김새도 높이도 흡사 칼 같은 신발이었다.

‘나는 이름도 알지 못하는, 신을 목적도 아닌 신발을 제작하는 요상한 디자이너가 만든 걸 테지.’

“시몬.”

부르자, 그녀가 돌아보았다. 검은 군용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청년은 젖은 그대로 소파에 앉았다. 시몬의 붉은 시선이 잠깐 그를 응시했다.

어지간한 고급 앞에서는 눈도 깜짝 않는 그녀가 그러는 것만 봐도 이 소파가 얼마짜리인지 감이 왔다. 하지만 그가 알 바는 아니었다.

시몬도 그걸 알아서 별말은 하지 않았다.

“팀을 보내기 전에 제게 말씀해 주셨다면 좋았을 텐데요.”

청년은 은발 남자가 전해주는 팩을 받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미안하군. 하지만 네 녀석, 연락하기가 힘들어서. 요즘 특히.”

“소득은 있으셨나요?”

청년은 빙긋 웃었다.

“그렇진 않을 거야. 뱃속에 그건 평범한 쌍둥이거든.”

“그렇다면 어째서?”

“한동안 너무 조용히 있었던 것 같아서. 어떤 관계든 적당한 긴장감은 필요하잖아?”

그런데 시몬은 그가 먹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따라서 청년은 제가 들고 있는 팩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 이거? 이건 정말 좋은 거 같아. 굳이 사냥 다니지 않아도 되고. 솔직히 남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거 기생충 같아서 구미에 맞지 않았거든. 덕분에 이제야 문명인이 된 것 같아.”

“저희에겐 현 인류를 먹잇감으로 삼을 자격이 있습니다만.”

장황하게 말은 한다만, 본인도 그다지 열의를 가진 어조는 아니었다.

저쪽도 흡혈 같은 몰상식한 행위를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청년은 소파의 등받이에 팔을 걸쳤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정말 SN이 최선이야? 좀 괜찮은 이름 좀 붙여서 뿌리지 그랬어. SN은 꼭 무슨 아이돌 회사 같잖아.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시몬은 그를 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당신이 멋대로 페인 총장을 죽인 덕분에 이바노프가 움직였습니다.”

청년은 고개를 젖혀 만화경을 빛에 비춰보는 아이처럼 팩을 빛에 비추며 말했다.

“그러게. 아닌 척해도 꽤 아꼈던 모양이야. 어지간해서는 움직일 녀석이 아닌데.”

청년은 갑자기 고개를 원위치 했다.

“내가 이야기한 적 있던가? 녀석이 하도 날 유령 취급해서 좀 골이 나더라고. 그래서 녀석이 은둔하던 곳 있잖아. 거기다가 기껏 공수한 MOAB(공중 폭발 대형 폭탄)#을 던졌는데, 그냥 무시하고 이사 가더라니까?”

얼간이라고 생각할 게 뻔했으니까.

“인명 피해가 없어서일 겁니다.”

청년은 픽 웃었다.

“또 시작이군. 위대한 이반 이바노프, 멋진 이반 이바노프, 쩌는 이반 이바노프……. 참 충성심도 깊어.”

웃는 눈이 차가웠다.

“네 파트로네스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야.”

시몬은 MCTC에서 ‘대공’이라는 코드네임으로 부르는 청년을 보았다. 눈에는 별다른 감정이 떠오르지 않았다.

‘천박한 녀석 같으니.’

대공은 어깨를 으쓱이고 팩에 연결되어있는 빨대를 빨았다.

“하여간 일이 꼬였어. 내가 죽인 그 아이가 하필 이바노프의 클리엔테스가 될 줄이야. 정말 감염을 버틸 줄은 몰랐지.”

시몬은 이바노프의 세 번째 클리엔테스가 된 한국인 여자를 떠올렸다. 그렇게나 사진을 들여다봤지만 인상은 흐릿하여 잘 기억나지 않았다.

‘정확히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거겠지만.’

무엇보다 알 수 있었다.

‘말을 돌리고 있군.’

그가 멋대로 행동하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만, 확실히 페인 총장 일은 과했다. 시간이 알아서 해결해 줄 노인네를 처리하려다 간부를 포함한 대원을 셋이나 잃었으니까.

뿐만 아니라, 세간의 일에는 신경을 끄고 사는 이바노프의 시선을 끄는 바람에 일이 더 복잡해졌다.

“신의 의지라는 걸까?”

대공이 중얼거렸다. 시몬은 그가 갑자기 일어나 홀딱 벗기라도 한 것처럼 돌아보았다.

“그런 걸 믿으시나요?”

대공은 넉살 좋게 성호까지 그었다.

“언제나 믿었지. 난 신심이 깊거든.”

보는 사람으로서는 모독하려는 건가 싶을 뿐이었지만.

시몬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약속이 있어서 가보겠습니다.”

시몬은 바로 돌아섰다. 별 소득이 없을 줄은 알았지만, 괜히 온 것 같진 않았다.

‘적어도 뭔가 숨기고 있다는 것만은 알게 됐으니까.’

“시몬.”

갑자기 그가 불렀다. 시몬은 무감동한 붉은 눈으로 돌아보았다.

널찍한 소파에 앉은 약관의 청년은 수렴청정을 맡겨야 하는 소년 왕처럼 푸릇하고 앳돼 보였다.

하지만 내뿜는 거만한 공기만큼은 자신이 왕이라는 의식을 뼛속까지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슬슬 테러리스트 우두머리 역할 같은 건 지루해지려고 해.”

“알고 있습니다. 곧 원하시는 대로 될 겁니다.”

청년은 빙긋이 웃었다.

“그래. 믿어. 넌 내 클리엔테스에 다름없으니까.”

시몬은 가슴 깊은 수원지에서 솟아나는 경멸감을 억눌렀다.

“찾아오는 일은 최대한 삼가겠습니다. 꼬리가 밟힐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 그러도록 해.”

밖으로 나온 그녀는 대기하고 있는 헬기에 올랐다. 그리고 마스크를 벗고 핸드백에서 거울을 꺼냈다.

매끄러운 표면에 비친 입술은 붉은 립스틱을 바르고 있었다. 칼로 그은 듯 번짐 하나 없었다.

헬기는 도시를 가로질러 날아갔다. 그리고 현대문명의 업적을 새긴 불망비처럼 우뚝 서 있는 마천루 옥상 헬기장에 내렸다.

철컹.

문이 열리고,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그녀는 바닥에 하이힐을 딛고 내려섰다. 헬기장을 가로질러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엘리베이터는 하나의 인체 같은 건물을 타고 내려가는 알약처럼 미끄러져 내려갔다.

띵─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하이힐과 구둣발들이 일사불란하게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리고 양쪽으로 열리는 문 너머로 들어섰다.

중세 영주들이 앉는 것 같은 기다란 탁자가 있고, 도시를 배경으로 사람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남자, 여자, 모두 자신감이 넘치는 당당한 얼굴이었다.

시몬은 중앙 자리로 나아갔다. 핸드백을 내려놓고, 유리 탁자에 손을 짚었다.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모두가 그녀를 주목했다. 그 시선에 시몬은 뱃속에서부터 올라오는 환희를 느끼며, 미소 지었다.

“그러면 시작해 볼까요. 제노아틱스 주주 여러분.”

* * *

“진짜 대단했다니까.”

리웨이는 기막혀했다.

“대체 몇 번째 이야기하는 거야?”

하루가 지났는데도 연하는 아직 설렘이 가시지 않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싸우는 건 처음 봤어.”

리웨이는 의자를 돌려 앉았다.

“뭐, 나도 영상 봤는데 대단하긴 하더라. 거의 탈 지구생명체 급이던데.”

“그 검이 뭐 특별한 건 줄 알았는데 말이죠.”

소파에 다리를 뻗고 앉아 있는 도영이 덧붙였다.

“요즘 같은 시대에 검으로 싸운다는 것 자체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죠.”

리웨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 남자는 차라리 탱크보다 효과적이겠더라만. 그런데 그 얼굴로 야크트훈트 소장이라니, 너무 깨는 거 아니에요?”

도영은 머리 뒤에 손을 깍지 낀 그대로 천장을 보고 중얼거렸다.

“그럼 대체 국장은 뭐라는 건지.”

“소장의 파트로네스 아니에요?”

도영은 리웨이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한 것처럼 돌아보았다.

“소장의 파트로네스가 누군데요?”

“전들……. 그러고 보니 파트로네스가 있었나? 소장이 그쪽 클랜의 리더 아니었어요?”

“저도 그런 줄 알았는데요.”

“클리엔테스가 아홉이나 된다던데. 꽤나 다산이네요.”

도영은 눈썹을 치켜들었다.

“다산이란 표현이 여기에 괜찮은 겁니까?”

리웨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결국 많이 생산했다는 의미잖아요.”

점점 산으로 가는 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연하는 생각했다.

‘파트로네스…….’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파트로네스가 있는 게 어떤 느낌인지 실감은 되지 않았다.

‘또 다른 가족 느낌일까.’

국장과 렉스는 그다지 친한 것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서로 신뢰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친해 보이지 않는 건, 뭐, 사내애들은 원래 다 그러지 않나.

“그래서 ISLE이…….”

연하는 생각에서 깨어났다. 어느새 도영과 리웨이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이야기 하는 중이야?”

묻자, 리웨이는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을 가리켰다.

“그거.”

“이거?”

연하는 팩을 들었다.

“하이마?”

리웨이는 눈썹을 추켜들었다.

“꼭 저러더라. 그게 왜 하이마야?”

연하는 ‘아아’ 소리를 냈다.

“그냥 버릇이 돼서. 플로스.”

이걸 언급한 적 있는지 모르겠다.

제노아틱스는 하이마를 개발해 공전의 히트를 쳤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하이마는 2세대가 나타났다.

바로 인도의 제약회사 가네샤가 내놓은 ‘플로스(Flos)’였다.

“안 그래도 늘 궁금했는데, 2세대가 가능해? 특허권이라든가 문제가 있지 않아?”

연하는 말이 나온 김에 물었다.

“꽃은 천연 성분이어서 특허권을 등록할 수 없거든.”

리웨이는 자주 같은 질문을 들었던 것처럼 대답했다.

“뭐, 이론적으로는 그렇지만, 물론 제노아틱스는 가네샤를 크고 아름답게 고소했지. 어쨌든 제노아틱스가 자랑하는 건 쿨리시다이닌에 대한 추출과 유기 합성 기술이니까.”

연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네샤는 인도 법인이니까.”

“아아, 인도는 공익을 위해서 의약품에 대한 특허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야기 말이죠?”

도영이 말했다. 리웨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괜히 노바티스나 화이자 같은 전통적인 대형 제약사들도 인도에서만큼은 두 손 들고 물러난 게 아니니까요.”

리웨이는 갑자기 패드를 들고 뭔가 찾으면서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래서 가네샤는 제노아틱스가 뭐라고 짖든 크게 개의치 않는 태도였어요.”

리웨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사실 2세대가 등장한 것까지는 큰 문제가 아니었을 거예요. 하이마는 인지도적인 면에서 압도적이니까. 다만 문제는…….”

# Massive Ordnance Air Bl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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