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사냥개
렉스는 모든 게 미니어처처럼 보이는 상공에서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파워는 좋은데, 파워만 좋군.’
이바노프의 피를 받은 이상 힘만으로는 대적할 상대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제하지 않고 원석 그대로 내버려 둔 힘은 오히려 처치불능이라는 느낌이었다.
렉스는 운석이 빗겨 떨어진 것처럼 가운데가 모조리 파여 있는 건물을 보며 생각했다.
그때, 무전기를 타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렉스. 내 눈엔 네가 보이지 않는데.]
과보호를 할 거라고, 페인 총장이 그랬던가.
“사랑스러운 아가씨한테 녹지 않을 남자는 없거든요.”
그러면서 총장은 병상에 누워 창백한 얼굴로도 짓궂게 웃었다. 과연 혜안이 있는 사람이었다.
“잠깐 실력을 봤습니다.”
렉스는 안전벨트를 풀고 일어났다. 그리고 열려 있는 문 앞에 서서 조종사 소위에게 말했다.
“머리 위로 가주십시오.”
“바로 머리 위는 위험합니다.”
“고도를 낮추실 필요는 없습니다.”
고민하는 소위의 헤드셋 너머로 어떤 명령이 들려온 모양이었다. 소위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헬기를 틀었다.
헬기는 점차 목표물에 가까워졌다.
렉스는 마스크를 썼다. 이미 반쯤 내놓은 발아래로 지상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다리에 가볍게 반동을 주어, 그대로 뛰어내렸다.
“잠깐! 강 상사도 이 높이에서는 못 뛰……!”
소위가 경악해 외치는 소리는 낙하하는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고 허공으로 녹아들었다.
후우우우우.
지상은 순식간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 * *
삐빅.
무전이 들어온다는 전기 신호가 울리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켜서십시오.]
‘머리 위에 무언가─’
생각한 찰나, 앞에 남자가 내려섰다.
하얗게 공기를 찢으며 내려선 압력이 실제로 눈에 보였다. 발사된 미사일이 터지지 않고 땅에 내려앉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나마 뱀파이어의 동체 시력이었기 때문에 눈으로 따라갈 수 있었을 뿐이다.
그가 내려선 땅이 불가능한 곡선으로 휘는 것, 그가 발을 뒤로 밀며 자세를 잡는 것, 그리고 발도가 되는 순간 파랗게 빛나는 검 같은 것을─
아, 발작하듯 펄럭이는 촌스러운 남방도.
그가 단번에 엄청난 높이를 도약한 찰나였다.
후웅.
공기의 폭풍이 일었다. 그리고 헬기와 적을 동시에 가르는 은빛의 직선.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은 순간, 허공에 떠 있는 남자가 아무것도 밟지 않고 그대로 몸을 틀었다. 그리고 포물선을 그리며 훌쩍 내려섰다.
물론 그건 느낌이었고, 뒤로 수십 미터를 더 밀려나서야 멈추었다.
그가 블랙홀이 되어 빨아들였던 바람이 풀려난 듯 다시 불기 시작했다.
“허…….”
연하는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렉스는 날아가지 않게 모자를 짚고 있는 손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저 멀리 건물의 창 너머에 있는 도영은 입을 떡 벌렸다.
“ㅆ…….”
옆에 있는 한 중사는 미처 욕을 끝맺지도 못했다. 그리고 기막혀하며 도영을 돌아보았다.
“우리가 저런 것들이랑 전쟁을 했다는 말입니까?”
도영은 겨우 목소리를 되찾았다.
“아무리 루아스라고 해도 과하잖아요, 저건. 오버파워도 정도가 있…….”
[우와! 진짜 멋있었어요!]
갑자기 무전에서 탄성이 터졌다. 그 소리가 어찌나 컸는지 귓구멍도 근육질로 싸여 있을 것 같은 대원들이 눈을 찡그렸다.
저 아래 연하가 제 운동화 밑창을 내려다보는 렉스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대원들은 시선을 교환했다.
“우리 상사님 저렇게 신난 건 처음 봅니다?”
꼭 슈퍼맨을 실제로 본 꼬마아이처럼─
“가만. 렉스?”
도영은 갑자기 왠지 모르게 낯설지 않은 이름을 되뇌었다.
“렉스, 알렉스…….”
무언가가 머리를 딱 쳤다.
“설마 알렉스 야크트훈트……?”
한 중사가 놀란 눈으로 돌아보았다.
“네? 알렉스 야크트훈트라면…….”
* * *
“중앙근위사단장?”
땀에 젖은 방탄복을 벗은 연하는 의아한 표정이었다. 그 앞에는 도영이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그래. 알렉스 야크트훈트 소장. 정말 몰랐어?”
“몰랐는데.”
도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알렉스 야크트훈트가 누군지는 알아?”
연하는 고개를 내저었다. 도영은 기가 막혔다.
“야, 아무리 그래도 네가 알렉스 야크트훈트를 모르면 되냐?”
“왜?”
도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 잊고 있었군. 내가 이 녀석을 곰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루아스가 된 이래 서울 지부에 예속되어 생의 전부를, MCTC 세계에서 보면 귀퉁이의 작은 점 같은 곳에서 보냈으니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12년이었다.
아예 귀를 닫아놓고 살았지 않고서야 알렉스 야크트훈트조차 모를 수가 없었다.
“중앙근위사단 제1예거 연대를 창설한 루아스잖아. 말 그대로 예거#, SN 잡는 지옥의 사냥꾼들 말이야.”
“아, 예거.”
예거는 들어봤다. SN도 예거가 떴다고 하면 초비상이라고 했던가. 일단 예거를 마주치고 살아 돌아간 SN은 없다는 것 같았다.
“루아스 중에서도 짬이 다 찬 정예만 들어갈 수 있는 MCTC의 꽃 아닙니까.”
옆에서 뒷정리를 하던 한 중사가 끼어들었다.
“딱히 연대 의식도 없고 제 욕구만 뚜렷해서 처치 곤란인 루아스들을 그나마 공존 가능한 상태로 만든 것도 알렉스 야크트훈트라고 하던데요. 오히려 지금 예거 연대라고 하면 충성심이 교황의 스위스 용병대 못지않아서 인간들도 존경한다던가…….”
도영이 덧붙였다.
“아홉이나 되는 클리엔테스가 있는 것도 그렇고, 별명이 휘하에 열두 기사를 거느렸다던 게르만의 전설적인 왕 ‘디트리히 폰 베른’이라지?”
연하는 돌아오자마자 렉스가 사라진 방향을 돌아보았다.
“렉스 씨가?”
도영은 한숨을 삼켰다.
“그래.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우리가 맨날 지나다니는 길에 서 있는 게 야크트훈트 소장일 거라고.”
루아스에도 유명인이 있다면 알렉스 야크트훈트는 확실히 그중 하나였다.
MCTC는 대테러부대라서 얼굴이나 신변이 외부에 노출되지 않으니까 대중에 알려져 있지 않을 뿐이었다.
중앙근위사단장쯤 되면 단순한 군인을 넘어서기 때문에 예외로 봐야 할지도 모르나, 알렉스 야크트훈트는 타고난 군인이어서 대외적인 일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같았다.
사실 ‘렉스’라고 불렸던 남자를 생각해 보면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결과론적인 판단일지도 모르지만.’
도영은 생각했다.
애초에 MCTC를 설립하려고 하는 페인 총장과 루아스 사회를 연결해 준 인물이 그라는 것 같았다.
힘이 있음에도 평화주의자에, 과묵하고, 신념을 가진 채 묵묵히 제 일을 하는 내추럴 본 군인을 상상했다.
또 별명 때문에 디트리히 왕이 그랬다는 것처럼 거구의 덩치일 줄 알았는데…….
‘존경했었는데.’
어쩌면 팬이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야크트훈트 소장을 향한 팬심에 유일한 걸림돌은 종적인 거부감이었는데, 그것도 연하 덕분에 깨어진 이후로는 마음 놓고 롤모델이라고까지 이야기하고 다녔다.
“하지만 확실한 겁니까?”
어느새 이야기를 듣고 있는 다른 대원이 물었다.
“아까 싸우는 모습을 보고도 그런 질문이 나와?”
그때였다. 대원들이 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천장이 높은 격납고가 우렁차게 울렸다.
도영 일행도 바로 돌아보고 자세를 잡았다.
“모두 수고했습니다.”
국장은 도열한 대원들 한 명, 한 명과 악수를 나누었다. 그 뒤에는 여전히 렉스가 그림자처럼 따르고 있었다.
대원들 사이에 소리 없는 술렁임이 번졌다.
개중에 용기 있는 혹은 고문관스러운 호기심을 참지 못하는 한 대원이 앞을 지나가는 렉스에게 물었다.
“혹시 야크트훈트 소장님이십니까?”
렉스는 별로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네.”
군대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투 스타가 온다는 이야기만 들려도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 것이다.
그런데 투 스타가 눈앞에 뚝 떨어진 것이다. 모두 숨 쉬는 법도 잊어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개인 경호 자격으로 방문한 것이니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이건 투 스타가 투잡을 뛴답시고 민간경호회사의 경호원으로 나타난 격이었다.
물론 평범한 군대였다면 있을 수조차 없는 일이지만, 이곳은 비상식과 불가능이 판을 치는, 인류의 다정한 친구 MCTC가 아닌가.
대응할 기력까지 앗아가는 상황에 모두 넋을 놓고 있는 가운데, 유일하게 눈을 빛내는 인물이 있었으니─
연하는 아이돌을 만난 소녀 팬 마냥 렉스를 보느라 국장과 악수도 하는 둥 마는 둥이었다.
렉스는 흘긋 이반을 보았지만, 그는 웃는 얼굴을 풀지 않았다.
‘당황스럽군.’
렉스는 생각했다. 이 얼굴이 자신을 영웅처럼 보는 게 이상했다.
차라리 ‘쓰레기통’이라고 부르는 쪽이…….
마침 이반이 몸을 돌려가기에, 렉스는 뒤를 따랐다.
그 뒤로, 좌중 누군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소장이 경호하는 우리 국장은 대체 뭐야?”
대답할 수 있는 이가 있을 리 만무했다.
격납고를 나서면서 렉스는 이반의 등을 보았다.
그조차도 이반 이바노프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신은 이런 존재일 거라고 생각했다.
모세 앞에 떨기나무에 붙은 불로 화한 자, 마호메트에게 빛나는 가브리엘을 보낸 자, 욥에게 폭풍 속에서 이야기한 자, 삼만이 넘는 얼굴을 가진 자…….
모든 일을 할 수 있음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면에서도 그는 신적이었다.
갑자기 그가 돌아보았다.
“거의 영웅으로 등극하셨군.”
전에 없이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렉스는 눈을 깜빡였다. 그가 이런 표정을 짓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난 그렇게 화려하게 기술을 선보이라고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다치지 않도록 서포트 해주라고 했지.”
“녀석들이 너무 약했습니다.”
렉스는 있는 사실 그대로 대답했고, 이반은 코웃음을 쳤다.
“아무렴. 알렉스 야크트훈트인데.”
이반은 보란 듯이 말했다.
“사람들이 그건 아나 모르겠군. 네 성, 예전에 누가 이바노프의 사냥개라고 조롱조로 부른 걸 그대로 성으로 삼은 거라고. 처음에 그렇게 부른 녀석이 독일계였지.”
귀족으로 태어나지 않은 그에게 성이란 게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하나 정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냥 생각나는 걸 말했다.
하지만 그때도 이반은 너답다는 듯이 고개를 한 번 젓고 말았다.
‘그런데 왜 지금은…….’
이반은 렉스가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뿐이라고 깨달았다.
‘이런 녀석을 데리고 무슨 이야기를 한다고.’
하지만 이런 꿔다놓은 자루 같은 녀석에게 그렇게 눈을 빛내다니.
기분이 나빴다.
아아, 이건 분명히 기분이 나쁜 일이었다. 그는 본 체도 하지 않는데, 그가 조금만 더 본능에 충실했다면─
평생 생각해 본 적 없는 무언가를 생각할 뻔했던 이반은 멈칫했다.
한참 동안 아무 반응이 없자 렉스는 이상하게 그를 보았다.
이반은 손을 내젓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렉스도 뒤따랐다. 그리고 화제를 바꾸는 게 좋을 것 같았는지 말했다.
“현장에 쌍둥이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뱃속에.”
“이런 경우는 처음이군요.”
이반은 시선을 돌렸다.
모니터에 그림이 떠 있었다.
중세시대의 종교화처럼 황금색 배경에, 고대 이집트 그림 같은 방식으로 인물을 그린 그림이었다.
가운데 신관의 복장을 하고 수염을 기른 남자가 두 손을 한쪽으로 들고 서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 구석에 여섯 날개가 달린, 얼굴만 있는 천사가 그의 귓가에 계시를 내리고 있었다.
시지고스.
고대 마니교의 창시자인 마니에게 계시를 내렸다는, 그가 자신의 수호신이자 쌍둥이, 짝이라고 불렀다는 영적인 존재.
그리스어로 ‘파트너’.
“녀석이 움직였겠지.”
그림을 응시하는 붉은 눈이 차가웠다.
# 사냥꾼. 독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