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 짐승-23화 (23/104)

23화. ZERO 14

“너 인마, 어디 있다가 이제 와!”

이미 격납고 앞에 나와 있는 KAI-10 수리온 헬기 앞에서 도영이 소리쳤다. 공기를 찢으며 돌아가는 로터 블레이드 소리에 흡수되어 들리지 않았으나 알 수 있었다.

버럭거리는 입 모양, 손가락질하는 제스처, 표정 같은 것으로.

연하는 격납고를 가로질러 달려갔다. 팀은 이미 모두 헬기에 탑승해 있었다. 늦어서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취하며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너 어디 있었어? 아무리 찾아도 없던…….”

맞은편에 앉은 도영이 물었지만, 연하는 양팔을 교차해 티셔츠부터 벗어 올렸다. 도영은 바로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아, 이 자식이. 훌렁훌렁 벗지 말라고 했잖아!”

직업특성상 급하게 출동하게 되면 그도 가면서 갈아입는 경우가 태반이었지만, 이 녀석은 너무 아무 신호도 주지 않았다.

대원들이 낄낄거렸다.

“우리 소령님 막 불끈불끈하십니까?”

도영은 기가 막혔다.

“제가 어제 태어난 줄 아십니까? 이런 유아 체형 따위…….”

“그래, 소령님 완전 나이스바디 취향이더구먼.”

“안 그런 남자가 있습니까? 소령님은 또 그런 애들만 꼬이는 거고요.”

팀원들은 하나 물었다 싶은지 고등학생들처럼 왁자지껄했다.

“왜요, 그래도 우리 상사님 제법…….”

오랜 시간 함께해 온 팀원들이기 때문에 악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이 몸에 밀착하는 기능성 상의로 갈아입은 연하의 가슴에 닿은 순간, 도영은 더 기가 막혔다.

“여러분.”

그제야 대원들은 정신을 차리고 헛기침을 삼키며 시선을 돌렸다.

하여간 남자들이란. 오랫동안 함께한 팀원들이라도 이렇게 본성이 튀어나올 때가 있었다.

그런데 탈 사람들이 다 탔는데도 헬기가 떠오르지 않아, 도영은 조종사 소위를 보았다.

“출발하지 않으십니까?”

“더 온다고 하는데요?”

“누가요? 대루아스 작전에 우리 말고…….”

입구에 나타난 인기척을 느끼고 도영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막 머리를 묶은 연하는, 날아오는 물건을 감지하고 받아들었다.

스포츠 가방이었다.

그리고 막 건너편 자리에 앉는 렉스를 발견했다.

“당신, 국장님 경호 아니었습니까?”

도영이 질문은 렉스에게 하면서 연하에게 대답하라는 듯이 눈짓했다. 하지만 연하는 맹한 얼굴로 이럴 따름이었다.

“나도 국장님 경호원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맞습니다.”

렉스가 대답했다.

‘지금은?’

도영이 물으려는데, 렉스가 먼저 연하에게 말했다.

“입으세요.”

가방을 열어보자, 익숙한 것들이 딸려 나왔다.

“방탄복이잖아요?”

“오늘부로 모든 대원은 방탄복을 입지 않고 작전에 들어가면 징계입니다. 국장님 직속 명령입니다.”

연하는 미간을 좁혔다. 아무리 요즘 방탄복이 옛날보다 경량이라지만 방탄복은 방탄복이었다.

“불편한데……. 그쪽은 안 입었잖아요?”

렉스는 아까 복장 그대로였다.

“전 견학이니까요.”

도영은 눈썹을 추켜들었다.

“그런 걸 들고 말이죠.”

렉스는 캐주얼한 복장에 어울리지 않게 박물관에서나 볼 것 같은 장검을 들고 있었다.

칼집은 둔탁한 검은색에 아무 장식이 없는 단순한 것이었지만, 쓸 줄 모르는 사람이 덜렁 들고 다닐 만한 것은 아니었다.

“호신용입니다.”

무시무시해 보이긴 해도 전쟁에서 검이 사라진 세월을 고려하면 실제로 호신용으로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도영은 더 말하지 않았다.

드디어 수리온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아무튼, 어서 입어. 안 그래도 너 맨날 가벼운 복장으로 덜렁덜렁 나갔다가…….”

도영은 멈칫했다.

‘이 녀석을 신경 쓰는군, 국장.’

이제는 단순한 감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그 정도 되는 남자가 이런 섹시한 구석이라고는 없는 곰한테 이성적인 관심을 가지게 됐을 것 같진 않은데…….

그때 연하가 다시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역시 이성들 앞이라는 의식 따위는 1그램도 없이 운동복 바지를 벗기에 도영은 혀를 내차고 고개를 돌렸다.

렉스는 이미 창밖을 보고 있었다.

창 너머 불빛이 타오르는 서울의 야경이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 * *

“ETA(도착 예정 시간)# 30초 전.”

건물이 가까워졌다.

연하는 활짝 열린 문가에 서서 건물을 훑었다.

건물은 현지 경찰이 폴리스 라인을 치고 출입을 통제 중이었다. 테러리스트들이 인질을 붙잡고 점거한 내부는 일단 조용해 보였다.

“헬멧 써.”

뒤에서 도영이 말했다. 연하는 품에 안은 헬멧을 썼다.

수리온은 거센 바람을 일으키며 건물 옥상 위에 멈추었다.

도영을 포함한 대원들이 먼저 호버링(공중정지비행)하고 있는 헬기에서 패스트로핑(헬기에서 줄을 타고 내려오는 것)해서 옥상에 차례대로 내려섰다.

“갑니다.”

마지막으로 연하는 로프 없이 훌쩍 뛰어내렸다. 가볍게 옥상에 착지하자, 선두에 있는 도영이 손짓했다.

헬기는 다시 상승했다. 렉스는 헬기 창 너머로 팀이 옥상 문을 통해 줄지어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 * *

“승냥이 셋, 내부진입.”

유리문 너머로 텅 비어 보이는 회의실이 나타났다. 아무도 없어 보였다.

도영은 신중하게 기다렸다가 신호를 보냈다. 건너편에 있는 대원이 먼저 내부로 들어갔다.

뒤이어 오는 아군을 위해 이미 클리어링 된 곳이라는 표시로 적외선 케미라이트를 구석에 던지고 다시 움직였다.#

복도는 고요했다. 대원들은 중장비를 갖춘 덩치들이 움직이는 것치고 거의 발걸음 소리를 내지 않았다.

연하는 글로벌 금융센터의 깨끗한 유리 창문 너머 건너편 건물에서 반짝이는 빛을 보았다. 금세 사라졌지만, 저격수 옆에서 상황을 살피는 감적수의 망원경에 스친 불빛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전방에 타깃!”

그때, 한 중사가 외쳤다.

대원들은 당장 총구를 겨누었다. 복도 끝에 낯선 인영이 서 있었다.

남자는 이를 드러내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발포!”

총구들이 불을 뿜었다.

“피해!”

도영이 외쳤다.

다른 수를 쓰기 힘든 좁은 공간인 데다가 대원들이 따라가기엔 뱀파이어의 속도가 너무 빨랐다.

뱀파이어가 지나가는 길에 다 썰려 나가지 않도록 피하라고 외친 게 거의 유일한 대응 방법이었다.

다들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몸을 낮추고, 매뉴얼대로 연하만이 남아서 계속 발포했다. 적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 있는 동체 시력을 지닌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텅.

슬라이드가 밀려나면서 탄창이 비었음을 알렸다.

연하는 내던지는 동시에 두 번째 총을 꺼내 발포하기 시작했다. 눈은 깜빡이지도 않고 목표물을 쫓았다.

터엉.

두 번째도 내던졌다.

그리고 세 번째, 네 번째…….

뱀파이어가 흐르는 물처럼 벽을 타고 옆을 지나가려고 했다.

뒤를 공격할 속셈이리라.

연하는 당장 총을 전부 내던지고,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적은 움찔했다. 그대로 적을 휘둘러 벽에 처박았다.

쿵.

충격에 온 건물이 진동했다.

연하는 멈추지 않았다. 뱀파이어를 다시 휘둘러 창문 밖으로 던져 버렸다. 그와 함께 유리가 산산이 터져 나갔다.

도영은 구멍이 뻥 뚫린 벽 너머 불어드는 바람을 맞으며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무식한 것…….”

볼 때마다 신기하지만, 도대체 꽃을 먹고 산다고는 볼 수 없는 파워였다.

도영과 대원들은 일어나서 다시 진영을 채비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도영이 움찔하더니 외쳤다.

“여덟!”

연하는 되묻지 않았다. 당장 유리창을 돌아보았다.

밖으로 떨어진 줄 알았던 뱀파이어가 튀어 올라와 그녀를 붙잡았다. 그리고 연하를 주축 삼아 한 바퀴 돌았다. 그대로 그녀를 안고 바깥으로 몸을 던졌다.

후우우우우.

연하는 머리부터 떨어지기 시작했다.

건물 외부 유리에 거꾸로 빛나는 도시가 비쳤다. 마치 수면을 향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연하는 건물 외벽에 양팔과 두 다리를 박아 넣었다. 전면 유리창들이 모조리 깨져나가며 굉음을 퍼뜨렸다.

그런데 가까스로 멈추고 보니, 유리창 너머 비명을 지르며 혼비백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인간, 민간인들로 보였다.

“아래층에 사람들이 있습니다.”

연하는 무전 너머로 말했다. 그리고 대답은 듣지 않았다.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뱀파이어가 빌딩을 박찼다. 그리고 그 반동으로 중력을 거스르는 포물선을 그리며 그녀의 머리 위 빌딩 벽에 착지했다.

찰나, 땅바닥에 서 있는 것 같은 두 사람의 발밑으로 빛을 반사한 유리 표면의 윤기가 지나갔다.

적이 조금 더 빨랐다. 중력과 무게, 힘을 더한 파워로 연하를 찍어 눌렀다. 아슬아슬하게 그 발을 붙잡을 수 있었지만, 연하는 적과 함께 떨어지기 시작했다.

쿠우우웅.

운석이 추락한 것 같은 굉음이 울렸다.

* * *

문짝이 폭발하듯이 열렸다. 그리고 외계인으로 보일 만큼 신식으로 중무장한 대원들이 들이닥쳤다.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다. 대원들은 어두운 방을 샅샅이 훑어 인질범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A-1 클리어.”

동시에 헬멧에 부착된 HMD(헬멧장착시현기)#를 통해 다른 방으로 돌입한 팀들에게서도 메시지가 들어왔다.

[A-2 클리어.]

[A-3 클리어.]

대원들은 빠르게 손짓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인질들을 밖으로 데려나가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어둠 속에 한 덩어리 같이 뭉쳐 있던 인질들이 실타래 풀린 실처럼 밖으로 연결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한 대원이 어떤 인질의 팔을 잡았다.

“잠깐.”

“네?”

여자는 경기를 일으킬 만큼 놀랐다. 대원은 여자를 훑어보고 바로 고개를 돌렸다.

“소령님.”

문가에 있는 도영이 돌아보았다.

“이거 혹시…….”

대원은 자신이 잡은 여자를 고갯짓했다. 도영은 야간투시경을 밀어 올렸다.

“사, 살려…….”

집채만 한 대원에 비해 아이처럼 작아 보이는 여자는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는지 떨기 시작했다.

“진정하세요.”

그리고 도영은 무어라 물었다.

“네?”

여자는 당황하는 듯했다.

“맞습니까?”

도영은 진지하게 되물었다. 여자는 얼떨떨해 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승냥이 일곱, 국장 연결하십시오.”

도영이 말하자, 상황실에 있는 국장은 바로 대답했다.

[듣고 있습니다.]

“현장에 쌍둥이가 있습니다.”

건너편에서 무언가 확인하는지 잠깐 침묵이 이어졌다.

그동안 총을 바투 잡은 대원들은, 실제로는 전원 총사령부 직속 제로 14팀으로서 다만 서울 지부 ERU 3팀으로 위장하고 있을 뿐인 대원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기다렸다.

[인질 리스트엔 쌍둥이가 없군요.]

드디어 국장이 말했다.

“당연하죠.”

도영은 여자를 보았다. 겁에 질린 여자의 배는 임산부의 것이라고 해도 지나치게 컸다.

“뱃속에 있으니까요.”

* * *

연하는 파손된 헬멧을 벗어던졌다.

사방을 덮은 잔해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 너머에서 부스러기를 떨치며 일어나는 인영이 비쳤다. 상대 또한 추락으로 인한 부상은 크게 입지 않은 것 같았다.

적이 무언가 꺼내 들었다. 사슬이었다.

탁, 탁탁, 타다다다…….

소리를 내며 끝에 쇠 구슬이 달린 사슬을 돌리기 시작했다. 연하는 어느 쪽에서 공격이 날아올지 몰라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적의 움직임을 읽었다.

번뜩 고개를 들었다.

‘위!’

사슬은 헬리콥터의 랜딩기어를 덮쳐들어 휘감았다. 적이 줄을 끌어당기자, 헬리콥터는 바다 속에서 발목을 잡아당기는 문어괴물의 다리에 휘감긴 조난자처럼 허우적거렸다.

마침내 기력이 다한 듯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수리온 찰리 다운, 수리온 찰리 다운. 탈출한다.]

뒤에는 아직 현장을 벗어나지 못한 인질들을 태운 버스가 있었다. 경찰들이 미친 듯이 소리치며 달리기 시작했다.

온갖 소음이 섞여 현장은 아수라장이었다.

군용 헬기가 너무 크고 무거워서 연하는 자신의 힘으로도 받아낼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받아야만 한다는 사실이 달라지진 않았지만.

연하는 다리에 힘을 주고 자세를 잡았다.

# Estimated Time of Arrival

# 마크 오언, 케빈 모러, 「노 이지 데이(NO EASY DAY)」, 이동훈, 길찾기(2013). p.223

# Helmet Mounted Displ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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