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 짐승-22화 (22/104)

22화. FLOS CULICIS(모기의 꽃)

막 인터폰을 누르려는데, 인기척을 감지한 자동문이 저절로 열렸다.

“강 상사.”

도영은 인상을 썼다. 방은 비어 있었다.

‘꼭 문단속을 하라고 당부했는데 또 이렇게 열어놓고.’

외모 때문만이 아니라, 도대체 어떻게 이런 헐렁한 녀석을 연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어디 간 거야?”

방은 깔끔했지만 침구는 자고 일어났던 모양 그대로 어지러웠다.

방이 이 정도로 깔끔한 것도 방 상태를 인지하고 자동으로 청소기를 가동하는 AI 덕분이지, 현대인이 아니었다면 돼지우리나 다름없는 곳에서 살 것이다.

그때 문이 열렸다.

“강 상사, 너…….”

잔소리를 일발장전하고 돌아봤는데, 들어온 사람은 리웨이였다. 리웨이는 의외라는 듯이 그를 보았다.

“여기서 뭐 해요?”

“대위님이야말로……. 아, 배달이요?”

그녀를 따라온 자동가동카트 위에 전문적으로 밀봉된 상자가 올려져 있었다.

리웨이는 고개를 내저었다.

“배신자 뭐가 예쁘다고 여기까지 친히 갖다주는지 모르겠네요.”

리웨이 나름대로 화해의 제스처이리라.

안 그래도 도영도 얼마 전에 의무대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국장의 행동 자체는 백 번 잘했다고 생각했다. 루아스 대원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생체정보 수집은 안 그래도 문제가 되고 있던 차였으니까.

단지 그가 그랬다고 하니 왠지 묘하게…….

‘국장이면 국장답게 지부의 대사나 처리할 것이지, 시간도 많아.’

그때 탁자 위에 있는 대용량 과자 봉지에 시선이 닿았다. 기가 막혔다. 도영은 봉지를 한 번 들었다가 툭 내려놓았다.

“이 녀석 또 이렇게 과자를 먹어대고. 애라니까, 애.”

“활동하는데 엄청나게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몸뚱이니까요. 먹을 수 있는 거라면 다 먹는 게 좋죠.”

피를 마시고 살 때도 뱀파이어는 다른 음식도 섭취해야 했다. 사실 열량 측면에서 피는 상당히 곤궁해서, 피만 마시고 살 수 있다면 그게 오히려 마법 같은 일이었다.

다만 피가 고양이에게 꼭 필요한 영양소인 타우린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옛날에는.

“아무리 먹어도 충분히 채워지진 않을 테지만요.”

리웨이가 박스의 뚜껑을 열자, 투명한 팩들이 열 맞춰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도영은 팩 하나를 집어 들었다. 말랑한 팩 안에는 사과주스 같은 액체가 찰랑거렸다.

“이게 아니면 말이죠.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단 말이죠. 꽃의 추출물이 피를 대체하다니.”

“모기는 원래 흡혈하는 생물이 아니거든요.”

드르륵.

리웨이는 냉장고 서랍을 열며 말했다.

“대중적인 인식과 다르게 실은 피보다 식물성 수액을 주식으로 하죠. 흡혈하는 건 영양이 필요한 산란기의 암컷뿐이고.”

카트가 자동으로 냉장고 안에 박스를 넣기 시작했다.

“그 사실에 착안해서 어떤 박사는 어쩌면 우리가 흡혈귀라고 부르는 존재가 피 대신 음용할 수 있는 식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세웠죠.”

리웨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이디어는 그럴듯했지만, 가망은 없는 이야기였죠. 그런 신기한 식물이 있다면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었겠어요?”

“하지만 발견됐죠.”

리웨이는 그를 보았다.

“맞아요. 아직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오지를 찾아 안데스로 간 박사가 떨어진 크레바스(빙하의 표면에 생긴 깊은 균열)#에서.”

* * *

이반은 희미하게 웃었다.

“맞아.”

이게 꽃이라니…….

연하는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인간과 뱀파이어 사이의 전쟁은 채 일 년을 끌지 않았지만 파괴적이었다. 뱀파이어는 소수였으나 강한 육체 능력이 있었고, 인간은 다수였고 최첨단무기로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전쟁의 흐름을 단번에 바꾸어 버리는 일이 일어났다.

블란두스라는 스웨덴의 식물유전공학자가 안데스에서 미지의 붉은 꽃을 발견한 것이다.

안 그래도 어디서 들은 이름이다 싶었더니, 아까 읽은 책의 저자인 그 블란두스가 맞았다.

마리에테 블란두스 박사.

이반이 왔을 때 연하는 마침 박사가 꽃을 발견했을 당시의 기록을 읽고 있는 참이었다.

<구사일생으로 구출되어 지상으로 돌아온 나는 현지의 병원에 입원했다. 때는 여름이었고, 눈이 녹아 곳곳에 물웅덩이가 고인 안데스의 자연에는 산란기를 맞은 각종 생물들이 우글거렸다.

밤 내내 모기들이 날아드는 소리를 들은 나는 내일 잔뜩 물려 있을 것을 걱정하며 잠들었다.

그런데 일어나 보니, 전혀 물리지 않은 것이다. 모기들은 모두 머리맡에 두고 잔 꽃에 몰려들어 있었다.

그건 섬뜩한 광경이었다. 마치 붉게 타오르는 태양을 향해 온몸을 던져 경배하는 원주민들을 보는 것 같았다.

연구소로 돌아가 분석한 결과, 꽃은 엽록소의 포르피린 고리에 원래 들어 있어야 할 마그네슘 원자 대신 철이 들어 있었다. 마치 인간처럼. 그래서 꽃잎이 핏빛을 띤 것이다.

나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내 가설이 틀리지 않았음을. 뱀파이어의 만나(manna)#는 존재했다.>

“서양에서는 만나, 여기서는 서천 꽃밭에서 온 꽃이라고 하기도 한다지.”

이반은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네. 박사가 떨어진 동굴이 이승과 저승을 잇는 동굴이었을 거라고.”

연하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런저런 이야기 중 하나지만요.”

하지만 꽃은 자연 상태에서는 피만큼 충분한 영양분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 꽃의 주요 성분이자 인간 혈액의 헤모글로빈을 대체하는 ‘쿨리시다이닌’을 정제하여 유기 합성한 것이 바로 제약회사 제노아틱스를 돈방석에 앉혀놓은 하이마였다.

“물론 ‘꽃’이 완전히 새로운 건 아니었다죠?”

연하는 고기, 아니, 고기처럼 보이는 것을 찍어 먹으며 말했다.

“옛날부터 흡혈귀 사회에서는 알음알음 알려져 있었지. 급할 때 피 대신 먹을 수 있는 꽃이 있다고.”

이반은 말했다.

하지만 일단 강을 타고 내려오거나 우연히 발견된 군락 몇 개를 제외하면 원산지를 알지 못했고, 무엇보다 흡혈귀들은 이 꽃을 대량화하는 방법을 알지도, 필요를 느끼지도 못했다.

먹잇감은 주변에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따라서 꽃은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팁 같은 것으로만 전해져 오다가, 인간의 기술을 만나면서 새로운 분수령을 이룬 것이다.

“그런데 하이마라는 단어 자체가 피라는 뜻이라서 그런지 아직 우리가 피를 마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즉, 하이마는 ‘피’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실제로는 식물성 식품인 것이다.

그렇게 뱀파이어들은 인간의 피에 기생하며 살아온 기나긴 역사에 처음으로, 흡혈생물로서의 악명을 벗을 수 있었다.

또한 모든 뱀파이어가 인류의 적은 아님을 주장하는 소수 평화파의 목소리가 힘을 얻는 순간이었다.

“이건 고기 형태로 만든 거야.”

괜히 학명으로 호모 비벤스, ‘마시는 사람’이라고 하는 게 아니듯 그들이 섭취하는 기본 형태는 액체였다.

하지만 재단사가 직접 만드는 맞춤옷처럼 아무리 더는 불필요해도 인간이 향유하고 싶어 하는 것이 있듯이 루아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게 있었구나…….”

연하는 감탄한 듯이 중얼거렸다.

이쪽이 평소 먹는 것보다 맛이나 향미도 더 풍부했다. 마트에서 파는 공산품 초콜릿과 스위스 수제 초콜릿이 차이 나는 것처럼.

“맛있어요.”

“먹어본 적 없어?”

“음, 다른 제품으로 만든 거라면 루챠챠 정도…….”

이반은 순간 뭔가 하다가 그 웃긴 이름의 주스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셀레나가 군것질거리와 접목한 것들이 의외로 이익을 낸다고 한 적이 있었지.’

이반은 연하를 보았다.

‘여기까지 영향을 미칠 줄은 몰랐지만.’

“불량식품을 좋아하는구나.”

“그래서 소령님이 맨날 열아홉에서 자라지 않는다고 구박해요.”

“구박한다고?”

“네. 느려 터졌다고 곰이라하고…….”

이반은 ‘흠’ 소리를 내었다.

“루아스가 듣기 쉬운 말은 아닌데.”

“인간이었을 때 느린 편이었거든요. 밥도 가장 늦게까지 먹었고. 그런 제가 뱀파이어가 됐으니 아이러니한 일이죠.”

그가 빤히 보아, 연하는 이유를 묻듯 고개를 젖혔다.

“넌 아직 인간이었을 때 기억이 선명하겠구나.”

따지고 보면 연하가 뱀파이어로 산 기간은 12년……. 아직 인생의 반 이상은 인간이었던 아이였다.

“국장님은요?”

이반은 조금 웃었다.

“글쎄, 같은 사람이긴 했는지.”

연하는 포크를 물고 이반을 빤히 보았다. 그가 시선으로 이유를 묻자, 포크를 빼고 말했다.

“국장님은 인간 같으세요.”

“내가?”

이반은 아주 뜻밖인 이야기를 들은 얼굴이었다.

“루아스들은 뭐랄까, 표정이 좀 없는 편이잖아요. 렉스 씨도 좀 그렇고…….”

저 녀석은 인간일 때부터 그랬을 테지만…….

뭐, 지금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니까.

“아마 다들 별로 새로울 일이 없어서 그럴 거야.”

“국장님은 그렇지 않으세요?”

그는 웃는 얼굴을 풀지 않았다.

“난…….”

그의 내부는 오래전에 텅 비어버렸다.

이제는 하늘의 별을 보며 감상에 젖는 일도, 지평선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해하는 일도 없어졌다.

만약 금은보화에 대한 전설을 듣고 그라는 무덤을 파낸 도굴꾼이 있다면, 먼지만 굴러다니는 텅 빈 속을 보고 실망을 금치 못할 것이다.

이제 그는 그저 습관의 무덤이라고 할 만한 존재였다.

‘하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군.’

누군가가 그에게 인간성이란 것이 남아 있다고 봐주는 기분이.

그때 연하는 옆을 보았다가 눈을 깜빡였다. 복도에 웬 못 보던 석상이 서 있는가 싶었더니, 렉스였던 것이다.

“언제 오셨어요?”

이반은 렉스를 돌아보았다.

“아까부터 저기 서 있었는데.”

연하는 미간을 좁혔다. 전혀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워낙 기척을 지우는데 탁월한 녀석이다 보니 아직 어린 뱀파이어로서는 눈치채지 못할 수 있는데 자존심이 상하는 모양…….

생각하는데, 연하가 말했다.

“식사하셨어요?”

렉스는 복도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오는 이가 없었다. 그제야 자신에게 하는 말임을 깨달은 것 같았다.

이반도 의외의 것을 깨달았다.

‘그렇군. 보통은 그런 걸 먼저 묻기 마련이겠지.’

어느새 그런 상식적인 것이 더 낯설어져 버렸다.

“괜찮습니다.”

렉스가 무심하게 대답했지만, 연하는 좁힌 미간을 펴지 않았다. 그리고 접시를 보았다가, 렉스를 보았다가, 다시 접시를 보았다가…….

이반은 묘한 웃음을 지으며 일어났다. 그리고 연하의 옆자리로 고갯짓했다.

“앉아.”

그의 말에 두 번 질문하지 않는 게 그나마 장점인 렉스는 자리에 앉았다. 이반은 다시 불 위에 프라이팬을 얹었다. 그사이에 연하가 렉스에게 말을 걸었다.

“재단사님은 잘 가셨어요?”

“네.”

그리고 정적이 감돌자 연하는 눈을 굴리더니 다시 심기일전하고 물었다.

“고기 좋아하세요?”

“아뇨.”

덧붙이는 말도 없이 그렇게 대답하고 말 줄은 몰랐는지 연하는 ‘아…….’ 소리를 냈다. 자신에게도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깨달은 것 같았다.

녀석을 상대로 괜한 노력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연하가 진지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로 이랬다.

“지구 환경에 좋은 선택이네요. 저희가 고기까지 좋아했으면 어떻게 됐겠어요?”

“네?”

렉스는 황당하다는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이반은 큭 웃었다. 렉스는 놀란 듯이 그를 돌아보았고, 연하는 그가 왜 웃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이반은 렉스의 앞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연하는 알 길이 없겠지만, 이반이 렉스에게 처음으로 요리라는 것을 해준 순간이었다. 그를 감염시키고 떠난 이래.

애초에 그는 클리엔테스라는 것을 키울 생각 따위 없었던 탓이다.

‘이래저래 셋이나 생겨 버렸지만.’

이반은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을 보았다.

렉스는 여전히 무표정했으나, 이 상황을 낯설어하고 있었다. 제 앞에 놓인 음식이 살아 있는 낙지라도 되는 양 쳐다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연하는 그가 먹나 먹지 않나 감시라도 하듯 보고 있었다.

‘만약 필립까지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안 드세요?”

연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렉스는 그제야 포크를 들었다.

“먹습니다.”

어쩐지 이 자매는 그에게 뭔가 먹이려고 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렉스는 음식을 먹었다.

맛있었다.

* * *

“애초에.”

탁.

리웨이는 냉장고 서랍을 닫았다.

“모기가 박멸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는 이유도 흡혈 행위 자체보다 말라리아나 뇌염 같은 위험한 병을 옮기기 때문이니까요.”

“하긴, 인간을 물지 않고 꽃의 꿀로만 살아가는 모기라면 굳이 박멸해야 할 필요가 없겠죠.”

도영은 말했다.

“어쨌든 모기도 생태계 균형에 일익을 담당하는 존재니까요.”

리웨이는 몸을 돌리고 쓰게 웃었다.

“모기가 사라지면 그 천적에게는 얼마나 신나는 세상이 되겠어요?”

그때였다.

삐잉. 삐잉. 삐잉.

경고가 터졌다. 리웨이는 흠칫 천장을 보고, 도영은 두말할 것도 없이 바로 뛰쳐나갔다.

* * *

경고음에 연하는 당장 포크를 내려놓고 달려 나갔다.

“가볼게요!”

이반은 순식간에 사라지는 연하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렉스.”

“가고 있습니다.”

렉스도 이미 일어나고 있었다.

두 사람이 바람처럼 사라지고 난 자리, 이반은 남아 있는 세 사람분의 식기를 보았다. 쓴웃음이 올라왔다.

“다시 이런 가족 놀이는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가던 도중, 광야에서 먹을 음식과 마실 물이 없어 방황하고 있을 때에 여호와가 하늘에서 날마다 내려 주었다고 하는 기적의 음식.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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