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 짐승-21화 (21/104)

21화. ANTIAIRCRAFT

“속옷은 이거…….”

속옷을 보여주려고 바지를 끌어올리려는 손을, 이반은 당장 붙잡았다.

“그런 건 보여주지 않아도 돼.”

말하고 보니 아닌 것 같아 다시 말했다.

“아니, 보여주지 마.”

다만 필요 이상으로 화내고 말았다는 건, 연하의 놀란 눈을 보고 알았다.

연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반은 낭패감을 느끼면서 연하의 손을 놓았다. 그런데 막 떠나는 손을, 연하가 도로 잡았다.

“근데 왜 자꾸 아버지라고 하세요?”

이반은 물끄러미 그녀를 보았다.

“너만 한 딸이 몇 명은 더 있어도 이상한 나이는 아닌데.”

“그래도 제 아버지는 아니잖아요.”

샤워를 했는지 그녀의 피부에서 싱그러운 향이 났다. 아까부터 맡기는 했지만, 이런 거리에, 이런 공간에서는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직접 마주하기 전까지는 그도 알지 못했던 부분인데, 외모는 어리지만 그녀의 눈빛은 전혀 아이 같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이 안에 있는 것은 서른하나의 성인여성인 것이다.

“내가 아버지라면 싫을 것 같아?”

“어쨌든 아니니까.”

그러면서 살짝 눈을 흘겼다.

“국장님 같은 아버지가 어디 있어요?”

이반은 피식 웃었다.

“내가 어떤데?”

그의 얼굴, 그의 눈동자…….

무엇 하나 섹시하지 않다고 느껴지지 않는 부분이 없었다. 낮은 목소리도, 윤기가 도는 눈동자도, 벌어진 옷깃 사이 굵은 울대도.

어쩐지 거리가 더 가까워진 것 같았다.

아까까진 그의 뒤로 천장의 조명이 보였는데 지금은 그에게 가려져 있었다. 둘 사이에 안전지대가 사라질수록 연하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의 그늘에 잠겨 숨이 가빠지는 기분이었다.

“섹시해요.”

‘어, 나 또 뭔가 필터 없이 말하지 않았나.’

말하고 바로 생각하는데,

“뭐?”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는지 그가 놀랐다. 연하는 빠르게 눈을 굴렸다.

“……애 아빠라기엔?”

이반은 묘한 표정이었다. 연하는 그가 말하기 전에 꾸벅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국장님께 드릴 말은 아니었네요.”

“아니…….”

말하면서 아래쪽을 본 그가 허리를 숙여 휴대용 청소기를 들어 올렸다.

“여기 있네.”

그는 청소기를 건네주었다.

“내려가 있어. 옷 좀 갈아입고 갈게.”

“네.”

연하는 조금 다급히 방을 나섰다. 이반은 팔짱을 끼고 웃는 입가를 손으로 짚었다.

‘저런 성격이었는지는 미처 몰랐군.’

보고서 너머 연하는 조용한 성격이었다. 뱀파이어라는 사실 외에 눈에 띄는 점은 없었다. 일도 평범하게 했고, 생활도 평범했다.

그래서 약간은 이 모든 상황에 위압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는데, 지금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직접 마주하자 역시 보고서만으로는 알 수 없었던 생동감이 총천연색으로 와 닿았다.

그는 웃으며 손을 내렸다.

‘하지만 안 되지.’

여자는 많지만, 딸은 하나니까.

그리고 반쯤 화석이 되어버린 몸에 성욕은 더 이상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예전에는 그런 소모적인 것이 쾌감으로 느껴졌다는 게 우스울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드레스룸을 나서는 길에 붙박이 거울이 눈에 띄었다.

“아직 쓸 만은 한가 보군.”

이반은 심상하게 말하고 드레스룸을 나섰다.

1층으로 내려온 연하는 청소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바람을 뿜으며 움직이기 시작하는 청소기를 지켜보았다.

‘뭐였지.’

방금 무슨 일인가 있었던 것 같은데, 무슨 일이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왠지 몸이 노곤하고…… 오금이 저린 느낌.

오금을 긁고 있는데, 청력이 좋은 귀에 얼핏 서랍을 여닫는 소리가 났다.

드르륵. 탁.

갑자기 귀에 온 정신이 집중되면서, 그가 옷 갈아입는 모습을 상상하고 말았다. 상체뿐이라도 벗은 모습을 알고 있어서 상상은 더욱 생생했다.

연하는 고개를 저었다.

반 벗은 남자의 몸쯤이야 지겹게 보는 것이었다. 도영만 해도 어지간한 속옷 모델 뺨치는 수준이라 새로울 것도 없는…….

‘그래도 꽤 볼 만한 것이긴 했지.’

사실 루아스가 기초대사량이 인간과 비교할 수 없게 좋아서 그렇지 관리를 하지 않으면 몸이 망가지는 건 다르지 않았다. 동물원에서 편하게 산 치타가 주는 족족 받아먹다가 돼지가 되듯이.

워낙 기본이 탄탄해서 오래 걸릴 뿐이지 결국 생물의 기본 원리에서는 벗어날 수 없었다.

정신이 들었을 때, 공간은 조용했다.

연하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사춘기 소녀 같은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사춘기 소녀가 이렇게 진한 상상까지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척.’

연하는 불현듯 깨달았다.

낯선 기척은 바로 뒤에 서 있었다. 너무 넋을 놓고 있었다.

허리 안쪽에 꽂아놓은 글록의 손잡이를 잡아 뽑으며 소파 뒤에 서 있는 남자의 멱살을 휘감아 당겼다. 동시에 그대로 등받이에 엎어 팔로 고정시켰다. 눈 깜빡할 사이였다.

연하는 남자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밀어붙였다.

“누구야.”

중년 남자는 아무리 봐도 낯선 얼굴이었다. 잘 모르는 행정 직원이라고 해도 혼자 국장 관사에 들어올 수 있을 리 없었다.

즉, 수상한 남자.

“대공의 개야?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왔지?”

남자는 눈이 튀어나오도록 크게 뜨고 있을 뿐이었다. 연하는 이를 갈았다.

“대공의 개냐고 묻잖아!”

“재단사입니다.”

대답한 사람은 남자가 아니었다. 렉스가 어느새 남자 뒤에 서 있었다. 낮에 본 복장에 캡 모자를 쓰고.

연하는 얼떨떨했다.

“재단사……요?”

재단사, 라고 해도 재단사가 왜 여기 있는지 상관관계를 잘 알 수 없었다.

아니, 그전에 요즘 재단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있었던가.

그때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이반이 2층에서 내려오다가 그 풍경을 보고 멈칫했다.

“재단사님?”

“네에…….”

중년 남자는 목이 졸려 겨우 대답했다. 연하는 눈을 깜빡이고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고통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대공의 개가 아니, 세요?”

* * *

연하는 문밖에서 슬그머니 방안을 보았다. 재단사가 국장의 치수를 재고 있었다.

국장은 내일 다시 오거나 다른 사람을 보내도 괜찮다고 말했지만, 재단사는 할 일은 하겠다며 줄자를 꺼내든 진정한 프로였다.

“살의를 가진 기척이 아니라는 걸 알지 않았습니까?”

문 안쪽에 서 있는 렉스가 물었다.

“잠깐 딴 생각을 하느라…….”

무슨 생각이었기에 그런 걸 헷갈리느냐는 표정에 뒷말이 흐려졌다. 물론 그는 견고한 무표정이었기 때문에 제 피해망상일 가능성이 컸다.

“아무튼 취임식을 하신다고요…….”

국장 관사와 재단사의 관계는 그렇게 밝혀졌다. 정복을 가져오지 않아 치수를 재기 위해 마침 재단사를 부른 날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미리 와 있었던 것이고.

렉스는 절절매는 연하를 지켜보다가 말했다.

“대공을 꽤나 미워하는 것 같군요.”

멈칫하고 렉스를 돌아보는 까만 눈동자가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마치 그 이름이 내부의 어떤 스위치를 켜듯.

코드네임 ‘ANTIAIRCRAFT.’

지상에서 공중의 목표물을 타격하는, ‘대공(對空).’

오로지 인류의 말살을 목표로 하는 비인간 테러리스트 조직 SN의 리더로 알려진 자.

이름도, 정확한 나이도, 인간이었을 때 어떤 인물이었는지조차 불명으로, 마치 실체가 없는 유령처럼 소재지 실마리가 전혀 잡히지 않는 인류의 악적.

“절 죽인 존재니까요.”

그리고 12년 전 강연하를 살해한 뱀파이어.

그런데 유럽 중심인 군사위원회 쪽에서 정한 코드네임이라서 모든 언어에서의 어감까지는 고려하지 못한 것 같았다. 한국어에는 묘한 동음이의어가 있기 때문이었다.

‘대공……. Grand duke라.’

어쩌면 어울리는 이름일지도 몰랐다.

악의 대공.

“기억이 납니까?”

그때 죽어가던 소녀와 지금 그녀는 많이 달라 보였다. 외모는 영원히 그 순간을 박제해 놓았으나, 무지의 껍질을 벗은 눈빛은 맑았다.

“하나도 잊지 않았어요. 웃는 모양새까지도.”

이제는 흔적도 남아 있지 않지만 연하는 배를 짚었다. 무의식중인 것 같았다.

렉스는 그녀가 단지 어디까지 기억하나 궁금했을 뿐인데,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지 재단사를 넘어 이쪽을 보는 눈빛이 살벌했다.

지금까지 어떻게 참았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하긴.’

렉스는 눈을 내리깔았다.

‘필립을 그렇게 잃었으니까.’

“다 끝났습니다.”

그때 안에서 재단사가 말했다. 바로 반응해서 돌아보는 강연하는, 강아지를 연상시켰다.

“수고하셨습니다.”

재단사는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때만을 기다린 연하는 당장 들어가 손을 내밀었다.

“제가 들어드릴게요.”

“아뇨, 괜찮…….”

“제가 들어드리겠습니다!”

재단사는 허허 웃고는 두 번 사양하지 않았다. 그에 연하가 더 쩔쩔매며 나가는 뒷모습을, 이반은 피식 웃으면서 보았다.

“그럼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입구에서 재단사는 짐을 받아들고 말했다.

“정말 정말 정말…….”

연하는 말하면서 점점 몸이 낮아지더니 거의 절을 했다.

“죄송합니다.”

“허허, 아니,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말도 없이 뒤에 가서 선 제 잘못도 있으니까요.”

이반은 웃으며 말했다.

“조심히 가십시오.”

렉스가 바깥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밖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그럼.”

두 사람이 나가고 나서야 연하는 일어났다. 그러고도 못내 걱정스러운 얼굴을 현관에서 돌리지 못했다.

“괜찮으시겠죠?”

“정말 다쳤으면 이미 병원에 갔을 거야.”

이반은 연하를 빤히 보며 덧붙였다.

“정말 착하게 컸구나.”

갑자기 연하는 얼굴이 뚱해졌다.

“또 아버지 같은 말.”

이반은 물끄러미 연하를 보았다.

‘이 녀석 지금 은근슬쩍 반말하지 않았나.’

연하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우물쭈물 말했다.

“근데 비교도 되지 않게 맛있는 걸 준다고…….”

이반은 ‘아아’ 소리를 내었다.

“그것 때문에 왔구나. 좀 섭섭해지려고 하는데.”

“네? 아니, 그게…… 그럼 뭐 때문에 와요?”

“글쎄.”

연하는 그의 웃는 얼굴이 정말로 이해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이런 걸 보면 아직 어린 것 같기도 한데 말이다.

“이리 와.”

연하는 그를 따라 부엌으로 갔다. 이반은 불 위에 프라이팬을 올려놓고 냉장고 아래쪽 서랍을 열었다.

순간 배양균 보관 냉장고인 줄 알았다. 푸른 불빛 아래 무언가 서류들처럼 가지런하게 꽂혀 있어서.

이반이 꺼낸 것은 진공포장 된 스테이크용 고기였다.

“혹시 그거 고기예요?”

연하는 조금 주저하며 물었다. 인간이었을 때부터 고기는 잘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채식주의자의 ‘주의’를 고수할 정도로 신념이나 믿음이 있었다기보다는 그냥 고기의 맛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뱀파이어가 되었다는 게 인생사의 아이러니한 점이지만, 다행히 뱀파이어도 채식 비슷한 걸 하고 살 수 있는 세상이니까.

어쨌든 그로서는 생각해서 초대한 걸 텐데 차마 말할 수 없어서, 연하는 최대한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아니.”

‘아무래도 고기처럼 보이는데.’

아니라는데 그렇다고 우길 수도 없어서 지켜보는 사이 이반은 고기를, 아니, 고기처럼 보이는 시뻘건 덩어리를 포장에서 꺼내 달궈진 팬에 올렸다.

고기 굽는 냄새가 퍼졌다. 연하는 자기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랐다.

뱀파이어라고 육식성은 아니기 때문에 불가피한 욕구만 제외하고 딱히 식성이 바뀌었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인간이었다면 집 기둥을 골백번 뽑을 것처럼 먹어대는 것만 제외하고.

‘그런데 왠지 이 냄새가…….’

이반은 플레이팅까지 마친 접시를 앞에 내려놓았다.

마음 같아서는 한입에 집어 먹을 수 있었지만, 문명인이니까. 그가 냅킨 위에 놓아준 칼과 포크로 잘라 조심히 한 입 먹었다.

그리고 연하는 놀란 눈으로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맛있……. 설마 이거 ‘꽃’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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