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PAIN
이반은 불이 켜진 관사를 의아하게 보았다. 그리고 거실 소파의 팔걸이에 걸쳐진 두 발을 발견했다.
누구의 것인지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부르려고 다가간 이반은 멈칫했다.
연하는 엎드려 누워 책을 읽고 있었다. 주변에는 빈 과자 봉지들이 늘어져 있고, 검어서 더 티가 잘 나는 가죽 소파에는 과자 부스러기가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다.
과자를 어떻게 먹었는지 짧은 트레이닝 바지를 입은 허벅지에도.
이반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부주의한…….’
그리고 그제야 자신이 딸이라고 부르는 여성의 허벅지를 너무 뚫어지게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연하는 머리맡에 있는 과자 상자를 손으로 더듬었다. 하지만 더 이상 잡히는 게 없자 놀란 듯 일어나 앉았다.
“어, 다 먹었어? 안 되는데…….”
“왜 안 됩니까?”
연하는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를 보고는 관등성명이라도 외칠 것처럼 벌떡 일어났다.
텅 빈 과자 상자를 뒤로 감추면서.
“어, 언제…….”
말하면서 주변에 너저분한 과자 봉지와 부스러기를 발견하고는, 연하는 흘긋 그를 보았다가 맨발로 열심히 끌어 모았다.
물론 그게 제대로 될 리 없었지만, 고군분투하는 그녀의 발가락이 귀여웠다. 그리고 그걸 귀엽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더 놀라웠다.
“언제 오셨어요?”
“방금 왔는데, 왜 다 먹으면 안 됩니까?”
“그게…….”
이반은 정말로 궁금했기에 대답을 기다렸다. 연하는 그가 포기하지 않을 거라 깨달았는지 한숨처럼 말했다.
“사실 국장님 드리려고 가지고 온 건데……. 하나만 먹으려다가 저도 모르게 다 먹어버려서요. 그게, 정말 하나만 먹으려고 했는데. 아무튼 그만큼 맛있는 거라는 증거…….”
연하는 자신이 횡설수설한다고 생각했는지 찡그린 채 말을 멈추었다.
‘웃으면 안 된다.’
이반은 무표정한 얼굴로 생각했다.
이 아이는 자기 나름대로 진지한 순간이니까.
그때 그녀가 읽던 책에 시선이 멈추었다. 연하는 볼을 긁적였다.
“이건 올려져 있어서……. 읽어도 괜찮은 거였는지 모르겠네요.”
이반이 책을 들어 올리자, 과자 부스러기가 우수수 떨어졌다. 연하는 민망한 얼굴이 되었다.
이반은 피식 웃으며 과자 부스러기를 털고 책을 건네주었다.
“물론이죠. 오히려 블란두스 박사의 책은 루아스로서 꼭 한 번 읽어볼 가치가 있으니까.”
연하는 책을 받아들었다.
“사실 책이 어려워서 무슨 소리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연하는 갑자기 얼굴이 밝아졌다.
“아, 루아스가 루아 엑스라는 건 알게 됐어요. 저도 루아스가 s를 붙여서 복수형인 줄 알았거든요.”
이반은 잠깐 연하를 보았다.
“난독증은 다 고쳐졌군요.”
연하는 깜짝 놀랐다,
“그걸 어떻게 아세요?”
충격 때문이었는지 루아스가 되고 한동안 어떤 글자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도리어 토할 때까지 글자만 노려보고 있은 끝에, 겨우 난독증을 고칠 수 있었다.
“강 상사에 대한 건 전부 압니다.”
물론 국장이니까 그녀의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전 국장님 성함밖에 모르는 것 같은데…….”
이반은 갑자기 자신이 나이가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쉬워졌다.
노인이 되었다면 손녀를 대하듯이 이 아이를 마음껏 쓰다듬어 줄 수 있었을 테니까.
딱히 남의 시선을 신경 쓰는 건 아니었지만, 둘 다 젊은 모습으로는 꽤 부적절해 보일 수 있다는 사실 정도는 인식하고 있었다.
“읽고 있어요.”
“네.”
연하는 계단으로 가는 그를 보다가 말했다.
“국장님.”
그는 돌아보았다.
“말씀, 놓으셔도 돼요.”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그리고 그는 2층으로 올라갔다.
연하는 바로 몸을 낮춰 과자 봉지와 부스러기를 줍기 시작했다. 책에 정신이 팔려 제 방에 있을 때처럼 행동해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부스러기는 카펫과 소파의 틈 사이에 끼어 잘 빠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청소기가 필요할 것 같은데.’
보통 먼지나 부스러기가 떨어지면 AI가 자동으로 청소기를 돌리는 법인데, 어째 조용했다. 그래서 아무리 둘러봐도 자동은커녕 일반 수동 청소기도 보이지 않았다.
연하는 계단 아래서 귀를 기울였다.
어렴풋이 물소리가 들려왔다. 세면대의 물소리였다. 그냥 기다릴까 싶었지만, 모델하우스 같은 곳이라 부스러기들이 유난히 두드러져 보였다.
연하는 2층으로 올라갔다. 복도 끝에 있는 방문의 틈으로 불이 새어 나왔다.
“국장님.”
막 문고리를 잡으려는데, 올라오는 소리를 들었는지 먼저 문이 열리고 이반이 빛을 등지고 나타났다.
그늘에 잠겨 채도가 낮은 붉은 눈동자가 조용히 그녀를 보았다.
“무슨 일?”
연하는 정신을 차렸다. 왜 자꾸 이 남자를 멍하게 쳐다보게 되는지 알 수 없었다.
“AI가 꺼져 있는 것 같아서요.”
“아아…….”
이반은 천장을 보았다.
“꺼놨어.”
“왜요?”
“오히려 불편해서.”
그리고 난감한 듯 웃었다.
“옛날 사람이라 그런지.”
은둔자 이반…….
국장의 별명이 생각났다. 얼마나 옛날이냐고 물어 보려는데 그가 먼저 물었다.
“켜줄까?”
“아뇨. 그냥 수동 청소기만 있으면 될 것 같은데……. 부스러기만 청소하면 되니까요.”
“휴대용이라면 드레스룸 어디에서 본 것 같은데.”
“제가 가져갈게요. 씻으세요.”
“그래.”
그가 먼저 들어갔다. 따라 들어가자, 집처럼 톤이 낮고 깔끔한 침실이 보였다. 이반은 안쪽에 있는 욕실로 들어갔다. 문 너머로 사라지는 등을 보고, 연하는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정리된 공간에서 포근한 냄새가 났다. 옷들이 종류별로 줄지어 걸려 있고, 아래쪽에 윤이 나는 구두들이 놓여 있었다.
‘남자 느낌이네.’
아무래도 여자보다 남자가 많은 직군이어서 남자 느낌이야 종류별로 지겹도록 받지만, 이런 화이트칼라 같은 느낌은 오히려 낯설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물건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꼭 비즈니스 출장 온 사람의 호텔 옷장 같은 느낌을 줬다.
“아, 청소기.”
연하는 넋을 놓고 구경하다가 여기 들어온 목적을 상기했다.
한편 욕실 안에 있는 이반은 아무래도 자신이 찾아주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소기, 청소기…….”
밖에서 계속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밖으로 나갔다.
“찾았어?”
“네, 여기 어디…….”
“내가 꺼내줄게.”
마침 연하가 서 있는 자리 어디서 본 것 같아 다가갔다. 몸을 숙이고 들여다보는데, 연하가 옆에서 우물거리다 말했다.
“죄송해요. 자꾸 번거롭게 해드리는 것 같아서…….”
“괜찮아. 너라면.”
“왜요?”
연하는 갑자기 물었다.
“고작 며칠 전에 처음 봤는데……. 저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세요?”
이반은 잠깐 자신의 행동들을 되짚어보았다.
“글쎄, 평범하지 않았나.”
물론 그마저도 특이한 일이기는 했지만, 연하는 그 사실을 모를 테니 말이다.
“전혀요.”
평범한 배려라는 게 존재하지 않은 세상에서 온 듯이 단호함이 서린 눈동자였다.
어째서 이 아이가 이런 눈을 하는지─
이반은 짧지만 강한 분노를 느꼈다.
물론 인간이었을 때처럼 평범하게 살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건 불가능한 이야기였으니.
하지만 차라리 죽음이 자비로운 고통의 양막을 뚫고 삶으로 돌아온 그의 사도를 인간들 사이에 살도록 내버려두면서 기대한 것이 아예 없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수중동물.’
확실히 도영 드페흐가 한 말은 의미가 있었다.
한순간에 육상동물에서 수중동물이 된 것 같은 엄청난 변화를 겪는 열아홉 살짜리 소녀에게 그는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이미 너무 오래 수중동물로 살았고, 땅을 걷는 법이 희미했다.
그리고 한 번 실패했으니까.
“사실 널 본 적 있어.”
“네? 언제요?”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는지 연하는 깜짝 놀랐다.
“작년 10월에.”
“작년 10월이라면……. 아.”
언제였는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장례식은 런던 교외의 우울한 잿빛 하늘 아래에서 열렸다.
대장으로 예편한 영국 서민원(하원)# 의원, SIS(영국의 비밀정보부, 통칭 MI-6)#의 전 국장, MCTC의 설립자이자 초대 사무총장, ‘예레반의 영웅’ 라디프 페인의 장례식치고 지나칠 만큼 소박한 규모였다.
그것이 고인의 뜻이었다. 그런데 고인이 미리 작성해 둔, 장례식에 참석 가능한 인명부에 연하가 있었던 모양이다.
군 관련자만 해도 고위급들이 기라성 같은 자리여서 부사관에 불과한 연하는 거의 이목을 끌지 않았다. 직접 손질한 것 같은 단정한 정복을 입고 내내 구석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주변을 한 번도 둘러보지 않더구나.”
피 웅덩이에 잠겨 죽어가던 소녀는 파란 윤기가 흐르는 눈으로 비석을 응시하고 있었다.
페인이 장례식에 그녀를 부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를 만날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지만, 어쩐지 바라고 말았다.
그녀를 발견한 순간, 눈앞을 오가는 검은 형체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로 그를 마주 보길.
우울감에 어두워진 눈에 빛이 번지기를…….
“페인 총장님은 제가 루아스가 되고 처음 만난 분이었거든요. 항상 친절하게 대해주셨어요. 바쁘셔서 자주 뵙지는 못했지만, 늘 메일로 안부도 물어주셨고…….”
연하는 모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테러 같은 걸로 돌아가실 분이 아니었는데.”
페인 총장은 췌장암 말기였다.
그런데 병상에서 일어날 수조차 없는 늙은이를, SN은 굳이 노력과 인력을 써가며 암살한 것이다.
페인 총장이 얼마나 그들에게 눈엣가시였는지 생각하면 무리도 아니지만, 무차별적인 테러를 일삼는 SN으로서도 과한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총장도 어느 정도 예감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병실에 미리 설치해 놓은 폭탄을 터뜨려 SN 간부를 포함한 대원 셋을 저승길에 데려갔다.
과연 전쟁 당시 뱀파이어의 아지트로 오인받아 대규모 폭격이 예정된 예레반에 도리어 부대를 끌고 들어가 폭격을 막아낸 담력이었다.
“미안합니다. 당신에게 너무 큰 짐을 지워서.”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총장은 말했다. 손등을 덮은 그의 손이 따듯했다. 처음 루아스로 눈뜬 그녀의 손을 잡았을 때처럼…….
그것이 마지막일 거라고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새삼 고통스러워, 연하는 일부러 더 밝게 말했다.
“하지만 거기 국장님이 계신 줄은 몰랐어요.”
아마 이래저래 엇갈려 보지 못했을 터. 그를 보았다면 기억 못할 리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을…….
“있었어.”
널 보고 있었어.
그녀를 똑바로 보는 눈동자가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연하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다시 다물었다. 도저히 이런 눈빛 앞에서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평범한 반응도 귀여워서, 이반은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이 낯설었다.
아이는 아직 인간의 향기를 풍겼다.
생명력, 감정, 그런 것들을.
손을 대면 사랑스러운 색채가 묻어날 것 같았다.
사실 그는 페인이 연하를 장례식에 부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에게 이 아이를 보라고 이야기한 것이다.
그가 포기한 클리엔테스가 이렇게 잘 자랐다고.
“그래서.”
이반은 갑자기 말했다.
“아버지의 마음으로 하는 말인데, 밖에 다닐 때 그런 바지는 안 입는 게 좋지 않을까.”
자신이 이런 소리를 하게 되는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 유적에서 일어난 사람처럼 고리타분한 소리를 한다고 생각할지라도 현대에도 남자가 남자인 한, 이반은 오늘 기필코 이 말을 해야 했다.
하지만 연하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제 바지가 왜요?”
“바지보다 속옷 같아서.”
“이게 왜 속옷이에요?”
연하에게는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장점이랄까 단점이랄까 아무튼 그런 귀여운 점이 있었는데, 더구나 그다지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편 같았다.
그러니까 연하는 바지를 속옷에 빗댄 비유를 이해하지 못했고,
‘속옷은 이렇게 생기지 않았다.’
그 사실을 증명하겠다는 외골수적인 생각밖에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속옷은 이거…….”
속옷을 보여주려고 바지를 끌어올리려는 손을, 이반은 당장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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