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 짐승-19화 (19/104)

19화. LUA X

“역시 고치는 건 무리겠지.”

규하는 끊어진 팔찌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은 인근 식당에 마주 앉아 있는 상태였다.

“그 정도로 소중한 물건이라면 좀 더 조심하는 편이 좋지 않았습니까?”

“뭐야, 그 여자친구가 바라지도 않은 터무니없는 해결책을 내놓고 괜히 구박만 당하는 남자친구 같은 말은? 원래는 하고 다니지도 않아. 끊어질까 봐 걱정돼서. 그런데 어제는 너무 일진이 사나워서…….”

규하는 입을 다물었다. 행운의 힘을 얻으려고 했다─고는, 너무 순정만화 주인공 같아서 차마 제 입으로 할 수가 없었다.

“이런 걸 고쳐 주는 사람도 있나.”

“오래돼 보이는군요.”

“응. 내 쌍둥이 유품이거든.”

규하가 너무 심상하게 말해서, 오히려 렉스가 입을 다물었다.

‘강연하 이야기를 이렇게 쉽게 할 줄은.’

들려오는 말이 없자 규하는 눈을 들었다.

“부모님은 언제 오시냐고 물어봤다가 조실부모했다는 대답을 들은 친구 같은 얼굴이네. 못할 이야기 한 것처럼 의기소침하지 말라고.”

“의기소침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너무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기에.”

규하는 어깨를 으쓱이고 팔찌를 가방에 넣었다.

“누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꼭 사연 있어 보이는 쓸쓸한 미소와 함께 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요즘 같은 세상에 사연 한둘 없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사고 후 그녀가 목격자로서 경찰조사를 받은 녹화화면을 보았다.

여기저기 치료받은 모습으로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규하는 심한 히스테리를 일으켰다. 울부짖고, 소리치고, 호흡곤란 증상까지 보여서 경찰조사는 수없이 중단되었다.

“연하는 죽지 않았어요!”

“연하가 죽을 리 없어요. 거짓말하지 말아요!”

그녀는 계속해 소리쳤다. 마치 인간이 내뿜을 수 있는 모든 격정을 방출시키는 것 같이. 마침내 그녀가 눈을 까뒤집으면서 기절하자, 의사가 달려 들어오면서 화면은 끝났다.

이런 차분함을 얻기까지 그녀가 겪어야 했던 시간이 어떤 것이었을지 짐작되지 않았다.

“그럼 물어봐도 됩니까?”

“아니, 가정사를 나누기엔 좀 이르지. 우리 겨우 어제 만났잖아.”

렉스는 미간을 좁혔다. 어쩌라는 건지, 종잡을 수 없는 여자였다.

“근데 그건 안 벗어? 혹시 얼굴에 그려놓은 건 아니지?”

규하는 그가 실내에서도 고집하고 있는 선글라스를 가리켰다.

“쓰고 있는 게 편합니다.”

“그러고 보니 그건 절대 벗으려 하질 않네. 수상한데?”

렉스는 침묵했다.

‘아무래도 수상해 보이겠지.’

내키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선글라스를 벗었다.

규하는 다시 잔에 물을 따르다가 무심결에 그를 보고 굳었다.

금세 잔을 채운 물이 밖으로 흘러넘쳤다.

“으츠츠.”

규하는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렉스가 뽑아 건네준 휴지로 물을 닦았다.

“내가 누구 얼굴 보고 놀라는 사람이 아닌데 이번엔 좀 놀랐다.”

혹시 티가 나는 걸까.

렉스는 조금 긴장했다. 하지만 규하는 특별히 경계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특이하네. 요즘 금발에 푸른 눈 가진 사람 보기 쉽지 않은데.”

대원들이 나갈 때 종종 쓰는 걸 봤지만, 직접 컬러렌즈를 껴보기는 처음이었다. 발전한 기술 덕에 본인 눈동자처럼 자연스러운 컬러렌즈 너머로 보는 거울은, 이상한 느낌이었다.

다시 푸른 눈동자로 세상을 보는 날이 올 줄이야.

어쨌든 물건을 찾아주러 오면서 쓸데없이 경계심을 일으키지 않으려 했을 뿐, 특별히 그녀를 속이려는 의도는 없었다.

‘아마도.’

“그쪽도 혼혈인 것 같지 않군요.”

“응. 백퍼센트 한국인. 요즘 사람들이 하는 말로 고루하기 짝이 없는 순혈 둘이 만났네. 건배나 합시다.”

그녀가 잔을 내밀어서 얼떨결에 잔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게 건배를 할 일인가 싶어 의아한 표정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때 식당 직원이 국밥을 내왔다.

“식사 나왔습니다.”

규하는 수저통으로 손을 뻗었다. 그런데 수저가 이미 앞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혹시 어린 동생 있어?”

“아뇨.”

“아니면 거동이 불편한 부모님이라던가?”

렉스는 잠깐 그녀를 보았다.

“비슷한 분은 있었습니다.”

“아, 정말? 그냥 물어본 건데. 그래서 남을 잘 챙기는구나.”

렉스는 그제야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수저나 휴지, 잔 같은 걸 챙겨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반은 자신이 노인네처럼 보이냐고 싫어하기 때문에 오래 전에 죽은 버릇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나와 버렸다.

“하지만 사지 멀쩡한 날 너무 살뜰히 보살펴 줄 필요는 없는데.”

규하는 국에 밥을 말면서 말했다.

“예. 실례했습니다.”

“뭐, 실례했을 것까진 없고. 거 참 예의 바른 청년이네.”

외모를 보고 그를 동생으로 판단한 모양이었다.

사실 외모로도 그녀와 그리 차이나 보이지 않는데.

렉스는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실제 나이를 밝힐 수도 없었다.

“안 먹어?”

규하가 꼭 뺏어먹을 것처럼 물어, 렉스는 한숨을 삼키고 숟가락을 들었다.

“먹습니다.”

* * *

두 사람은 식당을 나왔다.

“잘 먹었습니다.”

“그러게. 생각보다 엄청 잘 먹어서 깜짝 놀랐네.”

신속하고도 정갈하게 국밥 두 그릇을 뚝딱 해치우는 거 보고 박수를 다 쳤다. 왠지 한 그릇 더 먹을 수 있는데 예의상 참은 것 같았다.

요즘 외국인이 국밥을 먹는 모습이 낯설 건 없지만, 동화 속의 왕자님 같은 남자와 국밥의 조합은 확실히 묘했다.

“참, 번호가 뭐야?”

규하는 핸드폰을 꺼내들고 물었다.

“무슨 번호 말입니까?”

“내가 뭐 주민번호를 묻겠어? 당연히 전화번호지.”

“제 전화번호를 왜…….”

규하는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섰다.

“같이 술 마셨고, 밥도 먹었고, 이만하면 이제 우리 진짜 친구 아냐?”

친구라니…….

난생처음 타인이 그를 칭하는 호칭이었다.

형제님이나, 클리엔테스나, 부하나 상사인 적은 있었지만 누군가의 친구였던 적은 없었다.

물론 이렇게 살고 친구 하나 정도는 괜찮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상대가 왜 하필 강규하인지, 렉스는 고약한 농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향으로 돌아가게 됐습니다.”

역시 타이밍이 너무 교묘하다 싶었는지, 규하는 눈썹을 추켜들었다.

“고향이 어디인데?”

“헝가리입니다.”

정확하게는 지금 헝가리인 곳이라고 해야겠지만.

“그리고 이거 돌려 드리겠습니다.”

렉스는 시계를 풀어 건넸다. 규하의 미간에 주름이 더 깊어졌다.

“괜찮아. 이미 준 거잖아. 기념으로라도…….”

“아뇨. 제 것이 아닌 건 탐하지 않습니다.”

아마 생각보다 더 단호한 어조였으리라. 규하는 잠깐 그를 보다가 시계를 받았다.

렉스는 작별 인사 같은 걸 해야 할까 생각했다.

하지만 둘은 애초에 만날 일조차 없었다. 12년 전에도 그들은 만나지 않았다. 렉스는 명령에 따라 구조에 나섰을 뿐이고, 규하는 그가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니 작별 인사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관계였다.

“그럼.”

마주보고 있는 네 발 중 운동화를 신은 발이 돌아섰다. 그리고 주저하지 않는 걸음으로 곧장 나아갔다. 구두를 신은 발은 한동안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예민한 청력에 바람을 타고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귀여웠는데.”

‘귀여…….’

저도 모르게 놀라서 돌아보자, 규하는 이미 몸을 돌린 상태였다. 하지만 마지막 툴툴거림은 역시 들을 수 있었다.

“하여간 남자 복 없기는.”

* * *

샤워를 하고 나온 연하는 냉장고를 열었다. 대기만 하다가 끝난 오늘처럼 냉장고의 내용물도 단조롭기 그지없었다.

‘루챠챠도 하나밖에 없네.’

설탕 함량이 높아서 리웨이가 많이 먹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었다. 돼지 루아스가 될 셈이냐며.

“루아스는 살 안 찌거든?”

그렇게 항변해 보았지만, 도영이 옆에서 거드는 바람에 다 망해 버렸다.

“야, 물도 네가 루챠챠 마시듯이 마시면 살찔걸.”

냉장고 안에서 산신령이 금 루챠챠와 은 루챠챠를 들고 나타날 것도 아닌데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쳐다보았다.

그러다 어쩔 수 없이 팩 하나를 꺼내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뉴스를 보면서 마시기 시작했다.

조금 먹다가 양 입맛이 당기지 않아 몸을 길게 뻗어 테이블에 올려둔 노래방용 대용량 과자 봉지를 끌고 왔다.

막 과자 봉지를 열었을 때였다.

“이런 건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맛있는 걸 줄 테니까요.”

국장이 한 말이 생각났다. 연하는 제 방문을 보았다.

‘그렇다고 오늘 바로 찾아가면 속보이려나.’

하지만 먼저 준다고 한 사람은 국장이었으니까…….

연하는 과자 봉지를 닫지도 않고 운동화를 꿰어 신고는 방을 나섰다. 뒤로 자동 미닫이문이 닫혔다.

지잉.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문이 열렸다. 연하는 신발을 벗어던지고 들어와서 찬장을 열었다.

온갖 과자류가 차 있었다. 고민하다가 개중 하나를 짚었다.

“아냐. 그래도 이 정도는 가져가야지.”

손을 옮겨 옆에 있는, 제법 고급스러운 과자 상자를 꺼냈다.

먹지 않고 아껴뒀던 거지만, 저번에도 방문하면서-정신을 잃었기 때문에 본의는 아니었지만- 아무것도 챙겨가지 못했으니 이 정도는 선물해야 할 것 같았다.

연하가 나가자 텔레비전에서 막 뉴스가 흘러나오다가 자동으로 꺼졌다.

[오늘 행사장에는 최고경영자 셀레나 추가 참석하여…….]

* * *

하지만 국장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 같았다. 유리 너머 깜깜한 관사를 보면서 연하는 기운이 빠졌다.

‘아직까지 일하나?’

과자를 든 손으로 뒷짐을 지고 조금 기다렸다. 하지만 국장은커녕 아무도 오는 기색이 아니었다.

도영이 곰이라고 타박하는 거에 비해 추진력 하나는 좋은 연하는 쉽게 발걸음을 돌릴 수 없었다. 그래서 벽에 붙어 있는 전면액정 패널 앞에서 괜히 기웃거렸다.

삐.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패널에 떠오른 인식시스템이 그녀를 인식하더니 문이 밀려났다.

연하는 깜짝 놀랐다.

뻥 뚫린 구름다리를 한참 보다가, 조심스럽게 발을 들여놓았다. 문은 다시 뒤에서 닫혔다.

‘내 아이디를 등록해 놓은 거야?’

일개 대원이 국장의 관사에 마음대로 들락거릴 수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어쨌든 열린 문이 있으니 지나갈 뿐이었다.

* * *

안은 어둡고 조용했다.

그래도 남의 집이라 조심하며 들어서자, 천장의 조명이 달려가듯 순서대로 커졌다. 그리고 모던하고 톤이 낮은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연하는 과자 상자를 피난민의 봇짐처럼 옆구리에 끼고 집을 둘러보았다. 저번에 왔을 때와 비교해서 달라진 건 없어보였다.

거실 소파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려니 탁자에 놓인 책이 눈에 띄었다.

‘국장 같은 남자는 무슨 책을 읽나.’

궁금해서 들고 제목을 읽어보았다.

“이종의 기원과 역사.”

그가 여기 앉아서 이 책을 읽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좀 너무…….

“있어 보이네.”

어떤 내용을 읽나 보려고 책갈피가 끼워진 페이지로 넘어갔다.

<하지만 과연 루아스는 무엇인가?>

그런데 펼치자마자 그 문장이 눈 안으로 뛰어들었다.

연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표지 안쪽을 보자, 어디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평범한 백인 중년 여성 사진이 있고, 아래에 이름과 소개 몇 줄이 적혀 있었다.

“마리에테 블란두스…….”

스웨덴 스톡홀름 태생, 진화생물학 및 식물유전공학 박사.

‘이런 약력을 가진 사람이 어떤 책을 썼을지 감도 잡히지 않네.’

어쨌든 연하는 국장이 읽고 있는 페이지로 돌아갔다.

<루아. LUA.

‘마지막 공통조상(The Last Universal Ancestor)’을 의미하는 약어이다.

옛 지구에는 생물체가 지금처럼 다양하게 분화하기 전 수십억 년에 걸쳐 모든 동식물의 공통조상이 살았다.

찰스 다윈도 그의 명저 <종의 기원>에서 “그러므로 나는 지구상에 살았던 모든 유기체들이 같은 원시 형태에서 비롯되었을 거라고 짐작한다.”#고 밝혔다.

그러므로 우리 인류는 거슬러 올라가면 오늘 아침 식탁에 올라온 고등어와도 같은 조상을 두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연하는 눈썹을 추켜들었다.

‘내가 고등어랑 형제라고?’

하지만 그게 중요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서 계속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공통조상 ‘루아’를 끝으로 생물들은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동물과 식물로, 그리고 동물은 포유류와 조류, 파충류, 양서류, 어류로.

인류와 루아스도 마찬가지였다. 루아 이후 루아스, 즉, LUA X가 등장했다. 무엇이 루아를 루아스로 변형시켰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루아에 미지수 X를 붙여 LUA X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흔히 통용되는 대로 ‘루아스(Luax)’가 복수형 Luas로 알려진 것은 잘못이다.>

“정말? 나도 루아스가 복수형인 줄 알았는데…….”

연하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깨닫지 못했지만,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소파에 다리를 올렸다.

<그러나 루아스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었다.

드라큘라, 뱀파이어, 흡혈귀, ‘병을 옮기는 자’ 노스페라투, 언데드, 강시, 보로라카스, 스트리고이……. 그 외에도 수많은 이름으로.

따지고 보면 이 인간의 피를 마시는 전설적 존재만큼 오랜 세월에 걸쳐 상상력을 자극해 왔던 것도 없다. 하지만 루아스는 과연 무엇인가?>

어느 순간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집중한 연하는 듣지 못했다.

# “Therefore I should infer from analogy that probably all the organic beings which have ever lived on this earth have descended from some one primordial form, into which life was first breathed.” Darwin, C.(1859),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John Murray, p. 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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