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교환
“하이마 오메가를 의무대 보급물품에서 제외하신다고요?”
공보관 이 중령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의심하듯 되물었다.
몇몇 사람들끼리 시선을 교환했다. 개중 몇은 왜 국장이 그런 것까지 신경 쓰는지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회의실 가운데 자리에 앉은 이반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저는 정확히 ‘하이마 오메가를 비롯한 여러 의약품’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만. 아무튼 말씀을 하셔서 말이지만, 그 약품의 안정성 문제는 꾸준히 제기되어 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 중령은 책상에 놓인 서류를 뒤적거렸다. ‘하이마 오메가를 비롯한 여러 의약품’의 리스트를 찾는 것 같았다.
찾았는지 훑어보고는 말했다.
“하지만 말씀하신 것들은 이미 연방 FDA(식품의약국)에서 승인한 의약품들입니다. 문제될 것이…….”
“제약사에서 제출한 서류에 의거해서 말이죠. 애초에 우스운 일 아닙니까? 제약사가 제출한 서류에만 의거해서 약을 판단한다는 건.”
이반은 그의 말을 잘랐다.
“그건 합법적인 절차…….”
이반은 무표정하게 이 중령을 보았다.
“중령님께서는 제노아틱스 대변인 같으시군요.”
이 중령은 입을 다물었다.
“그들이 합의한 절차까지는 제 알 바 아니지만, 저로서는 논란이 있는 약품들을 중요한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대원들에게 제공할 수 없군요. 이 건에 대해서는 더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더는 반문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태도여서 아무도 더 말하지 못했다. 주제는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평소와 달리 국장에게서 멀찍이 앉아 있는 부국장은 생각했다.
‘확실히 제노아틱스 주주라는 말은 사실이 아닌 것 같군.’
주주가 회사의 이득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일을 할 리 없으니까.
MCTC는 군대면서도 비인간적인 존재에 의한 테러가 만연해 있는 근래에는 불가피하게 반쯤 경찰의 역할도 겸하고 있었다.
총사령부 직속 기동부대가 옛날 대테러부대의 역할을 담당한다면, 대도시의 상설지부는 재량권이 좀 더 넓은 경찰기동대 같은 역할을 했다.
따라서 상설지부의 국장은 해당 도시에서 상당한 유력 인사였고, 그가 내리는 결정은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부국장은 회의를 끝내고 일어나 가는 국장의 뒷모습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그런데 애초에 왜 그런 소문이 돌기 시작한 거지?’
* * *
사무실로 들어가는데 전화가 울렸다. 이반은 전화를 받았다.
[만나셨어요?]
“셀레나.”
셀레나는 그가 말하길 기다리지 않았다.
[어때요? 기억하세요?]
“전혀.”
안 그래도 연하는 그를 만나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는 것 같았다.
굳이 그때를 기억하기 바라는 건 아니었다. 여러모로.
그런데 사람 마음이 참 희한한 부분이 있어서, 자신을 어제 처음 본 사람처럼 보는 눈을 보면 묘하게…….
‘섭섭하달까.’
한동안 자신이 느끼는 게 어떤 감정인지 스스로도 정의할 수 없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감염시킨 사람이라고 생각지도 못하는 백지 같은 얼굴을 보면 그렇다고 말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어졌다.
아마 이야기해도 ‘아, 그래요?’ 정도 반응밖에 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의 성격을 생각하면 더욱.
이반은 사무실 한쪽에 아무 데도 보지 않는 시선을 멈추었다.
‘하긴.’
어느 날 생면부지의 남자가 나타나서 네 파트로네스라고 해봤자, 그리 큰 감흥이 있을 리 없을 것이다. 관계라는 건 결국 신뢰인 법이니까.
갑자기 회의에 들어가기 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왜 그러세요?]
자기도 모르게 실소를 지었는지 셀레나가 물었다. 그는 회의록을 다시 보면서 부국장과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런 인간조차 그 아이를 무시하는 건 기분이 나쁘더군.”
정말 기분이 나쁜 점은, 다른 건 다 떼놓고 생각해도 연하는 군인으로서도 나무랄 데가 없다는 점이었다.
근무태도도 훌륭했고, 업무능력도 탁월했다. 그리고 때로 쌍둥이 자매를 보러가는 것 외에 문제가 될 만한 사생활이랄 것도 없었다.
사고로 뱀파이어가 되기 전엔 평생 생각해 본 적도 없을 일을 묵묵히 해내고 있는 아이를 고작 종 같은 걸로 차별…….
그때 셀레나가 웃었다.
[저희가 아는 이바노프 씨 맞으세요?]
이반은 한쪽 눈썹을 추켜들었다.
“날 어떻게 생각했는데?”
[세상에 환멸을 느끼고 냉소적이 된 헤라클레스요.]
“왜 헤라클레스야?”
[반신이잖아요.]
“난 신이 아닌데.”
[저희한텐 신이시죠.]
이반은 펜을 내려놓고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었다.
“뭐 부탁할 거 있어?”
[아뇨. 또 다 싫다고 버리고 사라지실까 봐서요. 아부 좀 떨어두려고요.]
이반은 희미하게 웃었다.
“부탁한 일은 어떻게 됐어?”
안 그래도 서울로 오는 길에 전화로 부탁한 일이 있었다.
셀레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요. 이상하게 흔적이 드러나지 않네요. 슈퍼마켓 CCTV에 찍힌 마지막 모습만 아니었으면 신원 미상의 시신으로 죽었다고 생각할 수라도 있겠는데……. 아무튼 정보망을 총동원하고 있어요.]
어차피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 계속 부탁해.”
[네. 몸조심하세요. 안부 전해주시고요.]
이반은 눈썹을 추켜들었다.
“네 파트로네스잖아. 왜 나한테?”
[두 분 사이가 하도 어색해서 대화 좀 하시라고요.]
이반은 의자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바빠, 그 녀석.”
[뭐 하신다고요?]
“글쎄, 무슨 생각인지.”
셀레나는 잠깐 말없이 있다가 말했다.
[지금 제가 한 질문에 대답하신 거 아니죠?]
이반은 웃고는 말했다.
“그럼 수고해.”
* * *
규하는 모기가 목표를 노리듯 팩의 좁은 입구에 정확하게 빨대를 꽂았다. 그리고 깊게 빨아들였다.
“선생님, 술 마시지 말아주세요.”
아이들이 낸 과제를 정리하던 반장 윤재가 뒤에서 말했다. 규하는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나 퇴근했어.”
“아직 학교에 계시잖아요. 교감 선생님이 보면 뭐라고 한다고요.”
규하는 청 테이프를 두른 소주 팩을 흔들었다.
“그래서 가렸잖아.”
“냄새가 나잖아요.”
“교감 입 냄새가 더 날걸.”
그러면서 몸을 돌렸다. 교실을 나서자, 윤재가 과제를 들고 뒤따라왔다. 아이들이 빠져나가고 난 방과 후 학교는 한산했다.
“하여간 술이 원수야.”
규하가 투덜거리자, 윤재는 그녀가 들고 있는 소주 팩을 묘한 눈길로 보았다.
“지금도 마시고 계신 분이 말씀하시니 참으로 설득력 있네요.”
“마시지 않을 수가 없으니 말이지. 또 시계를 풀어줬어. 스위스제라 비싼 건데.”
그때 규하는 손목의 시계를 보고 시침이 멈춰 있는 걸 발견했다.
“이건 왜 또 멈췄어?”
팔을 흔들던 규하는 멈칫했다. 윤재가 어리둥절해하며 말했다.
“시계라면 그거요?”
규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침에 눈을 뜨니 욕실이었다.
시간은 여덟 시.
정신없이 씻고 으아아 뛰쳐나왔고, 하루 종일 자신의 코가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빴기에 손목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물론 몇 번이고 손목을 봤지만, 거기에 뭐가 있는지 인식할 정신도 없었던 것이다.
“분명히 풀어줬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뭔가가 머리를 탁 쳤다.
“잠깐. 그럼 그건?”
“그거요?”
규하는 바로 사무실로 달려 들어갔다. 그리고 제 책상의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서랍 구석까지 싹 쓸어내고, 어지러운 핸드백을 아예 뒤집어서 물건들을 훑었다.
하지만 없었다.
“아, 이런…….”
규하는 욕을 할 정신도 없는 것 같았다. 한 순간에 눈이 풀리는 것 같더니, 갑자기 뛰쳐나갔다.
“선생님!”
놀란 윤재가 불렀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규하는 그야말로 엄청난 속도로 사라졌다.
* * *
렉스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작은 지퍼 백에 들어 있는 너덜너덜한 실 팔찌는 알록달록한 색감이 꼭 다섯 살 아이가 장난감 구슬을 꿰어 만든 팔찌 같았다.
안 그래도 강규하의 캐릭터와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한 남자가 앞에 와 섰다.
“다시 접촉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학교 옆 공사장에서 바로 나온 것으로 보이는 인부였다. 얼굴은 낯익었지만, 수염도 있었고 느낌이 이 정도나 다르니 전혀 동일인물로 보이지 않았다.
“중요한 물건을 떨어뜨린 것 같아서 가져다주러 왔을 뿐입니다.”
“그럼 제게 주십시오. 우연히 발견하실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그 편이 나을 것이다. 어차피 경비원에게 맡기려고 했으니까…….
렉스는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갑자기 남자가 인사하고 걸어갔다.
“그럼.”
뒤돌아보자, 규하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발견하더니 멈칫했다.
“쓰레기통.”
지나가던 사람들이 렉스를 흘긋거렸다. 그제야 규하는 오해를 살 수 있는 명칭이라고 깨달은 모양이었다.
“아, 미안. 나도 모르게. 그러고 보니 이름이…….”
취하기 전에 들었지만 그때부터 일회용 만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듣는 순간 잊어버렸다.
희미한 느낌에는…….
“뭔가 이리 와, 라고 말하고 싶은 이름이었는데.”
“렉스입니다.”
“맞다. 렉스, 이리 와. 이 리듬이었지.”
렉스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왔던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저, 잠깐!”
렉스는 강아지 따위 되고 싶지 않았으므로 규하의 말에 따라 멈추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급히 쫓아왔다.
“혹시 낡은 실 팔찌 못 봤어? 막 보풀 다 일어나서 거지같은…….”
자매의 유품을 두고 거지같은, 이 뭡니까.
그렇게 말할 뻔했다. 그가 멈칫하자 규하는 긍정의 의미로 해석했는지 얼굴이 밝아졌다.
“봤구나, 그렇지?”
“제게 주신 거 아니었습니까?”
규하는 손을 모으고 하늘에다가 ‘하느님, 부처님, 알라, 감사합니다. 이제 술 먹지 않을 게요.’ 라며 기도했다.
“이거.”
규하는 제 손목에 찬 시계를 가리켰다.
“이거 주려다가 취해서 실수한 거야. 그거 별거 아냐. 딱 봐도 낡았고 거지같잖아.”
협상가로서의 자질은 없는지, 아니면 그만큼 간절해서인지 그쪽이 아쉬운 입장이라는 사실을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거 돌려주면 안 될까? 이거 줄게. 응?”
“좋습니다.”
“으…… 응? 이거 여자 시계인데? 그리고 멈췄는데…….”
정말 달라고 할 줄은 몰랐나 보다. 그도 무슨 억하심정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필요도 없는 물건을 달라고 해버렸다. 하지만 무를 마음은 없었다.
“마음에 드는군요.”
“그럼…… 그래. 맞바꾸자.”
규하는 시계를 풀어서 건넸다. 렉스는 주머니에서 비닐째 팔찌를 꺼내주었다. 그리고 규하가 팔찌를 끌어안고 각종 신에게 감사 인사를 하는 동안 시계를 손목에 찼다.
여자 시계라고 해도 그녀의 성격을 대변하는 중성적인 디자인이어서 무리 없이 착용할 수 있었다.
규하는 막상 팔찌를 되찾고 나자 미련이 남는 눈으로 그가 찬 시계를 보다가 뭔가 깨달은 얼굴이 되었다.
“근데 나 일하는 데는 어떻게 알았어?”
“특이한 이름이어서 인터넷에 바로 나오더군요.”
사실이었다. 하려면 할 수야 있지만 MCTC를 통해 강규하의 정보에 접근하는 일은 나중에 귀찮아질 수 있기 때문에, 인터넷에 검색해 보았더니 학교 홈페이지에 그녀에 관한 정보가 떴다.
“내 이름은 어떻게 알고?”
규하는, 바람직하다 할 만한 태도지만,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내가 전설의 말술 강규하야, 새벽에 두 시간 동안 걸어간 강규하야…….”
간밤의 말들을 렉스가 무표정으로 리플레이하기 시작하자, 규하는 손을 들었다.
“거기까지. 하여간 이놈의 주둥아리가 방정이야.”
규하는 그를 지나쳐 걷기 시작했다.
‘끝인가.’
생각한 렉스는 몸을 돌려가려고 했다. 그런데 규하가 뒤에서 물었다.
“어디 가?”
지부로 돌아간다고 할 수는 없고, 보통 한국어에서 이럴 때 쓰는 표현이…….
“집에 갑니다.”
“밥 먹으러 안 가?”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규하는 눈썹을 추켜들었다.
“내 물건 찾아주려고 일부러 와준 사람 그냥 돌려보낼 정도로 정 없는 사람은 아닌데, 나. 그렇게 마귀할멈처럼 보여?”
어쩐지 자주 듣는 말인 모양이었다.
“다시 보지 말자고…….”
“취해서 주절주절 늘어놓은 게 쪽팔려서 한 말을 담아놓기는.”
그러고는 몇 걸음 더 가더니 찡그리고 돌아보았다.
“빨리 와.”
어쩐지 그 말이 ‘이리 와.’로 들렸다면 피해망상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