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 짐승-17화 (17/104)

17화. TALITHA CUMI(“소녀여 일어나라”, 마가복음 5:41) (3)

“저희도 정말 감염을 이기실 거라고는 믿지 않았습니다만.”

대변인은 곤란한 건지 쓰게 웃는 건지 아니면 둘 다인지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갑자기 악수를 청했다.

연하는 의미를 알 수 없어 앞에 다가온 손을 보았다.

“이 ‘의료 행위’로 살아나신 분이 정말 손에 꼽아서요. 어쩐지 당신과 악수하면 행운이 있을 것 같네요. 행운의 부적인 토끼 발 같은 거죠.”

그럼에도 잘 이해되진 않았다. 사실 어떤 것도.

전부 설명을 듣긴 했지만, 그냥 소설을 읽은 것 같은 현실감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어쨌든 연하는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삶으로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럼 절 감염시킨 사람은…….”

한 가지는 이해했다. 그녀를 감염시킨 흡혈귀가 있다는 것.

아마 마지막에 빛 너머로 보았던 그림자…….

대변인은 미안해하는 것 같은 미소를 지었다.

“기증자께서는 익명으로 남길 원하셨습니다.”

회상에서 돌아온 연하는 베개를 끌어다가 베고 천장을 보았다.

가끔 그, 혹은 그녀에 대해 생각했다.

‘생각한다고 해서 뭘 알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때로 궁금해지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간이나 심장을 기증해 준 도너가 궁금하듯이.

그 사람에 대해 특별한 감정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어차피 모르는 사람이니까.’

이건 오히려 자신의 기원을 궁금해 하는 본질적인 호기심으로,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라는 문제에 천착하는 인간과 다르지 않은 태도였다.

자신의 혈관에 흐르는 피, 의식의 심연, 그 너머에 있는 하나의 근원…….

하지만 손을 뻗으면 잡힐 것만 같은 그것은 쏟아지는 빛 가운데 황금빛 형체로 이내 멀어져버렸다. 아무리 의식을 집중해 보아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뭐, 애초에 없었던 거라 아쉬울 일도 없지만.’

연하는 침대 테이블 서랍에서 빛바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사진은 모서리가 다 닳고 헤졌지만, 그 속에 웃고 있는 그녀는 마치 어제 찍은 것처럼 지금과 같았다. 그 곁에 어린 규하가 웃고 있었다.

그들은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비슷해 보였고, 둘 다 교복을 입고 있었다. 결국 연하는 같이 졸업하지 못한 고등학교의.

그래, 연하는 장교가 되어 군대를 지휘하는 일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다. 군인이 된 이유는 단 하나, 지켜야 할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건 그녀는 삶으로 돌아왔고, 그것만이 중요했다.

* * *

“강 상사는 내버려 둬도 접촉하지 않을 겁니다.”

렉스는 MCTC의 공식서류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제로팀의 대원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확신하시죠? 당신이 두 분을 본 건 그날 현장이 처음이자 마지막 아니었던가요.”

대원은 물었다.

강규하는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물론 그 자체가 많이 다른 상태이긴 했다. 머리도 짧았고 근위사단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녀를 공격하는 검을 막아섰을 때는.

아마 기절하기 직전이었기 때문이리라.

괜찮은지 돌아봤을 때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는데, 그때 이미 의식을 잃은 것 같았다.

그녀를 공격한 거구의 뱀파이어는 ‘글래디에이터’라고 불리는, 실제 고대 로마 검투사 출신의 악명 높은 SN 대원이었다.

하룻밤 식사로 인간 열을 해치우는 녀석에게 목을 졸리고 그때까지 의식을 붙잡고 있었던 게 오히려 대단한 일이긴 했지만.

그의 거대한 글라디우스를 막아낸 자신을 보고 글래디에이터는 지옥의 불이 타오르는 듯한 눈을 빛내며 으르렁거렸다. 짐승에 가까운 녀석이었다.

열차는 사방으로 훤히 열려 있었다.

오로지 강연하가 누운 자리만 제외하고.

그 머리맡에 이반 이바노프가 서 있었다. 주변에는 기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휘광 같은 햇빛이 피 웅덩이에 누워 죽어가는 소녀를 비추었다. 여린 생명의 모래시계 속의 모래가 거의 다 떨어져 가는데도 그는 특별히 급한 것 같지 않았다.

‘하긴, 그럴 이유가 없었겠지.’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소녀가 죽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테니까.

“어떻게 확신하느냐고 물으셨습니까?”

렉스는 막 8층에서 불이 꺼지는 아파트를 돌아보았다.

“자신의 쌍둥이를 만나게 되면, 강규하는 죽게 될 테니까요.”

* * *

주스 팩에 꽂힌 빨대를 통해 무색의 액체가 올라갔다.

빨대를 물고 있는 연하는 키오스크 패널에 떠 있는, 초록 얼굴을 한 괴물 남자가 그려진 포스터를 보고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젖혔다.

‘프랑켄슈타인, 1931년 작 복원.’

포스터 아래쪽에 세로로 쓰여 있었다.

“규하가 좋아하겠다.”

연하는 중얼거리고 몸을 돌렸다.

청사는 조용했다.

식사시간이 아니어서 텅 비어 있는 식당에 갔다가, 헬스장 유리문 너머로 대원들이 운동하는 모습을 보고, 직원용 극장에 와서 상영시간표를 살폈지만 별로 흥미로운 영화가 없었다.

그런데 지나가는 길목에 자판기가 눈에 띄었다. 연하는 들고 있는 루챠챠를 내려다보았다.

그때 연하는 몰랐으나, 뒤돌아 있는 그녀를 발견한 시선이 있었다.

따르는 사람들에게 먼저 가라고 손짓하고 다가왔다.

그런데 연하가 갑자기 몸을 숙였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 자판기 유리에 의아해하는 이반이 비쳤다.

연하는 바닥에 머리카락이 끌리는지도 모르고 음료수가 나오는 입구를 들춰 보았다. 이반은 그녀를 흥미롭게 내려다보았다.

‘이건 또…….’

무슨 행동일까 싶었다. 다음 행동이 예측되지 않는 면이 있었다.

“있을 리 없나…….”

그때, 중얼거리는 연하가 들고 있는 물건이 눈에 띄었다.

‘저건…….’

이반은 손을 뻗었다.

“어…….”

누군가가 제 손에 있는 루챠챠를 가져갔다고 깨달은 연하는 몸을 들었다. 머리와 등이 무언가에 부딪쳤다. 뒤에 커다란 게 있었다.

‘뭐지?’

하지만 살의를 가진 공격이 아니면 원래 반응이 느린 편이라 생각한 다음에야 고개를 돌렸다.

반가움, 이랄지, 그리움이랄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그는 그녀를 보면서 루챠챠를 마시고 있었다.

오늘도 반듯하게 넥타이를 맨 와이셔츠 차림이었는데, 아동적인 색깔의 팩 주스를 마시고 있는데도 섹시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니 참 신기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인상을 썼다. 그가 인상을 쓰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이거였군요. 루챠챠?”

이반은 주스 이름을 읽을 때 코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이런 부스러기를…….”

말하면서 연하를 본 이반은 멈칫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새 무슨 일이라도 났나 싶어서.

“무슨 일…….”

다시 팩을 받은 연하는 바로 알았다.

이건 반 모금도 남지 않은 무게라는 걸.

가슴이 덜컥했다. 하지만 어른이니까. 도영 말대로 고작 팩 주스 하나에 일희일비하지 말아야하는 서른한 살이니까…….

“아껴 마시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슬픈 목소리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반은 자판기에 시선을 던졌다.

“설마 이게 있을 것 같아서 들여다본 거였습니까?”

그가 본의는 아니었을 거라고 믿으면서도 살짝 노려보게 되는 시선은 어쩔 수 없었다.

“당연히 없다는 건 알죠. 그냥 심심해서 들여다본 거예요.”

이반은 제 턱을 쓰다듬었다. 조금 당혹스러운 것 같았다.

“국장님.”

그때 뒤에서 그의 전속부관인 이 대위가 불렀다.

“추경 예산위원회가 도착했습니다.”

“곧 가죠.”

이반은 연하를 돌아보았다.

“미안합니다. 그렇게 좋아하는 줄 몰랐군요. 설탕이 많이 들어서 좋지 않을 텐데……. 나중에 관사로 오세요. 이런 건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맛있는 걸 줄 테니까요.”

귀가 번쩍 뜨였다.

“정말요?”

“네.”

이반은 웃었다. 꼭 귀엽다, 고 말하는 것 같아서 너무 태나게 좋아했나 싶었지만 연하는 역시 팩 주스 하나에 연연해하지 않는 훌륭한 어른은 되고 싶지 않았다.

도영은 가끔 이럴 때 보면 어디 좀 모자란 애 같다고 기막혀했지만.

“그럼.”

이반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 대위와 렉스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세 사람은 멀어졌다.

그러다가 렉스가 갑자기 뭔가를 본 것처럼 돌아보는 것을, 연하는 이미 등을 돌렸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신이 나 가면서 고개를 드는데, 앞에 렉스가 서 있었다. 연하는 눈을 깜빡였다.

‘어라. 전혀 기척을 못 느꼈는데.’

“그거.”

렉스는 아래쪽을 가리켰다. 연하는 따라서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그를 보았다.

“제 바지요? 산 곳 알려드려요?”

“아뇨. 그 팔찌 말입니다.”

렉스는 웃지도 않고 말했다. 연하는 색색의 실 팔찌를 차고 있는 팔을 들었다.

“아, 이거요? 브라질의 미산가 팔찌예요, 소원을 이뤄준다는.”

“직접 만든 겁니까?”

“네.”

“그렇군요.”

그러더니 몸을 돌려서 갔다. 연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싱거운 사람이네.’

이반은 복도의 끝에서 렉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가오는 그를 보고 뭐라고 물었다. 렉스는 별것 아니라고 대답하는 것 같았다.

이반은 뜻밖이라는 표정이었으나 더 물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세 남자는 모퉁이 너머로 사라졌다.

연하도 몸을 돌렸다. 그리고 부국장 일행과 마주쳤다.

연하는 바로 거수경례하고 옆으로 비켜섰다. 일국의 왕처럼 뒤따르는 사람들을 거느린 부국장은 뒷짐을 진 채 연하를 위아래로 훑었다. 못마땅하기 그지없는 눈빛이었다.

“자네는 복장이 그게 뭔가?”

연하는 평소처럼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여기가 놀이터로 보이나?”

연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 대답하든 그에게서 좋은 말을 듣기 힘들다는 사실을 오래전에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부국장의 눈에 흉포한 기름기 같은 빛이 번들거렸다.

“지금 내 말을 무시하는……!”

“부국장님.”

부국장이 내뱉으려는 찰나, 뒤따르는 사람 중 누군가가 나직이 부르며 말렸다. 새 국장을 의식한 것이리라.

부국장은 혀를 내찼다.

“흡혈귀 주제에 인간인 체하는 꼴이라니. 루아스? 그딴 말장난으로 피에 굶주린 본성이 숨겨질까.”

부국장 일행이 지나간 자리, 연하는 고개를 들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은 표정이었다.

‘맛있는 거라니, 뭘까?’

연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가던 길을 갔다.

* * *

반면, 예산위원회가 열리는 회의실을 향해 모퉁이를 돌아간 부국장은 국장과 정통으로 마주쳤다.

부국장은 분명히 누가 봐도 흠칫했으면서 전혀 그런 적 없다는 듯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국장님.”

왜인지 국장은 팔짱을 끼고 벽에 비스듬하게 기대 있었다. 전속부관인 이 대위는 복도 가운데에 기다리고 있었다.

절대 말로 할 순 없지만, 꼭 불순한 의도를 가진 불량배 무리 같았다.

국장은 팔짱을 풀고 제대로 섰다.

“부국장님.”

부국장은 그가 다가오는 모습을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잘 생기고 근사한, 하지만 위험한 짐승이 어슬렁대며 다가오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째서 제 일행은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것인지.

“저에 대해 좀 아십니까?”

“예? 물론……”

아는 게 있을 리 없었다.

당연히 제게 떨어질 거라 생각한 국장직을 꿰찬 이 흡혈귀에 대해 휴민트를 총동원해 알아보았다. 하지만 MCTC의 창립자이자 초대 사무총장의 라인이라는 것 외에는 암흑이었다.

제노아틱스의 주주라는 소문이 있었으나 그건 사실이 아닌 것 같았다.

아니, 애초에 제노아틱스의 주주가 이런 일을 할 리 없잖은가?

그렇잖아도 작년에 초대 사무총장이 사망하고 그 라인은 대부분 좌천되거나 축출되었다. 이 자가 마지막 끈을 붙잡고 있는 모양으로, 어차피 오래가지 못할 터였다.

그래서 특별히 신경 쓰지 않으려 했는데…….

“제가 소박하게 중앙루아스권위원회의 비상임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국장은 말했다. 부국장은 짐짓 미소를 지었다.

“아, 그러시군요. 훌륭한 일을…….”

“그런데 이 위원회 일이라는 게 참 애매해서…….”

국장은 정말 곤란한 얼굴이었다. 그 진심 어린 표정이 천박한 출세욕 외에는 없는 빈 대롱 같은 가슴에도 와 닿았다.

그런데 왠지 거리가 가까운 것 같아 부국장은 주춤 물러났다. 어느새 뒤가 벽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국장이 턱 옆에 손을 짚었다.

부국장은 눈에 띄게 움찔했다.

하지만 이건 토끼 같은 두 딸과 어미 토끼 같은 아내가 있는 충실한 가장으로서 절대 다른 의미가 아니라─

“위원회에서 우리를 친근한 존재로 선전하다보니, 때로 사람들이 잊더군요.”

“무얼…… 말입니까?”

가까이서 보니 붉은 눈동자는 더욱 짐승 같았다. 쳐다보는 사이에 동공이 서서히 좁아졌다. 그건 문틈이었다.

들여다보아서는 안 될 문틈.

“우리가 포식자라는 사실을요.”

정수리에 피뢰침을 때려 박은 것 같았다. 부국장은 그대로 죽어버린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반은 옅게 웃었다.

“양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사냥을 그만뒀다고 해서, 들판의 초목 같은 것으로 보시면 곤란합니다.”

퇴로를 차단하던 손이 떠났다. 부국장은 현기증이 나는 것처럼 비틀거렸다.

“부, 부국장님!”

“부국장님!”

뒤에서 일행이 소란스럽게 불렀다.

“그냥 둬도 별일은 하지 못할 악졸입니다만.”

따라오는 이 대위가 말했다. 오히려 저런 인간을 상대한 게 놀랍다는 투로.

“압니다.”

이반은 차갑게 말하고 앞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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