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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짐승-16화 (16/104)

16화. TALITHA CUMI(“소녀여 일어나라”, 마가복음 5:41) (2)

아주머니는 힘겹게 눈을 떴다.

“아파…….”

“밖으로 나가야 해요. 일어나실 수 있겠어요?”

둘은 아주머니가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그녀를 부축해 나가다가 연하는 저 멀리 의자 사이로 늘어진 손을 보았다. 연하는 멈칫했다.

“먼저 나가.”

아주머니를 넘기고 돌아가려고 하자, 규하가 바로 손목을 잡았다.

“곧 구조대가 올 거야. 우리가 함부로 건드리면 안 돼.”

현실적인 말이긴 했지만 연하는 주저했다.

“하지만…….”

규하는 그녀와 입씨름을 하는 게 의미가 없다는 걸 알았다. 아주머니에게 혼자 나가실 수 있냐고 물어보고, 먼저 그쪽으로 뛰어갔다.

“빨리.”

“응.”

두 사람은 구석에 쓰러져 있는 사람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일어…….”

둘은 흠칫했다.

왜냐하면 남자는 이미 죽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 힘 없이 활짝 열린 동공이 그들을 비추었다. 하지만 처음 마주한 죽음에 전율하고 있을 새가 없었다.

끼긱.

이번에 가장 먼저 인식한 것은 소리였다. 멀리서 들려오는 비명소리. 사람들이 달리는 소리…….

끼이익.

그리고 종이가 찢어지는 것 같은, 신경에 거슬리는 날카로운 소리.

인간의 귀에 허용된 소리의 스펙트럼을 벗어나는 파열음이 진동처럼 울려왔다. 지진의 전조 증상처럼.

그리고 비틀려 넘어진 열차가 쩍, 소리를 내며 열렸다. 요나를 삼킨 고래의 입이 갈라지듯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바깥 공기가 흡사 폭풍 같았다.

갈라진 열차 사이로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거의 은발처럼 보이는 금발에 이글거리는 붉은 눈동자─

“흐, 흡혈귀다! 달아나!”

아비규환.

그 단어로밖에 상황을 설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도망가는 사람들은 본 체도 하지 않고, 남자가 옆으로 비켜났다. 그리고 한 청년이 앞으로 나섰다. 마치 노예가 터주는 길을 나서는 주인 같은 태도로.

“흡혈귀……?”

규하가 긴장한 듯 중얼거렸다.

연하는 그때까지 흡혈귀를 직접 본 적이 없었다. 뉴스나 신문에서 접했어도, 실은 존재한다고 밝혀진 전설 속의 괴물 같은 건 유령처럼 막연한 개념에 가까웠다.

봤다는 사람은 많지만, 도저히 실존한다고 믿을 수 없는.

그런데 그를 보는 순간에 알 수 있었다. 흡혈귀라고.

붉은 눈이 그들을 보았다. 어두운 곳에서 봤다면 마치 눈만 타오르는 것처럼 보였을 것 같았다.

그들을 번갈아 보던 눈이 규하에게 멈추었다.

“이쪽이군.”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전에, 규하는 옆에 떨어져 있는 의자 팔걸이를 집었다. 무기로 쓰려는 것처럼. 연하는 깜짝 놀랐다.

규하는 새벽에 도둑이 들었을 때도 아빠보다 먼저 야구방망이를 잡은 사람이었다. 그걸 휘둘러서 도둑을 전치 2주로 실려 나가게 만든 것도.

아빠는 운동을 해서 그런가 애가 공격적이라고 농담했지만, 분명히 인간이 아닌 ‘무언가’ 앞에서도 주눅이 들지 않을 줄은 몰랐다.

청년은 피식 웃었다. 규하가 하는 양이 같잖기도, 대견하기도 하다는 듯.

청년은 그들 쪽으로 걸음을 디뎠다.

“다가오지 마!”

규하는 의자 팔걸이를 방망이처럼 움켜쥐며 일갈했다. 청년은 휘파람을 내불었다.

“백마 탄 공주님이군. 반하겠어.”

그가 너무 인간 같이 말해서 연하는 놀랐다. 흡혈귀는 어떨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래도 저렇게 인간 같을 줄은…….

“다가오지 말라고 했잖아!”

규하가 일갈했지만 청년은 귓등으로도 듣는 기색이 아니었다.

마침내 청년이 정해둔 선을 넘어오자, 규하는 의자 팔걸이를 휘둘렀다. 그는 피하지도 방어하지도 않았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은발 흡혈귀가 그를 보호하듯 팔로 팔걸이를 막고 있었다.

연하는 눈을 크게 떴다.

‘분명히 멀리 있었는데.’

청년은 픽 웃었다.

“우리는 총탄도 맨 몸으로 막아낸다고, 뉴스에서 보지 못했어?”

은발 흡혈귀가 의자 팔걸이를 뺏어 한 손으로 우그러뜨렸다. 팔걸이는 수수깡처럼 두 조각나서 떨어졌다.

규하는 창백해져 주춤 물러났다. 은발 흡혈귀는 규하의 멱살을 잡아 가볍게 들어올렸다.

“그만두……!”

연하가 다급히 외쳤지만, 은발 흡혈귀는 규하를 옆으로 집어던졌다. 규하는 열차 옆 벽에 부딪치고 의자 위를 굴러 바닥에 떨어졌다.

그런데 웃는 소리가 나서, 연하는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청년은 정말로 즐거워하는 얼굴이었다.

“이번엔 성격이 좀 있네.”

청년이 그쪽으로 가려 했다. 연하는 두 번 생각하지 않았다.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달려 나가, 청년의 손목을 잡았다.

“그만둬.”

청년은 제 손목을 잡고 있는, 떨리는 손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를 잡고 끌어당겼다.

연하는 강한 힘에 빨려 들듯이 그를 마주 보게 되었다. 청년은 그녀보다 조금 더 키가 컸다.

붉은 눈 깊은 곳을 들여다보게 된 연하는 그가 보기보다 어리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흡혈귀들이 오래 산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만이 아니었다. 청년의 눈에는 깊고 탁한 호수 속에서 꿈틀거리는 불길한 그림자 같은 것이 살고 있었다.

“네 쌍둥이 대신 죽을 수 있겠느냐?”

이상한 말투도 그렇고, 갑작스러운 질문을 연하는 이해하지 못하지 못했다.

“그게 무슨…….”

청년의 손이 연하의 볼을 후려쳤다.

열차를 찢어발기던 힘을 보면 그대로 머리가 날아갔어도 이상하지 않은데, 은발 흡혈귀 정도는 아니었는지 고개만 옆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이렇게 볼이 터지도록 얻어맞은 경험은 처음이었다.

연하는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녀가 전혀 모르는, 어둡고 폭력적인 세계가 벽을 찢고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눈물이 차오르고, 몸이 떨려왔다. 청년은 거의 옆으로 넘어간 연하를 힘들이지 않고 당겨 일으켰다.

“죽을 수 있겠느냐?”

연하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차마 소리가 나오지 않자, 그는 다시 손을 들었다.

“물었잖아?”

맞는다─

연하는 움츠렸다. 그런데 청년은 순간 손을 돌려 날아오는 무언가를 잡았다.

물병이었다. 저편에 규하가 서 있었다. 몸이 제대로 펴지지 않는지 구부정한 자세였다.

“더러운 손 치워, 개새끼야.”

일부러 도발이라도 하는 것 같은 행동에 연하는 너무 놀랐다.

“규하야. 그러지…… 그러지 마.”

“강연하 건들지 마.”

청년은 신경 쓰지 않고 연하를 돌아보았다. 입매를 늘어뜨린, 조금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만약 죽을 수 있다고 한다면, 네 쌍둥이는 살려주겠다고 약속하마.”

갑자기 바람 소리가 났다.

하지만 반추해 보면 실제로 들은 소리가 아니라, 뒤이어 일어난 일들을 보고 나중에 덧입힌 것 같았다. 그만큼 순간이었고, 본능적으로 몸을 낮춘 규하가 엄청난 반사 신경을 가진 것이었다.

조금 전까지 규하의 머리가 있던 자리를 거대한 검이 지나갔다.

“……!”

검이 앞에 있는 의자를 후려쳤다. 의자는 잘린다기보다 폭발하듯이 터져 나갔다. 잔해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연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어느새 규하 앞에 거구의 흡혈귀가 나타나 있었다. 그는 거의 그녀만 한 대검을 들고 있었다.

규하 역시 놀랐는지 어떤 상황에도 포기하지 않는 욕마저 내뱉지 못하고 숨만 몰아쉬었다.

거구의 흡혈귀는 두꺼운 손으로 규하의 목을 잡아 들어 올렸다. 규하가 팔을 휘두르고 다리로 걷어차도 꿈쩍하지 않았다.

“놔, 놔줘. 제발…….”

연하는 떨면서 청년에게 애원했다.

“대답하면 돼.”

연하는 당장 입을 열었다. 그런데 청년이 말을 막듯이 손가락을 들었다.

“하지만 신중하게 대답해. 꼭 진심이어야 해.”

그의 태도는 연신 즐겁고 경쾌했지만, 진담이라는 것쯤은 알았다.

연하는 규하를 보았다. 규하는 온갖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거구의 흡혈귀에게 발길질했다. 하지만 점차 힘이 빠지고 있었다. 숨을 쉴 수 없는지 얼굴이 푸릇하게 질려갔다.

“나는……. 난…….”

흘러나가는 목소리가 떨려왔다.

연하는 도저히 청년이 뭘 원하는지, 뭘 위해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꼭 대답해야 한다면.’

그래야 한 사람이라도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다면…….

가쁜 숨이 새었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죽을 수 있어.”

청년이 픽 웃었다. 연하는 잔뜩 긴장한 몸에 힘을 조금 풀었다. 그가 웃는 얼굴 그대로 중얼거렸다.

“그럼 죽어.”

연하는 숨을 멈추었다.

아니, 멈춰졌던가.

하지만 보기보다 아프진 않았다. 너무 순식간이었고,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손이 배를 뚫고 들어온 모양새가.

어느새 뒤에 와 있는 은발 흡혈귀가 단번에 손을 뽑았다.

그때 고통은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세상에 그런 고통이 존재할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규하가 울부짖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흡혈귀에게서 벗어날 수 없자 새끼를 잃은 어미처럼 괴성을 질렀다.

그 소리가 더 아팠던 것 같다…….

몸이 무너지고, 청년이 그녀를 받았다. 입 밖으로 쿨럭이며 역류한 액체가 앞섶을 적셨다.

“쉿, 괜찮아. 금방 끝날 거야.”

청년은 아이를 어르듯 속삭였다.

그제야 거구의 흡혈귀가 규하를 놓았다.

“콜록, 콜록!”

규하는 바닥에 떨어져 정신없이 기침을 토해냈다. 그러면서도 계속 일어나려 했지만, 흐려지는 의식을 붙잡을 수 없는지 갓 태어난 새끼 송아지처럼 미끄러져 넘어졌다.

거구의 흡혈귀는 붉은 눈으로 청년을 보았다. 그의 명령을 기다리는 것처럼.

“죽여.”

청년은 말했다.

연하는 발작적으로 입을 열었다. 피와 울음이 뒤섞인 덩어리가 질척이며 굴러 떨어졌다.

“살려…… 살려준…….”

청년은 빙긋이 웃었다.

“난 너 같은 것들이 제일 짜증나거든. 지킬 힘도 없으면서 어쭙잖은 영웅 흉내라니. 마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이 친구야.”

그는 고개를 가까이 하고 속삭였다.

“이게 만용을 부린 대가라는 거야.”

연하는 입을 열었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목소리가 나가지 않았다.

청년은 피로 흥건한 손으로 그녀의 볼을 쓰다듬었다. 마치 원시 부족이 피로 얼굴에 주술을 그려 넣듯이…….

“하지만 무서워하지 마. 어쨌든 너희는 천국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을 테니까.”

그의 말은 상징과 은유로 가득한 비전 같아서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때 거구의 흡혈귀가 규하를 향해 검을 들었다.

‘안 돼.’

외쳤지만, 아무 소리가 나가지 않았다.

규하는 늘어진 채 움직이지 못했다. 눈앞이 흐려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번에야말로 피할 길이 없었다.

검이 하강하기 시작했다.

그때 규하를 구할 수만 있다면 연하는 스스로 제단에 올라 제 목을 갈라 번제라도 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죽어가는 것밖에는.

연하는 그게 정말 무서운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만둬.’

관자놀이에 혈관이 터질 듯이 불거진 옆얼굴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폭풍이 터졌다.

두꺼운 이불을 쓴 것처럼 감각이 무딘 피부에도 바람이 느껴졌다. 기울어 있는 시야에, 규하를 덮치는 검을 막아선 검은 그림자가 비쳤다. 상대도 검을 들고 있는 것 같았다.

얼핏 금빛…….

어느새 연하를 놓고 멀리 물러나 있는 청년이 무어라 말했다.

하지만 연하는 시야도, 소리도 너무 멀었다. 구멍 난 배에서 흘러나가는 생명력이 손에 잡힐 것 같았다.

‘죽는 건 온몸이 돌처럼 굳는 느낌이구나.’

그때 얼굴에 밝은 빛이 쏟아졌다. 연하는 마지막 힘을 끌어 모아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위로 검은 그림자가 서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빛이 지나가는 방향에 따라 얼핏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지만, 결국엔 빛이 너무 강해져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거대하고, 압도적이었다. 마치 장엄한 폭포나 수평선 너머까지 이어지는 드넓은 들판을 마주한 기분이 들었다.

연하는 피에 젖은 입을 열었다. 불가항력적인 자연의 힘 앞에 기도밖에 할 수 없는 옛날 사람처럼.

“구해…… 주세요…….”

눈꺼풀이 내려갔다. 죽음은 온전하고 완전한 잠 같은 것이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 * *

여전히 손가락 사이로 형광등 빛이 부서지고 있었다.

연하는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다시 뜨지 못할 줄 알았던 눈을 떴을 때, 바깥세상 일은 거의 정리가 되어 있었다. 그때 온 것이 바로 MCTC였다.

덕분에 규하는 무사히 구출되었고, 자신은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이미 감염된 상태로.

“부상이 너무 심해 살아날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에 불가피한 의료 행위였습니다.”

MCTC의 대변인은 그렇게 설명했다.

“저희도 정말 감염을 이기실 거라고는 믿지 않았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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