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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짐승-15화 (15/104)

15화. TALITHA CUMI(“소녀여 일어나라”, 마가복음 5:41) (1)

“렉스.”

남자 둘은 서로를 보았다.

“목소리가…… 남자야?”

“이름도…….”

남자 둘은 데칼코마니처럼 인상을 찡그리고 렉스를 한 번 더 보았다. 긴 머리카락과 얼굴에 시선을 빼앗겨 뒤늦게 그가 여자라기엔 너무 키가 크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았다.

남자 둘은 혀를 내차고 자리를 떴다.

규하는 렉스를 보고 옆으로 고갯짓했다.

“앉아.”

정말 기다리던 친구를 대하는 것 같은 이 당당한 태도는 뭔가 싶었다. 그 생각을 읽었는지 규하는 맥주를 마시다가 픽 웃었다.

“있을 놈이잖아.”

어쩐지 그대로 가는 게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쨌든 렉스는 아까 연하가 앉았던 의자에 앉았다.

규하는 턱을 괴고 그를 보았다.

“사실 나도 여자인 줄 알고 말 걸었던 건데.”

키는 크긴 했지만, 옷이 커서 그런가 말라 보였고 무엇보다 선글라스 아래 이목구비가 무척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운동 좀 한 게르만 언니쯤 되는 줄 알았다. 그 동네 언니들 골격이 좀 기대고 싶어지는 편이니까.

그런데 말하는 순간 남자 목소리, 그것도 꽤 동굴 보이스가 나와서 놀랐다.

이렇게 정면에서 보니 남자라는 걸 알겠지만 이 정도면 오히려 착각한 게 무리도 아니다 싶었다.

“지금이라도 원하신다면…….”

렉스가 말을 꺼냈지만, 규하는 그가 말을 끝내길 기다리지 않았다.

“머리는 왜 그렇게 기른 거야? 록 같은 거 해? 아니다. 옷 보니 그건 아닐 듯.”

렉스는 도대체 자신의 복장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궁금했다.

물론 패셔니스타 소리를 들을 만하진 않아도 활동성 면에서 충분히 훌륭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다들 이 밤에 선글라스는 왜 끼고 있는 거야? 아까 여자도 그렇고.”

그녀는 흡혈귀에게 가족 전원을 잃었다. 쌍둥이 자매 강연하를 포함해서.

어쨌든 본인은 그렇게 알고 있으니, 지금 그가 흡혈귀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유쾌해할 것 같지는 않았다.

‘죽이겠다고 덤벼들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렉스는 선글라스를 좀 더 밀어 올렸다.

“유행이라서.”

규하는 눈썹을 추켜들었다.

“은근히 유행에 민감한가 봐. 저기 콘서트도 그렇고.”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는지 이어 말했다.

“아무튼 가다가 다시 온 거 보니 그쪽도 오지랖 병이 깊다. 두 오지라퍼가 만난 기념이다. 내가 쏜다. 맥주 하나 가져와. 아, 맞다. 내 밴드 고장 난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술은 마시지 않습니다.”

“뭐, 술 마시지 않고도 괜찮다면야. 아무튼 준비됐어?”

그녀는 정말 당장 일어나 달리기라도 할 것처럼 팔을 뻗어 스트레칭 했다. 렉스는 궁금한 눈을 했다.

“뭐가 말입니까?”

규하는 빙긋 웃었다.

“내 감정의 쓰레기통이 될 준비. 왜, 그런 날 있잖아. 인생 좆같은 날. 내가 오늘 그런 날이거든.”

* * *

‘역시 그냥 가는 게 나았군.’

렉스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 새끼가 아가리 털린 것 같은 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하는데 내가 진짜 야마가 돌아서…….”

더 문제는, 규하의 말을 들어주고 싶어도 들어줄 수가 없다는 데 있었다.

말의 반이 욕이었다. 그녀의 상사로 짐작되는 중년남성의 편협함과 변태성에 대한 분노는 무시무시했다.

꽤 심도 깊은 토론까지도 가능한 그의 한국어 실력에 이 정도로 회의감을 들게 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아, 살 것 같네.”

규하는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이미 다섯 개째인 맥주 캔을 한 손으로 우그러뜨렸다.

물론 그것들을 사다 나른 사람은 그였다. 하나가 비었다 싶으면 어김없이 그를 보았기 때문이다.

세 번째쯤에서는 무시도 해봤지만, 꼭 마른 급수기의 꼭지를 핥는 강아지처럼 텅 빈 맥주 캔을 핥아대기에 동물학대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 이후부터는 그냥 포기했다.

그런데 들려오는 소리가 없었다.

렉스는 돌아보았다.

규하는 등받이에 기댄 채로 잠들어 있었다. 고개를 완전히 뒤로 젖힌 상태로. 긴 머리카락이 밤에 보는 버드나무처럼 음산하게 늘어져 있었다.

“설마 잠든 겁니까?”

의미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물어보았고, 역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규칙적인 숨이 새어 나왔다.

‘확실히 닮은 것 같았군.’

일란성 쌍둥이니까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느낌이 천지차이인 걸 보면 이 정도로 닮은 게 신기한 일이었다.

강연하는 대체로 나무늘보 같은 느낌이라면 이쪽은 여러모로 표범 같은 느낌이었다. 표정이나, 말투, 눈빛까지.

갑자기 규하가 눈을 떴다.

“내가 전설의 말술 강규하거든?”

그녀는 끈을 매달아놓은 것처럼 상체를 일으키더니, 묻지도 않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술 궤짝으로 마신다하는 남자 동기들이 싹 죽었을 때도 멀쩡했던 사람이야, 내가. 오늘 한 끼도 못 먹어서 좀 어지러운 것뿐이야. 이 험난한 세상에 내 몸은 내가 지켜야지.”

그리고 양 팔걸이를 짚고 일어나다가 다시 앉았다. 무슨 생각이 난 것 같았다.

“쓰레기통.”

렉스는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웬 쓰레기통…….’

“말 들어줘서 고마워. 이건 약소하지만 보답이야.”

그녀는 팔목에 찬 걸 풀었다. 술기운에 마비된 손가락이 말을 잘 듣지 않는지 잡아 뜯듯이.

“됐…….”

“받아둬, 받아둬.”

그의 손에 쥐어주고, 꼭 손까지 닫아주었다.

“이래봬도 비싼 거거든.”

규하가 일어나다가 비틀거렸다. 렉스는 바로 팔을 잡아 부축했다.

“갈 수 있겠습니까?”

규하는 피식 웃었다.

“남자라 이거야? 말라 보이는데 힘세네.”

그의 손에서 팔을 빼내더니, 앉아 있느라 구겨진 정장을 탁 당겨 폈다.

“당연하지. 내가 남자 동기들 다 택시 태워 보내고 새벽에 혼자 집까지 두 시간동안 걸어간 강규하야.”

규하는 걸어가기 시작했다. 렉스는 잠깐 지켜보았다. 취한 것 같지만 제대로 걷고 있고 집도 근처 같으니 어떻게든 찾아갈 것이다. 그런데 규하가 다시 돌아왔다.

“쓰레기통.”

렉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규하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저한테 하는 말이었습니까?”

“이 근처에 살아?”

역시 그녀는 본인이 하고 싶은 말만 했다.

“아뇨.”

“잘됐네. 다시 보지 말자. 왜냐면, 너무 많은 걸 말했거든. 쪽팔리니까. 깔끔하게 각자 인생 살자고.”

애초에 강규하는 그와 관계없는 사람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그의 파트로네스가 혈연관계도 없으면서 딸이라고 주장하는 여성의 가족 정도일까.

그러니까 다시 볼 걱정 따위 하지 않아도─

“그럼.”

대답하기도 전에, 규하는 몸을 돌렸다.

“간다. 배웅은 됐어.”

척 손을 들어 보이고 가는 등에서 왠지 같은 처지의 동료들과 술 한잔 걸치고 쓸쓸하게 귀가하는 기러기 아빠의 냄새가 났다.

렉스는 그녀가 모퉁이를 돌아가고도 한참 그대로 서 있었다. 뒤에 인기척이 다가왔다.

“저분과 접촉하는 일이 허가되지 않으신 걸로 아는데요.”

돌아보자, 퇴근길의 직장인 같은 사십대의 평범한 남자가 서 있었다. 아무도 없는 밤거리를 둘이 걸어간다고 해도 전혀 의심하지 않을 것 같은 완벽한 위장이었다.

“실수였습니다.”

말하자, 남자는 피식 웃었다.

“설마요.”

남자는 빠르게 웃음기를 거두었다.

“부탁드립니다. 강 상사님이 접촉하지 못하도록 신경 쓰는 것만으로도 저희는 충분히 힘드니까요.”

그런 걸 걱정하다니, 의외였다.

“강 상사는 내버려 둬도 접촉하지 않을 겁니다.”

“어떻게 확신하시죠?”

렉스는 입을 열었다.

* * *

자동문이 밀려났다. 연하는 어두운 내부로 들어섰다.

[다녀오셨습니까? 상사님.]

불이 켜지면서 천장에서 나직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안녕.”

MCTC는 민간군사기업만큼이나 대원들 복지에 신경 쓰는 편이었고, 따라서 BNQ(독신자 부사관 숙소)#도 쾌적한 편이었다.

요즘엔 어디나 기본이긴 하지만 AI도 장착되어 있고 연하의 방도 원룸이다 뿐이지 어지간한 민간 아파트 못지않았다.

“텔레비전 좀 틀어줘.”

[네, 알겠습니다.]

연하는 별 의미 없는 광고 같은 것들을 한참 멍하니 보다가 중얼거렸다.

“마른 것 같았어, 규하.”

‘일이 힘든 걸까.’

하긴, 그렇게 쉴 새 없이 일만 하니까…….

마침 옆에 있는 거울에 시선이 멈추었다.

희멀건 얼굴, 붉은 입술, 까만 눈동자.

묘하게 비현실적인 느낌이 더해진 것 빼고, 그녀는 열아홉 살 그날에서 단 하루도 더 늙지 않았다. 누가 봐도 지금 규하와는 헷갈리지 않으리라.

연하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늙어서도 같은 얼굴이겠거니 했는데.”

자주 규하와 그런 농담을 하고는 했다.

“나중에 우리 남편들은 우리를 구별할 수 있을까?”

규하는 대체로 이렇게 대답했다.

“구별하지 못하면 맞아야지.”

그러면 연하는 난감하게 웃었다.

“네가 자꾸 그러니까 애들이 무서워하지.”

규하는 코웃음을 쳤다.

“넌 그러니까 그것들이 자꾸 덤비지. 맨날 맹한 얼굴로 뭘 해달라고 하면 해주고 달라 하면 주니까. 정신 차려, 이 똥 멍청아. 너 때문에 내가 늙는다.”

어째 끝은 늘 잔소리였던 것 같지만…….

그러고 보니 규하도 그렇고 도영도 그렇고, 자신은 주로 주변 사람들한테 잔소리를 듣는 편인 것 같았다.

‘나도 이제 애가 아닌데.’

천장에 달린 형광등 빛이 눈부셨다. 장난하듯 손가락을 왔다 갔다 움직였다. 그런데 손가락 사이로 빛이 눈을 찌르는 순간─

* * *

불빛이 눈꺼풀 사이를 파고들었다. 연하는 눈을 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가장 먼저 인식한 것은 냄새였다. 지독하고 매캐한…… 집 한 채가 통째로 불타오르는 것 같은, 유독성이 이글거리는 냄새.

위잉.

그리고 귀에 이명이 울렸다.

슴벅거리는 시야에 다시 빛이 지나갔다.

강연하.

연하는 어지러운 머리를 들었다. 눈앞에서 규하가 외치고 있었다.

강연하, 일어나!

규하가 비추고 있는 핸드폰 플래시가 눈부셨다.

규하야.

귀에 이명이 짙어서 자신이 말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괜찮아? 안 다쳤어?

연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묻는 규하야말로 엉망이었다. 다친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얼굴에 그을음이 잔뜩 묻어 있고 머리는 산발이었다.

규하가 무어라 말하며 뒤를 보았다.

명료해진 시야에 보이는 광경은 말 그대로 지옥도였다. 비틀어져 넘어진 열차에 여기저기 튕겨 나간 사람들이 울음과 비명을 터뜨렸다.

분명히 마지막으로 밖을 봤을 때는 낮이었는데, 그새 한밤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어두운 곳에 불꽃이 튀었다. 천장과 벽은 알루미늄 호일처럼 우그러졌고, 전선과 파이프들이 살점을 꿰뚫은 뼈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내 말 들었어?

규하는 겨우 참고 있는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말했다.

엄마랑 아빠가 안 보여.

연하는 아수라장을 돌아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

그들은 열차를 타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들 자매에게 먹이기 위한 음식을 산다고 식당 칸에 갔고, 아버지는 막 화장실을 간 참이었다. 그리고 남은 둘은 부산에 사는 작은 아버지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세상이 뒤집힌다고 느꼈고, 눈을 뜨니 이렇게 되어 있었다.

“학생들. 어서 나가.”

한 남자 승객이 피가 흐르는 이마를 붙잡고 지나가며 말했다. 그제야 귀에 이명이 걷혀서 소리가 제대로 들리기 시작했다.

의식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둘 서로 의지해서 탈출하고 있었다.

규하가 그녀를 일으켜 주었다.

“일단 나가자. 밖에 나가면 엄마, 아빠랑 만날 수 있을 거야.”

연하는 발목을 삐었는지 조금 아파 절뚝거리며 일어났다.

“괜찮아?”

규하가 물었다.

“응.”

연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규하가 손을 내밀었다. 연하는 그 손을 잡았다.

그때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연하는 돌아보았다. 저편에 이상한 각도로 돌아가 있는 의자에 걸쳐져 있는 아주머니가 고통스럽게 몸을 뒤챘다.

“괜찮으세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가가 불렀다. 아주머니는 힘겹게 눈을 떴다.

# Bachelor Non-commissioned officer Quar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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