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은둔자 이반
“국장 말이야.”
도영이 갑자기 말해, 연하는 고개를 돌렸다.
“은둔자 이반이라고 불린다더라.”
“은둔자?”
은둔자라면 중세 수도복 같은 걸 입은, 머리카락과 수염이 하얗게 센 우울한 노인이 떠오르는데, 국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였다.
“거의 세상에 나오는 일이 없었던 모양이야.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더라고. 그런데 꽤나 오래 산 것 같아.”
“꽤나? 얼마나?”
“정말로 꽤나. 아무도 정확하게 모른대. 그냥, 은둔자 이반이란 존재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들려왔다고 할 뿐이었어.”
외모는 삼십대 초중반…….
하지만 연하가 그렇듯 그건 국장이 인간으로서 죽은 나이를 보여주는 묘비일 뿐이었다.
“전쟁에도 참여하지 않았고. 종전협정이 체결될 때도 그냥 인류 편에 선다는 증거로 끝자락에 사인한 게 전부인 모양이야. 그리고 또 두문불출하다가, 갑자기 우리 국장으로 나타난 거야. 수상하지 않아?”
연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수상해?”
“이름도 이반 이바노프라니, 존의 아들 존? 완전 김 씨네 아들 김 서방 아냐. 그리고 솔직히 ‘이반 이바노프’라기엔 너무 러시아 느낌이 없는 얼굴이잖아. 우랄 산맥 서쪽이든 동쪽이든.”
연하는 국장을 떠올렸다. 그의 얼굴, 그의 눈동자…….
“잘 어울리는데, 이름.”
“강연하야.”
갑자기 도영이 등받이에 턱 팔을 걸쳤다.
“내가 체육관에서 뭐라고 했어?”
이름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남잔 다 늑대라고.”
“잘 기억하네. 그러니까 조심하라고 했지?”
“그럼 소령님도 늑대야?”
“난 아니지. 난 너한테 흑심을 품고 있지 않잖아.”
그건 분명한 것이, 동고동락하면서 볼 꼴 못 볼 꼴 다 봐온 팀원들은 그녀를 뱀파이어로 볼지는 몰라도 여자로는 보지 않았다. 반대도 마찬가지였고.
“그럼 국장님이 나한테 흑심을 품고 있다는 거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근데 뭘 조심해?”
연하는 정말 몰라서 묻는 것 같았다.
“그건……. 됐다, 됐어. 앓느니 죽지.”
도영은 손을 내저었다.
“살 수 있으면 앓는 게 낫지.”
“야, 강연하…….”
‘귀엽군.’
옆 칸에 서 있는 렉스는 생각했다.
두 사람은 생각보다 친한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소령이 저렇게 스스럼없이 대할 수 있는 계급은 아닐 텐데…….’
갑자기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내리니, 늙은 여인 하나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여인은 끌끌 혀를 내찼다.
“눈깔에 뭐 희한한 걸 끼고……. 하여간 요즘 젊은 것들은…….”
선글라스 틈 사이로 붉은 눈동자가 보였던가 보다. 렉스는 캡 모자를 더 눌러쓰고 창밖으로 시선을 피했다.
국토 면적에 비해 서울은 여전히 메가시티이지만, 이곳에서는 아직 루아스가 낯선 모양이었다. 이질적인 존재가 섞여 있을 거라고 생각지도 못하는 표정들이었다.
‘그러고 보면 혼혈 비율도 다른 나라들에 비해 낮군.’
아직도 반수 이상은 염색한 게 아니면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였다. 옛날에 총기와 마약을 대할 때처럼 아직도 격리구역 같은 통제력을 유지하는 모양이었다.
고향이기 때문이기도 할 테지만, 아마 이래서 강연하를 이곳에 머물게 했을 터.
렉스는 강 위로 노을이 지는 풍경에 뜻하지 않게 시선을 빼앗겼다.
가끔은 인간의 탄력성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일련의 난리를 겪고도 이렇게 다시 문명을 쌓아올린 회복력을 보면 말이다.
더구나 한 번 무너진 세계는 ‘뱀파이어’이라는 이질적인 요소를 품고 유연하게 형태를 바꾸어 재건되었다.
“근데.”
렉스는 정신을 차렸다. 칸 건너편에서 연하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체육관에서도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내가 아기 돼지 3형제도 아니고 문밖에 늑대가 어슬렁거린다고 두 눈 시뻘겋게 뜨고 경계하고 있어야 돼?”
[이번 정거장은 인천, 인천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방송을 들은 연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일어났다.
“재주 있으면 잡아먹어 보라지.”
도영은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기분이 묘해졌다.
‘저 녀석이 저런 말을 하다니…….’
뭔가 머쓱하면서 얼떨떨한 기분이라고 할까.
렉스는 조금 피식 웃었다.
제법 맹랑한 구석도 있는 것 같았다.
혼자 웃는 렉스를 앞에 앉은 늙은 여인이 이상하단 듯이 보는데, 칸 건너에서 연하가 도영에게 말했다.
“안 내려?”
도영은 일어나 연하를 따라 내렸다.
두 사람과 시차를 두고 열차에서 내린 렉스는 반대편 출구로 내려갔다.
연하와 도영은 역을 나와 거리를 걸었다. 뒤로 저녁 기운이 뚜벅뚜벅 따라왔다.
둘은 별 대화 없이 걸어가다가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뭐 마실래?”
“이거.”
각자 음료수를 하나 골라서 나왔다. 음료수 값은 나올 때 팔찌처럼 손목에 밀착된 형태로 차고 있는 손목밴드에서 자동으로 계산되었다.
둘은 편의점 앞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뒤따라오던 저녁 기운은 그새 저만치 앞서 가 있었다. 골목 어귀에서 ‘안 따라와?’ 하고 묻듯이 어슬렁대다가 훌쩍 가버렸다. 머지않아 그 뒤를, 퇴근하는 사람들이 웅성이며 따랐다.
그 가운데, 투피스 정장을 입은 한 여자가 눈에 띄었다.
늘씬한 키에, 긴 생머리, 지적으로 보이는 예쁘장한 얼굴이 시선을 끌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유난히 그녀가 눈에 띈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지나가던 여자가 우뚝 멈추었다.
바로 그들 앞에.
‘헉.’
음료수를 마시던 두 사람은 흠칫했다.
‘선글라스랑 후드를 벗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다.’
연하는 생각하며 목을 더 움츠렸다.
여자는 두 사람을 빤히 보다가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도영은 목구멍에 꽉 잡힌 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거의 후드 속에 처박힌 연하에게 속삭였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야.”
“우리가 마시는 거 보고 마시고 싶어졌나 봐.”
“근데 가까이서 보니까…….”
도영은 뒤를 살폈다. 편의점 안 여자는 생사의 길목 앞에 선 햄릿 같은 태도로 냉장고를 보고 있었다.
“진짜 너랑 똑같이 생겼네.”
여자가 눈에 띈 이유는, 딱 연하의 성장 버전이었기 때문이다.
“잠깐. 우리 빨리 도망 가야하는 거 아냐?”
도영이 말하자, 연하는 ‘맞다!’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여자가 맥주와 봉지과자를 골라서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지잉.
자동문이 열리고 내딛는 구두 굽 소리가 울린 순간이었다.
삐삐삐─
경고음이 울렸다.
“씨발, 뭐야?”
연하는 음료수를 뿜을 뻔했다.
여자가 한 걸음 물러났다가 다시 나가려 했다.
삐삐삐─
다시 경고음이 울렸다. 여자는 손목밴드를 찬 팔을 흔들었다.
“왜 너까지 지랄이야?”
도영과 연하는 시선을 교환했다. 잘못하다가는 연하를 보겠다 싶어서, 도영은 어쩔 수 없이 일어났다.
“저.”
여자는 손을 내미는 그를 보았다.
‘어머, 잘생긴 청년.’
그런 생각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났다. 연하처럼 생각을 숨길 줄 모르는 것 같았다.
아니면 숨기지 않는 건지.
도영은 맥주와 과자를 받아서 손만 문을 통과했다.
“제가 사는 걸로 하죠.”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내가 어떻게 학생의 코 묻은 돈으로…….”
하고 있는 차림도 그렇고 늦깎이 대학생쯤으로 보였던가 보다. 도영은 빙긋 웃었다.
“괜찮습니다. 집에 돈이 많거든요.”
그런 당돌한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는지 여자는 조금 놀라더니 피식 웃었다.
“멋지네. 난 언제 그런 말 한 번 해보려나.”
여자는 꿋꿋이 앞만을 쳐다보고 있는 연하의 등을 보았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도 몸의 실루엣으로 여자라고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가만히 있자 자신에게 사주는 걸 서로 동의한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럼 고마워요.”
여자는 도영에게서 맥주와 과자를 받았다.
“좋은 시간 보내요.”
여자는 가면서 낮게 웃었다.
도영은 다시 탁자에 앉았다.
연하하고 세월의 흐름만 다른 똑같은 얼굴인데 느낌은 천지차이라 기분이 이상했다. 확실히 저쪽은 어른스러운 느낌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연하의 쌍둥이를 보고 그렇게 생각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 괜히 툴툴거렸다.
“누가 강연하 쌍둥이 아니랄까 봐 하는 짓도 참 똑같다.”
“소령님보다 세 살이나 많아.”
“뭘 새삼스럽게. 너한테도 맨날…….”
늘 구박하고 낮잡아 말해도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는 연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전에 없이 단호한 얼굴이었다.
“그래, 미안하다.”
주술이 풀리듯, 연하는 어깨를 으쓱이고 음료수를 마셨다.
“규하가 좀 철이 없긴 해.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욕을 입에 달고 살고.”
연하는 사뭇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빨리 결혼을 해야 할 텐데.”
“사귀는 남자도 없지 않아?”
“왜 없을까?”
연하는 정말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했다. 꼭 ‘우리 딸이 어때서?’라고 묻는 엄마처럼.
“난들……. 선이라도 보게 해야 하는 거 아냐?”
“쟤가 보란다고 볼 애면 말도 안 하지.”
“아무튼 가자. 마주친 거에 대해서 시말서 써야 할 것 같은데.”
연하는 도영을 따라 일어났다.
두 사람이 떠난 자리, 편의점 옆 어두운 골목에서 렉스가 나왔다.
동족인 연하를 상대로는 멀리서 지켜보기보다 숨어서 기척을 지우는 쪽이 낫기 때문이었다.
‘나머지 쌍둥이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렉스는 한동안 눈앞에 있는 것에 의미 없는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 그때였다.
“아, 갔네.”
렉스는 시선으로만 옆을 보았다. 규하는 비어 있는 편의점 의자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하긴, 그 사이에 끼어서 뭘 하겠다고. 여자애는 이 밤에 선글라스 딱 끼고 앉아서 엄청 시크하던데.”
그러더니 도영이 앉았던 자리에 앉아 맥주 캔을 땄다.
렉스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시선을 편의점 유리에 붙어 있는 포스터에 고정했다. 마치 처음부터 그 포스터가 목적이었다는 듯이.
“그거 기한 지났어요.”
렉스는 규하를 보았다. 그녀는 그를 보지 않고 과자 봉지를 열고 있었다.
흘긋 포스터를 보니, K-pop 콘서트에 관한 것이었다.
“내 말 알아듣는 거 보니까 한국말 할 줄 아네요.”
그래서 어쨌다는 건지 렉스는 빤히 규하를 보았다. 그녀는 맥주를 한 모금 홀짝이더니 말했다.
“와서 내 얘기 좀 들어달라고 한 건데.”
렉스는 걸음을 돌렸다.
“바빠서.”
“콘서트 티켓 사러 가야 해서요?”
렉스는 멈칫했으나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규하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각박한 현대사회에서 처음 보는 사람한테 시간 내줄 의리를 기대할 순 없는 거죠. 이미 동서남북 사방에서 전천후로 돌려 까인 거, 한 번 더 까인다고 상처받지도 않을 것 같네요. 갈 길 가세요.”
렉스는 잠깐 그녀를 보았다. 그가 알 바 아니긴 하지만…….
“있어주길 바란다면 좀 더 친절하게 묻는 편이 낫지 않습니까?”
“인생이란 게 그래요. 있을 놈은 어쨌든 있고, 갈 놈은 어차피 가거든요.”
‘강연하와 성격은 좀 다르군.’
렉스는 걸어가기 시작했다. 청력이 좋은 귀에 그녀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갈 놈이었군.”
‘세 사람.’
렉스는 기척을 느꼈다.
하나는 기척을 감추는 데 인간 이상의 재능을 가진 것 같았지만, 그래도 그에게 들키지 않기는 역부족이었다. 꽤 넓은 반경에 포진해 있었다.
근접경호를 하기보다 경호대상자에게 존재를 들키지 않아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조금 반응을 볼까.’
현장 시찰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았다.
렉스는 돌아갔다. 그런데 얼마 가지도 않은 것 같은데, 두 남자가 그녀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하지만 규하는 익숙한지 두 남자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친구 기다리는 중이에요.”
“설마 남자친구요?”
상당히 실망한 듯한 남자 둘은, 갑자기 옆에 와 선 렉스를 돌아보았다. 규하도 그를 올려다보더니, 과자를 쥔 손으로 가리켰다.
“왔네요.”
남자 둘은 렉스를 훑어보더니 오히려 얼굴이 밝아졌다.
“잘 됐네요. 저희도 둘이니까…….”
규하는 렉스를 보았다.
“네 이름 말해줘.”
규하 자신도 모를 제 이름을 왜 말해주라는 건지 궁금했으나 렉스는 일단 따랐다.
“렉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