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의 짐승-13화 (13/104)

13화. ANOTHER

연하는 벤치에 앉아 발을 흔들었다.

웅장한 로비에서 그러고 있는 모습은 누가 봐도 학교에서 견학 왔다가 선생님을 잃어버린 미아였다.

특히 평소처럼 트레이닝팬츠에 티셔츠, 후드 재킷 차림이라 정부기관 청사라는 장소와의 상관관계는 조금도 없어 보였다.

연하는 갑자기 벌렁 벤치에 드러누웠다. 경비원은 한 번 눈짓할 뿐 특별히 제지하지 않았다.

그때 양복 입은 남자가 지나가다가 연하를 발견하고는 흠칫했다. 그녀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 아는 얼굴.’

행정부 9급 직원이었던 것 같았다.

남자도 연하를 알아본 것 같았다. 하지만 직립보행 동물에게는 불가능한 줄 알았던 게걸음으로 슬금슬금 피하더니만 얼른 제 갈 길을 갔다.

연하는 천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안 잡아먹는데.’

[15년 전 7월 16일.]

그때 로비 천장 가운데에 샹들리에처럼 매달려 있는 전자패널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UN 안전보장이사회가 승인한 비상의장국장, 프리드리히 마드찰란 독일 총리는 공식적으로 루아스들과의 전쟁에 종식을 선언했습니다.]

화면에서는 운집한 관중 앞 연단에 서 있는 남자가 막 입을 열었다. 워낙 자주 본 내용이어서 연하도 절로 따라서 중얼거리게 되었다.

“멸망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공존입니다.”

여성 해설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해설을 덧붙였다.

[마드찰란 총리는 종전을 기념하는 베를린 연설에서 말했습니다.]

화면 속에서 연단 위에 선, 갈색 피부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중년 남자가 말했다.

[우리는 같은 자궁에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곳에 함께 있었습니다. 단지 달의 다른 쪽 면을 모르듯이 서로를 모르고 지내왔을 뿐입니다.]

여성 해설자가 다시 덧붙였다.

[마드찰란 총리는 이라크 전쟁난민 아버지와 유대계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화면에 평화로워 보이는 가족사진이 떴다. 피부가 짙은 중동인 아버지와 얼핏 보기에는 혈통이 구별되지 않는 유럽인 어머니,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아이.

[따라서 무지와 오해에서 비롯된 반목이 얼마나 큰 비극으로 치달을 수 있는지, 그로 인한 전쟁이 얼마나 파괴적이며 허무한지를 온몸으로 구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런 배경이 그를 대표적인 평화파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화면 속 마드찰란 총리는 강인한 눈빛으로 관중을 주시했다.

[우리는 다시 과거의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피부색이 달라서, 민족이 달라서, 종교가 달라서 차별받는 사람은 없어야 합니다. 따라서 단순히 다른 종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받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관중은 함성을 지르고, 각종 언어로 반전 구호가 적힌 종이와 패널, 깃발을 흔들었다.

[적은 악한 의지를 가진 자들입니다.]

함성이 점차 커졌다.

[테러리스트들입니다. 우리가 힘들게 쌓아올린 터전과 안전을 위협하는 테러리스트들을 결코 용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드찰란 총리는 차분하면서도 뜨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선한 의지를 가진 자들의 연대가 중요합니다. 따라서 오늘 저는 이 자리에서 평화를 선언…….]

“노숙자냐?”

머리 위로 도영이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연하는 놀랐다.

“소령님.”

도영은 청바지에 흰 티셔츠, 재킷을 입고 운동화를 신은 사복 차림이었다.

평소에는 워낙 우락부락한 대원들 사이에 있어서 말라 보이지만, 도영은 키가 크고 몸이 좋아서 뭘 입어도 옷맵시가 좋은 편이었다.

일단 늘씬한 미남이라는 점에서 무장을 하고 있으면 실제 대테러부대원이라기보다 그렇게 분장을 한 배우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여자들에게 상당히 인기가 좋은 편이었다.

본인도 그 점을 잘 알고 있는 데다 즐기는 것 같았고.

그도 그럴 게, 일단 프랑스인이잖은가?

“어디 가?”

연하가 부스스 일어나며 묻자, 도영은 대답하지 않고 손목시계를 보았다. 그리고 몇 초를 세는 것 같았다.

삐빅. 삐빅.

연하가 차고 있는 손목밴드에서 알람이 울렸다. 표면에 푸른 글씨로 ‘대기 해제’를 의미하는 코드가 떠있었다.

드디어 청사를 벗어나도 된다는 의미였다.

도영은 문 쪽으로 고갯짓했다.

“가자.”

연하는 일어났다.

“소령님도 가려고? 근데 내가 어디 가는지 알고?”

“네가 갈 데라고는 한 군데밖에 더 있어?”

‘그건 그렇지.’

연하는 납득했다.

사람들이 오가는 정문을 나서자, 며칠 전 그녀가 쓰러진 계단에 해가 쓰러지고 있었다. 눈이 부셔서 들어 올린 손가락 사이로 일몰 직전의 쨍한 햇빛이 넘실거렸다.

“눈부시면 너도 선글라스 써.”

도영이 선글라스를 꺼내 쓰고는 말했다.

“응.”

연하도 후드 주머니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루아스들에게 햇빛은 적이 아니었다.

계속 어둠 속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어둠 속에서도 어렵지 않게 사물을 볼 수 있을 뿐, 햇빛을 본다고 기화하는 마법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랫동안 전설과 신화 영역에 머물러 있었지만 사실 뱀파이어는 생각보다 현실적인 동물이었다.

메커니즘의 상당 부분이 과학적으로 해명되었고, 아직 남은 부분도 서서히 밝혀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옛날 사람들이 흡혈귀가 햇빛에 타버린다고 생각한 이유는 아마 압도적인 공포를 주는 존재도 신적인 광휘에는 꼼짝할 수 없으리라고 믿고 싶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루아스가 루아스로 불리기 이전, 전설적인 존재로서 상상과 소문 속을 돌아다닐 뿐이던 그 시절─

* * *

렉스는 읽고 있는 책에서 시선을 들었다.

사무실은 조용했고, 반쯤 블라인드가 내려온 투명 벽 앞 소파에 그는 앉아 있었다. 그래서 가끔 유리 너머 복도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를 흘깃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한 가운데 책상에 앉은 이반은 종이서류를 보고 있었다.

“나가는군요.”

사무실 벽에 걸린 액자보다도 존재감 없이 있던 그가 말하자, 이반이 시선을 돌렸다.

“어디로?”

렉스는 잠깐 소리를 듣다가 말했다.

“시내로 가는 것 같습니다.”

이반은 창 너머를 보았다.

“뭐, 누가 납치해 갈 수도 없을 테니.”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렉스는 가만히 있다가 중얼거렸다.

“이름이…….”

“무슨 이름?”

이번에 이반은 시선을 돌리지 않고 물었다.

“강 상사가 소속된 3팀의 소령 말입니다.”

이반은 바로 그를 보았다.

“도영 드페흐?”

“같이 가는 것 같군요.”

이반은 다시 창 너머를 보았다.

“따라가.”

렉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반이 ‘뭐 해?’라고 말하듯이 돌아보았다. 그제야 렉스는 깨달았다.

“진심이시군요.”

이반은 기가 찬다는 얼굴이었다. 그는 만년필을 들고 있는 손으로 턱을 괴었다.

“농담이란 건 이런 게 아냐. 정말, 셀레나가 그리워지는군.”

어차피 더 있어봤자 좋은 소리는 들을 수 없었으므로, 렉스는 읽던 책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그리고 목례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다녀오겠습니다.”

* * *

열차가 빠르게 강을 가로질렀다. 후드를 눌러쓴 연하는 선글라스 너머로 해를 꿀꺽꿀꺽 삼키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한강변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하지 않네.’

탁 트인 강변에서 여가 시간을 즐기고 싶어 하는 건 인간의 본능인 모양이었다. 주변으로 도로가 좀 더 높고 어지럽게 얽혀 있을 뿐이었다.

‘참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아.’

아직도 차는 날아다니지 않았고, 사람들은 비가 오면 우산을 꺼내 펼쳤다.

지구가 한 번 멸망할 뻔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모든 일은 갑자기 시작되었다. 약 17년 전 정도로 추산하고 있으나, 정확한 시점은 아니었다. 재앙들이 전 세계에서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연달아 일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태풍, 지진, 호우, 해일, 낙뢰, 화재, 화산, 한파, 가뭄, 그리고 전염병까지…….

하나하나가 대재앙이라고 불릴 법한 재앙들이 불의 비 같이 내려, 마침내 지구 종말을 향한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것만 같았다.

지구 표면을 걷기 시작한 이래 인류는 많은 고비들을 넘겨왔으나, 그때만큼은 누구도 살아나갈 수 없을 거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이런 평화로운 풍경을 보면 아예 없었던 이야기 같기도 하지만.’

“한때는 세상이 멸망하는 줄 알았는데.”

연하는 중얼거렸다.

“멸망은 무슨. 인간을 그렇게 쉽게 없애 버릴 수 있을 것 같아?”

옆에 앉은 도영이 대답했다. 인류의 생존능력을 자랑스러워한다기보다 지긋지긋해하는 투였다.

하여간 전쟁 이후 허무주의에 빠진 포스트모더니즘 예술가들처럼 염세적인 구석이 있었다.

“뭐, 방공호로 도망간 지도자들끼리는 모여서 와인 잔을 부딪치면서 다음 생에서 또 잘 먹고 잘 살아보세, 하고 건배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도영은 어깨를 으쓱이고 덧붙였다.

“겨우 몇 달 정도 시달린 걸로 뭘.”

연하는 해가 지는 창 너머를 보고 말했다.

“하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용해졌지.”

그런데 재앙들이 지나간 자리는 조금 묘했다. 그만큼 온 인류가 하나가 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비교적 피해가 적었던 나라들은 조건 없이 더 피해를 입은 나라들에 복구 인력과 구호물품, 의약품, 지원을 보냈다. 온 인터넷과 SNS에 감사인사와 응원, 평화로운 분위기가 가득했다.

아마 그런 분위기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내 각국의 이득을 위해 각축을 벌여온 UN 안전보장이사회 5개 상임이사국#이 하나의 비상의장국을 선출해 당분간 전권을 부여하는, 평소라면 생각도 할 수 없는 안건에 찬성했던 이유는.

연속된 재앙으로 쑥대밭이 된 자리에서 ‘그들’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낡고 병든 작금의 인류를 끝내고 새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일어났다.]

유명 동영상 사이트에 공개된 한 동영상 속에서 남자는 무표정하게 대본을 읽었다. 그는 아주 평범해 보였다.

[이 세계가 병들었다고 생각하는 자, 더 이상 나아질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는 자, 그럼에도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자, 우리에게 오라. 우리는 선택받은 자들을 미래로 데려갈 노아의 방주이며, 정화의 불꽃이다.]

똑바로 이쪽을 보는 붉은 눈은 화면을 오가는 분석 프로그램의 분석 결과에 의하면 컬러 렌즈나 특수효과 같은 게 아니었다.

알비노라고 하기에는, 남자는 흑인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무언가가 아니다. 너희들 사이에 우리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다른 이름이 없다.]

남자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카메라를 응시했다. 마치 최면을 걸듯이.

[‘우리는 너희다.’]

하지만 그 영상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실 처음에는 조회수조차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재앙을 피해 방공호로 대피했던 세계의 지도자들이 하나둘 시신으로 발견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봐도 그때 상황을 찍은 것 같은 동영상들이 같은 아이디로 업로드 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 그리고 ‘어라…….’ 이어서 ‘이거 혹시……?’ 하던 반응들이 폭발하며 영상들은 순식간에 해당 사이트 조회수 1위로 등극했다.

그것이 영상들을 업로드한 아이디였다.

Sine Nomine, Sans Non, Sin Nombre, Senza un Nome…….

이름이 없는.

로망스 계통 언어에서 같은 뜻을 가진 그 약자는 그대로 이 새로운 테러리스트들을 지칭하는 이름이 되었다.

이 새로운 테러리스트들 앞에서는 어떤 경호 시스템도 무력했다. 그들은 비인간적으로 강한 육체를 지녔고, 총탄이 소용없었으며, 철문을 맨손으로 뜯어냈다.

그것이 뱀파이어가 처음으로 세상에 등장한 순간이었다.

도시 전설로는 늘 곁에 있었지만 어쨌든 정식으로는.

그들은 마침내 어둠을 벗어나 빛으로 걸어 나왔다.

최악의 형태로.

인간들 사이에 숨어 살던 많은 뱀파이어들은 경악했다.

현대도시에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게 되며 점차 정체를 숨기는 일이 힘들어지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여태 용케 정체를 숨겨왔다고 할 만큼.

하지만 이건 그야말로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로 정체가 밝혀지는 일이었다.

많은 뱀파이어들이 다급하게 성명을 발표하여 그들은 이 광신도들과 관계가 없음을 천명했다.

<우리는 SN이라는 테러단체의 행위를 규탄한다.>

하지만 어쨌든 뱀파이어는 인간의 피를 마시고 사는 생물이었다.

인류는 자신을 먹잇감으로 여기는 생물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결국 지구의 밤에 거주하는 이웃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그렇게 전쟁이 시작되었다.

“국장 말이야.”

도영이 갑자기 말해, 연하는 고개를 돌렸다.

# 2차 세계 대전의 주요 승전국들.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