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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짐승-12화 (12/104)

12화. 이름이 없는 자

“강 상……!”

누가 놀라 부르기도 전이었다.

화면 속에서 남자는 돌아서면서 주먹을 날렸다. 자세, 힘, 속도, 모두 살상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연하는 힘으로 밀렸다는 데 좀 놀란 것 같았지만 순간적으로 몸을 젖혀 피했다. 그리고 날아오는 팔을 잡고, 다른 팔꿈치로 남자의 턱을 가격했다.

엄청난 소리가 났다.

연하는 그대로 팔을 틀어 손바닥으로 남자의 얼굴을 감싸서 밀어 넘어뜨렸다.

남자는 거의 바닥에 넘어졌다. 그런데 그 몸집에, 탈골되지 않고서는 꺾을 수 없는 방향으로 몸을 뒤집어서 일어났다.

연하는 놀라지 않고 그대로 몸을 뒤집어 뱀처럼 그의 목에 다리를 감았다. 다리로 목을 비틀려는 찰나, 그가 연하를 잡아 벽으로 내던졌다.

콰장창.

날아가는 연하의 발에 채여 조명과 카메라가 동시에 부서졌다. 소리로 보아 천장도 함께.

[승냥이 셋, 엔트리!]

무전 너머 도영이 외쳤다.

그때 상황실 한쪽에서 김 중령이 누군가가 건네준 전화를 받았다.

“국장님.”

전화를 끊은 김 중령이 다가와 속삭였다. 이반은 돌아보았다. 김 중령은 심각한 얼굴이었다.

“방금 용의자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입수됐습니다. 저 녀석…….”

* * *

중무장을 하고 야간투시경을 쓴 대원들은 종대로 벽에 붙어서 있었다. 복도에 떠도는 공기가 무거웠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문 오른쪽에 대기한 도영이 손짓했다. 그러자 산탄총을 든 브리처(통로개척 대원)가 문 앞으로 나섰다. 도영은 잠깐 안쪽에 귀 기울이고 있다가 손짓했다.

브리처는 자물쇠에 산탄을 쏘았다.

탕, 쾅!

총이 불을 뿜고, 자물쇠가 박살 났다. 브리처가 재빨리 문을 열고 물러나자, 문 왼쪽에 대기한 포인트맨이 먼저 안으로 총구를 겨누며 진입하기 시작했다.

“승냥이 셋, 엔트리!”

도영은 무전을 치고 따라 진입했다. 사전에 조율된 연극무대처럼 정확하고 신속했다.

조명이 박살 나 방은 어두웠다.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여덟.”

“여기 있어.”

야간투시경의 초록 시야에 비친 연하는 다행히 서 있었다.

아래쪽을 보자, 타깃은 부서진 침대에 처박혀 있었다.

연하가 하이힐로 목을 밟고 있었다. 타깃이 낑낑대며 발을 밀어내려고 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오히려 연하의 다리에 근육이 꿈틀거리며 힘이 가해졌다.

결국 타깃은 포기했는지 몸에 힘을 풀었다.

“포박하겠습니다.”

한 중사가 합성 카르빈 소재로 만든 수갑을 꺼냈을 때였다. 타깃이 훗 웃고 말했다.

“용케 날 찾아냈군. 하지만 소용없을걸.”

연하는 의아하게 타깃을 보았다.

“우리는 너희다.”

모두 흠칫한 찰나였다.

타깃은 바로 얼굴에 검푸른 빛이 올라오더니 목이 툭 꺾였다. 막을 새도 없었다. 이미 동공이 활짝 열려 있었다.

“뱀파이어는 독도 듣지 않는 체질인데…….”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이렇게 단번에 죽으려면 자연이 아닌 실험실에서 만든 합성맹독을 미리 입안에 넣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영원히 살 수 있음에도 죽음마저 각오한 의지.

연하는 천천히 발을 뗐다. 타깃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 녀석…….”

도영이 마스크를 끌어내리고 신음처럼 말을 꺼냈다. 하지만 이 방에 있는 모두가 뒷말을 알고 있었다.

“이름이 없군.”

이름이 없다.

그건 예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전혀 새로운 의미를 지닌 관용어였다.

‘이름이 없는 자’ 중 하나라는 의미.

연하는 지옥으로 통하는 입구처럼 활짝 열린 눈동자를 내려다보며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 * *

“강 상사.”

연하는 돌아보았다. 복도 건너에서 국장이 다가왔다. 뒤에는 그림자 같은 렉스가 따르고 있었다.

“이야기 좀 할 수 있겠습니까?”

연하는 앞에 선 국장을 올려다보았다.

“하실 말씀 있으시면 나중에 사무실로 찾아뵐까요?”

“아뇨. 잠깐이면 됩니다.”

“아, 네.”

‘땀을 너무 흘려서 씻고 오고 싶었는데.’

연하는 혹시 냄새가 날까 싶어 자기도 모르게 뒷목을 문질렀다. 그녀는 아직 작전에 나갔던 차림 그대로였다.

“그럼 앉아도 될까요?”

연하는 옆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물론입니다.”

연하는 의자에 앉아 하이힐을 벗었다. 따라 옆에 앉은 이반이 빤히 보기에 어색하게 웃었다.

“죄송해요. 발이 좀 아파서.”

아까 천장에 부딪쳤기 때문인 것 같았다. 천장이 패여서 파이프가 드러날 정도였으니까. 게다가 하이힐을 신고 그 정도로 움직이면 아무리 뱀파이어라도 발이 아플 법했다.

빨갛게 쓸린 상처는 나지 않을지라도.

이반은 바닥에 내려놓은 하얀 발을 보다가 연하를 마주 보았다.

“강 상사, 당신이 싫다 싶은 일은 할 필요 없습니다.”

“네?”

연하는 선뜻 이해하지 못했다.

“저희는 인류에게 협력하고 있는 거지, 목줄에 매여 있는 게 아니니까요.”

“어…….”

어, 라니…….

이반은 의아했다. 왜 이 타이밍에 그런 반응이 나오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연하는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잘 알 수 없는 듯이 주저했다.

“제가…… 인간이 아니긴 하죠. 근데 딱히 인간이다, 아니다 생각한 적은 없는데…….”

그는 말이 없었다. 뭔가 허를 찔린 듯이. 왜 말이 없나 싶어 쳐다보자, 이반은 조금 웃었다.

“괜한 이야기를 했군요. 제가 한 이야기는 잊어버리세요.”

그러고는 또 말이 없었다. 연하도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때 렉스가 모퉁이를 돌아 나타났다. 연하는 그제야 그가 계속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렉스는 그녀의 앞에 슬리퍼를 내려놓았다.

“어.”

생각지도 못한 배려에 올려다보자, 렉스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연하도 그 시선을 따라 이반을 보았다. 그가 슬리퍼를 가져오라고 했던 모양이다.

‘가져오길 기다렸던 거구나.’

그때 도영이 모퉁이를 돌아오다가 멈칫했다. 하지만 연하는 슬리퍼에 정신이 팔려서 알지 못했다.

“신고 가세요.”

이반은 말하고 일어났다. 연하도 슬리퍼를 신고 따라 일어섰다.

“국장님.”

부르자,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반은 말하라는 듯이 기다렸다. 연하는 또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몰라 주저하다가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그래도 싫은 일은 한 적 없어요.”

이반은 희미하게 웃었다.

“다행이군요.”

어쩐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가 가는 모습을 보다가 연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덜컥? 웬 덜컥?’

“강연하.”

연하는 돌아보았다. 단추만 푼 전투복 차림 그대로인 도영이 다가왔다.

“소령님.”

도영은 슬리퍼를 신은 그녀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발 아파?”

“아니.”

“인마, 솔직히 말해.”

그렇게까지 말하니 연하는 바른 대로 대답했다.

“응.”

“근데 왜 말 안 했어?”

“다친 것도 아닌데?”

연하는 왜 그래야 하냐는 듯 정말 이해를 못하는 얼굴이었고, 도영은 기가 막힌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여태 다친 게 아니라고 말도 안 하고 있었던 거냐?”

“응.”

“앞으로는 말해.”

“왜?”

도영은 기가 질린다는 얼굴이었다.

“팀 리더인 내가 네 상태를 알아야 할 거 아냐?”

“그렇지.”

“이제 말할 거야?”

“알았어.”

연하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도영은 마침내 만족하는 얼굴이었다.

마지막으로 그 모습을 보고 모퉁이를 돌아간 이반은 한동안 말없이 복도를 걸었다.

따라오던 렉스가 갑자기 말했다.

“오해를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소리야?”

돌아봤지만 렉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이반은 찡그리고 웃었다.

“저 애는 내 딸이야.”

“하지만 강 상사에게 이바노프 씨는 낯선 남자일 뿐이죠.”

렉스는 무표정하게 덧붙였다.

“아무리 파트로네스이셔도 말이죠.”

“그런 일이…….”

이반은 말하다가 멈추었다.

“그렇게 비쳤나?”

렉스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반은 턱을 쓸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딸과 재회해서 즐거웠던 것뿐인데.”

“파트로네스라고 말씀하시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까?”

“좀 무서워져서.”

렉스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하지만 놀랐다. 이반 이바노프가 무서워한다니,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미처 몰랐다.

“내가 자신을 흡혈귀로 만들었다는 걸 알면 어떻게 반응할까, 순간 손끝이 차가워졌어.”

이반은 연하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이제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가 보는 건 기억 속의 그녀인 것 같았다.

“죽어가는 걸 봤을 땐 진흙탕에 빠진 새끼강아지 꼴이었는데. 너무 작고 연약해서 도저히 살아날 것 같지가 않았지. 그런데 감염을 이겨낸 거야. 과연 내 딸이었지.”

말이 나온 김에, 렉스는 아까부터 하고 싶었던 질문을 했다.

“자꾸 딸이라고 하시는데, 그럼 저도 아들입니까?”

이반은 그를 훑었다. 이번에는 전혀 웃지 않았다.

“무서운 소리를 하는군.”

“저도 이바노프 씨의 피를 받아 뱀파이어가 되었고 강 상사도 마찬가지인데, 차별이 심하시군요.”

“너 같은 아들은 싫은데.”

꼭 ‘당근은 싫은데.’라고 말하는 것 같은 어조였다. 좀 더 섬세한 성격이었다면 상처받을 만 한 말이었으나, 렉스는 표정을 풀지 않았다.

“다행히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 사이에 혈연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같은 감염원을 가져서 혈액형이 같은 정도죠.”

이반은 웃었다.

가끔은 렉스의 이런 원칙주의자 같은 점이 귀엽다 싶을 때도 있지만, 역시 물기 하나 없는 마른장작 같은 사내 녀석은 싫었다.

괜히 이번 일이 있기 전 수십 년간 얼굴을 보지 않고 지내온 게 아니었다. 그는 이번에도 혼자 가겠다고 했건만, 렉스가 부득불 따라왔다.

“딸이건, 클리엔테스건, 뭐라고 부르는 건 중요하지 않아. 저 아이는 이바노프니까.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야지.”

웃음기를 띠고는 있지만 눈이 차가웠다.

‘역시 다른 아이들은 역부족이었겠군.’

렉스는 생각했다.

이반은 MCTC가 창설되도록 돕고 나서도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는 걸 거부해왔다. 그런데 얼마 전 선뜻 현역으로 가겠다고 해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셀레나가 직접 내려와서 말릴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모두 왜 그가 갑자기 움직이려 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그가 버린 막내 클리엔테스, 강연하.

“그런데 여전히 네 사복차림은 굉장하군.”

이반은 갑자기 렉스를 보고 말했다.

“셀레나가 차라리 제복을 입고 다니라고 하지 않았어? 한동안 잘 듣더니.”

“지금은 공무 중이 아닙니다.”

본인의 패션 센스가 섬세한 심미안을 가진 이들에게 어떤 고통을 주는지 모르니까 저럴 수 있을 것이다.

이반은 고개를 젓고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융통성이라고는 없는 녀석이야.”

렉스는 묵묵히 따라왔다.

이반은 허공을 보았다.

‘연애를 못하는 이유가 있었군.’

거의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지만, 연하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없진 않았을 것이다. 외모가 어리긴 하지만 그만큼 사랑스럽고 엉뚱한 매력이 있는 아이니까.

다만 연하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런 쪽에 전혀 관심이 없으니, 누가 신호를 준다고 반응할 리가 없었겠지.’

연하가 그런 쪽에 왜 관심이 없는지도 충분히 알 만했다.

아까 급하게 소집한 간부 회의가 떠올랐다.

* * *

패널에는 사진이 떠 있었다.

요트에서 내리는 일행의 사진이었다. 각기 다른 인종과 나이대가 섞여 있었다. 옷차림도 제각각이어서 그들은 마치 여러 연극 무대를 한군데에 몽땅 섞어놓은 것 같았다.

유일한 공통점은, 붉은 눈.

“뱀파이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린 뱀파이어 테러리스트 그룹 SN#, 즉 ‘이름이 없는 자들’입니다.”

패널 앞에 서 있는, 브리핑을 담당한 김 중령이 말했다.

사진 속에서 한 쌍의 붉은 눈이 똑바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카메라 렌즈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다른 이들과 달리, 반가운 손님을 대하듯 웃음기를 머금고.

요즘 스타일로 깔끔하게 커트한 검은 머리 청년은 아주 아름다웠다. 나이는 스물쯤, 언뜻 동서양 혼혈 같았다.

하지만 사실 동양인 같지도 서양인 같지도 않은 외모는 현대엔 존재하지 않는 혈통 같은 독특한 느낌을 풍겼다.

“그리고 강 상사가 휘말려 죽을 뻔했던 12년 전 열차 테러를 일으킨 주범이죠.”

김 중령은 덧붙였다. 무겁고 진지한 얼굴로.

# Sine Nomine, Sans Non, Sin Nombre, Senza un Nome. 순서대로 라틴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뜻은 ‘이름이 없는(Without a 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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